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의 민족운동


민족교육의 추진


문맹퇴치운동

31운동 이전: 기독교 계통의 주일학교와 YMCA 중심의 한글교육.

31운동 이후: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어학회에서 전개.

문자 보급 운동: 조선일보는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라는 표어 아래 운동 시작(1929). 당시 조선일보와 귀향 학생들에 의하여 추진된 이 운동은 농촌 계몽과 문맹 퇴치에 큰 성과.

브나로드 운동: 1,600만 명이 문맹자라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하여 이들에게 우리글을 가르치면서, 한편으로는 미신 타파, 구습 제거, 근검 절약 등 생활 개선을 꾀하려고 하였다(1932).

일제의 탄압: 1935년에 조선 총독부는 문맹 퇴치 운동을 금지하게 하였다.


민립대학 설립운동(1923)

1910년 윤치호, 남궁억 등이 민립대학 설치를 요구.

1920년 이상재, 장덕수 등이 조선교육협회를 조직하여 민간대학 설치를 결의. 1923년 민립대학 기 성회를 조직하여 모금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좌절. 이후로도 연희 전문 학교, 보성 전문 학교, 이화 학당 등을 대학으로 승격시키려고 하였으나 일제는 1924년 경성제대를 설치하여 저지.


과학 대중화 운동

배경: 일제의 식민지 교육에 과학 교육 부재, 경성제대 제외하고는 한국인을 위한 교육 기관이 부 족, 31운동 이후 과학 진흥의 필요성 인식, 열강의 과학 기술 진흥, 안창남의 고국 방문 비행.

전개: 동아일보를 비롯한 민족지와 잡지 등에서 과학의 대중화 주장. 발명 학회과학 문명 보급 회(1924)가 과학의 중요성을 계몽하면서 민립 대학과 연구 기관의 설립, 외국 유학 기금 적립을 추진. 발명 학회는 과학조선을 창간하고, ‘과학의 날을 정하여 전국적인 과학 행사를 열었다. 과 학 지식 보급회는 생활의 과학화, 과학의 대중화를 주장하였으며, 과학 도서의 간행, 강연회, 전시 회 등의 개최에 노력. 이들 단체는 주요 도시에 지부를 설치하고 조직을 확대해 나갔으나, 30년대 말 일제의 강요로 일제가 만든 과학 단체에 흡수.



경제투쟁의 전개


민족기업의 육성(일제의 규제로 소규모 공장의 건설에서 두드러졌다)

민족 기업의 성격: 순수한 한국인만으로 운영, 한국인의 기호에 맞는 제품 생산.

공장 규모의 발전: 1920년대까지는 소상인수공업자들의 소규모 생산, 20년대에는 노동자 수가 200인이 넘는 공장도 출현.

경공업 관련 기업의 설립: 서울, 평양, 대구, 부산 등 대도시에서 순수 민족 자본의 직포 공장, 메 리야스 공장, 고무신 공장 등 설립.

기업의 유형

지추 출신: 호남지방 지주들의 경성방직(1919), 영남지방 지주들의 무역회사인 백산상회.

서민 출신: 평양에서 발전하기 시작한 메리야스고무공업은 중요한 민족기업 분야.

물산 장려 운동의 전개

민족계 은행: 경남합동은행, 삼남은행, 경일은행, 호남은행.

1930년대 민족 기업: 30년대에 들어와 영세한 민족 기업은 일본의 독점 자본과의 경쟁에서 점차 밀려났고, 전시 체제하에서는 총독부의 물자 통제로 큰 타격을 받았다. 총독부는 기업 정비령을 통하여 민족 기업을 억압하여 강제 청산하거나 일본 공장으로 흡수 합병시켰다.


물산장려운동

자작회: 청년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각자 저축하고 필수품은 가능한 만들어 사용하자는 운동.

물산장려회(1922): 조만식, 김동원 등을 중심으로 평양에서 조직.

조선물산장려회(1923): 물산장려회의 활동이 호응을 얻자 종교계, 교육계 인사 등을 규합하여 서 울에서 조직되어 1940년대까지 계속. 민족 자본의 육성을 위하여 소비 절약이 필요하다고 보고, 국산품 애용, 근건 저축, 생활 개선, 금주금연 운동 등의 실천 요강을 내걸고 활동하였다. 민족 주의자들이 주도하였고 사회주의자들은 불참.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추진되었으나, 일제의 탄압으 로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소작쟁의


1920년대: 31운동 이후에 시작하여 30년 전후에 최고조. 1920년대 전반기에는 소작인 조합이 중 심이 되었고 20년대 후반기에는 농민 조합이 소작 쟁의를 주도. 농민운동은 주로 소작쟁의로 전 개, 소작권 이동 문제, 소작료 인하 문제(관계쟁의), 지세와 공과금 부담 문제, 횡포한 마름 처벌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각지에서 소작인회, 농민조합 등을 결성. 공산주의자의 지도로 조직된 농민조합은 전국적으로 80여개나 되었는데, 함경도 지방의 농민조합이 가장 격렬. 각지에 결성된 단체는 조선노동공제회, 조선노농총동맹, 조선농민총동맹(1927. 9)등과 결합하여 대항. 1920년대의 대표적인 소작 쟁의로는 1924년 암태도 소작쟁의로 악질 지주와 일본 경찰에 맞서서 소작료를 낮 추었고, 19261923년 악질 일본인 지주를 상대로 한 요천 소작쟁의 등이 있다.


1930년대: 농민의 투쟁은 지하 농민 조합을 통하여 전개되었고, 19341937년의 명천농민투쟁이 가장 유명하다. 1930년대부터 조직된 혁명적(적색)농민조합운동은 적색 농민조합의 지도하에 식민 지 지배에 정면 대항하는 항일 농민 폭동이다. 함남 정평과 함북 명천지역이 가장 대표적이다. 1930 년대 농민운동의 두드러진 특징은 혁명적 농민운동조합이 80여개 군도에서 활발하게 전개 되었다는 점이다. 주로 소작관계의 개선, 농촌개량, 농업정책 반대 등으로 그 이전의 합법적 투쟁 과는 다르다. 30년대 이후의 소작 쟁의는 항일 운동의 성격을 띠며 더욱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대 상의 범위, 규모, 기간이 확대되고 장기화되어갔으며 형태도 대중적 봉기 형태로 옮아가고 있었 다. 특히 동양척식 주식회사 농장의 소작 쟁의는 항일 운동의 성격을 띠었다.



노동쟁의


1920년대: 노동자들은 노동환경 개선을 위하여 조선노동공제회(1920. 4), 조선노동총동맹(1927. 9) 의 전국적 단체와 평양노동연맹, 경성노동연맹, 진주노동연맹회, 원산노동연합회, 인천노동연맹, 부산노동연맹 등의 지역 단체를 결성하여 투쟁하였다. 1924년 결성한 조선노농총동맹은 전국 260 개 노동농민운동단체 53천명의 회원을 포괄하였다. 1920년대 대표적인 노동자 투쟁으로는 부 산 부두 노동자 5000여인 파업, 1923년 평양 양말공장 노동자 쟁의 등이 있다.


1920년대 후반: 서울, 인천, 목포 등의 대도시에 한정되던 노동 쟁의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영흥 노동자 총파업 등 대중화하는 양상을 보였다. 1928년의 원산 총파업은 최대의 투쟁이었다. 19289월 문평 석유 공장의 감독 고다마가 조선인 노동자를 구타하여 시작된 총파업은, 원산 노련위원장 김태영이 동요하여 실패하였다. 원산 총파업은 노동 운동이 항일적 성격을 띤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1930년대: 훨씬 조직적정치적 성격을 띠었으며,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동맹파업도 빈번하였다.

운동

내용

단체 및 활동

1920년대

1930년대

농민 운동

(소작 쟁의)

소작료 인하, 소작권 이전 반대

생존권 투쟁의 성격

 

항일 운동의 성격

사회주의계와 연계

 

각지의 농민 조합, 소작인 조합

암태도 소작 쟁의(1924)

조선 농민 총동맹(1927)

노동 운동

(노동 쟁의)

임금 인상, 근로 조건 개선

노동자의 생존권 요구 운동

노동 운동이 항일 투쟁의 성격 으로 전환

규모와 쟁의 횟수의 증가

조선 노동 총동맹

적색 노동 조합

원산 노동자 총파업(1928)

 


사회운동


사회주의 사상의 대두

수용: 레닌이 약소 민족의 독립 운동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이후, 1920년대에 들어와 사회주의 사상을 처음 받아들인 사람은 러시아와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 운동가들로 민족 독립과 함 께 계급 해방을 추구하였다.

초기의 사회주의 운동: 소수의 지식인이나 청년, 학생이 중심이었고 노동자, 농민의 참여는 오히 려 적었다.

사회주의 운동의 확대: 국내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노동농민청년학 생여성 운동과 형평 운동등이 전개되기 시작.


사회주의 사상의 유입 결과

내부의 갈등: 사회주의 운동에는 그 노선에 따라 이해를 달리하는 계열이 있어 마찰과 갈등이 심화.

민족주의 운동과 대립

민족 유일당 운동의 대두


사회주의 세력

형성배경: 상해 고려공산당(1920), 연해주의 공산당, 도쿄의 무정부주의 운동, 조선공산당이 대두. 민족주의계와 마찰을 일으키기도 하다, 1925년 치안유지법 공포 이후 민족 유일당 운동이 전개.

 

단체

중심인물

활동내용

한인사회당

(1918. 2)

이동휘

볼셰비키 찬성 정치세력 최초의 공산단체. 전로한족회 주도세력은 불참.

한인공산당

(1920. 8)

이동휘, 여운형, 김립, 안병찬

한인사회당 주도세력이 대한국민의회와의 관계를 끊고 상해에 건너가 여운형 등과 함께 조직.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1921. 5)

한명세, 이훈, 최고려

러시아에 귀화한 교포를 중심으로 한 단체로 사회주의 혁명을 우선시.

상해파 고려공산당

(1921. 5)

이동휘, 김립

식민지화과정에서 망명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민족회방을 우선 과제로 삼음.


공산당의 결성과 그 활동 

1

조선공산당

1925. 4 김재봉

김재봉을 책임비서로 화요회와 북풍회가 참여. 산하에 고려공산청년동맹을 두었으며 1925. 11 신의주 사건(청년회원이 변호사 구타)으로 파괴. 기관지 조선지광

2

조선공산당

1925. 12 강달영

강달영을 책임비서로 하여 다시 조직. 권오설 책임비서인 고려공산청년회도 재조직. 국민당 시도도 하였으나 610만세운동으로 탄로해체.

3

조선공산당

1926. 9 김철수, 김준연,

한위건, 안광천

ML(통일공산당) 김철수를 파견해 승인을 받고, 안광천이 책임비서일 때 신간회 결성에 적극 참가하였으나 조직이 탄로나 200여명이 검거되어 1928. 2월 해체. 기관지 대중신문, 이론투쟁, 현단계.

4

조선공산당

1928. 3. 차금봉

해외활동을 주력하다가 7월에 해체. 기관지 조선지광, 혁명, 불꽃등이 있다.

코민테른은 4차 조공해체 후 192812월 테제를 발표. 조공은 해방 후 19459월 박헌영이 재건.


공산당의 재건과 노동자 농민운동: 1930년대 이후 지하운동을 통해서 재건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지역별로 고립분산적이어서 통일성이 없었다. 박헌영이 1939년 서울에서 경성콤그룹을 조직하 였으나 1941년 해체된다. 이들은 운동방향을 공산주의 혁명운동으로 이끌어 갔다. 이같은 운동은 민족역량을 분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국내 공산주의자들은 해방 후 박헌영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였으며, 중도좌파정당을 흡수하여 남로당(1946. 11)으로 개편되었다.





610만세 운동(1926)

배경: 1926426일 순종이 승하하자 순종의 인산일을 기하여 제2차 조공의 간부였던 권오설 은 운동을 계획하고 민족주의 세력과 제휴.

경과결과: 우연히 삐라가 발견되어 계획의 핵심 인물들이 대부분 검거되었으나, 조직을 보존한 학생들은 밀고 나갔다. 이 운동은 민족 유일당 운동과 신간회 결성을 촉진하는 요인이 되었다.



광주학생운동(1929)

원인: 19291030일 광주-나주간의 한일 통학생이 충돌하여, 113일 대규모 충돌로 비화.

경과: 학생들은 학생 투쟁 지도 본부를 설치하고 11122차 시위 전개. 서울 학생들은 12914일에 운동을 전개.

결과: 193031일에 대규모 시위를 전개하려 하였으나 일경의 사전 검거로 실패.

의의: 5개월 동안 전국의 각급 학교 학생 54,000명이 참여한 광주학생운동은 31운동 최대의 민 족적 항거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성진회(광주지역 비밀결사)와 신간회가 지원.

탄압정치 반대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관료교관 배격 식민지교육 철폐 치안유지법 반대



신간회(1927-1931)

배경

1920년대 중반 이후 민족 개량주의가 등자하고 민족주의 계열이 비타협적 민족주의와 민족 개량주의로 분화

민족 개량주의자들은 참정권 운동’, ‘자치운동을 제창하였으며, 

일제가 허용 하는 범위내에서의 정치 운동, 교육과 산업의 진흥을 제시.

결성: 192611월에 발표된 정우회 선언은 조선 사회주의 운동의 방향전환을 촉구한 글로서 민 족 유일당 운동에서 하나의 전기가 되었다. 19271민족 단일당’, ‘민족협동전선이라는 구호 아래 조직 계획이 발표되고 215일 창립 대회가 열렸다. 이상재가 회장, 권동진이 부회장으로 선출되고, 정치적경제적 각성 촉구 단결 공고, 기회주의 부인 의 강령이 채택되었다. 19275월에는 근우회(김활란)가 창립되어 신간회 산하 단체로 가입하였다. 신간회 중앙 본부는 민중의 권익을 옹호하며 일제와 투쟁하였다.

해소: 1929년에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의 진상보고를 위한 민중 대회를 계획한 일이 발각되어 다수 의 지도 인사가 검거. 이후 중안 간부가 새로 구성되었으나 좌우 노선의 갈등으로 내분이 발생하 였다. 또한 1930년 이후 중앙이 보인 타협적 태도나 방관적 자세는 회의를 불러일으켰다. 코민테 른의 12월 테제(1928) 이후 쿠시넨 의견서(1932. 5)는 민족연합전선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신 간회는 19315월 대회를 열고 해소.

신간회의 결의문

 

민중대회 개최 시위운동 전개 여론 환기

 

 

 

 

신간회의 주장 내용

 

한국어 교수

일본인의 한국 이민 반대

한국인 특별취제법 철폐

동양척식주식회사 폐지

8시간 노동과 최저임금

 

 

한국인 착취기관 철폐

한국인 본위의 교육 실시

과학과 사상연구의 자유보장

소년부녀자 노동운동

노동권 확립

신간회의 결의문

 

민중대회 개최 시위운동 전개 여론 환기

 

 

 

 

신간회의 주장 내용

 

한국어 교수

일본인의 한국 이민 반대

한국인 특별취제법 철폐

동양척식주식회사 폐지

8시간 노동과 최저임금

 

 

한국인 착취기관 철폐

한국인 본위의 교육 실시

과학과 사상연구의 자유보장

소년부녀자 노동운동

노동권 확립

 

  

배경: 31 운동을 비록한 국내외 항일 독립 운동에서 여성들의 참여가 그들의 의식을 계발.

활동: 문맹 퇴치, 구습 타파, 생활 개선의 실현을 위한 여성 교육 계몽 운동.

여성 단체의 조직

1920년대 초(민족주의의 영향 아래 계몽 차원)조선 여자 교육회조선 여자 청년회(계몽)

│ ├조선 여자 기독교 청년회

│ └지방: 야학, 강연회 등

1920년대 중반: 사회주의 운동과 결합되는 모습으로 변화

결과: 1920년대 후반에는 여성 직업 단체들이 조직되어 보다 많은 참여가 이루어짐.



여성 운동과 학생 운동

전개: 천도교 청년회가 소년부를 설치함으로써 본격화, 이후 천도교 소년회로 독립하여 어린이날 제정.

발전: 전국적 조직체인 조선 소년 연합회(1927)가 결성. 방정환과 조철호 등이 소년 운동 전개.

분열: 지도자들 사이의 사상과 이념 대립으로 분열.

중단: 일 전쟁 발발 후, 일제가 한국의 청소년 운동을 일체 금지시킴으로써 중단.

목표: 1920년대 초에 전국의 청년 운동 단체는 100개가 넘었으며, 표면적으로는 품성 도야, 지식 계발, 체육 장려를 내세웠고, 실제로는 민족의 생활과 역량 향상을 목적으로 하였다.

활동: 학교야학, 금주회, 저축 조합 등.

조선 청년 총동맹(1924):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의 분열을 수습하기 위하여 조직.

전개 과정: 대개는 동맹 휴학의 형태로 전개. 초기에는 시설 개선이나 일인 교원 배척 등의 요구가 많 았고, 후기에는 식민지 노예 교육 철폐, 조선 역사의 교육, 교내 조선어 사용, 학생회 자치, 언론집회 의 자유 등의 요구가 대두.

광주학생항일운동(1929)

배경: 백정들은 갑오개혁에 의해 법적으로는 해방되었으나 사회적으로 계속 차별받고 있었다.

전개: 진주에서 이학찬을 중심으로 조선 형평사를 창립하고(1923) 운동 전개.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고 애정은 인류의 본령이다. 그러한 까닭으로 우리는 계급을 타파하고 칭호를 폐지하여 우리도 참다 운 인간이 되는 것을 기하자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형평 대회 취지문

성격: 신분 해방 운동을 넘어서 민족 해방 운동의 성격까지 내포.

와해: 1920년대 말 내부적으로 이념적 갈등을 겪으면서 급진파와 온건파 사이에 대립이 격화. 또한 일 제의 탄압 강화로 더욱 약화.

성격의 변화: 1930년대 중반 이후에는 회원의 순수한 경제적 이익 향상 운동으로 변화.




애국지사들의 활약


장인환전명운(1908): 스티븐스 사살.

안중근(1909)

이재명(1909): 이완용에게 부상을 입혔다.

강우규(1919):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저격.

김익상(19211922): 1921년 조선 총독부에 폭탄 투척, 1922년 상해에서 다나카 대장 저격.

김상옥(1923): 의열단원으로 종로 경찰서에 폭탄 투척.

박열(1923): 도쿄에서 일본 천황 암살계획을 세우다 체포.

김지섭(1924): 의열단원으로 일본 궁궐에 폭탄 투척.

나석주(1926): 의열단원으로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에 폭탄 투척.

이봉창(1932): 애국단원으로 일본 천황 저격 실패. 이 사건을 계기로 상하이 사변 발발.

윤봉길(1932): 애국단원으로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 천장절및 전승 축하식전에 폭탄을 투척하여 시 라카와 등을 살해. 이후 중국의 장 제스는 임점에 대한 지원 강화.

그 외 상하이에서 주중 일본 공사를 사살하려 했던 백정기, 친일파 민원식을 사살한 양근환 등이 대표적인 애국 지사.


참고: 의열단과 한인 애국단

의열단(1919): 김원봉이 지린에서 조직.

한인 애국단(1926): 김구를 중심으로 상하이에서 조직, 활동이 가장 두드러졌다.






4. 일제의 민족성 말살정책과 민족 문화의 수호


민족말살정책


병참기지화 정책

배경: 1920년대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경제 공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경제 블록을 형성하여 한반도 의 노동력과 자원의 수탈이 가중.

투자시장화: 1920년대 회사령 철폐로 회사설립을 신고주의로 전환. 조선 수력전기회사가 설립되어 (1926) 부전강의 수력 개발, 흥남 질소비료공장 설립(1927).

만주 사변(1931) 이후: 중화학공업육성정책, 남면북양정책, 농촌진흥운동(농민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미봉책, 19321940), 군수공업 촉진- 재벌이 중심이 되어 군수공업과 광업개발(금광 석탄)

중일전쟁(1937) 이후: 민족말살정책.


침략전쟁의 확대

만주사변(1931. 9. 18): 일제는 심양 교외 유조구의 만주 철도를 폭파하여 만주를 점령.

상해사변(1932. 1): 유럽의 눈을 상해로 돌린 다음 만주국 세움(1932. 3. 1). 규탄을 받자 국제연맹 탈퇴(1933)

중일전쟁(1937. 7): 노구교 사건을 계기로 발발하여, 중국 침략을 시작.

태평양 전쟁(1942. 12. 7): 이른바 대동아 전쟁’.


민족말살정책: 중일전쟁 발발과 함께 시작.

육군특별지원병령

1938. 2

중일전쟁 직후의 조선청년 동원(18,000명 동원)

국가총동원법

1938. 2

일본 내 동법의 조선내 적용 시작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

1938. 7

지방연맹직장연맹 조직

국민징용령

1939

1939년부터 모집, 1940년부터 알선 형식으로 133146만 징집

공출제도

1939

식량 영단을 설치하고 식량 강제 수탈

학도병제

1943

조선인 전문학교대학교 학생을 징집하여 총 4,500명 동원

징병제

1944

종전까지 약 20여만 징병

여자 정신대근무령

1944. 8

1240세 여성 수십만을 강제 동원, 이 중 57만이 위안부로 성적 노리개 역할.

기타

근로동원으로 어린 국민학생과 중학생들을 군사시설 공사에 동원, ‘근 로보국대로 여성들을 토목공사에 동원, ‘애국부인회라는 어용단체 설립.

산미 증식 계획 재개: 개인에게까지 할당

경제생활 규제: 식량 배급, 미곡 공출, 가축 수탈

금속 그릇의 공출: 농구, 식기, 제기, 교회사원의 종까지 징발.

패전 후에는 류큐나 중국 하이난 섬 등지에서 한국인을 대량 학살.


국가 총동원체제로 전환

신사참배 강요

1936. 8

11신사 원칙하에 궁성요배 강요

황국신민화정책

1938

내선일체 구호 하에 황국신민 서사 암기

한국어 교육금지

1938

일본어 사용 강요

한국사 교육금지

1938

일본 역사에 편입

창씨개명

1939. 11

조선민사령 에정, 전국민 4/5 개명

동아일보, 조선일보 폐간

1940. 8

문장, 인문평론등 한글잡지도 폐간

조선어학회 사건

1942

강제로 해산하고 관계자 투옥학살

사상범 통제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1936), 조선 정보위원회(1937), 사상보국연맹(1938), 조 선사상범 예비구금령(1941)


민족문화 말살


 

민족문화의 수호


일제의 한국문화 연구

고적조사위원회(1910): 고적조사도보(15) 편찬.

법전조사국: 한국의 관습풍속을 연구하다 31운동 이후 중추원에 이관.

조선사편수회: 총독부 내의 기관으로 조선사(35), 조선사료총간(21), 조선사료집진(3) 등 간행.

청구학회(1930): 한국만주 등 극동문화 연구 단체. 학술지 청구학총


종교 탄압

기독교: 안악 사건(1910), 105인 사건(1912)이 날조되었고, 31운동 이후에는 많은 교회 지도자들 이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고 하여 체포투옥되었다. 1930년대 후반 이후에는 신사 참배가 강요되 었으며, 이를 반대하는 종교 계통의 학교는 폐쇄되고, 기독교 지도자들은 투옥되었다.

1. 안악 사건(1910): 안중군의 동생 안명근이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자 국내에 들어와 자금을 모금하다가 검거 된 것을 기화로 황해도 지방의 교육종교계의 관련 인사 160명을 총독 사살 계획에 연루시켜 체포.

2. 105인 사건(1912):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를 구실로 신민회 회원을 체포. 신민회 해산의 계기가 되었다.

불교: 사찰령, 승려법 제정으로 탄압.

천도교대종교: 민족 종교는 일제의 간섭이 특히 심하였다.


한국사의 왜곡: 단군 조선의 부정, 식민 사관의 전개.


민족문화의 수호운동


조선학 운동(1934): 문일평안재홍정인보 등이 1934여유당전서의 간행을 계기로 전개. 이 들 외에 백남운 등이 주축. 과거 민족주의 역사학이 국수적낭만적이었음을 비판하고 민족과 민 중을 다같이 중요시하면서 우리문화의 고유성과 세계성을 동시에 확보.


유물사관 도입(19301940)

특징: 사적 유물론에 입각하여 한국사를 세계사적 보편성 위에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식민 사학의 정체성 이론을 반박,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정신 사관도 비판.

대표자: 연합성 신민주주의를 제창한 온건 좌익 백남운은 조선사회경제사(1933), 조선봉건사회 경제사(1937) 저술.

이 외에도 이청원 조선역사독본, 박극채 이조사회경제사, 김광진, 진석담 등이 있다.


진단학회(1934): 청구 학회를 중심으로 한 일본 어용 학자들의 왜곡된 한국사 연구에 반발하여 순 수학문으로 역사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결집하여 진단학보발간. 이병도(실증 사학의 대표자, 한국고대사연구), 이상백, 김상기, 이윤재, 이희승, 송석하, 손진태, 신석호 등 참여. 실증사학 도입.


조선어학회(1941): 한글날과 맞춤법 통일안 제정, 한글발간. 우리말 큰사전 편찬을 준비하다 이 중화, 장지영, 최현배 이희승 등 수십명이 투옥되고 이윤재한증은 옥사(조선어학회 사건, 1942)


신민족주의 사학

특징: 194050년대에 주로 연구되었으며, 민족주의 사학을 계승하여 자주적 민족 국가를 수립하 고, 민족적 자유와 평등을 실현한다는 입장에서 역사적 사실을 재평가하고 민족사를 체계화하고 자 하였다.

학자: 손진태는 신민족주의를 통한 민족 단결과 평등친화자주독립을 주장하였으며, 조선민족 사개론」․「조선민족설화의 연구」․「국사대요등을 저술. 안재홍 조선상고사감, 홍이섭 조선과 학사



문예활동


문학: 일제 말기는 한국 문학의 암흑기였고, 이광수 일장기가 날리는 곳이 내 자손의 일터최남 선 조선인의 일본화가 조선 문화의 당면 과제노천명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서정주 오장 마쓰이 히데오 송가등이 친일 활동을 하였다.


음악: 국내(홍난파-봉선화, 현제명), 국외(안익태-애국가, 코리아 환상곡), 동요(홍난파-고향의 봄, 윤극영-반달)


미술: 동양화(안중식-한국의 전통회화 전승발전), 서양화(고희동-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자화상, 이중섭-부부), 기타(전형필-문화재 수집보호, 고유섭-한국탑파연구」․「조선미술문화사 총론). 동양 화가인 김은호 등은 친일.


연극

31운동 이전: 신파극의 유행

31운동 이후: 극예술협회(1921), 극예술연구회(1931, 연극공연을 계몽수단으로 간주), 토월회 (19231926, 박승희김기진이 조직한 근대연극회, 민중각성 촉구)

중일전쟁 이후: 일제 탄압으로 오락지향성 돌변, 일제찬양연극 공연, 연극공연에 일본어 사용.

일제 말기: 일본어를 쓰지 않는 연극은 공연히 허가되지 않아 연극은 질식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영화: 나운규의 아리랑(1926). 이후 1940년 일제의 조선 영화령 발표로 탄압.

일제 말에 이광수, 최남선 등이 조직한 친일적 문인조직. 조선음악가협회, 조선연극협회도 같은 성격.


아동문화: 방정환이 어린이를 창간(1922), 어린이날 제정, 조철호는 소년군(소년단) 창설(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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