3. 위정척사운동과 개화파보수파의 갈등



위정척사운동의 전개

위정척사운동의 경향: 서양 일본. 주리론에 바탕, 이항로 계열 유생들이 주도.

시 기

배 경

특 징

1860년대

통상반대운동

이항로, 기정진 등 척화주전론

1870년대

개항반대운동

최익현 개항5불가소

1880년대

개화반대운동

이만손 영남만인소, 홍재학 만언척사소

1890년대

항일의병운동

유인석 문석봉

위정척사운동의 전개

이항로 동부승지를 사직하고 겸하여 소회를 진언한 소: 서울 근교의 노론 산림학자 이항로는 상소를 올림. 고종 4(1867)에 편찬된 그의 언행록 화서아언속에서도 같은 사상을 밝힘. ‘존체 통개언로선무비용덕인의 구체적 대응책을 제시. 기정진도 같은 내용의 척사론 주장.

최익현 오불가소: 이항로의 제자인 유학자 최익현은 도끼를 들고 대궐문 앞에서 상소하다 구속. 최익현은 풀려났으나 1905년 을사조약으로 태인에서 의병 등을 일으켰다가 순창에서 관군과 접하여 체포되고 대마도로 유배, 단식 투쟁 끝에 순절(1906).

이만손 영남만인소: 1881조선책략의 유포로 위정척사 운동이 비등. 이만손은 조선책략의 내용을 비난하고 김홍집의 처벌을 요구. 홍재학의 상소도 이와 유사. 이만손은 강진 유배, 홍재학은 능지처참 당함.

위정척사운동의 의의와 역기능

의의: 내수외양 정신의 표현

역기능: 전근대 체제를 유지시키려는 데 목적, 역사의 발전을 가로막는 기능.

 


임오군란(=도봉소 사건, 1882. 6)


배경

개화파와 수구파가 대립: 대원군은 정권을 되찾기 위하여 고종 19(1881) 서장자 이재선을 국왕으로 추대하고 고종을 폐위하며 일본 공사관을 습격, 개화론자를 제거하려 하였음.

구식 군대의 차별 대우: 민씨 정권이 별기군을 우대하고 구식 군대를 차별 대우하는 불만에서 폭발(1882).


경과

13개월이나 급료가 밀린 구식 군대가 선혜청 고리의 사리에 분개하여 관리와 싸움

선혜청 당상 이자 병조판서인 민겸호가 주동자를 잡아 사형을 언도하자 군졸들이 민겸호의 집을 습격하였고 그는 도망

대원군은 군졸들을 배후 지휘하여 포도청과 경기감영 습격, 별기군 일본인 훈련장교 살인, 일본 공사관 방화

일본공사 하나부사는 도주. 다음 날 민겸호와 이최응을 죽이고, 명성황후는 충주로 도주

재집권한 대원군은 2영과 별기군을 폐하고 5군영을 부활, 통리기무아문 폐지.

그러나 대원군의 재집권은 오래 가지는 못했다.


결과


일본의 대응: 거류민보호를 구실로 하나부사 공사에게 군함 4척과 육군 1개 대대 파견.

20일 이내에 군란책임자 처벌, 그 기일 안에 체포하지 못할 때에는 일본국이 처리.

5만 원을 내어 피해를 입은 일본 관리들의 유족 및 부상자에게 지급.

일본이 받은 피해 및 공사를 호위하는 육해군의 경비 중에서 10만원씩을 5년동안 조선이 지급.

공사관에 경비병 주둔시키고 비용은 조선이 부담.

기타 조선 사죄사 파견, 일본 상인의 여행범위 확대 등

제물포조약(1882, 이유원-하나부사) 체결


청의 대응: 김윤식, 어윤중의 요청으로 속국 보호 명분으로 3천여 군대를 파견하여 조선 군민 살상, 대원군 납치. 명성황후 일파가 재집권하여 청에 사대정책.

청은 오장경, 원새개, 마건상, 묄렌도르프 고문을 보내어 내정간섭

통리외무아문(외아문-후에 통 리교섭통상사무아문)과 통리내무아문(내아문-후에 통리군국기무아문) 설치

묄렌도르프와 마건상을 외교고문으로, 하아트를 세관고문으로 파견. 상무감독관 진수당 파견

원세개가 조선군대를 청나라식으로 훈련. 상민수륙무역장정(1882) 체결.

 



(3) 갑신정변(1884)


개화당의 활동

1882년 박영효가 임오군란 뒤처리로 일본에 간 뒤에 개화당의 활동이 활발화.

개화당의 건의로 일본 유학생 50명 파건, 김옥균 기화근사, 박영교 지구도경보급. 박문국, 전환국, 기기국, 우정국 등 설치.

김옥균은 유대치, 박규수 등의 지원 하에 세력을 넓히고 충의계라는 비밀조직 결성(1878)

한계성: 그러나 일본의 태도가 냉담하여 개화 운동을 위한 차관 도입에 실패. 친청 민씨 일파의 견제.


배경

친청 세력의 개화당 탄압: 신변에 위혐을 느낀 개화당 요인들은 비상 수단을 도모.

개화당과 집권세력 사이의 대립: 정부는 묄렌도르프의 건의로 당오전을 발행하려 하였지만 김옥균은 일본 차관을 제안. 고종은 병행하기로 하였으나 차관도입 실패.

조선 주둔 청군의 철수: 청이 베트남 문제로 프랑스와 전쟁 상태로 들어가(1884) 조선 주둔 청군의 일부가 철수하자 개화당은 정변의 기회로 삼음.

일본 공사의 지원 약속: 개화당은 미국 공사관의 지원을 얻는 데에는 실패했으나, 일본 공사의 지원을 약속받음. - 그러나 실제로는 지원 안 함

청의 내정 간섭과 개화 정책의 후퇴: 이에 대한 반발로 급진 개화파들은 갑신정변을 일으킴.


경과: 갑신정변 14개조 요강

내 용

분 석

청에 잡혀간 대원군을 돌아오게 하고, 청에 대해 행하 던 사대허례 폐지.

자주독립의 역설, 대원군 송환, 청에 대한 사대 관계 폐지

 

문벌 폐지 사민평등 확립.

 

조세제도(지조법) 개혁, 관리부정 방지.

 

내시부(환관) 폐지, 인재등용

 

탐관오리 처벌

 

상환미를 영구히 받지 않음

환곡제 폐지

규장각 폐지

구조 조정

경찰제도 정비

 

혜상공국(보부상들로 조직된 행상인 관청) 폐지

특권적 상업 체제 폐지

투옥유배자 감형

 

4영을 1영으로 할 것

 

모든 제정은 호조에 통할

 

정부, 6조 외에 불필요한 기관 폐지.

 

대신과 참찬은 매일 합문 내의 의정소에 모여 정령을 의결반포(입헌군주제 요소)

 

개화당은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켜 14개조의 개혁요강 발표.

청국 군사가 창덕궁을 포위하여 일본과 전투 후 왕을 구출. 일본공사관 피격, 홍영식박영교는 피살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공사 다케소에는 일본 망명(삼일천하).

 


결과

조선은 예조참판을 일본에 보내 개입에 항의하고 망명자의 송환을 요구.

일본은 공사관 전소와 거류민 희생을 이유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고 7척의 군함과 군대를 인천 파견.

한성조약(김홍집-이토 히로부미)

조선은 국서로 일본의 변란에 사의 표명.

일본 거류민 피해자에 위로금 11만원(12만엔).

이소바야시 대위 살해자를 잡아 처단.

일본 공사관 신축지 및 신축비 2만원 지불.

일본군 영사로 공관부 대지 택정.

천진조약(이토 히로부미-공사 파아크스-이홍장)

청일 양국은 조선으로부터 4개월 이내 공동철병.

청일 양국군은 조선에 군사교관을 파견하지 않음.

조선에 변란이 일어나 양국 중 어느 한 나라가 군 대 파견의 필요가 있을 때에는 사전통고

 

한성조약(1884)과 천진조약(1885) 체결.

- 한성조약은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의 조약이다.

- 천진조약(텐진조약)은 일본과 청 사이의 조약이다.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은 18943월 상해에서 홍종우에게 사살되고 양화진에서 능지처참.


의의: 인민평등의 이상만을 내걸고 국가의 주권수호와 위기관리, 국민 정서를 거의 외면한 위로부터의 개혁.

 

. 근대화의 시련과 민족운동


1. 근대사회로의 정치적 변화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


흥선대원군의 집권: 철종 서거 후 대원군의 생부인 이하응(흥선대원군)이 고종을 섭정(16731873).

개혁의 방향

개혁의 내용

전제왕권강화

인재등용

안동 김씨 세력을 누르고 사색을 고르게 등용

통치기구 정비

의정부와 삼군부(신영남영마병소)가 부활하여 정치와 군사 분리

법전 완비

고종 2년 조두순, 이유원에 의해 대전회통 편찬.

보조법전인 대전조례 편찬. 육전조례 편찬.

서원 정리(1871)

47개소만 남기고 정리

- 참고로 흥선대원군 하야 후 여럿 부활(만동묘 포함)

위민사회개혁

전정

은결 적발, 토지겸병 금지, 부분적 양전실시

군정, 동포제

군포를 양반에게까지 확대하는 동포제(호포제) 실시 하여 양반의 원성을 삼

환곡, 사창제

환곡제를 사창제로 개혁하였으나 성과는 없었음

경복궁 중건

(재정실책)

영건도감을 중건하고 원납전을 강제징수.

당백전(종래돈의 100) 발행. 통행세 징수, 결두전(1결당 100) 부과

양반들의 묘지림 벌목, 백성들의 토목공사 동원.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 ‘폐정쇄신봉건적 개혁

개혁 정치의 의의: 전통적인 통치 체제를 재정비하여 국가 기강을 바로 잡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데 어느 정도 기여.

한계: 전통 체제 안의 개혁이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배경(서세동점)과 이양선 출몰

영국은 아편전쟁을 일으켜 청은 최초의 문호개방인 난징조약(1842)을 체결. 미국은 일본을 위협하여 미일 화친조약 체결.

이양선

최초로 영국 상선 로드 암허스트호가 통상 요구(1832). 

프랑스 세실의 통상요구 거절(1846). 러시아(1845), 독일(1866), 미국 셔먼호(1866)이 통상 요구.

천주교 확산과 서양 상품의 유입: 대원군 집권 이전부터 프랑스 선교사가 국내에 잡입, 선교 활동을 하여 신자가 점차 늘어났고, 의주, 동래 등지를 통하여 서양 상품이 불법 유입되고 있었음.


국내의 반응: 애로우호 사건(1858)과 베이징 조약(1860) 체결 등이 위기의식을 조성하여 동학, 위정척사, 개화사상의 대두.




쇄국정책의 강행: 병제병오신척

병인박해(66.1) - 제너럴셔먼호(66.8) - 병인양요(66.9) - 오페르트도굴사건(68) - 신미양요(71) - 척화비(71~72)

병인양요(고종 31866)

원인: 대원군은 처음에는 천주교에 관대. (철종 이후 이미 베르누, 리델 등 프랑스 선교사가 활동) 연해주를 차지한 러시아가 경흥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자(1864) 대원군은 신도 남종삼의 건의에 따라 프랑스 신부를 이용하여 견제하려 하였으나 거절.

경과: 청국에서 탄압하자 대원군도 탄압. 벽파 조두순의 배외정책 압력과 천주교의 만연이 조선 유교사회를 말살시킨다 하여 고종 3년에 남종삼, 정의배 등 신도 8천여명과 프랑스 신부 9명 사형. 탄압을 계속한 병인사옥(=병인박해, 66.1) 발생.

결과: 탈출한 리델 신부가 프랑스 극동함대의 로즈 제독에게 사실 보고. 프랑스 정부는 신부의 처 형을 구실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고자 극동함대 7, 1천 군사를 끌고 강화도 점령. 대원군은 훈 련대장 이경하 휘하에 순무영을 설치하여 대응, 이항로 등의 척사론자 등과 한성근 문수산성, 양 헌수 정족산성 전투로 승리. 프랑스군은 40여 일만에 물러나며 약탈과 방화 자행.


오페르트 사건(1868): 고종 32차에 걸친 통상요구를 거절당한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프랑스 신 부 페론과 함께 충청도 아산만에 상륙하여 관청을 습격하고 남연군의 무덤을 도굴하려다 실패. 유 생들은 존화 양이론 주장, 대원군은 쇄국 의지 강화.


신미양요(1871)

원인: 병인양요 이전에 미국 상선 제네럴 셔먼호가 대동강에서 통상을 요구하다 평양군민과 충돌하여 선원과 배가 소실.

경과: 미 대통령 그란트의 명을 받은 베이징 주재 미국 공사 로오는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 에게 조선 정벌을 명하여 5척의 군함과 1,200명 군대를 보내 강화도를 공격. 미국은 초지진을 함락하고 광성진 포대까지 점령.

결과: 어재연이 이끄는 경군과 강화 수비군이 광성진과 갑곶에서 대항하여 20일 만에 물리치고 어재연은 전사.



쇄국정책의 강화

대원군은 척사교서를 반포. 주요 지역에 척화비 건립(1871). 해국도지의 영향으로 전함 수뢰포 완성.

하지만 대원군 하야 후 척화비는 상당수 철거되게 된다.



2. 문호 개방


개항의 배경

흥선 대원군의 하야: 고종이 성인이 되고 서원 철폐에 대한 지방 유림의 반발과 왕후 및 개화파의 통 상개화론에 밀려, 대원군이 1873년에 물러남.

통상 개화론의 성장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등이 당시의 조선 사회는 개방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지만 개방이 불가피 하다고 주장. 역관이었던 오경석은 해국도지, 영환지략등 개화 서적을 접하기도 하고, 승려 이동인을 비롯하여 중인과 상민 계층에서도 개화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출현.

고종과 노론 북학을 계승한 통상 지지파인 명성황후 일족(민태호, 민영목 등)이 집권.

고종과 개화추진세력의 입장: 전면적인 서양화는 아닌 동도서기론.

급진 개화파: 북학을 계승한 대외통상 개화론자들(김옥균, 김홍집, 홍영식, 서광범 등)은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하는 입헌군주제 혹은 서양식 공화정 추진. 변법개화사상으로 발전하고 사회진화론과 연결되 어 공리주의로 나아감.

1. 역사지리서: 해국도지(위원), 영환지략(세계여), 지구전요(최한기), 보법전기(왕도), 서유견문(유길준)

2. 정치법률서: 조선책략(황쭌셴), 만국공법」․「이언(정관응)

3. 자연 과학 서적: 격물입문(Martin), 박물신편(Hobson)

 


일본과의 관계와 조약 체결

일본 국내의 입장: 18세기 이후 국학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854년 미국에게 개항당한 일본은 메이지 유신의 신정부 수립을 알리며 조선과 다시 수교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함. 일본에서 정한론이 대두하였으나 온건파의 반대로 후퇴. 조선은 일본과 외교 단절.

정한론이 보류되자 집권당은 18744월 대만을 침공하였으나 청국의 반대로 배상금을 받고 물러나 조선으로 주의 집중.

병자수호조약(강화도 조약)과 개항

운요호 사건: 18754월 일본 군함 3(춘일호, 운요호, 제이정묘호)이 부산에 출현. 8월 운요호는 강화도에 접근하여 조선 측의 발포를 유도하였고, 조선의 공격에 즉각 반격하며 영종도에 상륙하여 약탈과 살육 감행.

강화도조약 체결(1876): 일본의 요구에 조선정부는 박규수, 신헌의 의견을 들어 조선 대표 신헌과 일본대표 구로다 사이에 전문 12개조의 불평등 통상수호조약 체결.

내 용

의 미

조선은 자주국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

청의 종주권 부인 의미, 일본의 침략 의도

15개월 후에 양국은 서로 사신을 파견.

김기수, 김홍집을 수신사로 파견

개항장에서 일본상인의 무역과 조계 설정 등.

 

20개월 이내에 부산과 그 밖의 두 항구 개항.

부산(경제적), 원산(군사적), 인천(정치적) 개항

일본은 조선연안을 자유로이 측량할 수 있다.

주요 군사 기지를 점령하기 위한 것으로 주권 침해

양국의 민간무역활동에서 관리의 불간섭.

 

일본은 조선이 지정한 항구에 영사 파견.

 

치외법권 인정

가장 독소적

조일수호조규부록

조선 내에서 일본외교관의 여행자유

개항장에서 일본거류민의 거주지역(통행거리 사방 10)

일본화폐의 유통허용 등

조일통상장정(=조일무역규칙) 잠정적 통상협정

일본의 수출입품에 비과세

양곡의 무제한 유출 등

(천재지변시 사전 통고후 수출 금지 가능)

강화도 조약에 따른 조일수호조규부록(1876)과 조일통상장정(1876. 7.)

개정된 조일통상장정(1883, 민영목-죽첨진일랑): 수출입 상품에 대한 관세, 조일통상에 대한 절차규정, 최혜국 대우, 방곡령 실시시 일본에 사전예고 등.

일본과 조약 체결 후 정부의 입장: , 일본, 서양세력에 대해 세력균형 정책 실시. 미수호통상 조약(1882) 체결.

강화도 조약의 의의: 부산 일본의 선택으로 원산(군사적 목적), 인천(정치적 목적) 개항. 1883년 통 상장정으로 일제는 침략의 발판 마련. 우리나라는 보호조치를 취할 수 없게 됨. 식민지의 계기.


 


서양제국과의 통상장정체결

미 수호 통상 조약(1882)

체결 배경: 조선 책략이 국내 지식층에 유포되어 미국과 외교를 하여야 한다는 주장 제기.

조약의 체결: 청과 이해관계가 일치되어 신헌-리홍장-슈펠트 사이에 체결.

조약의 내용

양국 중 한 나라가 제3국의 압박을 받을 경우 서로 도와 준다.

영사 재판에 의한 치외 법권과 최혜국 대우.

조약의 성격: 서양과 맺은 최초의 조약으로 불평등 조약.

1. 전래: 주일 청국 참사관으로 있던 황 쭌셴이 동양 3국이 펼쳐야 할 외교 정책을 쓴 것으로, 2차 수신사 김홍집이 소개(1880).

2. 요점: 러시아의 남하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중국, 미국, 일본과 결속해야 한다. 서양의 기술을 배워야 한다. 예수와 주자를 동격으로 표현.

3. 영향: 개화 운동을 자극, 위정척사 운동을 강화.

청은 일본의 조선지배를 차단하려고 조청 상민수륙무역장정(1882) 체결: 치외법권, 청상인의 내지통상 권연안어업권

청의 추천을 계기로 한 열강과의 통상조약: 영국(1882. 4, 민영목), 독일(1882. 5, 조영하), 이탈리아 (1884. 5, 김병시), 러시아(직접, 1884. 7, 김병시), 프랑스(1886, 김만식, 직접), 오스트리아(1892, 권 재형), 필리핀(1901, 박제순), 벨기에(1901, 박제순), 덴마크(1902, 유기환) .

영 수호 통상 조약(1882): 서양 최초의 통상 요구로 최혜국 대우와 내지 통상권 규정.

러 수호 통상 조약(1884): 일의 반대로 지연, 직접 수교.

불 수호 통상 조약(1886): 천주교 반대 문제로 지연, 천주교 신앙 및 선교 자유 허용.

 


개화운동

신문물 수입

수신사(18761881): 1차 김기수(1876), 2차 김홍집(1880) 파견. 김기수는 일동기유, 수신사 일기 저술, 김홍집은 황쭌셴 조선책략과 정관응 이언소개.

신사유람단(1881): 박정양, 어윤중, 홍영식 등이 일본의 근대기관을 살피고 돌아옴. 수행원 중 유길 준, 윤치호 등은 유학.

영선사(1881) 김윤식 등을 톈진에 파견, 학생들의 근대 기술에 대한 기본 지식과 정부의 재정 지원 부족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년만에 귀국. 영선사를 계기로 기기창(1883) 설치.

보빙사(1883): 미국 측의 푸트 공사 파견에 대한 답례로 민영익을 전권대사로 하여 미국에 파견. 사절단은 대부분 개화에 뜻을 둔 젊은이들.

개화운동

고종의 개혁: 규장각 기능 부활, 1881년 청을 모방한 통리기무아문(총리대신)과 산하 12(당상관) 설치. 5군영을 2영으로 개편(무위영장어영)으로 개편하고 별기군(교련병대) 신설.

사대사: 대중국 외교

교린사: 교린외교

군무사: 군대통솔

변정사: 변방사무외국정탐

통상사: 통상무역

기계사: 기계제조

선함사: 선박군함제조 감독

군물사: 병기제조

기연사: 왕래 선박 순찰

어학사: 외국어언어문자

전선사: 인선

이용사: 물품조달

일본의 사정: 자유민권운동가들이 흥아회를 조직하여 아시아 연대론주장. 뒷날 김옥균의 삼국합 종론(삼화주의)’, 안경수의 일청한 동맹론에 영향.

<현대 경제사 간단요약 표>


1950

농지 개혁 실시

1953

1차 화폐 개혁

1962

2차 화폐 개혁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시작(SOC 시작)

1965

일 협정 조인

1970

경부 고속 국도 개통새마을 운동 시작

1973

1차 석유 파동(아랍 산유 6개국 원유가 인상)

1977

수출 100억 달러 달성

1979

2차 석유 파동(석유 수출 기구 원유가 평균 59% 인상)

1993

금융 실명제 실시(김영삼 정부)쌀 개방 관련 담화

1995

WTO 체제 출범수출 1,000억 달러 돌파

1996

OECD 가입

1997

IMF 구제금융 신청

2001

IMF 위기 탈피, WTO 뉴라운드 출범

 



. 경제 발전을 위한 노력


1. 광복 직후의 경제 혼란


일제하의 경제


광복 후 경제 혼란

미군정기의 경제적 어려움: 높은 인플레이션, 원자재와 소비재 부족, 식량 부족 등.

미군정과의 갈등

소작료 인하 요구:

미군정은 일본이 가지고 있던 토지를 비롯한 재산을 인수하여 산하 기관인 신한 공사에서 관리

소작료를 1/3로 낮추고, 지주가 일방적으로 소작 계약을 깨뜨리지 못하게 하는 등 부분적으로 농민의 요구 수용

그러나 소작료의 추가 인하와 금납제를 요구하는 농민들과 갈등이 커져 갔다.

101 대구 봉기: 19469월에는 철도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대구 등 여러 곳의 민중 봉기로 이어 졌다.

자원과 시설 부족 




경제 회복을 위한 노력

1공화국의 경제 정책 기본 방향: 공 균형 발전, 소작제 철폐, 기업활동 자유, 사회 보장 제조, 인플레이션 극복 등.

경제 안정 시책 추진: 일본인들이 소유했던 공장을 민간인에게 불하(46년 2월부터)하여 산업 자본의 형성이나 신흥 재벌 형성의 계기가 되었다.


농지 개혁법(1949. 6)

목적: 농민생활의 향상과 국민경제의 균형 발전을 위해 경자유전의 원칙 하에 실시.


방법: 이 법은 이듬해에 일부 수정되어 실시되었는데, 산림과 임야를 제외3정보 이상의 농지를 가진 부재지주의 농지를 국가에서 유상 매입하고 영세 농민에게 3정보를 한도로 유상 분배 하여 5년간 수확량의 30%씩을 상환토록 하였다.

결과: 소작농이었던 농민들이 자기 농토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산업자본주의 형성에 기여하였다. 또한 지주계급은 소멸되고, 농업은 자본주의 경제체제 안에 포섭되었다.

의의: 625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농지개혁이 이루어져 남한의 공산화 방지에 일조.


한계

소작농의 부담 가중: 개혁 이전에 지주계층은 소작인에게 자기들의 토지를 강매.

농지개혁 기간의 연장: 한국전쟁 발발로 기간의 연장이 불가피.

- 연장이 왜 한계냐면, 이렇게 시간을 질질 끌게 되면 지주들이 법의 변화로 인해 불리한 점들에 대한 대비를 할 수 있게 되므로, 사실상 그 부담이 소작인들에게 전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개혁 이전에 소작인에게 강매했다는 그런 점 등)

신흥지주계층과 소작제의 부활 현상: 지주계층의 사전 강매에 따른 경제적 부담과 유상분배에 따른 빈농의 곤란으로 자기소유 농지를 되팔게 되었고 부농이 이를 겸병하는 현상 발생.

산림과 임야의 제외: 농지만을 대상.

지주의 개혁대상 제외: 3정보 이상의 땅도 지주들이 매각하여서 개혁 대상에서 제외.


 

남한

북한

개혁안

농지 개혁법(산림, 임야 제외)

토지 개혁법(전 토지)

법령 공포

19496(19503월 개정)

- 기출: 신한공사랑 아무런 관련 없다. 신한공사는 46.2~48.3까지 존속했다.

19463

- 기출: 우리보다 먼저니까, 우리가 이에 영향을 미쳤다고 하면 틀린다.

원칙

유상 매입, 유상 분배

- 기출: 좌우합작 7원칙(46.10) 때 보면 "몰수, 유조건 몰수" 이런 문구가 있는데, 이거랑 헷갈리면 안 된다.

무상 몰수, 무상 분배

토지 상한선

3정보

5정보

 



2. 경제 발전

한국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피해

생산 시설의 파괴: 남한은 생산 시설의 42%가 파괴. 특히 경인 지방에 밀집되어 있던 섬유 공업과 인 쇄 공업 분야가 격심.

물가 폭등과 물자 부족

 


1950년대 후반 경제 복구 사업

경제 복구 사업의 본격화

삼백 산업: 1950년대(이승만 정권)에 제분(밀가루), 제당(설탕), 섬유 공업(면방직)이 성장한다.

- 기출: 52년~58년(이승만 정권)에는 미국이 "무상 원조"를 했고, 60년대 박정희 정권 때부터는 "유상 차관"을 들여오게 된다.

- 기출: 면방직, 설탕, 밀가루 등의 "3개의 하얀색" 소비재 산업을 "삼백"산업이라 한다.

취약한 경제 구조

수입에 의존: 소비재 산업은 성장, 생산재 산업은 발전하지 못함. 생산재에서 원료까지 수입에 의존.

미복구와 원조 감소: 농업 분야의 복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원조가 줄어들면서 어려움을 겪음.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추진


경제 개발 계획의 수립 과정

최초 계획: 1공화국 하에서 작성된 7개년 계획.

수정: 2공화국에 의해 5개년 계획안으로 수정.

- 기출: "5개년" 계획의 최초 "제안"은 2공화국 장면내각이다.

- 기출: 5개년 계획의 "실시(62년~66년)"는 박정희 정권 때이고, 그 중에서도 군정(61.5~63.10) 때 시작됐다.

본격적 실시: 516 군사 정변 후 군사 정부에 의해 재수정되어 1962년부터 실천.


경제 개발 계획의 추진 과정

1960년대: 1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에서는 기간 산업의 육성과 경공업 신장에 주력.

1970년대: 34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에서는 중화학 공업의 육성과 광공업 비중이 증가.


1

19621966

경제 자립 달성을 위한 공업화 기반 구축

군정~제3공화국

2

19671971

SOC를 시작하긴 했는데, 아직 경공업이 대세이다.

중화학 공업은 아직 시작 안 했다.

제3공화국 시절 때의 일이다.

3

19721976

중화학 공업 중점 개발

10월 유신 직전이라 볼 수 있다. 72년 1월에 실시했으니.

4

19771981

국민 경제의 균형과 조화, 복지 사회 건설

제4공화국 때의 일이다.

5

19821986

경제 안정 기반 정착, 국민 복지 증진

6

19871991

능률과 형평을 토대로 한 경제 선진화 달성

7

19921996

경제의 선진화와 통일에 대비한 경제의 내실화 및 효율화 추구

 


성과

사회 간접 시설의 확충.

간척 사업이 진행되고 작물의 품종 개량이 이루어져 식량 생산도 증대.

19621981년 사이에 수출이 비약적으로 증가.

- 기출: 77년에 100억달러 달성한다.

국내 자본의 축적이 이루어져 외국 자본에 의존하던 자본 구조가 어느 정도 개선.

폐단: 소수의 재벌. 산읍의 수출 의존도 심화.

1980년대 중반 이후(전두환 정권): 3저 호황으로 물가가 안정되고 수출이 크게 늘어나 무역 수지가 흑자로 돌아섰으나, 전체 경제의 외국 의존도는 더욱 증가.

경제 개발 계획의 문제점: 국민 간의 소득 격차, 정부 주도형의 경제 체제 등.

 





. 현대 사회의 변화

2. 산업화와 도시화

농촌 문제

새마을 운동: 1970년대에 제창되어 근면, 자조, 협동을 기본 정신으로 삼음.

 

4. 노동 운동

정부의 통제와 노동 운동의 활성화

정부의 통제: 1980년대 중반기 이전만 해도 노동자의 단체 교섭권과 단체 행동권을 크게 재한.

노동 운동의 활성화: 1987년 이후 정치적인 민주화와 함께 노동 운동도 활성화. (87년 6.29 민주화 선언 이후)


국민 연금법

1986

국민의 노령 또는 폐질, 사망에 대하여 연금 급여를 실시.

의료 보험 제도 확대

1989

전 국민을 대상으로 국민 의료 보험 제도 실시.

고용 보험 제도

1995

실직자가 다시 취업할 때까지 생계를 보장.

국민 연금 제도

1998

 

국민 건강 보험법

1999

국민의 질병, 부상에 대한 예방, 진단, 치료

재활과 출산, 사망 및 건강 증진에 대하여 보험 급여 실시

남녀 차별 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

1999

 

국민 기초 생활 보장법

1999

최소한의 기초 생활 보장


3. 통일 정책의 추진


<★통일정책 요약 표>

 

통일 정책

내용

닉슨 독트린(1969)

주한 미군의 감축 

⇨ 정부의 자주국방 정책과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대북한 교섭 추진의 계기

815 선언(1970. 8. 15)

남북한 무력 대결의 지양선의의 경쟁

남북 적십자 회담 제의

(1971. 8. 12)

대한 적십자사의 이산가족 찾기 제의

7남북 공동 성명

(1972. 7. 4)

자주/평화/민족적 대단결의 3대 원칙,

남북 조절 위원회 설치의 합의(최초의 남북 공동 합의서)

623 평화 통일 선언

(1973. 6. 23)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

호혜 평등의 원칙하에 모든 국가에 대한 문호 개방 발표

남북한 상호불가침협정 

체결 제의(1974. 1)

절대로 무력 침략을 하지 않겠다는 것을 세계에 약속.

상호 내정 간섭을 하지 않는다.

현행 휴전 협정을 준수.

평화 통일 3대기본원칙 

제의(1974. 8. 15)

남북 간 불가침 협정 체결

남북 대화의 성실한 진행과 문호 개방

토착 인구 비례에 의한 자유 총선거 실시

남북한 당국의 최고 책임자 

상호 방문 제의(1981. 1)

112 제의

민족 화합 민주 통일 방안 

제시(1982. 1)

민족 통일 협의 회의 구성

이 기구에서 통일 헌법을 기초

통일 헌법 초안을 국민 투표로 확정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 국회와 정부를 구성하고 통일 민주 공화국을 수립.

남북 이산가족 고향 방문단 및

예술 공연단의 교환 방문(1985)

 

7특별 선언(1988. 7. 7)

남북한 관계를 공동체 관계로 규정6개 항의 통일 관련 정책 선언.

한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

제시(1989)

자주/평화/민주의 3원칙

남북 연합의 구성(남북 평의회를 통해 헌법 제정 ⇨ 총선거)

남북 고위급 정상회담 시작(1990)

 

남북 기본 합의서 채택

(1991)

남북 간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 선언 채택

3단계 3기조 통일 방안(1993)

3단계 통일 방안(화해협력남북 연합통일 국가 완성)

3대 기조(민주적 국민 합의공존 공영민족 복리)

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

(1994. 8. 15)

한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89)의 3원칙(자주/평화/민주)

+ 3단계 통일 방안(화해협력남북 연합통일 국가 완성)

+ 3대 기도(민주적 국민 합의공존 공영민족 복리)

615 남북 공동 선언(2000)

통일 문제의 자주적 해결

남측의 남북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의 공통성 인정

8.15 이산가족 방문단 교환과 비전향 잔기수 문제 해결(인도적 문제 조속히 해결), 

경제 협력의 확대합의 사항의 조속한 실천을 위해 당국 간의 대화 개최.


● 10.4 남북공동선언(2007): 종전 선언, 공동어로구역, 서해안 평화 협력, 특별지대 설치, 개성공단 시작

1조: 6.15 공동선언을 고수하고 적극 구현...

4조: 현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종전 선언을 협력해 추진하기로 하였다.





민족의 과제


1950년대: 한국 전쟁을 겪으며 분단 고착화, 남한의 북진 통일 주장과 북한의 적화 통일 정책으로 논의 조차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았다.

 


1960년대

평화 통일 주장 표출: 419 혁명 직후 학생들과 일부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내용

정부 여당: 더 이상 북진 통일을 주장할 수 없었고, 유엔을 통한 평화 통일을 주장.

진보당과 유사한 정치인: 혁신 정당 조직, 다양한 평화 통일론 주장. 한반도 중립화 통일론에서 남북의 정치인들이 참여하는 남북 협상론 등 제기.

학생: 통일을 위한 모임을 조직하고, 남북 학생 회담을 추진(1961)

한계: 516 군사 정변, 남북한 간의 대립 등으로 진전될 수 없었다.

 




1970년대

배경

닉슨 독트린 선언(1969): 이 선언으로 주한 미군이 감축되자 정부는 자주국방 정책을 추진, 한편으로는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대북한 교섭을 시도.

내외 여건의 변화: 냉전 체제의 완화와 민주화의 요구.

815 선언(평화 통일 구상 선언, 1970): 북한에 대해 선의의 체제 경젱을 제의, 우리 정부의 대북 자신감 표현.

남북 적십자 회담 제의(1971): 대한 적십자사가 북한에 대하여 이산가족 찾기를 위한 남북 적십자 회담 을 제의(1971), 북한이 수락하여 회담 성사(1972)

74남북 공동 성명(1972)

3대 원칙: 민족 통일의 원칙으로 자주 통일, 평화 통일, 민족적 대단결을 원칙.

합의: 통일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남북 조절 위원회 설치에 합의.

623 선언(1973): 남북 유엔 동시 가입 제의, 호혜 평등의 원칙하에 모든 국가에 문호 개방, 내정 불간섭, 남북 대화, 북한의 국제 기구 참여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합의.

평화 통일 3대 원칙(1974): 남북 상호 불가침 협정의 체결을 제의(1974. 1). 또한 평화 정착, 상호 신뢰 회복, 토착 인구 비례에 의한 남북한 자유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을 이룩한다는 평화 통일 3대 원칙 발표.

 


1980년대

남북한 당국의 최고 책임자 상호 방문 제의(1981. 1): 일명 112 제의.

민족 화합 민주 통일 방안(1982. 1. 22)

통일 방안: 민족 자결의 원칙에 의거해서, 민주적 절차와 평화적 방법으로 민족/자주/자유/복지의 의상을 추구하는 통일 국가를 수립하자.

당시 북한의 방안: 북한은 고려 민주주의 연방 공화국 방안을 제시(1980. 10)하여, 총선거에 의한 통일 방안 폐기, 남북한이 동등하게 참가하는 통일 정부를 수립하고 지역 정부를 설치를 주장.

남북 이산가족 고향 방문(1985): 남북 이산가족 고향 방문단 및 예술 공연단의 고향 방문이 성사.

77선언(민족 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특별 선언, 1988): 남북한 관계를 동반 관계, 나아가서는 민족 공동체 관계로 규정.

한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1989): 자주, 평화, 민주의 원칙 아래 과도적인 통일 체제로 남북 연합을 구성 하여 남북 평의회를 통해 헌법을 제정하고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 민주 공화국을 구성하자는 제안.



1990년대

남북 기본 합의서 채택(1991)

배경: 적극적인 북방 외교 정책이 추진되고 남북 고위급 회담이 시작되었으며, 문화체육의 교류 가 이루어졌다.

내용: 남북한 상호 화해와 불가침을 선언하고 교류와 협력을 하며,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 선언이 채택.

영향: 민간 차원에서도 적극적인 통일 노력이 전개.

3단계 3기조 통일 정책(1993): 정부는 화해협력, 남북 연합, 통일 국가의 3단계 통일 방안과, 민주적 국민 합의, 공존공영, 민족 복리의 3대 기조를 바탕으로 통일 정책을 마련.

(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1994): 한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1989)+3단계 3기조 통일 정책(1993)

내용: 정부는 3단계 통일 방안으로 자주, 평화, 민주의 3원칙과, 화해협력, 남북 연합, 통일 국가 완성의 3단계 통일 방안을 발표.

 

남한

북한

명칭

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1994)

고려 민주 연방 공화국 창립 방안(1980)

통일 과정

화해 협력 단계

남북 연합 단계

- 남북 연합 헌장 채택

- 남북 연합 기구 구성, 운영

통일 국가 완성 단계

- 국민 투표로 통일 헌법 확정 총선거 실시

남한의 국가보안법 폐지, 주한 미군 철수

고려 민주 연방 공화국 수립

- 최고 민족 연방 회의 구성

- 연방 상설 위원회 설치

- 통일 국가는 중립국이어야

과도 체제

남북 연합

없음

최종 국가

1민족 1국가 1체제 1정부

1민족 1국가 2체제 2정부

특징

민족 사회 우선 건설(민족 통일 국가 통일)

국가 체제 조립 우선(국가 통일 민족 통일)

정상 회담 무산과 관계 냉각(1994): 김일성의 사망으로 정상 회담이 무산, 김일성 조문 문제로 남북 관 계는 다시 냉각.

김대중 정부 이후 남북 관계 급진전(1998): 정부는 이른바 남북 화해 협력 정책을 추진하여 민간 차원 의 교류를 크게 확대.



615 남북 공동 선언(2000)

의의: 평양에서 남북 정상 회담이 이루어져 남북 공동 선언이 발표되고 남북 이산가족이 만나는 등 남북 간의 긴장 완화와 화해 협력이 진전.

내용

통일 문제의 자주적 해결

통일 위한 남측의 연합제와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사이의 공통성 인정

이산가족 방문단의 교환과 비전향 장기수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

경제 협력을 위한 민족 경제의 균형적 발전과 제 분야의 협력교류 활성화.

대화의 계속 등.

<북한 요약 표>

 

시기

중요 사건

1940년대

평남 건준위 결성(45. 8)

신의주 반공 학생 의거(45. 11)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 발족(46. 2)

남녀평등법(46. 7)

북한 노동당 창당(46. 8)

인민군 창군(48. 2)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수립(48. 9)

소련군 평양 사령부 설치(45. 8)

소련파 숙청(45. 11)

토지 개혁(46. 3): 우리(49.6)보다 빠르다는 점 주의

중요 산업 국유화(46. 8)

북한 화폐 개혁(47. 12)

김구의 남북 협상안 수락(48. 3)

소련군 철수(48. 9)

1950년대

한국 전쟁(50. 6)

박헌영 숙청(52. 12 ⇨ 사형 판결 55. 12)

8월 종파 사건(56. 8)

천리마 운동(58. 3)

남한에 대한 토지 개혁(50. 7)

주체사상 최초로 제기(55. 12)

김두봉 축출(57. 5)

노동 적위대 창설(59. 1)

1960년대

정당/사회 단체 연석회의 구성 제의(60. 4)

북한/소련 간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 조약 체결(61. 7)

4대 군사 노선 채택(62. 12)

남로당갑산파 숙청(67. 3)

미정보함 플르 나포(68. 1)

주체사상의 유일 사상화(69)

∙「조선말 사전출간(60. 8)

소련 비판(현대 수정주의, 62. 10)

이라크와 수교(67. 1)

김일성 10대 정강 발표(67. 12)

통혁당 창설(69. 8)

 

1970년대

남북 공동 성명(72. 4)

북한 사회주의 헌법 국가 주석제 신설(72. 12)

유네스코 가입(74. 10)

이후락 정보부장 김일성 면담(72. 5)

평양 지하철 개통(73. 9)

200해리 경제 수역 선포(77. 7)

1980년대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80. 10)
주체사상탑 개막(82. 4)

합영법(84)

서울 올림픽 불참 발표(88. 1)

김일성문익환 목사 면담(89. 3)

김정일 후계자 공인(80. 10)

부주석 김일 사망(84. 3)

핵 확산 금지조약(NPT) 가입(85)

남북 국회 연석회의 제의(88. 7)

 

1990년대

청년 학생 축전(91. 8)

IAEA 핵 안전 협정 서명(92. 1)

NPT 탈퇴(93. 3)

김일성 사망(94. 7)

미국과 직통 전화 개통(95. 4)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 선언(91)

합작법(92)

김정일을 국방 위원장에 추대(93. 4)

단군릉 준공(94. 10)

김정일의 승계 공식 선언(97. 10)

 



. 통일을 위한 노력



1. 적극 외교의 추진


1960년대


일 협정(일 국교 정상화, 한일기본조약, 65.6)

㉠ 평가

가. 긍정: 한일 관계에 새로운 협력 체제를 이룩하였다.

나. 부정: 그러나 배상금을 경제 개발 자금으로 활용하기 위해 체결한 굴욕 외교라 하여 반대(63 사건)도 있었다.

4개의 부속 협정: 어업 협정, 제일 교포의 법적 지위 및 대우 협정, 재산 및 청구권 문제 해결과 경제 협력 협정, 문화재 및 문화 협력 협정.


베트남 파병(1965): 

ㄱ. 미군은 한국군의 추가 파병에 대한 보상 조치로 브라운 각서(66) 마련.

ㄴ. 브라운 각서는 국군의 장비 현대화와 물자 수출 요구 등을 내용으로 한다.


미 행정 협정 체결(1966): SOFA.

 

1970년대: 비동맹 국가들과의 교섭

1980년대

● 88년 이후 노태우 정권 때 많은 외교적 노력이 있었다. 

● 예를 들어 올림픽 개최(88), 북방 정책을 추진하여 헝가리, 폴란드 등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과도 수교(1989) 등이 있다.

1990년대

● 90년대 초 역시 노태우 정권 때 외교 관계가 많이 맺어짐

● 1990년에는 소련과 국교, 1991년에는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 1992년에는 중국과 국교

 





2. 북한의 변화


1950년대 상황

정치

독재 기반 강화: 김일성은 그에 따르지 않는 세력등을 숙청하여 1인 독재의 기반을 강화.

내용

남로당 제거: 김일성은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패전의 책임을 물어 남로당을 비롯한 국내파 공산 주의자들을 제거

연안파 제거: 19568월 노동당 중앙 전원 회의에서 독재 체제를 비판(8월 종파 사건)연안파 공산주의자들도 숙청


한국전쟁 중

19531955

19551958

1967

무정허가이 숙청

남로당계 숙청

(박헌영, 이승엽)

연안파 제거

(최창익, 김두봉 등)

소련파 제거

(박창옥, 이상조 등)

갑산계 숙청

(박금철, 이효순)


경제

목표: 북한은 전후 복구와 자립적 민족 경제 확립을 목표로 하였다.

정책: 소련과 중국의 원조를 받아 중공업과 경공업의 병진 정책을 추진.

천리마 운동: 참여를 독려하기 위하여 전개, 중공업 우선시 하였다. 또한 농업과 상업 분야에서도 협동화를 통하 여 한동안 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왔다.

3대 혁명 운동: 새로운 사상기술문화를 창조하자는 운동.

 


1960년대 상황

정치: 김일성 유일 지배 체제가 구축, 김일성을 추종하는 강경파가 권력을 독점.

군사: 4대 노선

ㄱ. 배경: 한일 안보 체제 구축과 국제 정세의 악화로 위기에 놓인 북한

ㄴ. 행동: 국방 건설을 위하여 이른바 4대 노선을 채택(전 인민의 무장화, 전 국토의 요새화, 전군의 간부화, 전군의 현대화)

주체 노선 강조

목적: 김일성과 노동당의 독재 강화.

내용: 정치의 자주, 경제의 자립, 국방의 자위.

대남 정책

표면적: 평화적인 남북 연방제 통일 방안.

내면적: 남한에 통일 혁명당을 조직하여 내부 혁명을 부추겼으며, 무장 군인을 남파하여 무력 도발.

 


1970년대 전후 상황

실무형 관료혁명 2세대 등장

ㄱ. 노선 완화: 강경 노선이 완화되고, 실무형 관료와 혁명 2세대가 등장

ㄴ. 친인척 장악: 김정일을 비롯한 김일성의 친인척이 권력의 핵심 장악.

주석제 신설과 후계자 공인

74 남북 공동 성명을 계기로 권력을 주석에게 몰아 주는 사회주의 헌법으로 개정(1972. 12)하여 국가 주석이라는 새 지위를 차지하고, 김정일을 김일성의 후계자로 공인.

 


1980~1990년대

정치

후계 체제 확립

권력 승계

김정일은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에 취임(1990), 조선인민군 사령관에 추대(1991),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였고(1993), 김일성이 사망한 뒤 권력 승계.

제네바 기본 합의서(1994): 미 관계 정상화 추진을 위해 스위스 제네바에서 한반도 핵문제의 전반적 해결을 위하여 이루어진 합의서.

경제

경제의 침체: 1970년대에 전반적으로 침체.

경제 특구

김일성은 중국의 경제 특구 전략을 부분적으로 모방하였다. 제한적 경제 개방 정책으로 나진/선봉 자유 무역 지대 설치를 공포하였다(1991).

합영법과 합작법 제정

배경

가. 계획경제: 북한은 철저한 계획 경제와 지나친 자립 경제 정책으로 경제 발전이 둔화

나. 국방비: 또한 과다한 국방비 지출로 투자 자본의 확보가 어려웠다.

내용

중국의 개방 정책을 부분적으로 원용하여 외국인 투자 유치를 위한 합영법과 합작법을 제정하였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한 편이다.

4. 5공화국(19811988)


최규하 정부의 출범(1979): 계엄령이 선포되고 통일 주체 국민 회의에서는 최규하를 대통령으로 선출.


신군부 세력의 등장

1212 사태(1979): 신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킴.

서울의 봄: 정치인과 학생들이 전개한 1980년 봄의 민주화운동이었는데, 결국 탄압되었다.

3김 탄압

김대중: 내란 음모죄로 재판에 회부.

김종필: 권력형 부정 축재혐의로 체포되고, 재산을 몰수당함.

김영삼: 자택연금.

518 광주 민주화 운동(1980):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의 요구가 518로 이어졌다. 무고한 시민들이 다수 살상됨.

 

신군부 세력의 정권장악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 전두환이 의장이 되어 국가의 통치권 장악.

언론과 지식인의 탄압: 정치인의 활동을 규제하고 언론을 통폐합하였으며, 민주화에 앞장선 교수와 언 론인을 직장에서 추방.

인권 탄압: 삼청교육대.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 신군부의 압력으로 사퇴하였고 전두환 장군이 대통령으로 선출(1980. 9. 1)

새 헌법의 제정: 유신헌법을 일부 수정하여 7년 단임의 대통령을 간접선거로 선출하는 헌법을 공포.

 


전두환 정부(19811988)

출범: 민주정의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선 전두환이 선거인단에 의해 대통령으로 당선.

정책방향

국정지표: 정의사회의 구현, 복지사회의 건설.

강경책

학생들의 시위를 강력하게 진압

언론통폐합, 반정부 성향의 기자 해직

국가안전기획부와 국군보안사령부를 조직하여 민주화 운동 탄압

온건책

정치규제를 단계적으로 해제

제적된 학생 복학, 해직된 교수 복직, 학생자치기구의 부활

해외여행의 자유화, 통행금지 해제. 고등학생의 교복자유화

내용: 강온 양면책 전개

한계성: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고 인권을 유린하였을 뿐만 아니라 각종 부정과 비리로 국민적 저항에 부딪쳤다.

6월 민주항쟁

시국선언의 발표: 대학교 교수들이 개헌과 민주화를 요구.

민주항쟁의 도화선

가. 박종철 군이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사건

나. 이한열 군이 시위 도중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

다. 413 호헌 조치를 발표하자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

 




5. 6공화국(19881993)


출범 과정

629 민주화 선언(1987): 6월 민주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선언 발표. 여야 합의와 정상적인 절차를 갖춘 개헌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노태우 정부 수립: 이 선언을 계기로 국회에서는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이 마련되고, 선거로 신군부 출신의 노태우 정부가 수립.

 

국정 목표와 공과

국정 목표: 민족 자존, 민주 화합, 균형 발전, 통일 번영으로 설정.

업적: 지방 자치제의 부분적 실시, 북방 정책의 추진, 유엔 남북한 동시 가입 등 적극적인 외교.

문제점: 부정과 비리

 

6. 문민정부(19931998)

국정지표: 깨끗한 정부, 튼튼한 경제, 건강한 사회, 통일된 조국건설.

내용

남북관계의 진전

비전향 장기수를 인도적 차원에서 무조건 북한으로 송환.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하여 북한이 수용하였으나 김일성의 사망으로 무산.

에너지개발기구(KEDO)에 의한 원자로 건설사업이 추진.

 

7. 국민의 정부(19982003)

국정지표: 외환위기의 극복과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천명

내용

국가적 과제의 제시: 국정 전반의 개혁, 경제난의 극복, 국민화합의 실현, 법과 질서의 수호 등.

② 햇볕정책




*개헌 과정 요약


구분

개헌(연도)

주요 내용

비고

1공화국

제헌 헌법(1948)

대통령 간선제, 단원제 국회

국회에서 대통령 간접 선거

1차 개헌(1952)

대통령 직선제

발췌 개헌

2차 개헌(1954)

대통령 직선제, 중임 제한 철폐

사사 오입 개헌

2공화국

3차 개헌(1960. 6)

내각 책임제, 양원제 국회

419 혁명의 영향

4차 개헌(1960. 11)

315 부정 선거자 처벌

소급 특별법의 제정

3공화국

5차 개헌(1962)

대통령 직선제, 단원제 국회

516 쿠데타의 영향

6차 개헌(1969)

대통령의 3번 연임 허용

3선 개헌

4공화국

7차 개헌(1972)

대통령 간선제, 권한 강화

유신 헌법

5공화국

8차 개헌(1980)

대통령 간선제, 7년 단임제

1212 사태의 영향

6공화국

9차 개헌(1987)

대통령 직선제, 5년 단임제

6월 민주 항쟁의 영향

 

 

1. 주어부터 해석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항상 기초가 중요하듯 독해의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주어와 동사를 찾는 겁니다그럼 주어가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이지요? 대체로 이/가 등의 주격조사 또는 은/는 등의 보조사를 붙일 수 있는 "명사, 대명사"가 주격이고 동사는 "이다", "하다"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사는 문장에서 시제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아무리 문장이 길고 복잡해도 전후에 있는 동사 또는 조동사의 시제(현재, 과거,미래)에 신경을 쓰면 동사는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2. 전치사 앞에 /를 치고 뒤에서 앞으로 해석한다.

 

, 전치사구는 문장구조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하는 수식어구 일뿐입니다과감하게 괄호로 묶든지 해서 단순화 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치사가 무엇일까요? 전치사란 말 그대로 "앞에 놓인 품사"라는 의미로, 명사 앞에 놓여서 명사 또는 대명사와 함께 쓰여서 "전치사구"를 이루어 형용사나 부사역할을 하게 됩니다. 간단히 말하면 수식어구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 '전치사 + 명사 = 전치사구'가 되어 문장을 복잡하게 만드는 주범 역할을 합니다그러나 아무리 복잡한 문장도 전치사구를 ( )로 묶게되면 간단하게 변합니다예를 들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Human beings have adapted to the physical world not by changing their physical nature, but by adjusting their society.

 

이 문장을 가지고 12를 적용해본다면, 우선 동사를 찾아보면 have adapted가 됩니다. 그리고 전치사구를 모조리 찾아서 ( )로 묶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Human beings have adapted (to the physical world) not (by changing their physical nature), but (by adjusting their society.)

 

굵게 표시된 전치사구를 모조리 생략하고 문장을 보면 간단하지요. 그리고 살을 붙여 나가는데 2번 설명처럼 뒤에서 앞으로 하세요.

 

"인간들은 적응되어왔다. 물리적인 세계에. 그들의 물리적 성질을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회에 적응하면서."

 

또 잔소리 같지만 해석을 영어책에서 처럼 예쁘고 완전한 문장으로 해서 해석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번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을 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머리속으로 이해를 하고 문제를 푸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위에서 해석한 것처럼 하는 방법을 익히고 바로바로 직독직해하는 연습을 평상시 하시면 그래도 빠르게 실력을 늘릴 수 있습니다.

 

 


3. 동사가 2개 연속 될때는 뒷 동사를 찾아서 그 앞에 ) 한다.

 

여기서는 Human beings have) adapted 여기서 본동사는 뒷동사인 adapted이고 have는 조동사라는 것을 모두 아시겠지요. 동사란 놈은 몇 개가 나오던 제일 뒷동사가 본동사로서 의미의 핵입니다. 나머지는 시제를 나타내거나 태를 나타내는 것이지요.

 



4. 관계사가 있는 문장의 해석 비법

 

절앞에 위치하는 관계사는 선행하는 명사를 대신해서 대명사나 부사 등의 역할을 하고 또 자신이 이끄는 절을 선행하는 명사에 접속시키고 우리는 이러한 관계사가 이끄는 절을 관계사절이라고 합니다.

 

이런 관계사절은 전치사구나 종속접속사가 이끄는 종속절과 마찬가지로 문장의 구조를 아주 복잡하게 만드는 골치아픈 놈입니다. 전치사구를 ( )로 묶어 단순화 시키는 것 처럼 관계사절도 [ ] 묶어버려 단순화 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관계사를 발견하면 그 범위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In England) one (of the 'safest' subject) is the weather. Two Englishmen [who meet for the first time and do not wish to get into an argument] often talk about the weather. Then they say only the most obvious things - 'A bit cold today, isn't it?'

 

두 번째 문장을 설명하기로 하지요.

 

who argument 까지를 [ ]로 묶었습니다. 왜 여기까지 묶었을까요?

동사를 찾아보면 meet, wish, talk 이렇게 3개가 나와있습니다. 동사가 3개 있으면 접속사는 당연히 2개가 있어야 하겠지요. 그래서 meetwishand로 연결되어있고 마지막 talk는 관계대명사(= 접속사 + 대명사 역할)에 연결되는 동사라서 그 앞까지 [ ]로 묶은 것입니다.

 

거꾸로 응용한 것인데 이해가 되겠지요? 이 공식은 매우 유용합니다. 잊지마세요두명의 영국인, who 는 누구를 의미할까요? 물론 두명의 영국인입니다. 그러므로 대입해서 해석을 합니다, 두명의 영국인이 처음으로 만난다. 그리고 논쟁에 빠지길 원하지 않는다날씨에 대해 얘기하곤 한다. 이렇게 머리속으로 정리하고 문맥을 잡아나간다면 관계사가 있는 문장도 해석이 쉬워지겠죠?

 

 

5. V(동사) 앞에 있는 which, that은 주격.

 


6. S + V 바로 앞에 있는 which, that은 목적격


 

7. 숨어있는 관계대명사를 찾아야 한다.


 

8. 관계대명사 앞에 있는 전치사의 소속은?


 

9. 전치사를 발견하면? 목적어를 찾는다. 목적어가 없으면 목적어는 생략된 관계대명사


지금 설명한 것이 바로 문법과 독해의 연관성입니다. 이것을 보고 "쉬운데 이걸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냐" 하시겠지만 이것만 잘 알아도 관계대명사에 관련된 문제는 거의 틀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7번을 예문과 함께 설명하겠습니다.

 

Our Asian cultures teach us moderation in everything we do, and it is not for us to conquer nature but rather to live in harmony with it.

 

Our Asian cultures teach us moderation (in everything) we do, and it is not for us (to conquer nature) but rather (to live) (in harmony) (with it.)

 

이 구문을 보면 먼저 주어, 동사를 찾고 전치사구를 묶어 버리면 간단하게 되고뒤에 we do 앞에 that 이 생략된 것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 do의 목적어가 생략되었으니 거기에 맞는 것을 보충하면 되지요. 그리고 and 이하를 보면 병치구문에 관련된 내용이 나와있습니다.

 

and it is not (for us) (to conquer nature) but rather (to live) (in harmony with it.)

 

이렇게 괄호로 묶어 보면 for us 뒤에 to , but 뒤에 동일한 형태의 to 로 연결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8. Cultural evolution includes the various ways in which human intelligence and socialization have been used by people to make life easier.

 

Cultural evolution includes the various ways in which human intelligence and socialization have been used (by people) (to make life easier.)

 

여기서 which 앞에 in 이라는 전치사가 나왔습니다. 그러면 이 전치사의 소속을 찾아야 해석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인 것, 괄호로 묶고 주어, 동사, 목적어를 찾으면 위와 같습니다. 뒤에 관.대로 연결되니까 물론 동사가 있고 문장의 형태를 갖춰야 하겠지요.

 

"have been used" 여기서 본동사는 무엇일까요? used가 본동사이고 나머지 have been 은 시제 또는 태를 나타내는 조동사의 역할을 합니다. 이런 형태(동사꼴이 2, 3개 나오는 것)에서 제일 마지막 동사가 본동사이고, 본동사의 의미가 제일 중요합니다.

 

뒷 문장에서

 

{in which human intelligence and socialization have been used (by people) (to make life easier.)}

 

여기서 which 가 받는 것이 무엇일까요? 선행사를 찾아보면 ways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in the various ways를 어디에 넣는 것이 좋을까요? by people 뒤가 아닐까요?

 

, "전치사 + .""전치사 + 명사(=선행사)" 바꾸고 나서 { } 속에 있는 술부의 파트너를 찾으면 의미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Almost all the gas ______ in the United States is natural gas.

is burnd that burning burned burns

 

첫 번째, 전치사구는 ( )로 묶어버려라.

 

Almost all the gas ______ (in the United States) is natural gas.

 


 

 

10. 분사의 용법

 

일단 분사의 형용사역할을 하면서문장의 본동사가 될 수 없고, 문장의 주어를 가지지 못하고 의미상 주어를 가집니다이 두가지는 꼭 알고 접근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명사뒤의 -ed형은 과거 or 과거분사? - 어떻게 구별해야하나?

 

As for timber, a recent article in Nesweek says that Japan receives forty percent of the wood exported from the world jungles.

 

Cutting down trees helps speed a phenomenon called "global warming," which increases and causes higher levels of water in the earth's oceans.

 

문장의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동사를 찾아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동사의 과거형과 과거분사 형태가 같을 경우, 둘 중의 어느 것인가를 구별하는 것에 대해 알아봅시다. 단독으로 술어동사가 되는 경우는 찾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명사 뒤에 있는 놈이 문제입니다과거형이라면 바로 앞에 있는 ()명사가 주어가 되고, 과거형이 아니라면 과거분사로서 형용사적 수식어가 되는데 이것을 기초로 예문의 -ed형을 파악해 봅시다.

 

(As for timber), a recent article (in Nesweek) says {that Japan receives forty percent (of the wood) exported (from the world jungles.)}

 

기초중의 기초, 전치사구는 ( )로 묶는다. 그러면 문장의 기본 골격이 나타납니다최근의 기사는 that절 이하를 말해준다.

 

여기서 exported가 과거형이라면 wood가 주어(S)가 되겠지만 여기서 wood 는 전치사 of 의 목적어입니다. 물론 전치사도 목적어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아시겠지요그러므로 목적어가 주어가 될 수는 없으므로 exported는 과거분사로서 뒤에 (from )를 수반하고 wood를 수식하게 됩니다.

 

수식어로서 타동사는 수동의 의미를 가지게 되므로 "(어 있)"라고 해석합니다그리고 that 절 이하는 완전한 문장이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exported가 동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 문장에 called 가 있는데 이것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Cutting down trees helps speed a phenomenon {called "global warming,"}

which increases and causes higher levels (of water in the earth'oceans.)

 

{ }로 묶은 것은 pheanomenon을 수식하는 과거분사입니다. 그리고 수식어는 제거해도 문장을 구성하는 데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 없애버려도 문형과 의미가 제대로 성립합니다. 그리고 which자리에 pheanomenon을 그대로 넣어서 번역합니다.

 

그 현상이 증가시키고 원인이 된다(야기한다) 높은수준 물의 지구의 바다 그 현상이 지구 온난화라 불린다.

 



*다음은 전형적인 분사에 관련된 문법문제를 한 문제 보겠습니다.

 

다음 문장 중 문법적으로 옳은 것은?

 

Seeing from the distance, it looked like a human face.

Comparing with his brother, he is not so diligent.

I have been to the photographer's to take my picture.

The treasure remains buried somewhere.

 

1. 분사구문은 주절의 주어를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여기서 주절은 it 이하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을 겁니다.

대부분의 분사구문과 관련된 문제는 주절의 주어와 종속적의 주어가 일치하는가?

그 의미상의 관계가 틀리지 않는 가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it 은 사물을 가리키는 주어로서 수동적으로 보여집니까? 아니면, 능동적으로 봅니까?

그러므로 여기서는 seeing 가 아니라 seen 으로 되어야 합니다.

 

2. 여기도 마찬가지로 he 가 주절인데, 의미상 hehis brothercomparing 합니까? 아니면 he compared 됩니까?

 

3. 공무원 시험에 감초처럼 나오던 구문입니다. 동사의 쓰임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해석상으로는 맞지만 실제적인 의미는 사진관에 가서 내가 직접 사진을 찍는다는 의미로 되어 집니다. 그래서 to have my picture taken으로 되어야 정확한 구문이 됩니다.

 

4. remain 동사. 뒤에 보어를 취하는 동사입니다. (정답)

 

소위 말하는 오감동사 + 형용사 보어(절대로 부사는 ×)

 

오감 : 다섯가지 감각, 보고, 듣고, 냄새, 맛보고, 느끼고 look, sound, smell, taste, feel .

 

그외 2형식(불완전 자동사) : "되다" 동사류

become(get, turn, grew), remain(keep, hold), seem(turn 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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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학기 때 대학교 수업 과제로 썼던 답사 보고서.



   지난 6 9일 일요일, 천도교 대교당, 탑골공원, 운현궁, 우정총국, 마지막으로 덕수궁의 순서로 총 5곳을 다녀왔다. 예전에 외국인 친구를 서울 구경시켜주느라 덕수궁과 경복궁은 가본 적이 있었지만, 그런 특별한 경우 혹은 이번처럼 과제를 부여받거나 하는 경우가 있지 않은 이상, 이번에 다녀온 답사지들을 방문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사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방문할 기회가 없었다기보다는 나의 주말이나 기타 남는 시간들을 활용해 역사적 장소를 답사하고자 하는 그런 의지나 동기부여가 없었던 것 같다. '기회가 없었다'라는 말은 그저 합리화를 위한 변명이라고 생각하고, 특히나 매일 광화문 일대를 거쳐 시청역 1호선 옆의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며 학교에 통학하는 나 자신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니 갑자기 매우 부끄러워 졌다.

   우리나라의 역사 깊은 장소들 5곳을 둘러보는데 몇 시간이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걸 답사하고서 알게 되었는데(그것도 도보로), 나는 학교 다니는 3년 동안 안국역 주변과 광화문 일대를 단지 인사동과 삼청동, 청계천 등이 있는 데이트 코스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답사로 자신에 대한 반성과 부끄러움을 느낀 학생이 나뿐이 아닐 거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그런데 만약 나뿐이라면 더욱 반성해야겠다. 오늘날의 나를 있게 해주신 조상님들의 주무대였던 장소를 매일같이 다니면서 단 한 번도 관심을 가진 적이 없다는 것은 확실히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계속 반성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앞으로는 내가 매일 통학하는 이 길이 조선과 근현대사 시기를 비롯한 우리나라 역사의 중심지였고, 또한 대한민국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의 역사를 써내려 갈 장소라는 사실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 편이 더 낫다고 느꼈다.


 

 

1. 천도교 대교당

 

1) 답사 지역 선정 이유

   수업시간에 갑오농민전쟁과 그에 관련하여 최제우, 최시형 등의 인물들을 배웠는데, 갑오농민전쟁의 종교적 이념이었던 동학(천도교)을 따르는 사람들이 집결하던 장소인 천도교 중앙대교당이 어떤 곳인지 알고 싶었다.

 

 

2) 답사지 이동 경로 및 위치, 동행자

   6 9일 일요일 13 45에서 출발하여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하여 이동하였고, 15 10분쯤 안국역  4번 출구로 나와 운현궁을 지나서 30m정도 걷다보니 오른쪽 길 건너에 천도교 중앙대교당이 보였다. 동행자는 없었다.

   천도교 대교당 문은 열려있었고 들어가서 이곳 저곳을 둘러 보았다. 신도들이 집회를 하고 있었던 걸로 보이기에 교당 내부는 들어가지 못했다. 이번 답사지에서 기억나는 점은 2층에 올라갔을 때 교당 내부의 물건들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는데, 창고의 입구에서 2세교조 최시형의 거대한 사진을 보았던 일이다교당 내부에 가지 못했기에 둘러 볼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15분 정도 건물 내외를 둘러본 뒤 탑골공원으로 떠났다.

 

 

3) 답사지의 역사

 

- 해당 답사지의 내력

   천도교의 3세 교조인 의암성사 손병희 선생의 계획아래 1918년 대교당 신축이 결의되고,  천도교인들이 모은 성금을 사용하여 1921 2 27일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원래는 1919년에 완공할 예정이었으나 해당 연도에는 성금의 대부분을 3.1운동을 위한 자금으로 사용했고, 그 남은 성금으로 지었기 때문에 완공이 지연되었다고 한다.

   완공 이후 주요 민족적 집회와 해방 이후 귀국한 해외 독립지사들의 귀국인사 강연 및 집회 등이 이곳에서 일어났으며, 1978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되었고 현재까지도 많은 천도교인들이 매주 일요일 11시에 시일식과 기념식 등을 행하고 있다.

 

- 역사적 사건

   건물 자체에 직접적으로 관련한 역사적 사건으로는 1922년에는 소파 방정환, 김기전 선생의 지도 아래 천도교소년회에서 어린이의 날을 선포하며 대대적인 행사를 하는 등의 어린이 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이 있고, 해방 이후에는 귀국인사들이 강연과 집회 등을 벌인 장소이기도 하다는 점 등이 있다.

   건물 자체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역사적 사건은 아니지만 건물이 지어지던 시기에 주변에 있는 탑골공원에서 3.1운동이 일어났었고, 건물이 지어지기 28년 전에는 동학(천도교)에 종교적 뿌리를 둔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났었다. 당시 천도교 대교당이라는 건물은 없었지만 동학 종교 조직의 체계적인 포접체계 등은 갑오농민전쟁 이전에 있었던 항쟁들의 한계였던 체계성이 없었다는 점과 지속성이 없었다는 점 등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 조사 방식

수업자료와 더불어 천도교 중앙대교당 내에 비치된 팜플렛, 그리고 인터넷 조사(네이버 지식백과 등)를 통해 조사하였다.

 

 

4) 답사 소감

  1920년대 당시, 민족의 힘으로 지은 건물 중 가장 컸던 건물이라는 것을 알고 답사했는데, 사실 생각했던 것보다는 크기가 작았다. 그러나 조금 더 조사해보니 원래 400평을 계획했던 것이 조선총독부에 의해 212평으로 규제, 축소당한 후 허가를 받았다고 한다. 건물크기까지도 규제할 만큼 조선총독부의 간섭과 견제가 심했구나 라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원래 답사지에 도착하기 이전에는 천도교 대교당 역시 경복궁이나 기타 문화재와 같이 '만지지 마시오', '들어가지 마시오' 등의 문구가 많이 비치되어 있을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러나 대교당 앞에 도착했을 때 집회를 하러 오신 몇몇의 천도교인들을 보고 실제로 ', 이 건물을 아직도 적극적으로 활용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실제로 대교당 내부에 들어와 보니 교당, 관리실, 창고, 화장실, 심지어 건물을 청소하시는 아주머니도 있었기 때문에 이 건물을 단지 보존해야 할 문화재로서 뿐만이 아니라 마치 다른 여느 평범한 교당처럼 실제로 활용까지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천도교는 현재 신도 수가 많이 부족하고 그나마 있는 신도들의 연령대도 점점 높아져 간다고 들었다. 1800년대 후반 신분제가 당연시 되던 조선 사회에서(물론 조선 후기였지만)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후천개벽 사상과 인내천 사상을 들고 나온 의미 있는 민족종교로서 명맥을 이어나갈 가치가 높다고 생각하는데, 비록 천도교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언젠가 천도교가 다시 부흥할 수 있는 계기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 탑골공원

 

1) 답사 지역 선정 이유

  탑골공원은 3.1운동이 일어난 역사적 장소이며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십층석탑과 유형문화재 팔각정이 있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내가 이 장소에 대해 평소 들어온 바는 주로 오갈데 없는 노인분들이 많이 이용하시는 공원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지탄과 비꼼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이 노인분들이 사실은 예전 어렸을 적에 부모님 손을 붙잡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시절이 그리워서 탑골공원에 매일 앉아계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번 해보았는데, 맞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런 생각도 해보며 탑골공원을 답사지로 선정하였다.

 

 

2) 답사지 이동 경로 및 위치, 동행자

  15 15분부터 15 30분까지 천도교 중앙대교당을 답사한 뒤, 바로 출발하여 낙원상가를 지나 탑골공원에 도착하였다. 도보로 10분 정도 이동했으며 동행자는 없었다. 탑골공원 내부 답사는 독립선언문 비석 -> 의암 손병희 선생 석상 -> 팔각정과 원각사지십층석탑 순으로 15분 정도 답사하였다.

 

 

3) 답사지의 역사

 

- 해당 답사지의 내력

   현재 탑골공원 부지에 고려시대에는 흥복사라는 사찰이 있었고, 조선시대에 와서 세조가 그것을 원각사로 개명하고 중건하였는데 그 규모가 실로 굉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성종 때부터 억불정책이 시행되던 것이 연산군 때는 절정에 이르게 되어 연산군을 위한 기생들이 거주하는 연방원으로 바뀌게 되었고 결국 1514년에 가서는 사찰을 헐게 되었다.

   현재 탑골공원 부지에는 원각사가 얼마나 웅대했는가를 보여주는 원각사지십층석탑만이 역사적 산물로서 남아있는데, 그곳이 언제부터 공원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다고 한다. 다만, “파고다공원이 이 땅에 최초의 공원이고 1897년 총세무사 브라운의 건의에 의하여 꾸며졌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고 하는데 반면 인천의 만국공원이 최초의 공원이라는 주장도 있다. 확실하게 인정된 정설이 없으므로, 어느 주장이 옳다라고 단정지어 말하기는 힘든 것 같다.

 

- 역사적 사건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났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사실 정작 조선은 승전국인 일본의 식민지였으므로 해당 사항이 없었지만)의 영향으로 서울과 평안도에서 독립운동을 벌여보자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서울에서는 이 탑골공원이 그 움직임의 중심지였다.

   3.1운동은 실력양성론자들인 민족대표 33인이 기획되었고, 운동 당일에 학생대표에 의해 독립선언문이 낭독되었으며, 외교독립론 중 독립청원의 일환인 만세시위로써 독립 의지를 강력하게 표명하였으나 당시 일본의 '이성'은 조선 민중들의 기대에 부응해주지 않았다. 결국 일제의 물리력에 3.1운동은 실패하였다. 하지만 비록 실패했으나 당시의 다양한 국내 세력들(복벽주의, 공화주의, 민족교육운동 등)이 한데 모여 민족자결을 외쳤다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 조사 방식

수업자료와 인터넷(네이버 지식백과)을 활용하여 조사하였다.

 

 

4) 답사 소감

   역사적 장소로서도 중요하지만 역시 공원으로서의 가치도 돋보이는 답사지였다고 생각한다. 이미 천도교 대교당에서 느꼈던 것이지만, 예전에는 역사 답사지라고 하면 단지 '과거'의 것만을 ', 그 때는 그랬구나'하고 배우는 것으로만 생각했었는데, 반면에 탑골공원처럼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며 과거를 대표하는 역사적 답사지로서의 성격과, 잘 정돈된 현재의 공원으로서의 성격이 둘 다 제대로 발휘되는 답사지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독립선언문을 보면서 '만약 내가 1919년 조선의 학생이었다면, 과연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를 위해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학생대표가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물론 학생 대표는 아닐지라도 자기가 생각하는 가치관에 따라 소신있게 독립을 적극적으로 외치던 부류에 속할 수 있었을까? 이러한 생각을 해본 이유는 요즘 나를 포함한 학생들이 각종 사회 문제와 현안들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점 때문이다. 요즘은 자기 자아에서 나온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기보다는 일단 남들처럼 좋은 스펙을 쌓아 좋은 대기업에 취직하기를 바라는 것 같다. 과거는 미화된다 라는 말이 있지만 그래도 3.1운동 시절의 학생들은 적어도 남들따라 줏대없이 독립을 외치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일제 순사들에게 빌붙어 편하게 사는 길을 택할 수도 있었을텐데, 내가 알고 있는 한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탑골공원은 듣던 대로 노인분들이 많이 앉아계셨다. 특히 팔각정 주위에 빙 둘러앉아서 더위를 피하고 계셨다. 그 노인분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괜스레 서글퍼지기는 했지만 다음 답사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3. 운현궁

 

1) 답사 지역 선정 이유

근현대사의 중심에 있는 고종과 흥선대원군이 살았던 집이자 흥선대원군의 고종 섭정 시절 수많은 국정 논의가 이루어진 장소이기에 반드시 답사해 보아야 하는 곳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2) 답사지 이동 경로 및 위치, 동행자

15 40분부터 15 55분까지 탑골공원을 답사한 뒤, 다시 안국역쪽으로 돌아오는 길에 있는 운현궁에 도착하였다. 동행자는 없었다. 운현궁 입구에서 '꽃필녘 일요마당'이라는 판소리, 가야금 병창, 전통무용 등의 특별공연을 관람하고 수직사, 이로당, 노락당, 노안당의 순으로 답사하였다.

 

 

3) 답사지의 역사

 

- 해당 답사지의 내력

   원래 흥선대원군의 사저였고 고종이 어린 시절부터 자란 곳이다. 고종이 즉위하면서 명칭이 운현궁으로 바뀌었다. 1864(고종1)에 노락당과 노안당을 짓고, 1869년에는 이로당과 영로당을 세웠다고 한다. 창덕궁에 쉽게 드나들게 하기 위한 공근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1912년 일제의 토지조사 때 소유권이 국가에 넘어가게 되었지만 실제 안살림은 역시 이로당의 안주인들이 맡아서 했다. 그러다가 1948년 미군정에 의해 다시 대원군 5대손 이청씨에게 소유권이 돌아오게 되었다. 그 이후 1991년 운영 문제로 이청씨가 소유권 양도 의사를 밝혔고 당시 서울시가 매입하여 현재까지 운영, 관리 중이다.

 

- 역사적 사건

   1866년 노락당에서 고종과 민비(명성황후)의 가례가 있었다. 노락당은 민비의 왕비 수업이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다. 노안당은 흥선대원군이 국정을 논의하던 곳으로서 수많은 정책들이 발의되고 결정된 역사적 장소이다. 이로당은 운현궁의 안살림을 책임지는 장소였다.

  

- 조사 방식

수업자료와 운현궁 내의 팜플렛, 운현궁 공식 홈페이지 등을 참조하였다.

 

 

4) 답사 소감

  규모가 굉장히 축소된 것이라고 하지만 한 가족이 살기에는 역시 거대한 규모라고 할 수 있었다. 흥선대원군의 위세를 잘 보여주는 집이라고 하는데, 인상깊었던 점은 국정운영 논의의 많은 부분들을 흥선대원군의 사저나 다름 없었던 운현궁에서 했다는 점이다. 지금 생각으로는 현재 정치도 국회나 청와대에 가서 하듯이 나라의 일은, 더군다나 왕의 권한을 가지고서 하는 일들은 창덕궁이라든지 어떤 특정한 격식이 있는 장소에서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궁이라고는 하나 원래는 흥선대원군의 개인 집인 노안당에서 했었다니 당시 흥선대원군의 위세를 짐작하게 했다.

  그리고 노락당을 답사하던 중 점점 사람들이 모이니 아무 대가 없이, 누가 해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운현궁과 기타 지식들에 대해 설명해주시는 친절한 어르신을 보게 되었다. 정말 세부적이고도 사람들이 모를 만한 것에 대해 설명을 하셨는데, 가령 조선시대 때 방을 좁게 만든 것은 부부 간의 금실을 좋게 하기 위해서 라고 하시고, 문 틈 모양은 모두 한자 쓸 용 자로 되어 있다 등의 설명을 해주셨다. 한 번쯤 알아두면 재미있을 만한 상식들이어서 설명이 끝난 후 그 어르신에게 모두 감사를 표했다.

 

 

 


4. 우정총국

 

1) 답사 지역 선정 이유

수업시간에 갑신정변이 시작된 장소가 이곳이라고 배웠는데, 수업시간에 배운 기억으로는 그 진행의 흐름이 상당히 흥미로웠기에 답사지로 선정하였다.

 

2) 답사지 이동 경로 및 위치, 동행자

16~1630분까지 운현궁을 답사한 뒤 안국역 6번출구 를 통해 우정총국으로 도보로 이동하였다. 동행자는 없었고 이동하는 잠깐의 휴식을 취하며 식사를 하였으며 17 15분에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우정총국은 크기가 매우 작아서 답사 시간은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3) 답사지의 역사

 

- 해당 답사지의 내력

   고종 21년인 18843 27일에 설치되었고, 다음날 홍영식이 총판으로 임명되었다. 그 해 5월에는 일본인 실무자 2명을 고용하였고 10 1일 처음으로 우체 업무를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10 17일에 우정총국 낙성식 때 갑신정변이 일어났고 19일에 그 막을 내린 후 이틀 튀인 10 21일 우정총국은 폐지되었다. 그러나 폐지된 이후에도 우체 업무는 계속되어, 실제로 우체 업무가 마감된 것은 11 20일이었다고 한다.

   1970년에는 국가사적 213호로 지정되었고 71 12월에는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72년에는 체신기념관으로 개관했다가 작년인 2012 8월 우정총국을 재개국하여 우편업무를 보고 있다. 기념관 역시 내부에 재조성되어 있다.

 

- 역사적 사건

   188410월 우정국 낙성식 때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급진 개화파이자 보빙사였던 홍영식이 총판이었는데 급진개화파들은 1884 4월 당시 조선 내부에 주둔하던 청군 1,500명이 청, 불 전쟁 때문에 청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보고 개혁의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 때부터 차곡차곡 물리력을 쌓기 시작하여 유학생들로 구성된 사관생도, 숙직장교가 이끄는 친군전영군, 박영효가 집을 판매한 돈으로 고용한 역사들, 부상 100여명, 운웅렬의 470인 중 함경도로 돌아가지 않은 70명 등 총 200~300명 정도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10월 낙성식 때 거사를 일으켰고 일련의 계획을 갖고 있었으나 별궁 방화 실패, 청과 민비의 결탁으로 인한 고종의 창덕궁 이어 등과 더불어 원래의 무력이 그렇게 강하지 않았기에 결국 청군에 의해 3일만에 제압당하고 말았다. 정변 주도층은 주로 일본 공사로 철수하거나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이들이 갑신정변 때 내세웠던 갑신정강은 갑오개혁에 가서야 실현되게 된다. 비록 실패 하였지만 갑신정변이 아무 의미 없는 개혁 시도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 조사 방식

수업자료와 우정총국 공식 홈페이지를 참조하였다.

 

 

4) 답사 소감

   우정총국이 답사 날 현재 업무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정말 충격에 휩싸였었다. 천도교 대교당에 이어 우정총국도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서 운영을 하고 있다니, 내가 갖고 있는 역사 시설물에 관한 상식(문화재로서 해당 물체를 영구히 잘 보존하는 것이 최우선)이 완전히 틀린 것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조사 결과 2012 8월부터 128년만에 업무를 재개했다는 사실을 알고서 그 충격이 조금 가라 앉긴 했다.

   다만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문화재를 잘 보전한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나의 인식의 틀이 변화했다는 것이다. 가령 이전에 갖고 있던 문화재 보전 인식은 해당 물체를 잘 보존해서 현대의 산물들이 최대한 반영되지 않은 채로 영구히 후대에 물려줄 수 있게끔 유지하는 것이 최우선적인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는데, 진정한 문화재 보전이란 그런 물리적인 측면보다도 정신적인 측면, 즉 우정총국의 경우 우정총국이 가지고 있던 고유의 우편 업무 기능을 재개하는 일이 어쩌면 더욱 큰 의미의 문화재 복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엇이 더 옳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 쪽으로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5. 덕수궁

 

1) 답사 지역 선정 이유

   덕수궁은 와 본적이 몇 번 있었는데, 이번 수업으로 근현대사 시기, 특히 대한제국을 배우고 나니 다시 한 번 답사해보고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고 보는 것과 알고 보는 것은 다르기 때문에 전에 못 보던 것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덕수궁을 선정했다.

 

 

2) 답사지 이동 경로 및 위치, 동행자

   우정총국 방문 뒤 광화문을 거쳐 코리아나호텔, 시청역 1호선 등을 지나 대한문 앞에 17 45분 경 도착하였다. 도보를 이용했으며 동행자는 없었다. 덕수궁 내에서는 덕흥전, 함녕전, 정관헌, 중화전, 즉조당, 석어당, 중화문, 광명문, 석조전 순으로 답사하였다.

 

 

3) 답사지의 역사

 

- 해당 답사지의 내력

   덕수궁은 1593년 선조26년인 조선 후기부터 역사에 나오기 시작했다. 원래는 월산대군의 저택이었으나 선조가 행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1611년에 광해군은 그 저택에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붙였다. 인목대비 유폐 이후 서궁으로 불렸고 1623년에는 경운궁의 대부분을 다시 월산대군 가에 돌려주었다.

   그 뒤로 약 280여 년이 흐른 뒤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옮겨오면서 다시 역사에 재등장했다. 대한제국기에 궁으로 사용되다가 통감부기에 이르러 1904년 대화재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다. 물론 나중에 재건은 하였다. 1907년에는 궁의 이름이 덕수궁으로 바뀌었고 1933년에 일반인에게 개방된 뒤 70년을 이어오다 2007년에 덕수궁 복원이 이루어졌다.

 

- 역사적 사건

   석어당은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가 광해군에 의해 10년간 유폐되어 감금생활을 했던 곳이다. 이 사건은 인조 반정이 이루어지는 구실이 되었고, 반정에 성공한 인조는 인목대비에게 정통성을 인정받고 여기에서 즉위했다고 한다.

   함녕전은 고종이 1919년 승하한 곳이면서 한편으로는 백범 김구의 목숨을 살린 대청전화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백범 김구의 사형 직전에 고종이 서류를 검토하다가 전화로 사형집행 중지를 내렸다는 일화가 있다. 또한 정관헌에서는 고종 독살 미수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석조전은 서양식 건물로서 근대국가를 상징하는데 이곳에서 외국 대신들과의 수많은 접견들이 이루어졌으며 미소공동위원회와 유엔한국감시위원단 이 이곳에 머무르며 많은 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의 궁역 안에 있었던 중명전은 일제에 의해 을사늑약이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지만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 파견이 이루어진 뜻깊은 장소이기도 하다.

 

- 조사 방식

수업자료와 덕수궁 내에 비치된 팜플렛인터넷 조사 등을 활용하였다.

 

 

4) 답사 소감

   덕수궁은 오늘 답사했던 곳들 중 가장 규모가 크고 건물도 웅장했다. 중화전이 서양식 기술로 만들어진 근대국가의 상징이었다면 중화전이나 함녕전, 등은 동양식 기술로 만든 조선을 상징한다고 생각하는데, 덕수궁을 보고 있으면 고종이 하루빨리 조선에서 벗어나 나라를 근대화시키고 싶어했음이 느껴진다.

   일단 고종이 대한제국을 성립한 후에 곤룡포를 벗고 제복을 입은 것과(동양식 옷이 아니라 서양식 옷이라는 점) 서양식 기술과 동양식 기술의 조화인 정관헌에서 커피를 마시며 외국 사절들과 연회를 즐겼던 점, 그리고 무엇보다 석조전을 건립하여 침전 및 편전으로 사용하려 했던 점 등을 보면 고종은 이 덕수궁 내에서 나름의 야망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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