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한국 전쟁과 공산군의 격퇴


발발 직전 남북한의 상황


남한

사회혼란 가중: 여수순천 1019 사건, 대구폭동사건 등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사회혼란 기도가 계속되었다.

애치슨 라인(1950. 1): 

한반도에 진주해 있던 미군이 철수하였으며, 한반도를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제외한다고 선언하였다.

(애치슨 라인: 알류산 열도 - 일본 - 오키나와 -필리핀)

이승만의 총선패배: 1950530 총선거에서 30(210)을 차지하였다.


북한

북한의 화전 양면 작전

북한은 겉으로는 평화 협상을 하였으나, 속으로는 전쟁을 일으킬 시점을 면밀히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통일 정부를 이루기 위한 남북한 지도자들 사이의 정치 협상을 주장하고 선전했다.

소련과 중국의 지원

군사력의 증강: 소련군은 무기를 지원, 중국은 조선의용군 5만 명을 인민군에 편입하였다.

 


경과

발발: 1950. 6. 25

국군의 후퇴: 국군의 병력과 장비가 부족하여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국군의 최후 방어선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했다. (1950. 9. 2)

유엔군의 참전

유엔은 즉시 안보리를 열어 대한민국을 지원하기로 결의하였다.

맥아더 장군을 사령관으로 하고 16개국 군대로 구성된 유엔군은 국군과 함께 반격을 개시했다.

서울 탈환과 진격

ㄱ. 인천상륙작전: 인천 상륙 작전(1950. 9. 15)으로 전세를 반전, 서울을 탈환(1950. 9. 28)하였다.

ㄴ. 압록강 진격: 또한 압록강 까지 진격(1950. 11. 1). 1125일에 최대 북진선까지 도달했다.

중공군의 개입(1950. 10. 25): 

ㄱ. 1.4후퇴: 국군과 유엔군은 한강 남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14후퇴)

ㄴ. 반격개시: 그러나 곧이 어 반격을 개시하여 38선 부근에서 교착 상태에 돌입했다.

 

전쟁 중의 이승만 정부의 실정

거창 양민 학살 사건(1951): 국군이 양민 500여 명을 공산군이라는 혐의로 학살했다.

국민 방위군 사건(1951): 고급 장교들이 군수 물자를 빼돌려, 국민 방위군으로 소집된 많은 장병들이 굶주림에 시달리거나 사망했다.

 





3. 휴전과 전후 복구

휴전의 성립

휴전 제의: 공산군 측은 소련의 유엔 대표인 말리크를 통해 휴전을 제의하였다. (1951, 6).

범국민 반대 운동

ㄱ. 휴전반대: 우리 정부와 국민은 휴전하면 민족 분단이 영구화될 것을 우려하여 운동을 전개헀다. 

ㄴ. 반공포로석방: 이승만 정부는 북진통일을 맹렬히 주장하면서 반공성향이 있는 인민군 포로를 전격적으로 석방했다.

휴전 협정(1953. 7. 27): 

전쟁의 장기화를 원치 않는 미소 간의 이해가 일치되어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휴전이 성립하였다.

 

미 상호 방위 조약(1953. 10. 1): 

미국에 대해 보장책을 요구하자, 어떠한 외부의 침략에도 상호협조하고 대항한다는 방위 조약이 체결되었다.

 

한국 전쟁의 피해

인적 피해: 남한의 사상자 수만 150만 명, 수많은 전쟁 고아가 발생했다.

물적 피해: 국토 초토화, 대부분의 산업 시설이 파괴되었다.

남북 대립의 격화

 

한국 전쟁의 영향

정치경제적인 면

ㄱ. 정치: 정치적으로 이승만 정부의 독재화에 이용되었다.

ㄴ. 경제: 경제적으로는 생존의 조건을 확보하기 위한 경제 발전의 의지를 고양하였다.

사회문화적인 면: 가족 제도와 촌락 공동체 의식이 약화, 서구 문화가 무분별하게 침투했다.

 

전후 복구 사업: 미국등 우방이 원조.

제네바 회담(1954): 

한국의 통일 및 인도차이나 휴전을 토의한 자리이다.

유엔 참전 16개국과 한국 및 소련, 중국, 북한 등이 참가했고, 한국 대표로 변영태와 북한 대표로 남일이 참석했다.

 

 


. 419 혁명과 민주주의의 성장

1. 1공화국(19481960)

반공 위주의 정책

국가 안보 중시: 반공을 강조, 미국 등 우방 국가와의 외교에 주력.

국민 자유 제약: 전쟁 기간 중 반공 포로의 석방도 있었으나, 국민 자유를 제약, 국회 활동까지도 제한하였다.

자유당의 조직: 국민회, 대한청년단, 농민총연맹 등의 관변단체를 토대로 조직되었다.

 

자유당의 장기 집권 기도

발췌 개헌(1952. 5):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당을 창당하고 재선을 위해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 국회를 골자로 한 발췌 개헌안을 강제로 통과.

*참고: 

상대방측과 딜을 했다고 한다. 각각이 원하는 바를 발췌했다고 하여 발췌개헌이라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직선제를 원했다고 한다. 왜냐면 국민에 대한 인지도가 제일 높으니까 직선제가 유리했다.


자유당 지도체제 교체

막강한 민족청년단의 조직을 가진 위협적인 이범석 계열을 제거하고 충성심이 강한 이기붕으로 하여금 당을 이끌게 하였다.


사사오입 개헌(1954. 11)

내용: 직선으로 재선된 이승만 대통령은 초대 대통령에 대한 중임 제한 철폐를 골자로 한 개헌안 을 강제로 통과시켰다.

결과: 개헌안의 통과로 국민에게 빈축을 사게 되었고, 개헌을 반대하였던 정치인들은 민주당을 조직해서 이승만 정부를 비판, 견제했다.

진보당 사건(1958): 

ㄱ. 배경: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당선되었으나 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의 장면 후보가 당선됐다.

ㄴ. 2.4파동: 자유당 정권은 신국가보안법을 여당 의원만으로 통과하였는데, 이를 24파동이라 한다

ㄷ. 조봉암 처형

또한 30%의 높은 지지를 받은 진보당을 탄압하였고, 당수의 조봉암의 평화 통일론이 북한 및 소련, 중국의 중립국 감시 위원단하의 총선거안과 동일한 주장이라는 구실로 간첩 혐의로 처형(1959. 7)하였다.

ㄹ. 경향신문 폐간: 민주당을 지지하며 정부에 비판적인 경향신문을 폐간(1959. 4).

315 부정 선거(1960): 자유당 정권은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정 선거 자행.

 





2. 419 혁명

발단과 전개과정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야당인 민주당은 국민들에게 큰 호응을 받음.

228: 자유당이 민주당의 선거 유세장에 가지 못하도록 한 데 반발하여 대구 시내 고둥학생들이 벌인 사건으로 419 혁명의 전주곡이 되었다.

315

부정 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마산에서 발생하여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마산 의거). 정부는 시위 군중에 발포하여 많은 희생자를 내고, 마산 의거를 공산주의 세력의 배후 조정 사건으로 몰았으나 시민의 반감만 증폭하였다.

411: 마산 앞바다에서 김주열 군의 시체가 떠올랐다.

419: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 발생, 학생과 시민들은 경무대로 육박. 이승만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였으나 시위는 연일 계속되었다.

425: 대학교수단이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였다.

426: 이승만 대통령은 사임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529: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729: 선거 결과 장면 내각이 출범했다.

 


 

3. 2공화국(19601961)

장면 내각의 수립

419 혁명 후, 허정을 내각 수반으로 하는 과도 정부가 구성되었다.

과도 정부는 내각 책임 제와 양원제(민의원, 참의원)를 골자로 헌법을 개정하고 총선거를 실시했다.

민주당이 압승하고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장면을 국무총리로 선출하였다.

 

장면 내각의 출범과 시련

과제: 2공화국은 국가 안보 체제를 확립하고 평화 통일을 위하여 국력을 신장시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출범했다.

국가발전노력

1961년 이후에는 점차 시위는 줄어들고 사회가 안정되는 모습을 보였다.

만성적인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한 경제개발계획도 마련되었다.

한계성

정치세력의 미흡: 민주주의의 열망과 민족분단의 현실 타개를 요망하는 당시의 움직임을 해결수 용할 만한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못하였다.

민주당의 분열: 윤보선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당 구파가 독자의 정당(신민당)을 결성하였다.

사회혼란의 야기: 민주당 내의 정치적 갈등과 계속되는 시위 등으로 당면 과제를 실현하지 못하였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