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제국주의와 민족수호운동


1. 일제의 식민지 정책


무단정치

임시총독 - 이토 히로부미

1- 데라우치(1910. 10, 무단정치)

2- 하세가와(1916. 10, 31운동 당시)

3- 사이토 마코토(1919. 8, 문화정치)

4- 우가키(1927. 4)

5- 야마나시(1927. 12)

 

6- 사이토 마코토(1929. 8)

7- 우가키(1931. 8)

8- 미나미 지로(1936. 8, 민족말살정치)

9- 고이소(1942. 5)

10- 아베 노부유키(1944. 7)


조선총독부: 무관출신 총독을 정점으로 헌병경찰제 실시. 정무총감과 경무총감.


강압정치

1910년대는 무단통치의 시기.

데라우치는 범죄즉결령(1910. 12), 경찰범 처벌규칙(1912. 3), 조선형사령(1912. 3), 조선태형령(1912. 3), 조선감옥령(1912. 3) 등 악법 제정.

헌병경찰제도: 헌병이 민사 경찰의 임무까지 수행하고 행정관, 검사, 재판관의 역할까지 행하며 즉 결심판 행함.

일반 관리에서부터 교원에 이르기까지 제목과 제모에다가 칼까지 차게 함.

한국인의 정치참여를 위장: 자문기관으로 중추원을 두었으나 회합이 없었음.

 


식민지 경제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실시(19121918)

토지조사령(1912): 토지조사국(1910)에 신고하면 그 소유권을 인정받는 기한부 신고제.

목적: 토지조사령을 발표하여 근대적 소유권이 인정되는 토지 제도를 확립한다고 선전하였으나, 실 제로는 한국인의 토지를 약탈하고 지주층을 회유하기 위한 것이었다.

방법: 토지 신고제가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며, 신고 기간도 짧고 절차가 복잡하여 기회를 놓친 사 람이 많았다.

미신고지국공유지를 불법 탈취한 것이 전 통토의 40%, 마을이나 문중 소유의 토지와 산림, 초원 황무지 등도 강탈.

수탈한 토지는 동양척식주식회사 또는 한국에 이주한 일본인에게 염가로 불허.

결과: 지주의 소유권만 인정되어 지주제가 강화. 1918년에는 3%의 지주가 50% 이상의 경작지를 소유. 소작 농가는 77%나 되었고 5070%의 소작료를 내게 되었다. 농민은 영세화되었으며 고리 대에 희생되어 화전민이 되거나 만주연해주로 이주.


임업어업광업부문

임업: 삼림법(1908)을 제정. 삼림령(1911)을 공포하면서 전 산림의 50% 이상을 총독부와 일본인이 강점. 압록강두만강 유역의 목재를 대대적으로 벌채.

어업: 1910년 이후 다수의 일본 어부들이 한국에 이주하여 황금 어장을 독점, 조선어업령(1911)에 의해 황실 및 개인소유 어장이 일본인 소유로 재편성.

광업: 조선광업령(1915) 공포와 병행하여 각지의 광산을 조사하여 이를 일본인 재벌에게 불하.


상업금융부문

총독부는 철도통신항만 등을 독점경영, 담배소금인삼은 전매.

회사령(1910): 회사설립에 허가제를 실시하여 자본형성을 견제. 1920년에는 민족 자본가층을 항일 의 대열에서 탈락시키기 위하여 신고제로 바꾸었고 이와 더불어 관세철폐로 일본의 독점 자본주의 진출을 적극 후원.

금융: 조선은행(1911), 조선식산은행(1918), 동양척식주식회사가 금융계를 장악, 지방에는 금융조합 이 침투. 세금도 대폭 강화.


식민지 경제정책의 결과

무역이 일본 중심으로 개편: 수출의 90%, 수입의 65%가 일본으로 집중. 잡곡담배를 수출하 고 옷감경공업 제품을 수입.

 


식민지 교육


일제 식민지 교육의 본질: 한국인의 민족성과 자주성을 말살하여 한민족을 일본의 하등 부용국민으로 만드는 것.

1
(1911)

일본어를 국어라고 하여 학습강요

사립학교규칙(1911. 10), 서당규칙(1918. 2)

우민화교육: 보통실업전문기술교육

 

3

(1938)

고등보통학교를 중학교로 개칭

초둥학교 시설 확장(11)

우리말 교육과 국사교육 금지

황국신민서사 제정, 암송제창 강요

2

(1922)

사범학교 설치, 대학교육 허용

교육시설이 31교로 확대

보통학교는 6, 고등보통학교는 5

4

(1943)

민족교육기관을 탄압


조선교육령


일제의 식민사관(조선반도사1910)

타율성론: 반도적성격론, 남한경영설, 만선사관, 임나일본부설

정체성론 사회경제사학

당파성론

일선동조론

 



2. 독립운동의 방향과 31 운동


약소 민족의 시련


파리 강회 회의(1919. 1): 1차대전의 뒤처리를 위하여 소집되었고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14개조의 평 화 원칙을 기본 원칙으로 하였다.

민족 자결주의: 패전국러시아의 식민지에만 적용되었음.

공산주의 세력 확대: 코민테른을 결성(1919), 반제국주의 민족 운동 및 약소 민족의 독립 운동 지원.



아시아 각국의 민족 운동


중국

54운동(1919): 파리 강화 회의에서 일본의 21개조 요구를 인정한 것을 원인으로, 베이징 대학생 을 중심으로 21개조 요구를 철회하고 친일 관리의 파면을 요구.

1차 국공 합작(1924): 쑨 원의 국민당이 중국 공산당과 제휴.

장 제스의 중국 통일: 난징에 국민 정부를 수립하고 베이징의 군벌 정부를 타도하여 통일(1924).


인도

간디: 완전 자치 주장, 비폭력불복종의 민족 운동 전개.

네루: 완전한 독립 요구.


오스만 제국

1차대전의 패배: 영토 상실, 소국으로 전락.

케말 파샤의 개혁: 오스만 제국의 술탄 퇴위, 터키 공화국 수립, 근대화 작업의 추진.

 



31운동 이전의 독립운동


국내의 독립운동


독립의군부(1912): 고종의 밀지를 받아 임병찬 등이 의병과 유생을 규합한 복벽주의 단체.

활동: 일본의 총리 대신과 조선 총독에게 국권 반환 요구서를 제출.


(대한(조선))광복단(1913): 채기중 등이 조직하여 각도에 지부를 설치. 만주에도 지부를 두어 독립 군 간부를 양성하였으며 군자금도 수집.


천도교국단(1914): 천도교 계통의 이종일 등이 조직.


조선국권회복단(1915): 대구에서 이시영, 서상일 등이 시회(詩會)를 가장하여 조직. 경찰서를 습격,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단체와도 연결한 공화주의 단체.

활동: 한일 합방 후 시도한 전국 규모의 첫 번째 항일 운동 단체로서, 만주연해주의 독립 단체 와 연계 투쟁을 하였고, 파리 강화 회의에 보낼 독립 청원서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대한(조선)광복회(1915): 채기중의 대한광복단을 개편하여 박상진, 김좌진 등이 군대식으로 조직한 공화주의 단체.

활동: 의병 출신자를 비롯하여 신교육을 받은 인사들이 참여하였으며, 근대 공화 정치를 지향. 국 외 독립 운동 기지 건설을 위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고, 친일파를 처단.


조선국민회(19151918): 장일환이 평양 숭실학교 학생과 기독교 청년을 중심으로 조직.

활동: 해외의 독립 운동가와 연락하며 군자금 모금과 무기 구입을 위해 활약.


자진회(1915): 함난 단천에서 자립 교육을 목표로 결성되었으나 곧 해산.

민단조합(1915): 한말 의병장 이동하를 중심으로 조직하여 군자금을 수집.

조선산식장려계(1917): 경성고보 교원양성소 내의 비밀결사조직.


기타: 송죽회(1913), 자립단(1915), 신명단(1915)


 

독립운동 기지의 건설


국내: 신민회(19071911)는 안창호, 이동녕, 이승훈, 양기탁, 박은식 등이 조직. 북간도와 연해 주 등지에서 항일운동의 거점 마련.


북간도 지역(19세기 후반에는 농민들의, 20세기 이후에는 민족의식이 확고한 사람들이 이주)

삼원보: 이시영이상용 등이 조직한 서간도의 조직.

한흥동: 이상설이승희 등이 조직한 밀산부의 조직.

경학사(1910): 대종교인들인 이시영이동녕이상룡 등이 만주에서 조직한 독립운동 단체의 시 초. 자치기관으로 기능하였고, 1914년 부민단으로 개편. 이후 백서농장을 건설(1917)하여 훈련+농 사. 신흥강습소(1919년 신흥무관학교로)를 설치.

항일 운동의 약화: 1930년대에 들어와 일제의 대륙 침략으로 만주의 무장 부대 활동이 점차 약화.

서전서숙: 이상설이 만주 용정에 세운 학교.


연해주(블라디보스토크)

한민회(1905): 해조신문등 발행, 한민학교(1909)를 중심으로 교육활동.

13도 의군(1910): 한말의 대표적인 의병의 통합체로, 유생 의병장인 유인석이 조직.

성명단(1910): 시베리아에서 유인석이상설 등이 조직, 8천명 애국자의 선언문을 채택.

권업회(1911): 이종덕 등이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조직, 한인 사회의 경제적 이익을 증진시키고 민족 교육 운동을 추진.

대한광복군정부(1914): 이상설과 이동휘를 정부통령으로 하는 최초의 임시정부. 독립군의 무장 항일운동의 기반이자 민간정부 탄생의 단초.

전로한족회 중앙총회(1917): 시베리아 한인의 핵심단체.

한인사회당(1917): 볼셰비키 혁명의 영향으로 이동휘 등이 하바로프스크에서 결성. 1921년 고려공 산당으로 개명.

대한국민의회(1919): 블라디보스토크의 전로한족회 중앙총회가 정부 형태로 개편(노령 정부)된 것 으로서 고창일 등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

1920년대: 시베리아 내전이 종식되고 볼셰비키가 정권을 장악한 후, 1920년 초에는 한국인의 무장 활동을 금지하고 무장 해제를 강요함으로써 민족 운동이 약화.

1930년대: 1937년에 연해주의 한인들은 소련 당국에 의하여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고, 그 과 정에서 수많은 한인이 희생되고 재산을 잃게 되었다.


상하이(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긴밀한 협력 관계가 편리한 것이 배경)

동제사(1911): 신규식, 박은식, 조소앙 등이 결성한 비밀 결사. 중국 국민당 인사까지 참여시켜 신 아 동제사로 개편(1913)하여 박달 학원 설립.

신한혁명당(1915): 박은식, 신규식이 중심이 되어 결성. 복벽주의에서 출발하였으나, 1917년 황제 권을 포기하고 국민 주권주의와 공화주의를 표방하면서 임시 정부와 같은 단체를 결성하는 내용 의 대동 단결 선언(1917) 제창(최초의 애국 계몽 운동과 의병 운동을 최초로 통합 시도).

신한청년당(1918): 여운형김구김규식장덕수 등이 조직하여 김규식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1919)


미주(20세기 초부터 하와이의 사탕수수 밭 노동 희망자와 그 가족의 이주)

하와이 이주민: 일제가 하와이 이민을 금지한 1905년 말까지 7천여 명이 하와이로 이주하여 혹사.

미국 본토: 대부분 유학생이나 관리 출신.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소수의 인삼 장수와 지식인들이 이주.

하와이서부터 시작하여 신민회(1903), 한인합성협회(1907)등 다수의 조직이 결성.

공립협회(1905):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조직.

국민회(1909): 공립협회와 합성협회가 합동하여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조직, 후에 대한인국민회로 개명.

한인소년병학교(1909): 박용만이 헤이스팅스에서 설립. 박용만은 그 후 국민군단(1914)를 결성하여 1917년에 약소국민회의에 참가.

대한인국민회(1910): 외교 활동 전개. 임정 수립 이후에는 의연금을 송금하였으며, 구미 위원부의 활동을 적극 지원.

흥사단(1913): 안창호가 로스엔젤레스에서 조직. 군인 양성과 외교 및 교민 교화에 노력하였으며, 동광잡지 발행.

구미 위원부(1919): 이승만이 미국 워싱턴에 설치한 임정의 외교 사무소로 서재필이 운영하던 한 국 통신부와 주 파리 위원회를 흡수. 영문 월간지 한국평론을 발행하여 일제 침략을 고발하기도 하였으나, 구체적 외교 성과는 없었다.

멕시코 동포: 승무 학교를 세워 독립군 양성.


일본: 조선유학생학우회(1912), 조선기독교청년회(1906), 도쿄의 동아동맹회(1915), 최팔용이 28독 립선언식을 추진한 조선청년독립단(1918)등이 활약. 일본에로의 이주는 19세기 말에는 유학생이, 국권 강탈 후에는 농민들이 산업 노동자로 취업 이주가 많았다.


 

31운동


배경

국제적 분위기

1910년대 말의 민족자결주의 물결.

볼셰비키 혁명 후 신정부의 레닌은 민족자결의 원칙하에 식민지 이권을 모두 포기한다고 선언.

윌슨 대통령은 191811차대전의 전후 처리 문제에 대해 강화원칙 제시.

해외 독립운동단체의 동향

대한국민회는 191812재미 한인 전체 대표 회의를 소집하고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를 파견 하여 독립을 호소할 것을 결의.

신한청년단도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할 것을 협의.

19192월 조소앙이 작성하고 민족대표자 39인이 서명한 지린의 무오독립선언 발표.

일본인들이 고종을 독살하였다는 소문이 반일감정을 고조.

28 독립선언(1919): 재일 조선 유학생들은 도교 조선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독립선언서와 민족대회 소집 청원서를 각국 대사관, 일본 정부와 의회, 조선총독부, 각 언론사에 발송. 학생 총회 이후 일본 의회를 향해 시위행진을 감행.




과정

추진: 민족대표자 33(천도교의 손병희 등 15, 불교의 한용운 등 2, 기독교의 이승훈 등 16) 과 학생들과의 결합 하에 추진.

민족대표의 계획: 총대표 손병희를 추대하고 31일 정오를 기해 탑골 공원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한 후 일제히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 지방에도 미리 조직을 짜서 독립선언서와 독립청원서, 독립의견서 등을 작성하고 인쇄배부 문제등을 결정.

계획의 실행

민족대표 측: 31일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만세삼창을 하고 독립 선언서의 공약 3장을 낭독 한 후 경무 총감부에 전화를 걸어 체포되었다.

학생 측: 오후 2시 반경 정재용이라는 학생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외침.

운동의 확산

31일 서울, 평양, 의주, 원산을 시발점으로 3월 하순4월 상순에는 하루 최고 60회 이상까지 투쟁.

청년 학생이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여 장날을 이용해 확산.

단계

1단계(점화기)

2단계(도시 확대기)

3단계(농촌 확산기)

범위

주요 도시

도시를 중심으로 확대

농촌, 국외로도 확산

주체 및 구성원

민족 대표(종교계)

학생

학생 주도

상인, 노동자 참여

농민 적극 참여

전개 양상

독립 선언서 배포

비폭력주의

만세 시위

만세 시위

철시

 

무력적인 저항

 

 

노동자들은 파업시위로, 학생들은 동맹 휴학가두연설, 상인수공업자는 폐점철시, 하급 관 리와 일본인 회사의 사무원들은 태업퇴직의 방법으로 투쟁.해외의 시위

지린: 무오 독립선언을 발표하였던 지린에서는, 31운동이 일어나자 각지에서 시위 전개.

만주 용정,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미국 필라델피아에서도 시위 전개.

일본: 28 독립선언을 하였던 도쿄 유학생들은 31운동 봉기 소식을 듣자 시위 전개, 오사카의 동포들도 뒤이어 시위 전개.


일제의 대응

헌병, 경찰, 군인, 소방대원을 동원하고 일본 내의 보병 6개 대대 이상을 증파. 수원제암리 처살사 건(1921)을 일으킴.

415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에 관한 것이라는 악법을 만들어 대대적으로 검거하고 고문과 악형을 가함.

4월 중순 이후 항쟁은 하강 국면에 접어들었고, 여파는 1920년까지 계속.


운동의 성격: 투쟁이 산발적분산적으로 이루어지고 지도가 부재하였지만, 민족 단결의 정신적 기반 을 마련.


운동의 의의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우리 한민족의 존속을 입증.

일제의 식민통치에 큰 타격을 주어 문화통치로 전환케 함.

민족운동의 방향 및 주도층을 바꾸었음. 1920년대의 노동운동, 농민운동의 바탕이 됨.

무장독립운동이 본격 추진.


영향

대한민국임시정부(1919. 4)의 수립, 일제의 문화통치 전환.

54운동(1919), 인도의 무저항운동, 중동지역의 민족운동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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