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근대화의 시련과 민족운동
1. 근대사회로의 정치적 변화
⑴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
① 흥선대원군의 집권: 철종 서거 후 대원군의 생부인 이하응(흥선대원군)이 고종을 섭정(1673~1873).
개혁의 방향 | 개혁의 내용 | |
전제왕권강화 | 인재등용 | 안동 김씨 세력을 누르고 사색을 고르게 등용 |
통치기구 정비 | 의정부와 삼군부(신영․남영․마병소)가 부활하여 정치와 군사 분리 | |
법전 완비 | 고종 2년 조두순, 이유원에 의해 대전회통 편찬. 보조법전인 대전조례 편찬. 육전조례 편찬. | |
서원 정리(1871) | 47개소만 남기고 정리 - 참고로 흥선대원군 하야 후 여럿 부활(만동묘 포함) | |
위민사회개혁 | 전정 | 은결 적발, 토지겸병 금지, 부분적 양전실시 |
군정, 동포제 | 군포를 양반에게까지 확대하는 동포제(→호포제) 실시 하여 양반의 원성을 삼 | |
환곡, 사창제 | 환곡제를 사창제로 개혁하였으나 성과는 없었음 | |
경복궁 중건 (재정실책) | 영건도감을 중건하고 원납전을 강제징수. 당백전(종래돈의 100문) 발행. 통행세 징수, 결두전(1결당 100문) 부과 양반들의 묘지림 벌목, 백성들의 토목공사 동원. |
②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 ‘폐정쇄신’ 봉건적 개혁
③ 개혁 정치의 의의: 전통적인 통치 체제를 재정비하여 국가 기강을 바로 잡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데 어느 정도 기여.
④ 한계: 전통 체제 안의 개혁이다.
⑵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① 배경(서세동점)과 이양선 출몰
㉠ 영국은 아편전쟁을 일으켜 청은 최초의 문호개방인 난징조약(1842)을 체결. 미국은 일본을 위협하여 미․일 화친조약 체결.
㉡ 이양선:
최초로 영국 상선 로드 암허스트호가 통상 요구(1832).
프랑스 세실의 통상요구 거절(1846). 러시아(1845), 독일(1866), 미국 셔먼호(1866)이 통상 요구.
㉢ 천주교 확산과 서양 상품의 유입: 대원군 집권 이전부터 프랑스 선교사가 국내에 잡입, 선교 활동을 하여 신자가 점차 늘어났고, 의주, 동래 등지를 통하여 서양 상품이 불법 유입되고 있었음.
② 국내의 반응: 애로우호 사건(1858)과 베이징 조약(1860) 체결 등이 위기의식을 조성하여 동학, 위정척사, 개화사상의 대두.
③ 쇄국정책의 강행: 병제병오신척
병인박해(66.1) - 제너럴셔먼호(66.8) - 병인양요(66.9) - 오페르트도굴사건(68) - 신미양요(71) - 척화비(71~72)
㉠ 병인양요(고종 3년 1866)
ⓐ 원인: 대원군은 처음에는 천주교에 관대. (철종 이후 이미 베르누, 리델 등 프랑스 선교사가 활동) 연해주를 차지한 러시아가 경흥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자(1864) 대원군은 신도 남종삼의 건의에 따라 프랑스 신부를 이용하여 견제하려 하였으나 거절.
ⓑ 경과: 청국에서 탄압하자 대원군도 탄압. 벽파 조두순의 배외정책 압력과 천주교의 만연이 조선 유교사회를 말살시킨다 하여 고종 3년에 남종삼, 정의배 등 신도 8천여명과 프랑스 신부 9명 사형. 탄압을 계속한 병인사옥(=병인박해, 66.1) 발생.
ⓒ 결과: 탈출한 리델 신부가 프랑스 극동함대의 로즈 제독에게 사실 보고. 프랑스 정부는 신부의 처 형을 구실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고자 극동함대 7척, 1천 군사를 끌고 강화도 점령. 대원군은 훈 련대장 이경하 휘하에 순무영을 설치하여 대응, 이항로 등의 척사론자 등과 한성근 문수산성, 양 헌수 정족산성 전투로 승리. 프랑스군은 40여 일만에 물러나며 약탈과 방화 자행.
㉡ 오페르트 사건(1868): 고종 3년 2차에 걸친 통상요구를 거절당한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프랑스 신 부 페론과 함께 충청도 아산만에 상륙하여 관청을 습격하고 남연군의 무덤을 도굴하려다 실패. 유 생들은 존화 양이론 주장, 대원군은 쇄국 의지 강화.
㉢ 신미양요(1871)
ⓐ 원인: 병인양요 이전에 미국 상선 제네럴 셔먼호가 대동강에서 통상을 요구하다 평양군민과 충돌하여 선원과 배가 소실.
ⓑ 경과: 미 대통령 그란트의 명을 받은 베이징 주재 미국 공사 로오는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 에게 조선 정벌을 명하여 5척의 군함과 1,200명 군대를 보내 강화도를 공격. 미국은 초지진을 함락하고 광성진 포대까지 점령.
ⓒ 결과: 어재연이 이끄는 경군과 강화 수비군이 광성진과 갑곶에서 대항하여 20일 만에 물리치고 어재연은 전사.
⑶ 쇄국정책의 강화:
대원군은 척사교서를 반포. 주요 지역에 척화비 건립(1871). 「해국도지」의 영향으로 전함 수뢰포 완성.
하지만 대원군 하야 후 척화비는 상당수 철거되게 된다.
2. 문호 개방
⑴ 개항의 배경
① 흥선 대원군의 하야: 고종이 성인이 되고 서원 철폐에 대한 지방 유림의 반발과 왕후 및 개화파의 통 상개화론에 밀려, 대원군이 1873년에 물러남.
② 통상 개화론의 성장
㉠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등이 당시의 조선 사회는 개방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지만 개방이 불가피 하다고 주장. 역관이었던 오경석은 「해국도지」, 「영환지략」 등 개화 서적을 접하기도 하고, 승려 이동인을 비롯하여 중인과 상민 계층에서도 개화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출현.
③ 고종과 노론 북학을 계승한 통상 지지파인 명성황후 일족(민태호, 민영목 등)이 집권.
㉠ 고종과 개화추진세력의 입장: 전면적인 서양화는 아닌 동도서기론.
④ 급진 개화파: 북학을 계승한 대외통상 개화론자들(김옥균, 김홍집, 홍영식, 서광범 등)은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하는 입헌군주제 혹은 서양식 공화정 추진. 변법개화사상으로 발전하고 사회진화론과 연결되 어 공리주의로 나아감.
1. 역사․지리서: 「해국도지」(위원), 「영환지략」(세계여), 「지구전요」(최한기), 「보법전기」(왕도), 「서유견문」(유길준) 2. 정치․법률서: 「조선책략」(황쭌셴), 「만국공법」․「이언」(정관응) 3. 자연 과학 서적: 「격물입문」(Martin), 「박물신편」(Hobson) |
⑵ 일본과의 관계와 조약 체결
① 일본 국내의 입장: 18세기 이후 국학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854년 미국에게 개항당한 일본은 메이지 유신의 신정부 수립을 알리며 조선과 다시 수교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함. 일본에서 정한론이 대두하였으나 온건파의 반대로 후퇴. 조선은 일본과 외교 단절.
② 정한론이 보류되자 집권당은 1874년 4월 대만을 침공하였으나 청국의 반대로 배상금을 받고 물러나 조선으로 주의 집중.
③ 병자수호조약(강화도 조약)과 개항
㉠ 운요호 사건: 1875년 4월 일본 군함 3척(춘일호, 운요호, 제이정묘호)이 부산에 출현. 8월 운요호는 강화도에 접근하여 조선 측의 발포를 유도하였고, 조선의 공격에 즉각 반격하며 영종도에 상륙하여 약탈과 살육 감행.
㉡ 강화도조약 체결(1876): 일본의 요구에 조선정부는 박규수, 신헌의 의견을 들어 조선 대표 신헌과 일본대표 구로다 사이에 전문 12개조의 불평등 통상수호조약 체결.
내 용 | 의 미 |
① 조선은 자주국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 | 청의 종주권 부인 의미, 일본의 침략 의도 |
② 15개월 후에 양국은 서로 사신을 파견. | 김기수, 김홍집을 수신사로 파견 |
③ 개항장에서 일본상인의 무역과 조계 설정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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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20개월 이내에 부산과 그 밖의 두 항구 개항. | 부산(경제적), 원산(군사적), 인천(정치적) 개항 |
⑤ 일본은 조선연안을 자유로이 측량할 수 있다. | 주요 군사 기지를 점령하기 위한 것으로 주권 침해 |
⑥ 양국의 민간무역활동에서 관리의 불간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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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일본은 조선이 지정한 항구에 영사 파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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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치외법권 인정 | 가장 독소적 |
조일수호조규부록 ① 조선 내에서 일본외교관의 여행자유 ② 개항장에서 일본거류민의 거주지역(통행거리 사방 10리) ③ 일본화폐의 유통허용 등 | 조일통상장정(=조일무역규칙) ← 잠정적 통상협정 ① 일본의 수출입품에 비과세 ② 양곡의 무제한 유출 등 (천재지변시 사전 통고후 수출 금지 가능) |
㉢ 강화도 조약에 따른 조일수호조규부록(1876)과 조일통상장정(1876. 7.)
㉣ 개정된 조일통상장정(1883, 민영목-죽첨진일랑): 수출입 상품에 대한 관세, 조일통상에 대한 절차규정, 최혜국 대우, 방곡령 실시시 일본에 사전예고 등.
㉤ 일본과 조약 체결 후 정부의 입장: 청, 일본, 서양세력에 대해 세력균형 정책 실시. 조미수호통상 조약(1882) 체결.
㉥ 강화도 조약의 의의: 부산 일본의 선택으로 원산(군사적 목적), 인천(정치적 목적) 개항. 1883년 통 상장정으로 일제는 침략의 발판 마련. 우리나라는 보호조치를 취할 수 없게 됨. 식민지의 계기.
⑶ 청․서양제국과의 통상장정체결
① 조․미 수호 통상 조약(1882)
㉠ 체결 배경: 「조선 책략」이 국내 지식층에 유포되어 미국과 외교를 하여야 한다는 주장 제기.
㉡ 조약의 체결: 청과 이해관계가 일치되어 신헌-리홍장-슈펠트 사이에 체결.
㉢조약의 내용
ⓐ 양국 중 한 나라가 제3국의 압박을 받을 경우 서로 도와 준다.
ⓑ 영사 재판에 의한 치외 법권과 최혜국 대우.
㉣ 조약의 성격: 서양과 맺은 최초의 조약으로 불평등 조약.
1. 전래: 주일 청국 참사관으로 있던 황 쭌셴이 동양 3국이 펼쳐야 할 외교 정책을 쓴 것으로, 2차 수신사 김홍집이 소개(1880). 2. 요점: 러시아의 남하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중국, 미국, 일본과 결속해야 한다. 서양의 기술을 배워야 한다. 예수와 주자를 동격으로 표현. 3. 영향: 개화 운동을 자극, 위정척사 운동을 강화. |
① 청은 일본의 조선지배를 차단하려고 조청 상민수륙무역장정(1882) 체결: 치외법권, 청상인의 내지통상 권․연안어업권
㉡ 청의 추천을 계기로 한 열강과의 통상조약: 영국(1882. 4, 민영목), 독일(1882. 5, 조영하), 이탈리아 (1884. 5, 김병시), 러시아(직접, 1884. 7, 김병시), 프랑스(1886, 김만식, 직접), 오스트리아(1892, 권 재형), 필리핀(1901, 박제순), 벨기에(1901, 박제순), 덴마크(1902, 유기환) 등.
ⓐ 조․영 수호 통상 조약(1882): 서양 최초의 통상 요구로 최혜국 대우와 내지 통상권 규정.
ⓑ 조․러 수호 통상 조약(1884): 청․일의 반대로 지연, 직접 수교.
ⓒ 조․불 수호 통상 조약(1886): 천주교 반대 문제로 지연, 천주교 신앙 및 선교 자유 허용.
⑷ 개화운동
① 신문물 수입
㉠ 수신사(1876~1881): 1차 김기수(1876), 2차 김홍집(1880) 파견. 김기수는 「일동기유」, 「수신사 일기 」 저술, 김홍집은 황쭌셴 「조선책략」과 정관응 「이언」 소개.
㉡ 신사유람단(1881): 박정양, 어윤중, 홍영식 등이 일본의 근대기관을 살피고 돌아옴. 수행원 중 유길 준, 윤치호 등은 유학.
㉢ 영선사(1881) 김윤식 등을 톈진에 파견, 학생들의 근대 기술에 대한 기본 지식과 정부의 재정 지원 부족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년만에 귀국. 영선사를 계기로 기기창(1883) 설치.
㉣ 보빙사(1883): 미국 측의 푸트 공사 파견에 대한 답례로 민영익을 전권대사로 하여 미국에 파견. 사절단은 대부분 개화에 뜻을 둔 젊은이들.
② 개화운동
㉠ 고종의 개혁: 규장각 기능 부활, 1881년 청을 모방한 통리기무아문(총리대신)과 산하 12司(당상관) 설치. 5군영을 2영으로 개편(무위영․장어영)으로 개편하고 별기군(교련병대) 신설.
사대사: 대중국 외교 | 교린사: 교린외교 | 군무사: 군대통솔 | 변정사: 변방사무․외국정탐 |
통상사: 통상․무역 | 기계사: 기계․제조 | 선함사: 선박․군함제조 감독 | 군물사: 병기제조 |
기연사: 왕래 선박 순찰 | 어학사: 외국어․언어․문자 | 전선사: 인선 | 이용사: 물품조달 |
㉡ 일본의 사정: 자유민권운동가들이 흥아회를 조직하여 ‘아시아 연대론’ 주장. 뒷날 김옥균의 ‘삼국합 종론(삼화주의)’, 안경수의 ‘일청한 동맹론’에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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