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민족운동의 성장
⑴ 식민통치의 강화
① 문화통치의 실시(1919~1930)
ⓐ 일본에 절대 충성하는 자로써 관리를 강화. ⓑ 친일적 인물을 물색하고 친일단체를 만든다. ⓒ 각종 종교단체에서 친일파가 최고지도자가 되게 하고 일본인을 고문으로 앉힌다. ⓓ 친일적 민간인에게 편의와 원조를 제공하고 친일적 지식인을 대량으로 장기적 안목에서 육성한다. ⓔ 양반․유생으로 직업이 없는 자에게 생활방도를 만들어 주고 선전과 민정정찰에 이용(대동사문회, 유교진흥회). ⓕ 조선인 부호에게는 노동자․농민과의 대립을 인식시키고 일본자본을 도입(조선인소작인상조회). ⓖ 유지가 이끄는 친일단체 교풍회, 진흥회를 만들어 회유․이용(대동동지회, 국민협회). |
㉠ 실시배경과 목적: 기만정책임
㉡ 내용
ⓐ 총독임명 제한철폐: 문관도 임명될 수 있게 하였으나 식민지 전 기간 동안 사이토가 해군대장, 나 머지는 육군대장.
ⓑ 보통경찰제 실시: 사실은 고등계 사찰기구 신설, 경찰의 수와 장비를 더욱 증가.
ⓒ 언론․출판통제의 완화: 3․1운동의 가장 두드러진 성과로 조선일보(1920. 3), 동아일보(1920. 4)등 민족신문 발행을 허가하였으나, 기사검열을 강화하여 탄압.
ⓓ 전시용 중추원을 확대하고 도․부․군에 평의회․협의회를 기만적․형식적으로 운영.
ⓔ 교육의 기회증대: 학제를 개정, 경성제대 설립(1926), 그러나 고등교육은 계속 억제.
ⓕ 치안유지법 공포(1925): “일본의 국체 및 정체의 변형과 사유 재산을 부인하는 자는 징역 10년에 처한다.”
② 일제 독점 자본의 침투
㉠ 1920년대
ⓐ 본격적인 침투: 1차대전을 계기로 성장한 일제 독점 자본은 1920년대부터 한국에 본격적으로 침 투하기 시작. 광업, 비료, 섬유 회사 등을 설립하고 우리나라의 공업 생산을 장악해 나감.
ⓑ 중공업 정책 실시: 1926년 함경도에 부전강 수력 발전소가 완성되고, 다음 해에 그 전력을 이용한 조선 질소 비료 공장이 흥남에 세워지면서 중공업 투자 시작.
㉡ 1930년대:
일본이 만주와 중국을 침략함에 따라 우리나라는 병참 기지가 되어 일본인의 중공업 투 자가 더욱 증가.
③ 식량의 수탈
㉠ 산미증식계획(1920~1933): 일본의 공업화정책으로 자국의 식량생산이 부족하자 조선을 식량공급기 지화 하는 것이 의도.
㉡ 산미증식계획 하에 영세한 농민들은 소작쟁의를 일으켰으며, 단작형 농업구조로 단순화.
㉢ 세계 경제공황(1933)으로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 산미증식계획 중단.
⑵ 대한민국 임시정부(1919. 4~1945. 8)
① 임시정부의 의의와 수립과정
대한국민의회(1919. 2. 25) | 블라디보스톡 | 대통령: 손병희/국무총리: 이승만 |
조선민국임시정부(1919. 4. 9) | 서울 | 정도령: 손병희/부도령: 이승만 |
대한민국임시정부(1919. 4. 10) | 상해 | 의정원 의장: 이동녕/국무총리: 이승만 |
신한민국정부(1919. 4. 17) | 철산․의주지역 | 집정관: 이동휘/국방총리: 이승만 |
한성정부(1919. 4. 23.) | 서울 | (국내에서 13도 국민 대표 명의로) 집정관 총재: 이승만/국무총리 총재: 이동휘 |
㉠ 「우리역사」에 따른 임시정부 단체
대한민국의회 (연해주 1919. 2) 노령정부 | ┐ │ │ │ │ ┤ │ │➡ │ │ │ ┤ │ │ │ ┘ |
| ➡
|
| ↗ 결 ➡ 렬 ↘
| 창조파 |
| ||||||
| ||||||
대한민국임시정부 (상해 1919. 4. 10) | 대한민국임시정부(1919. 9)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한 상해 임시정부로 최초의 민주 공화제 정부 | 국민대표회의(1923. 1) 이승만의 불신임과 독립운동 전체 방향 전환 문제 | ||||
현상 유지파 | ||||||
| ||||||
| ||||||
한성정부 (서울 1919. 4. 23) |
|
| 개조파 | |||
| ||||||
서․북간도의 군정부 (1919) |
㉡ 임시정부의 수립과정
구분 | 연도(지역) | 내용 |
초기 | 1919. 4(상해) | 국무총리: 이승만, 의정원 의장: 이동녕, 내무총장: 안창호 |
제1차 개헌 | 1919 (상해) | 대통령 중심제(이승만→12월 박은식), 국무총리: 이동녕, 3권 분립 제도 |
제2차 개헌 | 1925 (상해) | 국무령 중심의 내각책임 지도제(김구, 이상룡, 양기탁, 안창호, 홍진) ⇨ 사법권 조항 규정 |
제3차 개헌 | 1927 (상해→충칭) | 국무위원 중심제(주석: 이동녕, 국문총리: 김구 등 11명) ⇨ 사법권 조항 폐지 |
제4차 개헌 | 1940. (충칭) | 주석 지도 체제(주석: 김구) |
제5차 개헌 | 1944 | 주석(김구)․부주석(김규식) 중심체제 ⇨ 다시 심판원 조항 규정 |
㉢ 개헌과 정치형태
② 임시정부의 활동
㉠ 연통제의 조직: 비밀 조직망으로서 서울(총판), 도(독판), 군(군감), 면(면감)의 조직.
㉡ 군자금의 지원: 만주에서 쇼의 이륭양행, 부산 안희제의 백산상회, 애국공채.
㉢ 외교활동: 김규식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1919. 5), 구미위원부 설치.
㉣ 언론․편찬사업: 독립신문 간행(1919. 8), 사료편찬소 「한․일 관계 사료집」
㉤ 무장활동: 상하이에 육군 무관 학교 설립, 광복군 사령부, 광복군 총영, 육군주만참의부를 두었다. 광복군을 조직(1940)하여 총사령관에 지청천 임명. 1941년에 대일․대독 선전포고, 1943년에는 버 마전선에도 참가.
③ 임시정부의 분열과정
㉠ 독립전쟁론과 외교론의 갈등
ⓐ 새 정부 통합 교섭 당시 연해주의 노령 정부는 외교부와 교통부만 상해에 두고, 정부와 의정원은 동포가 많이 사는 간도나 연해주 지방으로 옮길 것을 제안(독립전쟁론).
ⓑ 상해 정부는 외교론에 근거하여 상해를 고수.
ⓒ 외교론의 문제점: 임정이 독립전쟁을 방기, 이론의 갈등이 내부 분열 유발, 독립운동 단체 및 무 장세력 통합 기회가 무산.
㉡ 외교적 실패
ⓐ 위임통치 청원서(1919. 2): 이승만이 미국 정부에 제출하여 임정의 권위 추락, 민족적 망신.
ⓑ 파리 강회회의 본회의에 김규식 참여 거부당함.
ⓒ 워싱턴 회의에도 이승만․서재필이 참여하지 못하고, 회의에서는 일본의 과잉 인구문제 해결을 위한 식민지 필요만이 역설.
㉢ 국민대표회의(1923. 1): 70여 단체 140명이 참석.
ⓐ 3개의 파
가. 창조파: 무력항쟁 강조․조선공화국 수립 주장, 임정의 완전 해체와 새 정부의 구성을 주장. 원세 훈․김규식․김창숙․박은식․신채호․이동휘 등 민족주의 좌파계열과 노령 공산주의 등 80여명 의 지지를 얻었음.
나. 개조파: 실력양성을 우선으로 자치운동과 외교활동을 강조, 임정의 개조를 주장. 안창호와 상해파 공산주의자 등 57명 정도가 지지.
다. 현상유지파: 이동녕․김구.
ⓑ 임정은 1925년 이승만을 탄핵․파면하고 박은식을 제2대 대통령으로 추대, 헌법 개정과 조직 개편 추진.
⑶ 한인의 국외 이주와 독립 운동
① 한인의 국외 이주
㉠ 19세기 중엽의 국외 이주
ⓐ 배경: 조선인들이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간도와 연해주 등지로 본격적인 이주를 하게 된 직접적 인 동기는 열악한 경제 상황을 타개하려는 것이었다.
ⓑ 지리적 여건: 이 지방들은 한반도와 연접해 있어서 이동이 쉬웠고, 풍토 역시 우리나라와 비슷.
ⓒ 이민 형태: 그 이전에도 변경 지대의 조선인 중에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간도 땅에서 농사를 짓고 가을이면 타작한 곡식을 가지고 돌아오는 계절 출가 이민이 있기는 하였지만 많은 수는 아 니었다.
㉡ 을사 조약(1905) 이후의 국외 이주
ⓐ 배경: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이에 반감을 품은 인사들 가운데 일부가 국외로 이주.
ⓑ 이민 형태: 일제의 탄압을 피한 정치적 망명자들의 이주가 급증.
㉢ 국권 강탈(1910) 이후의 국외 이주
ⓐ 배경: 국내에서 활동하던 의병과 애국지사들은 중국, 연해주, 미국, 일본 등으로 망명하여 본격적 인 국외 독립 운동을 전개하려 하였다.
ⓑ 전개: 민족 운동가들은 주로 서․북간도를 비롯한 남․북만주와 시베리아 연해주에서 독립 전쟁 을 위한 기지 건설을 활발히 추진하였다.
ⓒ 지리적 여건: 이 지역은 국내 진공이 유리한 국경 지역이라는 점 이외에도 수많은 한인들이 이주 하여 폭넓은 한인 사회를 형성하고 있어서 지역 주민들의 협조와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 이민 형태: 대부분의 독립 운동 단체들은 경제 및 교육 단체를 표방. 그들은 향후 독립 전쟁을 위 하여 동포들의 생활 대책을 강구하는 목적과 대중적인 운동 방법으로 경제 활동을 강조.
⑷ 독립군의 항전
① 독립군의 편성(1920년대 전후)
㉠ 만주
ⓐ 대한독립단(서간도): 1919년 박장호, 조맹선, 백삼규 등이 조직.
ⓑ 서로군정서(남만주): 1920년 이상룡, 여준, 지청천 등이 활약.
ⓒ 북로군정서: 1919년 서일, 김좌진 등 대종교도들이 중심.
ⓓ 대한독립군: 1919년 홍범도 지휘, 본부는 봉오동.
ⓔ 대한독립군비단: 1919년 장백현에서 이희삼 등이 조직.
ⓕ 의군부: 김덕원, 김평식 등이 조직.
ⓖ 광복단: 1920년 봉천에서 김성극, 홍두식 등이 조직.
ⓗ 태극단: 1919년 조인관, 김동준 등이 조직.
ⓘ 광한단: 1920년 현정경, 이호원 등이 조직.
ⓙ 광복군 사령부: 1920년 조병준 등이 조직.
ⓚ 광복군 총영: 1920년 광복군 사령부가 오동진에 의해 개편되어 임시정부 산하군단으로 발전.
ⓛ 광정단: 1922년 장백현에서 대한독립군비단+흥업단+태극단+광복단. 김호익․윤덕포 등이 활약.
㉡ 연해주
ⓐ 혈성단: 1920년 헤이룽장성에서 김국초, 김태일 등이 조직.
ⓑ 신민단: 1919년 블라디 보스토크에서 한광휘 등이 조직.
ⓒ 경비대
㉢ 미국
ⓐ 국민군단: 1919년 하와이를 중심으로 박용만 등이 조직.
ⓑ 비행사 양성소
ⓒ 소년병 학교 등
㉣ 국내
ⓐ 천마산대: 3․1운동 이후 평북 천마산에서 최시흥, 최지풍 등이 조직.
ⓑ 보합단: 1920년 의주에서 김동식, 백운기 등이 조직. 군자금을 모금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보 내고, 친일파를 숙청하는 데 힘썼다.
ⓒ 의용단: 1919년 평양에서 홍석운, 김동혁 등이 조직.
ⓓ 구월산대: 1920년 이명서, 이근영 등이 구월산에서 조직.
ⓔ 태극단: 1942년 이상호 등이 조직.
● 보민회: 1919년 최창규 등의, 본부를 홍경현에 둔(후에 봉천 이전) 반민족적 단체. 후신으로 조선 인민회와 권농회.
② 독립군의 승리와 수난
㉠ 봉오동 전투(1920. 6)
ⓐ 독립군 부대들의 국내 진입 작전에 시달리던 일본군이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하였으나 삼 둔자에 매복해 있던 독립군에게 섬멸당함(삼둔자 전투).
ⓑ 일본군은 1920년 6월, 1개 대대의 병력으로 독립군 소탕 시작.
ⓒ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은 화룡현을 출발하여 함북 종성현의 일제 국경 수비대를 격파, 일본군 남 양 수비대 1개 중대를 기습.
ⓓ 일본군은 6월 6일 1개 대대 병력으로 공격해오고 대한독립군은 최진동의 군무도독부와 안무의 국 민회군과 합세하여 격파(봉오동 전투), 반격하는 일본군을 맞아 7월 7일 대승리.
㉡ 청산리 대첩(1920. 10)
ⓐ 봉오동 전투의 보복으로 일본군은 중국 마적과 짜고 학살과 훈춘성의 일본공사관을 방화한 훈춘 사건(1920. 10. 2)을 조작, 이것을 구실로 3만명의 한국인을 학살.
ⓑ 북로군정서 부대는 서대피구를 출발하여 안도현의 백두 밀림으로 이동 중, 화룡현 청산리에서 적 의 포위를 당함.
ⓒ 김좌진 부대는 배수진을 치고 10월 20일 독립군의 매복 지점에 당도한 일본군 선발 부대를 기습 하고, 3차례에 걸친 적의 반격을 격퇴. 이후 김좌진 부대는 후퇴를 하고, 그 와중에 일본군은 양 쪽에서 자기편을 공격하여 많은 사상자를 냄.
ⓓ 10여 차례의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 1254명 사살, 아군은 60명 전사․90명 부상.
㉢ 간도참변(=경신참변, 1920. 10): 일본군은 1920년 10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독립군은 물론 비전투원 동포에 조선군(국내), 관동군(관동), 포조군(연해주)를 동원하여 무차별 살상, 체포, 강간, 방화 자행.
㉣ 자유시 참변(=흑하사변, 1921)과 미쓰야 협정
ⓐ 간도참변 후 독립군 주립부대는 밀산부(소․만 국경지대)에 집결하여, 서일을 총재로 대한독립군 단을 조직(1921. 4)하고 노령으로 이동.
ⓑ 소련 영내의 자유시로 이동한 독립군은 적색군(적군, 소련군)과 백색군(백군, 반혁명군)의 내전에 서 적군을 도왔다.
ⓒ 독립군은 약소 민족을 지원한다는 적색군에게 이용당하고 무장 해제까지 당하였다. 이것은 시베 리아의 일본군이 백색군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내전에서 승리한 적군이 독립군의 무장을 강제로 해산하려 하자 독립군은 무수한 사상자를 내었다.
ⓔ 미쓰야 협정: 만주 군벌 장작림 장군은 1925년 6월 조선 총독부 미쓰야와 미쓰야 협정을 체결하 고 재만 조선인의 독립운동 단속, 체포자의 일본 영사관 인도를 약속함.
지린성 만보산에서 일제의 한․중 양국 이간책으로 만보산 사건이 발생하여 재만 동포의 생존에 위협. |
㉤ 독립군의 재정비와 통합
ⓐ 독립 운동 단체들의 통합운동 전개로 민정기관과 군정기관을 갖춘 삼부 성립. 완전한 통합은 이 루지 못함.
ⓑ (육군주만)참의부(1923): 백광운, 최석순, 윤세용 등이 압록강 대안에 임시정부직할 하에 편성.
정의부(1924): 지청천과 오동진 등이 지린성과 봉천성을 중심으로 조직.
신민부(1925): 김좌진 등이 북만주 일대에서 자유시 참변 이후 노령에서 돌아온 독립군을 중심으 로 결성.
ⓒ 혁신 의회(1928): 북만주의 독립 운동 세력인 김좌진, 지청천, 김동산 등을 중심으로 결성. 이를 통치하는 정당의 성격을 띤 한국 독립당과 군사 조직인 한국 독립군이 결성.
ⓓ 1929년 삼부는 국민부로 통합: 남만주에서 수립되고, 조선 혁명당의 군사 조직으로 조선 혁명군 결성.
㉥ 만주사변 이후의 독립군 활동
ⓐ 1930년대는 만주․간도 지역에서 해방 운동 주도, 따라서 함경도․평안도의 노동자․농민 투쟁이 격렬.
ⓑ 만주를 통치하던 중국 군벌이 구국군으로 저항. 여러 노력으로 1932년에 각지의 소규모 유격대가 만들어지고 항일유격대로 발전. 동만주의 유격대는 거의 조선인, 남․북만주는 한․중연합. 항일 유격대는 인민 혁명 정부를 수립하고 개혁 실시.
ⓒ 일제는 항일 유격대를 토벌키 위하여 1933~1936년 만주 파견군 규모를 40만으로 증강, 보갑제․ 집단부락․민생단 등을 실시.
ⓓ 항일 유격대는 민족 통일 전선 조직체를 건설하고 ‘재만 한인 조국 광복회(약칭 조국광복회)’를 1936년 5~6월 경 창립.
ⓕ 만주사변(1931) 이후 독립군 일부는 한․중연합군을 결성하였고, 만주를 일본이 장악하자 중국대 륙이나 연해주로 분산되었는데, 중국 본토로 들어간 독립군은 광복군에 합류.
∙한국 독립군(지청천)과 중국 호로군: 쌍성보, 대전자령 전투, 사도하자 전투, 동경성 전투 등지에서 일․만 연합군과 전투를 전개하여 대승. ∙조선 혁명군(양세봉)과 중국 의용군: 흥경성 전투, 영릉가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격파. |
항일유격대와 조국광복회의 협력 전투. 조아범(중국인)이 이끄는 부대는 압록강 연안으로 진출하여 후위를 담당, 주수동(중국인)․최현이 이끄는 함북 무산으로 진공하여 보조 타격을 담당, 보천보 공격의 주공 방향은 김일성 부대가 맡는다는 계획을 1937년 3월 서강 회의에서 수립. 1937년 6월 4일 밤10시 주력부대에서 선발된 1백50여명의 원정대를 김일성이 지휘하여 전투를 시작했다. 이 전투로 일제의 모든 기관들이 불타고, 일본인들은 처형당했다고 북한이 주장. |
㉦ 중․일 전쟁 무렵 독립군
ⓐ 독립군의 동향: 1930년대 중반 이후, 독립군의 대부분은 한국 광복군에 참여하였고. 만주 잔류 독 립군은 중국 항일군과 함께 항일 연군을 편성하여 항전을 계속함.
ⓑ 조국광복회의 조직(1936): 중국 공산당의 동북 인민 혁명군(1933)을 확대 개편한 동북 항일 연군 의 조선인 간부들이 민족 연합(통일)전선을 실현하고 독립적인 인민 정부를 수립한다는 목적 아 래 조직. 국내의 민족주의자 및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함경도 일대에도 조직을 확대.
⑸ 광복군의 대일항전
① 광복군 결성(1940. 9)
㉠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각지의 무장독립군을 모아 김구, 김규식, 지청천 등을 중 심으로 충칭에서 광복군을 창설하고, 지청천을 사령관, 이범석을 참모장으로 하였음.
㉡ 1942년 조선의용대(김원봉, 1938)을 흡수하고 그를 부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조직을 보강.
② 대일선전포고(1941): 대일․대독 선전포고문을 발표하고, 버마․인도전선에서 영국군과 연합작전 수행.
③ 국내진입작전: ‘국내 정진군’으로 특수훈련을 받고 45년 9월 국내진입 계획을 세웠으나, 미국의 일본 제압으로 인하여 이미 광복이 됨으로써 실현되지 못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