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학농민혁명과 갑오개혁


1. 동학농민운동(1894)


동학교세의 확장

최제우: 1860년 창도, 1864년 최제우 처형.

최시형: 2대 교주로 각지에 포와 접 설치. 동경대전용담유사로 포교. - 이 두 책도 최제우가 다 지어놓은 거였다.

 


교조신원운동

삼례집회: 189211월 전라도 삼례에서 교조 신원과 탐관오리의 숙청을 충청전라감사에게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함.

2차 신원: 18933월 박광호손병희 등이 서울 궁궐에서 교조신원 복합상소를 하고 외국인 철수 요구, 실패.

보은집회(3차 신원): 

1893. 3. 114. 2. 척외양창의를 구호로 정치운동을 벌임

정부는 탐학한 향리를 징벌하겠다며 어윤중을 선무사로 파견.

한편으로 홍계훈으로 하여금 600명의 관군을 출동시켜 진압.

금구집회

보은집회 시기에 전라도 금구에서 1만여명의 농민이 참가

전봉준서장옥황하일 등이 보 은집회와 결합하여 서울로 쳐들어가려 하였으나 집회는 무산되고 동학 상층부의 반대로 해산.

 


동학농민운동의 전개


1- 고부민란의 시기

원인 고부군소 조병갑이 만석보의 수세를 강제 징수하고 1천냥을 사취.

전봉준과 농민군 지도자들은 사발통문을 돌리며 1894110일 봉기. 고부접주 전봉준은 관아를 습격하며 군수를 내쫓고, 아전들을 징벌한 뒤 곡식을 농민들에게 분배하고 보를 허물음.

몇 개조의 요구사항을 제시하며 10여일 만에 해산(1894. 2). 1차 농민전쟁의 도화선이 됨.


2- 황토현 전투(남접)의 승리(절정기)

원인: 정부는 조병갑을 징죄하고 안핵사 이용태를 파견하였으나 그는 탄압에 급급. 대장 전봉준과 총사령관 손화중, 김개남, 총참모 오지영 하에 창의문을 선포.

주장: 탐관오리 제거, 조세 수탈의 사정 등을 주장. 특히 균전사 폐지를 강력히 요구.

1890년에 왕실이 전라도 서북부 11개 고을의 개간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파견한 관리.

경과: 농민군은 고부와 태인에서 봉기하여 백산에 진을 옮겨 호남창의대장소를 조직하고 격문과 4 대 강령 발표. 이후 황토현에서 관군을 물리치면서 남하.

<4대 강령>

사람을 죽이지 말고 가축을 잡아 먹지 마라.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라.

왜놈을 몰아내어 없애고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는다.

서울로 들어가 권세가와 귀족을 모두 없앤다.

결과 : 정읍고창함평에서도 승리하고, 양호초토사 홍계훈 병력 800여명을 장성에서 패배시킨 후 전주를 점령.




3- 집강소 설치 및 자치시기

집강소의 설치

정부와 전주 화약을 맺고 촌촌설포

새로 부임한 전라감사 김학진과의 합의에 따라 전라도 53개 군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폐정 혁역안(=폐정개혁안)을 실천.

집강소의 조직: 한 사람의 집강과, 몇 명의 임원. 전주에는 대도소 설치. 도소가 있는 곳은 도소가 집강소를 대신.

민보단: 봉건유생층(지주, 부호, 양반 등)이 각지에서 농민군을 체포하여 화적 혐의로 처형.

정부의 대응

전주 화약에도 불구하고 청에 파병 요청

청이 파병되자 일본도 천진조약을 구실로 파병하여 갑오개혁도 후퇴하고 청일 전쟁 발발

관민상화와 집강소체제는 좌절.

<폐정개혁안> - 나중에 갑오개혁 때(그 중에서도 1차개혁 때) 많이 반영 된다.

동학도는 정부와의 원한을 씻고 서정에 협력

탐관오리는 엄징.

횡포한 부호는 엄징.

불량한 유림과 양반 징벌.

노비문서 소각: 갑오 1차 때 반영

- 1차 때 노비제도 "공식"적 소멸

- 물론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좀 남았을 것이다.

7종의 천인차별 개선, 백정의 평량갓을 없앤다.

청상과부의 개가 허용.

무명의 잡세를 일체 폐지.

관리 채용에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

공사채를 물론하고 기왕의 것은 무효로.

왜와 통하는 자는 엄징.

토지는 평균하여 분작

- 참고: 토지에 관하여 "평균분작"이라는 말은 한국사 통틀어서 여기밖에 안 나온다. 만약 다른 시기의 토지제도에서 이 말 하면 그건 틀린 보기이다.


2차 동학농민전쟁(남접+북접), 공주우금치 전투

원인

갑오정권의 개혁 지진, 일본군관군의 탄압, 봉건유생의 반격

일본의 내정간섭과 왕궁 점령에 농민군은 189410월 척왜를 구호로 재기.

경과

손병희는 최시형의 승인 하에 10만여 명의 충청 농민군(북접)을 이끌고 청산에 집결하여 논산에서 합류

서울로 북상하다 공주 남쪽의 우금치에서 관군일본군과 1주일간 50여회 격전

첫 전투인 목천 세성산 전투에서 패배, 이인 전투에서 승리, 우금치에서 많은 희생을 내고 후퇴

농민 군의 전면적 후퇴와 함께 무자비한 살육 시작

양반토호의 민보군수성군도 공격하여 3040만 의 민중이 학살.

결과

전봉준은 변절한 부하의 밀고로 순창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일본공사의 재판을 받고 사형(1895. 4.).

나머지 지도자들도 체포 혹은 살해.

 

동학운동의 성격

철학적으로 주기론에 근접, 종교적으로 샤머니즘 중시

도교에 가까워 조선왕조를 부정하고 양반사회를 반대하는 사회개혁 사상

인내천 사상(한울님 사상), 천인합일, 운수, 말세, 후천개벽 사상 보유.

 

동학운동의 영향

갑오개혁에 영향

구국 의병 투쟁의 활성화: 농민군의 잔여 세력이 영학당, 활빈당을 조직.

 

동학운동의 의의

일부의 유생, 관리, 군인까지 참여.

조선의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고 항일의병운동의 단초를 열었음.

중국의 태평천국 혁명, 인도의 세포이 투쟁과 함께 19세기 아시아 3대 농민전쟁의 하나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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