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국시대
Ⅰ. 남북국가의 성립
1. 신라의 삼국통일(676)
2. 발해의 건국(698)
(1). 진(震)국의 성립 : 고구려 舊장인 대조영이 동모산(길림성 돈화)에서 건국
(2). 발해의 사회구조 : 지배층은 고구려인, 피지배층은 말갈족
(3). 발해의 고구려 계승의식 : 발해 무왕때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 復高麗之舊居有扶餘之遺俗 ”이라고 한 것이 나 스스로 高麗國으로 칭한사실
3. 남북국가의 관계 ( 국제적 세력관계 및 국내사정에 따라 친선과 대립을 교차적으로 행하였다. )
(1). 대립 - 신라군의 발해공격( 무왕 : 732 ) : 당․발해 전쟁시 당의 요청으로 신라가 발해의 남쪽경계공격
- 쟁장사건(897), 등제서열사건(906)
(2). 친선 - 건국직후 : 신라에 사신파견(700), 대조영에게 대아찬(5품)수여
- 원성왕(790), 헌덕왕(812)에 북국에 사신파견
- 신라에 결원 요청( 911) : 거란 공격시 신라에 결원요청, 신라수락
- 신라도(신당서), 39개의 역(고금군국지)이 존재하여 교류사실 입증(그러나 활발한 교류는 아님)
Ⅱ. 통일신라의 발전과 정치․경제․문화
1. 통일신라의 발전( 신라중대사회 : 무열왕 ~ 혜공왕 )
(1). 중대사회의 성격 - 신라의 전성기, 왕권의 전제화, 정치․문화의 황금기
(2). 왕권의 전제화의 성격 - 진골왕위의 세습(무열왕계) : 태종무열왕, 김유신계 등장
- 진골귀족의 세력약화 : 상대등 권한 약화 (상대적으로 왕권이 강화되고 시중의 권 한이 강화됨), 갈문왕제 폐지, 화백회의 약화
(3). 왕권의 전제화 과정
◈ 신문왕( 681~692 ) - 전제왕권의 확립, 김흠돌의 난을 진압하고 각종제도의 정비
- 정치제도 : 집사부 및 6전체제 정비(보충자료 참조)
- 지방제도 : 9주 5소경
- 군사제도 : 9서당 10정
- 경제제도 : 녹읍을 폐지하고 관료전 지급(진골귀족의 세력약화)
- 교육제도 : 국학 설치
◈ 성덕왕( 702~737 ), 경덕왕( 742~765 ) : 통일신라의 극성기
- 성덕대왕 신종, 관부와 지명의 한식화, 석굴암․불국사 창건
◈ 혜공왕( 765~780 ) - 5묘제(미추왕, 무열왕, 문무왕, 성덕왕, 경덕왕) : 중대에 있어서의 直祖관념 표출
2. 통일신라의 정치․경제
(1). 중앙관제( 신문왕때 완성 ) - 상대 ~ 중대에 걸쳐 점진적으로 설치됨.
- 당제 6전조직의 모방(형식적)
- 독자적 운영 : 단일성(집사성)중심으로 운영
(2). 지방관제( 신문왕 : 9주 5소경 )
1). 9주 (군주→총관→도독) ┌ 주장관의 명칭변화 : 군사적 성격에서 행정적 성격으로의 변화(민정장관)
├ 외관의 파견 : 중앙에서 파견
└ 외사정 설치(주,군) : 감찰임무
2). 군․현
3). 5소경(사신) ┌ 중원경(충주), 북원경(원주), 금관경(김해), 서원경(청주), 남원경(남원)
├ 방향에 맞추어 설치, 수도편제 극복, 지방세력 감시․견제목적
├ 정복한 국가의 귀족을 강제 이주시킴 : 중원경(가야), 남원경(고구려)
├ 중앙의 귀족 파견
└ 행정적 의미보다 정치적․문화적인 필요에 의해 설치
4). 村 - 몇 개의 자연촌이 합쳐진 행정적 지역촌 (민정문서 또는 신라장적 : 보충프린트 참조)
- 토착적 유력자인 촌주가 통제 ( 현령을 통한 간접통제)
5). 부곡(특수행정조직) - 피정복자 집단, 전쟁포로의 집단 거주지
- 천민집단
※ 토착세력에 대한 - 우대 : 촌주, 주․군현의 관리로 임명, 외관보좌
- 통제 : 상수리 제도 ( 고려 기인제, 조선 영저리․경저리제도의 기원)
(3). 통일신라의 군사제도 : 전제왕권의 밑받침이 되는 중앙군의 강화가 특색.
1). 중앙군 : 9서당(신문왕) - 통일전 서당의 확대․개편
- 왕경에 주둔, 국왕직속의 특수부대( 왕권강화 )
- 고구려, 백제 말갈등 피정복민을 흡수포함(깃의 색깔로 구분)
- 신라(녹․자․비), 백제(백․청), 고구려(황금), 말갈(흑금), 보덕국(적벽)
2). 지방군 : 10정 - 각주에 하나씩(단 한주만 2정) 설치(신라 지방제도가 군사적 조직과 결합)
5주서 - 강주․전주․한주․삭주․명주
3변수당 - 국경지대
(4). 토지제도 : 통일전 귀족은 식읍(공훈), 녹읍(관직기준)을 받았으며, 녹읍은 백성들의 노동력도 징발
- 관료전 지급 ( 신문왕: 687 ) : 왕권강화책의 일환으로 녹읍을 폐지하고 관료전 지급.
- 정전 지급 ( 성덕왕: 722 ) : 신라장적의 연수유답․전
- 녹읍의 부활 ( 경덕왕: 757 ) ; 귀족들의 반발로 녹읍부활, 귀족의 경제적 기반이 됨.
3, 통일신라의 문화
(1). 유학의 발달 : 전제왕권 확립의 필요성에서 유교정치 이념 도입
◎ 국학 (신문왕 682) - 교과를 3과로 나누고 박사․조교 설치
- 공통과목(논어, 효경), 예기․주역, 좌전․모시, 상서․문선
- 명칭변경 : 국학(신문왕) → 태학감(경덕왕) → 국학(혜공왕)
◎ 독서 삼품과 (원성왕 788) - 국학에 설치한 관리 채용 시험제도
- 목적 : 골품위주 관리등용 지양, 능력위주 지향(왕권강화)
- 결과 : 실패( 골품제의 견고성, 진골귀족의 반대 )
(2), 한학의 발달 ◈ 강수(6두품) - 외교문서 작성
◈ 설총(6두품) - 이두, <화왕계>: 군주의 도덕정치 요구
◈ 김대문(진골) - <계림잡전>, <고승전>, <화랑세기>, <악본>, <한산기>
- 부전함, 문화주체의식(모방단계극복)
◈ 김운경, 김가기, 최치원( 시무책 10조, 계원필경, 제왕연대력 )
(3). 향가문학의 발달 - 특징 : 일반민간에도 널리퍼짐, 통일후 더욱발전, 승려와 화랑작품 다수.
- 작품 : <삼대목 : 부전 >, <삼국유사 : 14수>, 서동요, 혜성가는 통일전 작품.
(4). 불교의 발달
1). 특징 : 대중불교화(정토신앙), 교학적 측면 발달(5교성립)
2). 5교의 성립 ◈ 화엄종(의상, 영풍부석사) → 圓融調和의 사상, 계층간․귀족간 갈등 해소
→ 지배층인 진골귀족의지지( 귀족불교 )
→ 통일후 전제왕권 강화의 이념적 도구 (一卽多 多卽一 사상)
→ 고려초 균여(광종)로 이어짐.
◈ 법상종(진표, 금산사) → 원측의 유식학, 티벳불교에 영향
→ 경덕왕때 화엄종과 대립할 정도로 성장
→ 고려중기(인종대, 특히 이자겸) 귀족불교로 부흥
◈ 열반종(통일전: 보덕, 전주 경복사)
◈ 계율종(통일전: 자장, 양산 통도사)
◈ 법성종(원효, 경주 분황사)
※ 원효의 <통불교 사상>, <화쟁사상> - 최고의 경전을 <화엄경>으로 삼음.
- 불교의 종합화․대중화에 기여
- 민중불교의 성격
<정토 사상> - 통일전 발생하여 통일후 발전
- 민중불교의 성격, 염불만으로 극락왕생
- 전불교적 현상: 왕실~노비까지 모두지지, 생활의 일부
- *대승기신론소, *십문화쟁론 *금강삼매경론
(5). 예술의 발달
1). 특징 - 불교미술중심으로 발달, 사실적인 기법에 생동감․조화미
2). 건축 ◎ 불국사(경덕왕, 김대성) - 임진왜란때 소실
- 석가탑(간소․장중), 다보탑(복잡․화려한 형식미, 균형미
◎ 석굴암(경덕왕, 김대성) - 화강암, 인조석굴
◎ 석등 : 법주사 쌍사자 석등, 불굴사 석등
◎ 범종 : 상원사종(最古의 종), 성덕대왕 신종(봉덕사종)
◎ 석탑 → 통일기 : 3층석탑 양식 유행 ( 고려 : 다층양식 유행 )
→ 감은사지3층석탑, 불국사 3층석탑(석가탑), 다보탑, 화엄사 4사자 3층석탑
3). 고분 → 통일후 횡혈식 석실분 유행 ( 분묘제작이 세련 )
→ 12지신상 조각유행( 김유신묘, 성덕왕릉, 괘릉: 원성왕릉 추정 )
4). 서화 → 김생(왕희지체, 원화첩:부전), 요극일(구양순체)
(6). 일본문화에의 영향 : 하쿠오(백봉) 문화에 영향을 줌
Ⅲ. 발해의 발전과 사회․문화
1. 발해의 발전 ◈ 무왕(719~737) → 일본에 사신파견, 고구려 계승의식
→ 당과의 전쟁 : 산둥지방(덩저우) 공격(732)
→ 신라와 대립 : 나․당 연합군 침
◈ 문왕(737~793) → 당과 화친 ( 제도․문화 수입
◈ 선왕(818~830) → 전성기, <해동성국>이라고 불림.
2. 발해의 정치와 사회
(1). 중앙정치조직 → 형식적 당제모방 : 3성 6부
→ 운영상 독자성 - 6부의 명칭이 유교적
- 6부의 운영이 이원적
- 정당성 중심운영
1). 왕(가독부)
2). 3성 - 정당성(정당 : 대내상) : 귀족합좌기관 → 忠부, 仁부, 義부
- 선조성(좌상) → 知부, 禮부, 信부
- 중대성(우상)
3). 기타 → 중정대 : 감찰기관
→ 문적원 : 도서기관
→ 주자감 : 국립대학. →사빈사 : 외빈접대
(2). 지방행정조직 → 5경 : 상경(수도), 중경, 동경, 남경, 서경, 수도의 편재성 극복
→ 15부(도독) : 지방행정의 중심지
→ 62주(자사)
→ 현, 촌락( 토착 유력자인 수령이 통치 )
(3). 발해의 사회구조 → 지배층 : 왕족인 大氏, 귀족인 高氏(고구려귀족)
→ 피지배층 : 말갈인 ( 농업에 종사 )
3. 발해의 문화
(1). 특색 : 고구려문화의 바탕위에 당의 선진문화 흡수
(2). 고구려 문화 영향 → 불교유물( 불상: 이불병좌상, 석등, 연화문 와당 ), 온돌장치
→ 고분 : 육정산 고분군(정혜공주묘 : 횡혈식 석실분, 두팔천정구조)
용두산 고분군(정효공주묘 : 도교, )
(3). 당문화의 영향 → 상경의 주작대로, 3성 6부제도
Ⅳ. 신라하대의 상황과 후삼국( 선덕왕: 780 ~ 경순왕: 935 )
1. 귀족사회의 동요
(1). 진골귀족의 왕위쟁탈전 → 大恭의 난(혜공왕: 768)발생 : 진골귀족들간의 상쟁
→ 내물왕계 등장(선덕왕) : 이후 왕위쟁탈전이 격화되어 155년간 20여명이교체
( 시중세력이 약화되고 상대등 권력이 강화됨 )
(2). 김헌창의 난(822) → 무열왕의 후손으로 웅천주(공주) 도독, 국호를 長安, 연호를 慶雲
(3). 김범문의 난(825)
(4). 장보고의 난(846) → 청해진(완도)설치, 김우징을 도와 신무왕으로 옹립
2. 사회 동요
(1). 골품제 붕괴 → 통일기에 성골이 사라짐(무열왕), 통일후에는 1,2,3두품은 사라지고 4두품은 평민화.
(2). 농장의 확대․농민몰락 → 9세기말 진성여왕 이후 농민봉기 극성
(3). 6두품 세력의 대두 → 학문적 식견을 가진 유학자로 중대에는 왕권과 결합
→ 행정적 실무를 담당하며, 하대에는 반신라적 세력으로 호족과 연결(최언위, 최승우)
→ 숙위학생, 고려건국의 사상적 배경
(4). 지방세력의 대두 ◈ 호족세력 → 유형 - 토착적 지방세력 : 지방촌주출신으로 촌락민을 통제한 유력자
- 중앙귀족출신 : 진골이나 6두품의 중앙귀족들 또는 외관으로 파견 되었다가 호족화
◈ 군진세력 → 호족의 두 유형 가운데 후자에 속함.
→ 국경지대에 설치된 패강진과 청해진
그리고 혈구진(왕건과 연결)이 대표적
◈ 사원세력 → 선종9산의 사원세력(주로 6두품출신이 많음)
◈ 농 민 군 → 진성여왕 이후 극성
→ 원종․애노(상주), 양길(북원:원주), 견훤(완산주), 궁예(철원), 기훤(죽주)
※ 지방세력(특히 호족)의 성격 → 중앙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립하고 그 지방의 백성들을 지배
→ 스스로 將軍 또는 城主라고 칭하고, 군사력을 가지고 그 지방의 행정을 장 악하고 조세․역역을 징수
→ 지방의 막대한 農莊과 私兵을 배경으로함.
→ 지방행정에 참여한 경험을 살려 신라 중앙제도를 모방하여 관반제 이룩.
Ⅴ. 신라하대의 사상변화
1. 선종의 대두
(1). 전래 → 통일전 전래 ( 선덕여왕 : 법랑 ) , 통일후 : 북종선(혜공왕:신행), 남종선(헌덕왕:도의)
(2). 성격 → 不立文字, 見性悟道 주장
→ 민중적, 혁신적으로 귀족불교인 교종과 대조 : 신라사회에 대한 개혁 주장
→ 산중불교, 지방호족과 연결 ( 반신라적 세력으로 등장)
(3). 9산의 성립 → 도의의 가지산파로부터 시작하여 이엄의 수미산파로 9산성립
→ 선종의 승려로는 진골귀족의 몰락자(무염, 범일), 6두품, 지방호족출신(도윤,혜철)이 있다.
(4). 선종의 영향 → 중국문화에 대한 이해
→ 고려 한문학 발달에 기여
→ 반신라적 움직임(호족, 6두품)과 연결되어 고려건국의 사상적 기반
→ 조형미술의 쇠퇴
(5). 선종과 교종의 비교
2. 유교의 정치이념화와 사상의 복합
(1). 유교정치이념의 등장 → 신라하대에는 최치원(시무 10조)을 비롯한 도당유학생 출신의 유학자가 배출되어 골품제도를 비판하고 유교정치 실현 주장.
(2). 영향 → 지방호족과 결합 : 지방호족의 학문적 소양 증진. 최승우(견훤), 최언위(왕건)
→ 지방문화의 발전 : 이 시대의 호족은 선종을 후원함과 동시에 유학을 정치이념으로 삼음.
→ 유․불의 결합 - 당대의 지식인들은 선종을 이해하고 포용
- 선승들도 유교사상에도 상당한 이해를 갖고 있었음
- 호족들도 유교와 선종을 장려
(3). 도교와 노장사상 : 귀족들의 사치․향락에 반발하는 은둔사상.
(4). 풍수지리사상 → <도선비기>, 예언적 도참신앙
→ 지방호족과 연결
→ 예언사상으로 신라정부의 권위 약화. 고려건국의 사상적 배경
→ 고려태조도 훈요10조에서 풍수지리 강조
남북국시대 보충자료
1. 민정문서(신라장적) → 서원경 부근 4개촌의 민정문서로 일본 東大寺 正倉院에서 발견(경덕왕 : 755)
→ 장적에는 村役, 烟數(호수), 인구수(노비포함), 牛馬수, 토지면적, 과수(뽕나무, 잣나무, 호 두나무)등이 기록되어 있음. ( 촌주가 3년마다 작성 - 촌주가 지배)
→ 9等戶制 : 호의 등급을 人丁의 多寡에 따라 9개로 편성.
→ 人丁은 성별․연령별로 6등급으로 나눔. (여자, 노비도 포함하여 노동력 수취의 대상)
→ 지급된 토지의 내용
◈ 麻田 : 촌민의 공동경작지
◈ 烟受有沓 : 호별로 농민들이 경작하는 토지로써, 성덕왕(722)때에 지급된 정전이으로 추정됨.
◈ 官謨畓 : 소출이 국가에 들어가는 官有地
◈ 內視令畓 : 내시령이라는 관리에게 할당된 관료전
◈ 村主位畓 : 촌주에게 할당된 토지(고려시대에는 외역전)
: 통일신라시대의 농민들은 자영농민으로서 독립적으로 연수유답을 소유․경작하는 동시에, 촌에 할당된 공유지를 공동경작하는 力役을 부담.
2. 신라시대 村의 성격과 村主
→ 촌은 가장 말단 행정구역으로 중앙에서 외관이 파견된 것이 아니라. 몇 개의 촌락을 관할하
는 토착적 지배세력인 촌주의 지배를 받음.
→ 촌의 생뢀상은 신라장적참조( 자연촌락을 기준으로 편성된 지역적 행정촌 )
→ 국가의 관리대상은 농민과 노비이고, 농민은 연령․성별로 6등급으로 구분
→ 촌주는 王京人이 아님. 고려 향리의 기원으로 보며 토착세력으로 촌주위답을 받았고, 5두품․4두 품에 대당하는 신분적 특권을 누림
3. 발해와 관련된 문헌 : 발해사의 연구는 조선시대 호란 이후 반청감정이 고조되면서 시작.
◈ 발해고(유득공) : 남북국 시대를 처음으로 다루고, 반도 중심의 협소한 사관 극복.
◈ 동사강목(삼국사기의 북국을 발해로 명명)
◈ 삼국유사(말갈건국으로 기록)
◈ 제왕운기(고구려 구장인 대조영 건국)
4. 인쇄물
(1). 무구정광 다라니경(751) : 현존 최고의 목판인쇄본, 석가탑에서 발견.
(2). 고려대장경(초조대장경 : 1012) : 현종대에 거란의 침입을 막기위해 기록시작
(3). 속장경(1096) : 의천이 송․요․일본 등지에서 수집한 불경을 종합하여 신편제종교장총록을 만들고 이에 따라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설치하고 조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