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립협회와 대한제국


1.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


청일전쟁

배경: 일의 경제적 대립. 임오군란 이후 청의 정치적 진출에 대한 일본의 불만과 동학 이후 청일 본의 군사적 대치.

경과

청은 일본에 조선에서 공동철수를 제의하였으나 일본이 거절. 일본은 청과 공동 내정개혁을 제의 하였으나 청이 거절.

일본은 갑오개혁을 시작하며 청과의 기존 조약을 폐기 선언하여 충돌.

아산만 풍도에서 일본의 선제로 전쟁이 시작되어(1894. 7), 성환평양여순위해위대만에서 일본이 승리.

결과: 하관조약이 체결되고 청은 조선에서 완전히 철수, 일본이 조선과 만주에까지 영향.

 

삼국간섭

원인: 하관조약으로 일본은 요동반도를 할양: 러시아에겐 남하정책에 위협.

경과: 러시아는 독일프랑스와 협동하여 요동반도 반환을 일본에 요구.

결과: 일본은 3천만냥을 받고 청에 반환. 국내에서는 친러파가 득세.

삼국간섭 이후 청으로부터 얻은 이권.

러시아: 뤼순다롄간의 철도부설권, 다롄 25년 조차권.

프랑스: 도쿄철도의 연장부설권, 광주만 99년 조차권.

독 일: 산둥성 철도부설권, 교주만 99년 조차권.


 

일간의 각축

춘생문 사건(1895. 10. 12): 이범진 주도하에 친러친미파들이 친일 정권에 포위되어 있던 국왕을 미국 공사관으로 이어(移御)하고 친일 정권을 타도하려 하였으나 실패.


아관파천

배경: 러시아는 친러파와 짜고 을미사변 후 러시아 수병을 파견. 베베르는 18961월 스피에르로 교체되었지만 여전히 막후에서 활동.

경과: 친위대가 의병 진압으로 왕궁의 경비가 소홀하자 친러파 이범윤 등이 베베르와 모의하여 아 관파천 단행(1896. 2)

결과: 김홍집과 어윤중이 친일파로 지목되어 민중에게 살해, 유길준 등은 일본으로 망명. 윤용선을 총리로 하는 친러내각이 조직되고 고종은 1년간 러시아 공사관에서 보호를 받음.


러시아와 청일본간의 관계

1차 협상 베베르-소촌 각서(1896. 5): 일본은 아관파천과 친러내각을 인정하고, 서울-부산간의 전신선 보호와 거류민 보호의 구실로 군대를 계속 주둔한다.

2차 협상 로마노프-야마가타 의정서(1896. 6)

3차 협상 로젠-니시 협정(1898): 양국은 모두 조선내정 불간섭, 훈병교관과 재무고문의 파견은 사전에 협의, 러시아는 일본의 조선 상업공업의 침투를 방해하지 않는다. 일본은 한반도의 경제 적 우위 확보.


니콜라이 2세 대관식을 계기로 한 러시아와 각국의 비밀조약

러시아-: 만주와 조선에서 일본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공수동맹을 체결하여 동청 철도 부설권 을 청으로부터 획득.

러시아-일본: 일본이 조선에 점유하고 있는 전신선 관리권을 인정하는 대신, 러시아는 서울에서 조러 국경선 간의 전신가설권 확보. 완충지대 설정. 일본은 38° 분할을 제의하였으나 거절당함 (로마노프-야마가타 의정서).

조선-러시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 파견. 전신선 연결 합의. 탁지부의 알렉셰프는 한러 은행을 설립.

 


⑷ 열강의 이권침탈


고종 20 (1883)

: 부산-나가사키 해저전선 부설권

고종 22 (1885)

: 인천-의주 전선 부설권 | : 부산-인천 전선 부설권

고종 23 (1886)

: 부산 절영도 저탄소 설치권

고종 25 (1888)

: 연안 어획권

고종 28 (1891)

: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경상도 연안 어획권

고종 31 (1894)

: 경부철도 부설권

고종 32 (1895)

: 평안도 운산금광 채굴권

건양원년(1896)

: 경인철도 부설권 | : 경의철도 부설권

: 경원종성광산 채굴권,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압록강 유역울릉도 채벌권

광무원년(1897)

: 강원도 금성 당현금광 채굴권 | : 부산 절영도 저탄소 설치권

: 서울 전기수도 시설권

광무 2 (1898)

: 한러은행 설치권 | : 평안도 은산금광 채굴권

: 평양탄광 석탄 전매권, 경인철도 부설권(미국으로부터 매수)

 



2. 독립협회의 활동(18961899)


독립협회의 성격: 자주독립자유민권자강혁신


독립협회의 자주적 근대사상과 그 조류

독립협회의 사상적 조류

서구시민사상: 서재필, 윤치호 등.

개신유학사상: 남궁억, 정교 등은 동도서기파로부터 발전.

자주자강과 개화혁신사상: 이상재는 서구시민사상+개신유학사상.

기타: 한규설 등의 개화파 무관, 자본가, 천민에서 해방된 일반 시민.

 


독립협회의 성립과 활동


독립협회의 성립

시작: 갑신정변에 실패하여 미국으로 망명하였던 서재필이 귀국하여 조직.

주요인사: 윤치호이상재 등 외교계 인사들로 조직된 정동구락부와 남궁억 등 실무관료 계열 인 사들이 주로 참여.

지지층: 학생, 노동자, 부녀자 및 해방된 천민 등 광범한 사회 계층의 지지를 받았다.


독립협회의 특징

회원 가입이 전적으로 개방

1898년 공지지회를 필두로 평양대구 등지에 지회 설치. 지회는 서울의 본회 해산 뒤에도 활동을 계속.


독립협회의 자주 국권 활동

모화관을 독립회관으로 개칭(1896).

고종 환궁요구: 고종은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국하여 국호 대한, 연호 광무의 대한제국 선포(1897. 10).

영은문 헐고 (청으로부터의) 독립문 설치(1897. 11)

러시아 군사교관과 알렉셰프의 소환.

만민 공동회 개최(1898): 1만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러시아의 침략 정책을 규탄하고, 대한의 자주 독립권을 지키자는 내용의 결의안 채택.

자주 국권 운동: 독립 협회는 수시로 만민 공동회를 열고, 민중을 배경으로 내정 간섭과 이권 요구 및 토지 조차 요구 등에 대항.

독립신문, 자주호국선언, 입헌군주제 주장, 지회설치


독립 협회의 이권 수호 운동

러시아의 이권 침탈 저지

절영도 조차 요구 저지: 러시아가 일본의 선례에 따라 저탄소 조차를 요구하자, 독립 협회는 만민 공동회를 배경으로 일본의 저탄소 철거까지 주장하여 러시아의 요구를 저지.

러 은행 폐쇄.

도서의 매도 요구 저지: 군사 기지의 설치를 위한 러시아의 목포, 증남포 부근의 도서에 대한 매 도 요구를 저지.

기타 열강의 이권 침탈 저지: 프랑스의 광산 채굴권 요구를 좌절, 독일이 차지한 이권에 대한 반대 운동도 벌여 한동안 이권 침탈이 줄어들었다.


독립 협회의 민권 운동

배경: 자주 국권 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민중의 힘이 증대되고 민권 의식이 고양되어 전개.

내용: 기본권 운동을 전개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고, 국민 참정권 운동도 전개.


독립 협회의 민중 운동 성과

민중의 대표 기관으로 성장

진보적 내각의 수립: 민중 운동을 통하여 보수적 내각을 퇴진시키고, 박정양의 진보적 내각을 수립.

관민공동회에서 헌의 6조 결의할 것: 헌의 6조는 고종도 실시를 약속하여 의관의 반을 민선으로 하기로 하고 독립협회에 의뢰까지 하였으나 이것은 정부의 탄압방책 준비수단에 불과.

외국인에게 의지하지 말고 전제황권을 공고히 할 것.

외국과의 이권에 관한 계약과 조약은 각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 날인하여 시행.

국가재정을 탁지부에서 관장, 예산과 결산을 국민에게 공포.

중대 범죄를 공판하되, 피고의 인권을 존중하여 자복한 후에 시행.

칙임관을 임명할 때에는 황제폐하가 정부에 그 뜻을 물어서 중의(과반수)에 따를 것

정해진 규정 홍범 14조를 실천할 것(장정실천).



독립협회의 의의


독립협회의 해산(1899)

정부는 독립협회가 공화주의 정치를 한다고 하여 해산 명령을 내리고 이상재 등 중심인물 17인 체포.

만민 공동회의 항거: 서울 시민들은 만민 공동회를 열어 50여 일간의 시위 농성을 통하여 독립 협 회의 복설, 개혁파 내각의 수립, 의회식 중추원의 설치 등을 요구하며 투쟁을 벌였다.

정부는 황국협회(1898)를 이용하여 시위 군중에게 테러를 감행하고, 군대와 순검을 풀어 독립협회 를 견제하다가 두 단체 모두 해산.


독립협회의 의의: 우민관을 지닌 부르주아적 개혁운동

시민 의식이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서구식 입헌군주제 혹은 공화국가를 세우려 하여서 보수 세 력의 지지를 얻지 못함.

미국영국일본에 대해서는 우호적, 농민군이나 의병에 대해서는 적대적.

독립 협회를 통한 사회의식과 사회 자체의 변화

사회의식의 변화

사회 자체의 변화: 민권 사상과 평등 사상이 확산

 



3. 광무개혁


광무개혁의 성격

광무개혁의 배경: 고종의 경운궁 환궁과 대한제국 선포.

광무개혁의 성격: 황제의 전제권을 강화하기 위한 구본신참.

교정소 설치: 정부는 법률칙령의 개정안을 마련하기 위한 황제 직속의 입법 기구 설치.

 

광무개혁의 내용

경향의 변화: 처음에는 중추원을 구성하여 민의반영 개혁정치를 실시하고자 하였고, 지방의 23부를 13 도로 개편, 사범학교 설립. 1899년 대한국제의 반포에서 황제권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정치적 개혁: 18998월 교정소에서 9개조에 달하는 대한국제의 반포.

모든 권한을 군주의 대권으로 규정. 의회참정권사법권 규정은 없음.

군사적 개혁

원수부를 설치하여 황제가 육해군을 통솔하도록 하고, 서울에 시위대와 지방에 진위대의 군제를 마련하고 군사 수를 대폭 증강.

장교 양성을 위한 무관 학교 설립

민주적 외교

청과 통상 조약을 체결하여 관계를 대등하게 수정(1899).

간도관리사(1902, 이범윤)와 블라디보스토크 통상사무관을 파견, 북간도의 영토편입 도모.

경제적 개혁

토지조사(양전) 사업: 1898년 양지아문을 설치하고 18991903년 사이에 미국인 측량사를 초빙하여 지계를 발급.

국가 제조공장을 설립하고 민간 제조공장 설립을 지원.

상무사를 조직하여 상업특권을 부여하고 영업세 징수도 위임.

내장원 재정 관리: 이용익에게 위임하였고, 재정은 군대양성공장건설회사설립학교건립의병 지원으로 사용.

사회적 개혁

기예학교의학교상공학교외국어학교 설립. 유학생 파견. 실업교육 강화.

교통통신시설 개선, 새 호적제도, 병원 설립.

 


대한제국의 의의와 한계

의의: 강력한 황제권을 바탕으로 여러 분야에서 짧은 기간에 근대화를 이룸.

한계

열강의 간섭과 보수적 파쟁을 제거하지 못하였음.

백동화 남발로 화폐제도가 문란, 상무사는 상업 발전을 저해.

군대도 민중항쟁 진압용이었을 뿐 외세를 막아내는 데는 역부족.

 


민주의 반침략반봉건 항쟁

농민운동과 노동운동

농민층의 저항: 항조운동, 항세운동

초기 노동운동: 제국주의매판적 자본에 대해 노동운동반침략적 운동을 벌임.

광부: 저임금과 민족적 차별대우에 저항. 운산당현은산직산금광에서 봉기.

개항장 부두노동자: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에 저항. 목포 부두노동자들의 파업(18981903)이 대표적.

영학당동학당활빈당

영학당

전라도 동학교도인 최익서 등이 영학당을 조직하여 1898년 말의 흥덕 농민항쟁을 지원하며 활동.

영학당은 1899년 봄 전라도 북부의 농민들이 균전폐지 요구에 해산당한 것을 계기로 고부, 흥덕, 무장 등지를 공격하고, 영암지역의 농민들과 합세하여 광주전주관찰부를 점령한 뒤 서울까지 공격 시도.

고창 공격에서 패함.

동학당

1900년경에 해주재령 등 황해도와 소백산맥 지역에서도 활발.

1900년부터 본격적 활동을 전개하는 활빈당으로 흡수되거나 을사조약 전후 의병에 참가.

활빈당

19001905에 활발. 충청경기, 낙동강 동쪽의 경상도, 소백산맥 부근 등지에서 활동.

행상유민초기노동자걸인의병 운동에 가담한 농민군 등의 조직으로서 양부를 빈민에게 분 배함으로 활동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하였음.

대한사민논설 13조목을 요구하며 저항하다, 을사조약 이후 일본군의 무력 탄압으로 지도부가 붕 괴되어 소멸. 잔여세력은 의병에 흡수.

방곡을 실시하여 구민법을 채용할 것.

시장에 외국상인의 출입을 엄금.

금광의 채굴 엄금.

사전을 혁파하고 균전으로 하는 목민법 채용.

악형의 여러 법을 혁파.

타국에 철도부설권 불허.

도우를 엄금.

곡가 안정을 위한 구민법 꾀할 것.

백성이 소원하는 문권을 폐하께 받들어 올려 흥인을 꾀할 것.

개화법을 행할 때에는 정법을 행할 것

어지럽지도 사치하지도 않은 선왕의 의제를 사용할 것.

요순 공맹의 효제안민의 대법을 행할 것을 간언함.

행상에게 징세하는 폐단을 고치고, 징세한 것을 모두 반환하고, 방임을 파할 것.

 

 

 

 

 3. 근대 문물의 수용


각종 시설

연대

내용

출판

박문국

1883

근대적 인쇄술 도입, 한성순보 발행

광인사

1884

최초의 민간 출판사

화폐

전환국

1883

당오전 주조

무기 제조

기기창

1883

연선사의 건의로 세운 최초의 근대식 무기 제조 공장

통신

전신

청에 의해

1885

서울-인천, 서울-의주

정부+일본

1888

서울-부산

우편

 

우정국 설치(1884) 우정국 운영(1895) 만국우편연맹 가입(1900)

전화

1898

궁중 내에(1893), 서울-인천(1898), 서울시내(1902)

교통 기관

철도

경인선

18991900

미국인 모오스가 착공하고 일본이 완성

경부선

1904

경의선은 프랑스가 침탈한 이권이나 경부선과 더불어 러일 전쟁 중 일본의 군사적 목적으로 부설

경의선

1905

전차

서대문

청량리

1898

미국인 콜브란과 황실의 합작으로 만든 한성전기회사(1898)가 발전소를 설립하고 전차를 운영

전등

1900

 

의료 기관

광혜원

1885

정부의 후원을 얻어 알렌이 설립한 최초의 근대식 병원. 후에 제중원으로 개명.

광제원

1889

정부가 설립하고 지석영이 종두법 시행.

세브란스

1904

미국인 에비슨이 설립, 경성 의학교와 더불어 의료 요원 양성.

대한 의원

1907

의학부, 약학과, 신파과, 간호과를 부설하여 의료요원을 양성한 국립병원.

자혜 의원

1909

진주청주함흥 등 지방 10여 곳에 설치한 도립병원.

근대 건축

독립문

1896

프랑스의 개선문을 모방.

덕수궁 석조전

19001909

르네상스식.

명동 성당

18871898

고딕 양식.

 

2. 갑오개혁(1894)



개혁의 배경


일본의 개혁건의

오오토리 공사로 하여금 189465개조의 내정개혁안을 제시하였으나 조선은 노인정회담(1894. 7. 10)에서 개혁 전에 일본군의 철퇴를 요구. 또한 개혁의 내용이 조선의 헌장과 대개가 같고 새로운 사항은 교정청(1894. 6.)에서 개혁을 실시하고 있다는 이유로 조선이 거절하였다.


개혁의 강행(경복궁 침입)

일본은 경복궁 점령(94.6.21) 후 대원군을 입궐시켜 집정토록 하고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여 친일계와 중립계로 정부를 개편.

이른바 1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된다. 여기에는 대원군도 몇 달 정도 같이 하게 된다. 물론 대원군은 실질적 힘은 크지 않았다고 한다.


개혁의 추진

당시 일본은 청과 전쟁 중(94.5~)이라 개혁에 관여할 여유가 없어서 새 정부는 거의 독자적으로 개혁을 추진

신정부는 군국기무처(1894. 7.)라는 회의기구를 설치하고 김홍집을 총재관으로, 또 박정양과 유길준 등 17명의 회의원을 중심으로 5개월 동안 존속하며 208건의 개혁안을 의결.

- 즉 군국기무처는 나름 독자적/자주적인 기관이었다. 일본이 경복궁 점령하고 난리를 피우긴 했지만 그건 그렇게 거대한 군대가 와서 점령한 것도 아니었고, 일본은 사실상 청과의 전쟁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1차 김홍집 내각에서 실시한 1차 갑오개혁은 자주적인 부분이 상당히 많이 있었다.

- 그러나 승기를 잡기 시작한 94년대 후반부터는 간섭을 하기 시작한다.

- 그리고 대체로 "김홍집", "흥선대원군" 이 두 인물만 1차 김홍집 내각의 인물로 알고 있는데, "박정양", "유길준" 역시 중책을 맡았다고 한다. 특히 기출에서 "박정양"을 키워드로 하여 해당 문제가 1차 내각에 관련된 문제인 것을 알아야 했던 것도 있다.




실시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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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 정리>

1) 1차 갑오개혁(94.6~94.11): 1차 김홍집 내각 (feat. 흥선대원군, 박정양, 유길준)

2) 2차 갑오개혁(94.11~95.7): 2차 김홍집/박영효 연립 내각

  - 홍범 14조(94.12)도 2차 개혁 시기에 있음

  - 2차 개혁 이후에 3차 김홍집 내각(95.7~95.9, 친러 by 삼국간섭으로 러시아 대세)

  - 이후 을미사변(95.8)도 있었고, 춘생문사건(95.11)도 있었다.

3) 3차 갑오개혁(95.11~96.2, =을미개혁): 4차 김홍집 내각 (until 아관파천)

- 3차 갑오(을미)개혁의 시작 시기를 95.9로 보는 견해도 있다.

- 3차 갑오개혁을 4차 내각이 했다면, 그럼 3차 김홍집 내각은 무슨 개혁을 실시했나? 2차 개혁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도 있고, 그냥 3차 개혁을 시작했다고 생각해도 되는데, 한편으로는 개혁 측면에서 약간 과도기적인 부분이라서 그냥 간단히 생각하자면 개혁이 없었다고 봐도 큰 문제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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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개혁(1894. 71894. 12)

군국기무처에서 단행한 208건의 개혁으로 중앙정치조직 및 관료제, 신분제, 재정, 화폐개혁. 이른바 갑오개혁.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세를 잡자 조선을 적극적으로 간섭.


2차 개혁(1894. 111895. 5)

대원군이 개혁에 불만을 품고 청군, 동학군과 내통하며 고종을 퇴위시켜 일본세력을 제거하려 하자 이노우에가 공사로 나와 대원군을 제거하고 급진적인 박영효를 입국시켜 김홍집과 연립내각 조직.

- 2차 개혁은 2차 김홍집 내각에서 실시하는데, 2차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이라고 더 많이 부른다.

18941240명의 일인고문관이 입국하여 중추원에서 개혁을 주도, 홍범 14조가 반포(1895. 1)되고 23부제 등 지방제도와 사법제경찰제학제 등이 개혁.

2차 개혁은 일본이 삼국간섭에 의해 세력이 약화되는 과정이어서 조선, 특히 박영효의 주도하에 단행. 박영효가 명성왕후 일파에 의해 제거됨에 따라 개혁은 중단.

- 제거가 사실은 살해를 뜻하는 경우가 많은데, 박영효는 죽은 게 아니라 망명을 갔다. (95.5)

- 박영효 망명 간 후


을미개혁

삼국간섭 후 박영효가 실각하고 온건 개화파와 친러파의 연립 내각인 제3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

명성황후는 친러파와 연결하여 일본의 침략세력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일본 침략자들은 을미사변 (1895. 8)을 일으킴.

을미사변 이후 제3차 개혁이 추진되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의병이 일어났고 아관파천으로 인하여 개혁운동은 중단.

을미개혁은 광의의 갑오개혁에 포함.

구 분

개 혁

내각

내 용

1차 김홍집 내각(1894. 71894. 12)

1차 개혁

친일

대원군 섭정, 군국기무처 중심

2차 김홍집 내각(1894. 121895. 7)

2차 개혁

친일

박영효서광범, 홍범 14, 박영효의 망명으로 개혁 중지

3차 김홍집 내각(1895. 71895. 10)

(3차 개혁?)

친러

삼국간섭 후, 이범진이완용 등

4차 김홍집 내각(1895. 101896. 2)

3차 개혁

친일

을미사변(95.8) 후, 을미개혁 추진

개혁 중단

 

친러

아관파천 후

 


갑오개혁의 내용

정치면

자주국권 선포

개국기원 사용으로 청의 종주권 부인

왕실존칭이 격상되어 주상전하는 대군주폐하, 왕비는 태후, 세자를 태자로 부르도록 하였다. 

중앙정치의 개혁

근대적 내각제로 군주권을 약화시키고 사법군사경찰을 독립

중앙기구를 의정부와 궁내부로 나누고 의정부를 내각이라 하여 총리대신을 두며, 산하 6조에 외무농상을 더한 8아문을 두었다가 7부로 축소. 경찰권을 일원화하여 경무청을 설치하였는데, 박영효가 내무대신에 임명되어 경무청을 두고 경무사, 경무관 등의 관제를 제정(1895. 5).

지방제도의 개혁: 8도를 23부로 소지역주의 채택. 지방관을 행정관으로 역할 축소.

사법제도 개혁: 사법권을 행정권에서 분리. 1심 재판소로 지방재판소개항장재판소, 2심 재판소로 고등재판소순회재판소 설치.

과거제도 폐지 관리임용법 제정

관등이 11품으로 축소. 칙임관(12), 주임관 (36), 판임관(79)으로 구분.

관리의 월봉제, 문무관 차별 철폐

군대의 통합과 일원화, 훈련대 사관 양성소 설립 (군사면의 개혁 소홀로 왕권약화)

경제면

재정의 일원화(탁지아문 관장): 220개 징세서와 9개 관세사 설치.

은본위제: 신식화폐장정을 만들어 일본과 같은 은본위제 채택. 이로 일본화폐 침투, 세금의 금납 제세금의 금납제를 실시하여 화폐 유통을 촉진, 화폐경제에 의한 시장화 촉진. 이에 도량형도 개정통일.

사회면

반상의 신분제 폐지

악습 폐지: 적서차별 철폐, 조혼 엄금(20/16), 과부 재가 자유, 연좌제와 고문제 폐지.

의복제도의 간소화

교육면

고종의 교육입국조서 발표(2차 개혁 때)

근대적 학제(신교육령): 한성사범학교와 영일어를 교육하는 외국어 학교의 관제 공포. 훈련 대사관양성소와 서울에는 소학교 설립.


홍범 14조(94.12)

청국에 아부하는 생각을 끊어버리고 자주독립하는 기초를 세운다.

왕실전법을 제정.

대군주는 정전에 나아가 정사를 보되 친히 명대신에게 물어 재결하고 후빈종척은 간예를 불허.

왕실사무와 국정사무는 분리.

의정부와 각 아문의 직무권한을 명확히 제정.

조세는 법령에 따름.

조세의 과징과 경비 지출은 탁지아문에서 관할.

왕실비용을 솔선절감하여 각 아문과 지방관의 모범이 되도록 한다.

왕실비와 각 관부의 비용은 1년 예산을 정한다.

지방관리의 직권을 제한조절.

청준자제를 널리 파견하여 외국의 학술과 기예를 전습.

장관을 교육, 징병법 제정.

민법과 형법을 엄명하게 제정하여 남용치 못하게 하고 생명과 재산을 보전한다.

선비를 구하되 두루 조야에 미쳐 인재 등용의 길을 넓힌다.



⑷ 1차 갑오개혁의 의의

조선 근대화의 출발점

을미개혁은 변법개화파가 추진하던 노선을 확대 발전시킨 것으로, 제도상으로는 서양식 근대국가에 근접하였으나 국방의회토지에 대한 배려가 거의 없고, 일본의 조종을 받는 내각에 실권을 전부 주 었음.

갑오개혁은 대원군을 최초로 국민들에게서도 반발을 일으킴.

 


을미개혁과 의병운동의 발발


삼국간섭과 친러파의 대두(3차 김홍집 내각)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

조선이 자주 독립국임을 확인. 청은 일본에 남만 철도, 요동반도, 대만, 팽호도 할양.

청은 일본에 배상금 2억량 지불.

청국내의 일본군은 3개월 내에 철병하되 위해위의 일본군은 배상금 지불시까지 주둔.

++독은 요동반도를 다시 청에 반환하도록 삼국간섭 행사(1895. 4): 일본의 위신이 추락하여 조선에 대한 압력 감소, 친러내각 구성.

삼국 간섭 후 정부는 배일친러로 경도. 친러파를 키우고 있던 베베르는 박영효가 폐비음모 사건으로 축출되자(1895. 7), 이완용이윤용이범진을 앞세워3차 김홍집 내각을 구성. 개혁은 중단.


을미사변과 을미개혁

조선정부가 친러로 기울자 일본은 친일파와 공모하여 대궐에 침입, 이경직홍계훈을 살해, 명성황 후마저 시해.

친일파 제4차 김홍집 내각(김홍집서광범어윤중유길준)을 조직하고 개혁을 재개.

을미개혁의 내용

훈련대 폐지하고 중앙에 친위대, 지방에 진위대 설치.

단발령 공포와 전국에 광제원을 세우고 종두법 사용.

일세일원의 연호로 1896년부터 건양사용.

189611일부터 태양력 사용.

개성, 수원, 충주, 안동, 대구, 동래 등지에 우체사 설치.

소학교령을 제정공포하여 서울 시내에 관립소학교들 설치.

 

갑오을미 개혁의 성격: 일본의 침략 의도가 반영된(타율적) 것이지만, 전통 질서를 타파하는 근대적 개혁이었고, 조선의 개화 인사들과 농민층의 개혁 의지가 일부 반영된, 민족 내부에서 일어난 근대화의 (긍정적) 노력이기도 하였다.

. 동학농민혁명과 갑오개혁


1. 동학농민운동(1894)


동학교세의 확장

최제우: 1860년 창도, 1864년 최제우 처형.

최시형: 2대 교주로 각지에 포와 접 설치. 동경대전용담유사로 포교. - 이 두 책도 최제우가 다 지어놓은 거였다.

 


교조신원운동

삼례집회: 189211월 전라도 삼례에서 교조 신원과 탐관오리의 숙청을 충청전라감사에게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함.

2차 신원: 18933월 박광호손병희 등이 서울 궁궐에서 교조신원 복합상소를 하고 외국인 철수 요구, 실패.

보은집회(3차 신원): 

1893. 3. 114. 2. 척외양창의를 구호로 정치운동을 벌임

정부는 탐학한 향리를 징벌하겠다며 어윤중을 선무사로 파견.

한편으로 홍계훈으로 하여금 600명의 관군을 출동시켜 진압.

금구집회

보은집회 시기에 전라도 금구에서 1만여명의 농민이 참가

전봉준서장옥황하일 등이 보 은집회와 결합하여 서울로 쳐들어가려 하였으나 집회는 무산되고 동학 상층부의 반대로 해산.

 


동학농민운동의 전개


1- 고부민란의 시기

원인 고부군소 조병갑이 만석보의 수세를 강제 징수하고 1천냥을 사취.

전봉준과 농민군 지도자들은 사발통문을 돌리며 1894110일 봉기. 고부접주 전봉준은 관아를 습격하며 군수를 내쫓고, 아전들을 징벌한 뒤 곡식을 농민들에게 분배하고 보를 허물음.

몇 개조의 요구사항을 제시하며 10여일 만에 해산(1894. 2). 1차 농민전쟁의 도화선이 됨.


2- 황토현 전투(남접)의 승리(절정기)

원인: 정부는 조병갑을 징죄하고 안핵사 이용태를 파견하였으나 그는 탄압에 급급. 대장 전봉준과 총사령관 손화중, 김개남, 총참모 오지영 하에 창의문을 선포.

주장: 탐관오리 제거, 조세 수탈의 사정 등을 주장. 특히 균전사 폐지를 강력히 요구.

1890년에 왕실이 전라도 서북부 11개 고을의 개간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파견한 관리.

경과: 농민군은 고부와 태인에서 봉기하여 백산에 진을 옮겨 호남창의대장소를 조직하고 격문과 4 대 강령 발표. 이후 황토현에서 관군을 물리치면서 남하.

<4대 강령>

사람을 죽이지 말고 가축을 잡아 먹지 마라.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라.

왜놈을 몰아내어 없애고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는다.

서울로 들어가 권세가와 귀족을 모두 없앤다.

결과 : 정읍고창함평에서도 승리하고, 양호초토사 홍계훈 병력 800여명을 장성에서 패배시킨 후 전주를 점령.




3- 집강소 설치 및 자치시기

집강소의 설치

정부와 전주 화약을 맺고 촌촌설포

새로 부임한 전라감사 김학진과의 합의에 따라 전라도 53개 군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폐정 혁역안(=폐정개혁안)을 실천.

집강소의 조직: 한 사람의 집강과, 몇 명의 임원. 전주에는 대도소 설치. 도소가 있는 곳은 도소가 집강소를 대신.

민보단: 봉건유생층(지주, 부호, 양반 등)이 각지에서 농민군을 체포하여 화적 혐의로 처형.

정부의 대응

전주 화약에도 불구하고 청에 파병 요청

청이 파병되자 일본도 천진조약을 구실로 파병하여 갑오개혁도 후퇴하고 청일 전쟁 발발

관민상화와 집강소체제는 좌절.

<폐정개혁안> - 나중에 갑오개혁 때(그 중에서도 1차개혁 때) 많이 반영 된다.

동학도는 정부와의 원한을 씻고 서정에 협력

탐관오리는 엄징.

횡포한 부호는 엄징.

불량한 유림과 양반 징벌.

노비문서 소각: 갑오 1차 때 반영

- 1차 때 노비제도 "공식"적 소멸

- 물론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좀 남았을 것이다.

7종의 천인차별 개선, 백정의 평량갓을 없앤다.

청상과부의 개가 허용.

무명의 잡세를 일체 폐지.

관리 채용에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

공사채를 물론하고 기왕의 것은 무효로.

왜와 통하는 자는 엄징.

토지는 평균하여 분작

- 참고: 토지에 관하여 "평균분작"이라는 말은 한국사 통틀어서 여기밖에 안 나온다. 만약 다른 시기의 토지제도에서 이 말 하면 그건 틀린 보기이다.


2차 동학농민전쟁(남접+북접), 공주우금치 전투

원인

갑오정권의 개혁 지진, 일본군관군의 탄압, 봉건유생의 반격

일본의 내정간섭과 왕궁 점령에 농민군은 189410월 척왜를 구호로 재기.

경과

손병희는 최시형의 승인 하에 10만여 명의 충청 농민군(북접)을 이끌고 청산에 집결하여 논산에서 합류

서울로 북상하다 공주 남쪽의 우금치에서 관군일본군과 1주일간 50여회 격전

첫 전투인 목천 세성산 전투에서 패배, 이인 전투에서 승리, 우금치에서 많은 희생을 내고 후퇴

농민 군의 전면적 후퇴와 함께 무자비한 살육 시작

양반토호의 민보군수성군도 공격하여 3040만 의 민중이 학살.

결과

전봉준은 변절한 부하의 밀고로 순창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일본공사의 재판을 받고 사형(1895. 4.).

나머지 지도자들도 체포 혹은 살해.

 

동학운동의 성격

철학적으로 주기론에 근접, 종교적으로 샤머니즘 중시

도교에 가까워 조선왕조를 부정하고 양반사회를 반대하는 사회개혁 사상

인내천 사상(한울님 사상), 천인합일, 운수, 말세, 후천개벽 사상 보유.

 

동학운동의 영향

갑오개혁에 영향

구국 의병 투쟁의 활성화: 농민군의 잔여 세력이 영학당, 활빈당을 조직.

 

동학운동의 의의

일부의 유생, 관리, 군인까지 참여.

조선의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고 항일의병운동의 단초를 열었음.

중국의 태평천국 혁명, 인도의 세포이 투쟁과 함께 19세기 아시아 3대 농민전쟁의 하나로 평가.

 

4. 열강의 침략


국내의 청일 상권 침략


청의 간섭과 경제적 침투

 위안스카이의 간섭

원세개(=위안스카이)는 주차관 명목으로 서울에 남아 간섭.

그의 비호아래 청 상인들이 전국적으로 상리를 취하여 국내/일본 상인에게 타격. 서울에 중국인가 형성.

수륙무역장정 체결 이후 일본에서의 수입은 점차 후퇴, 청국 수입이 점차 증가.

청국은 일본과 달리 영국상해조선으로 직수출 하였고, 일본의 상품에 조악품이 많았음.

조선은 쌀, 인삼 등을 수출하고, 영국제 면제품 수입.


일본의 경제적 침투

임오군란, 갑신정변으로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되자 경제적 침략을 강화하여 조선을 상품시장 및 원료공급지화 정책을 사용.

1890년대 초 조선의 전 수입액의 50% 이상, 수출의 90% 이상이 일본. 농촌경제 파탄. 고리대금.

조선은 쌀, , , 생사, 피혁 등을 수출하고 면제품, , 농구, 석유, 소금, 성냥, 자기 술 등 수입.

일 어로협정(1889)으로 국내 어민의 피해가 크자 제주도에서는 1891년 일본 어민의 출어금지 를 요구하는 민란 발생.


조선 정부의 대응

ㄱ. 조선의 대응

조미수호통상조약(1882), 조일통상장정(1883)에서는 어느 정도 관세 자주권과 수출 금지권 획득.

정부의 상회사 설립: 1880년대 초평양의 대동상회, 서울의 장통상회 등 30여 개 회사가 영업권과 징세권을 위임.

혜상공국(1883): 영세상인인 보부상 보호책.

관영 운송회사: 기선회사(1884), 이운사(1892) 등에 세곡운반 전담

방곡령: 함경도에서 1889년 감사 조병식에 의해, 황해도에서 1890년 감사 조병철에 의해 내려짐. 일본은 조일통상장정 제 37조 위배를 트집잡아 조선은 10만엔 손해배상.

기타: 서울 시전상인들의 황국중앙총상회(1898), 경강상인들의 증기선 도입 등.

ㄴ. 대응했으나 대세를 뒤집긴 어려웠음.

청일전쟁(94.6~95.4) 이후 일본이 조선의 경제권 독식. 아관파천 전후(96) 열강(특히 러시아)의 이권침탈이 극심.



 

러시아 세력의 진출

정부의 친러화: 인아거청 정책

갑신정변 이후 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의 우호를 강화하고자 하였으나 미국이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자 러시아와의 교섭을 적극 추진.

러 통상조약(1884, 김병시-베베르): 베베르가 반청 경향을 보이던 조선 정부에 접근하여 중재 없이 체결.

러 비밀 협정 추진(1886, 명성황후-베베르): 3국의 분쟁 시 러시아 함대가 출동한다는 내용의 밀약을 체결하려 하였으나 청의 압력으로 폐기.

청의 대응

대원군 귀국조치, 비밀협정설에 트집.

묄렌도르프 대신 미국인 데니를 외교고문으로 추천(1886), 조선 사무를 청의 해관에 예속 조치. 데 니도 러시아와의 연결을 주장하며 청국의 고종 폐위 음모를 고발하고 청의 속방론 비판.

러 육로통상장정(1888, 조병식-베베르)

경흥이 대러무역을 위해 개방되고 조차지도 허용. 러시아인의 두만강 항해도 허용.

러시아는 원산과 절영도에 저탄소를 설치하려 하였으나 청의 간섭으로 실패.

 


영국의 진출 - 거문도 사건(18851887)

영국이 청의 양해하에 고종 22(1885) 함대를 파견하여 전라도의 거문도(해밀톤항) 불법 점령.

러시아는 조선정부를 통하여 항의하고 청에 대해서도 조선 영토를 점령하겠다 위협.

청이 개입하여 2년 동안 교섭 후에 영국 함대는 철수.

 


중립론

정부는 박정양을 주미전권공사로 미국에 파견(1887)하여 접근을 꾀함.

독일 영사 부들러가 조선의을 영세국외중립국화 운동을 정부에 건의, 묵살.

유길준의 중립론(1885), 묵살.

● 유길준의 업적

정치적으로 법치주의적 민주주의, 경제적으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목표로 하고 군민 공치가 적절하다 함.

한성순보에 발표한 회사설에서는 근대적 상업체제로의 전환을 강조.

㉢ 「서유견문은 그 나라에 알맞은 독자적인 개화의 길을 주장.

사회진화론처음으로 소개(양계초 음빙실문집)

거문도 사건 직후 중립론자. 김옥균도 중립론 주장.

㉥ 「조선문전(1895)저술 ⇨ 「대한문전(1909)재저술. 국한문혼용체.


3. 위정척사운동과 개화파보수파의 갈등



위정척사운동의 전개

위정척사운동의 경향: 서양 일본. 주리론에 바탕, 이항로 계열 유생들이 주도.

시 기

배 경

특 징

1860년대

통상반대운동

이항로, 기정진 등 척화주전론

1870년대

개항반대운동

최익현 개항5불가소

1880년대

개화반대운동

이만손 영남만인소, 홍재학 만언척사소

1890년대

항일의병운동

유인석 문석봉

위정척사운동의 전개

이항로 동부승지를 사직하고 겸하여 소회를 진언한 소: 서울 근교의 노론 산림학자 이항로는 상소를 올림. 고종 4(1867)에 편찬된 그의 언행록 화서아언속에서도 같은 사상을 밝힘. ‘존체 통개언로선무비용덕인의 구체적 대응책을 제시. 기정진도 같은 내용의 척사론 주장.

최익현 오불가소: 이항로의 제자인 유학자 최익현은 도끼를 들고 대궐문 앞에서 상소하다 구속. 최익현은 풀려났으나 1905년 을사조약으로 태인에서 의병 등을 일으켰다가 순창에서 관군과 접하여 체포되고 대마도로 유배, 단식 투쟁 끝에 순절(1906).

이만손 영남만인소: 1881조선책략의 유포로 위정척사 운동이 비등. 이만손은 조선책략의 내용을 비난하고 김홍집의 처벌을 요구. 홍재학의 상소도 이와 유사. 이만손은 강진 유배, 홍재학은 능지처참 당함.

위정척사운동의 의의와 역기능

의의: 내수외양 정신의 표현

역기능: 전근대 체제를 유지시키려는 데 목적, 역사의 발전을 가로막는 기능.

 


임오군란(=도봉소 사건, 1882. 6)


배경

개화파와 수구파가 대립: 대원군은 정권을 되찾기 위하여 고종 19(1881) 서장자 이재선을 국왕으로 추대하고 고종을 폐위하며 일본 공사관을 습격, 개화론자를 제거하려 하였음.

구식 군대의 차별 대우: 민씨 정권이 별기군을 우대하고 구식 군대를 차별 대우하는 불만에서 폭발(1882).


경과

13개월이나 급료가 밀린 구식 군대가 선혜청 고리의 사리에 분개하여 관리와 싸움

선혜청 당상 이자 병조판서인 민겸호가 주동자를 잡아 사형을 언도하자 군졸들이 민겸호의 집을 습격하였고 그는 도망

대원군은 군졸들을 배후 지휘하여 포도청과 경기감영 습격, 별기군 일본인 훈련장교 살인, 일본 공사관 방화

일본공사 하나부사는 도주. 다음 날 민겸호와 이최응을 죽이고, 명성황후는 충주로 도주

재집권한 대원군은 2영과 별기군을 폐하고 5군영을 부활, 통리기무아문 폐지.

그러나 대원군의 재집권은 오래 가지는 못했다.


결과


일본의 대응: 거류민보호를 구실로 하나부사 공사에게 군함 4척과 육군 1개 대대 파견.

20일 이내에 군란책임자 처벌, 그 기일 안에 체포하지 못할 때에는 일본국이 처리.

5만 원을 내어 피해를 입은 일본 관리들의 유족 및 부상자에게 지급.

일본이 받은 피해 및 공사를 호위하는 육해군의 경비 중에서 10만원씩을 5년동안 조선이 지급.

공사관에 경비병 주둔시키고 비용은 조선이 부담.

기타 조선 사죄사 파견, 일본 상인의 여행범위 확대 등

제물포조약(1882, 이유원-하나부사) 체결


청의 대응: 김윤식, 어윤중의 요청으로 속국 보호 명분으로 3천여 군대를 파견하여 조선 군민 살상, 대원군 납치. 명성황후 일파가 재집권하여 청에 사대정책.

청은 오장경, 원새개, 마건상, 묄렌도르프 고문을 보내어 내정간섭

통리외무아문(외아문-후에 통 리교섭통상사무아문)과 통리내무아문(내아문-후에 통리군국기무아문) 설치

묄렌도르프와 마건상을 외교고문으로, 하아트를 세관고문으로 파견. 상무감독관 진수당 파견

원세개가 조선군대를 청나라식으로 훈련. 상민수륙무역장정(1882) 체결.

 



(3) 갑신정변(1884)


개화당의 활동

1882년 박영효가 임오군란 뒤처리로 일본에 간 뒤에 개화당의 활동이 활발화.

개화당의 건의로 일본 유학생 50명 파건, 김옥균 기화근사, 박영교 지구도경보급. 박문국, 전환국, 기기국, 우정국 등 설치.

김옥균은 유대치, 박규수 등의 지원 하에 세력을 넓히고 충의계라는 비밀조직 결성(1878)

한계성: 그러나 일본의 태도가 냉담하여 개화 운동을 위한 차관 도입에 실패. 친청 민씨 일파의 견제.


배경

친청 세력의 개화당 탄압: 신변에 위혐을 느낀 개화당 요인들은 비상 수단을 도모.

개화당과 집권세력 사이의 대립: 정부는 묄렌도르프의 건의로 당오전을 발행하려 하였지만 김옥균은 일본 차관을 제안. 고종은 병행하기로 하였으나 차관도입 실패.

조선 주둔 청군의 철수: 청이 베트남 문제로 프랑스와 전쟁 상태로 들어가(1884) 조선 주둔 청군의 일부가 철수하자 개화당은 정변의 기회로 삼음.

일본 공사의 지원 약속: 개화당은 미국 공사관의 지원을 얻는 데에는 실패했으나, 일본 공사의 지원을 약속받음. - 그러나 실제로는 지원 안 함

청의 내정 간섭과 개화 정책의 후퇴: 이에 대한 반발로 급진 개화파들은 갑신정변을 일으킴.


경과: 갑신정변 14개조 요강

내 용

분 석

청에 잡혀간 대원군을 돌아오게 하고, 청에 대해 행하 던 사대허례 폐지.

자주독립의 역설, 대원군 송환, 청에 대한 사대 관계 폐지

 

문벌 폐지 사민평등 확립.

 

조세제도(지조법) 개혁, 관리부정 방지.

 

내시부(환관) 폐지, 인재등용

 

탐관오리 처벌

 

상환미를 영구히 받지 않음

환곡제 폐지

규장각 폐지

구조 조정

경찰제도 정비

 

혜상공국(보부상들로 조직된 행상인 관청) 폐지

특권적 상업 체제 폐지

투옥유배자 감형

 

4영을 1영으로 할 것

 

모든 제정은 호조에 통할

 

정부, 6조 외에 불필요한 기관 폐지.

 

대신과 참찬은 매일 합문 내의 의정소에 모여 정령을 의결반포(입헌군주제 요소)

 

개화당은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켜 14개조의 개혁요강 발표.

청국 군사가 창덕궁을 포위하여 일본과 전투 후 왕을 구출. 일본공사관 피격, 홍영식박영교는 피살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공사 다케소에는 일본 망명(삼일천하).

 


결과

조선은 예조참판을 일본에 보내 개입에 항의하고 망명자의 송환을 요구.

일본은 공사관 전소와 거류민 희생을 이유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고 7척의 군함과 군대를 인천 파견.

한성조약(김홍집-이토 히로부미)

조선은 국서로 일본의 변란에 사의 표명.

일본 거류민 피해자에 위로금 11만원(12만엔).

이소바야시 대위 살해자를 잡아 처단.

일본 공사관 신축지 및 신축비 2만원 지불.

일본군 영사로 공관부 대지 택정.

천진조약(이토 히로부미-공사 파아크스-이홍장)

청일 양국은 조선으로부터 4개월 이내 공동철병.

청일 양국군은 조선에 군사교관을 파견하지 않음.

조선에 변란이 일어나 양국 중 어느 한 나라가 군 대 파견의 필요가 있을 때에는 사전통고

 

한성조약(1884)과 천진조약(1885) 체결.

- 한성조약은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의 조약이다.

- 천진조약(텐진조약)은 일본과 청 사이의 조약이다.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은 18943월 상해에서 홍종우에게 사살되고 양화진에서 능지처참.


의의: 인민평등의 이상만을 내걸고 국가의 주권수호와 위기관리, 국민 정서를 거의 외면한 위로부터의 개혁.

 

. 근대화의 시련과 민족운동


1. 근대사회로의 정치적 변화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


흥선대원군의 집권: 철종 서거 후 대원군의 생부인 이하응(흥선대원군)이 고종을 섭정(16731873).

개혁의 방향

개혁의 내용

전제왕권강화

인재등용

안동 김씨 세력을 누르고 사색을 고르게 등용

통치기구 정비

의정부와 삼군부(신영남영마병소)가 부활하여 정치와 군사 분리

법전 완비

고종 2년 조두순, 이유원에 의해 대전회통 편찬.

보조법전인 대전조례 편찬. 육전조례 편찬.

서원 정리(1871)

47개소만 남기고 정리

- 참고로 흥선대원군 하야 후 여럿 부활(만동묘 포함)

위민사회개혁

전정

은결 적발, 토지겸병 금지, 부분적 양전실시

군정, 동포제

군포를 양반에게까지 확대하는 동포제(호포제) 실시 하여 양반의 원성을 삼

환곡, 사창제

환곡제를 사창제로 개혁하였으나 성과는 없었음

경복궁 중건

(재정실책)

영건도감을 중건하고 원납전을 강제징수.

당백전(종래돈의 100) 발행. 통행세 징수, 결두전(1결당 100) 부과

양반들의 묘지림 벌목, 백성들의 토목공사 동원.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 ‘폐정쇄신봉건적 개혁

개혁 정치의 의의: 전통적인 통치 체제를 재정비하여 국가 기강을 바로 잡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데 어느 정도 기여.

한계: 전통 체제 안의 개혁이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배경(서세동점)과 이양선 출몰

영국은 아편전쟁을 일으켜 청은 최초의 문호개방인 난징조약(1842)을 체결. 미국은 일본을 위협하여 미일 화친조약 체결.

이양선

최초로 영국 상선 로드 암허스트호가 통상 요구(1832). 

프랑스 세실의 통상요구 거절(1846). 러시아(1845), 독일(1866), 미국 셔먼호(1866)이 통상 요구.

천주교 확산과 서양 상품의 유입: 대원군 집권 이전부터 프랑스 선교사가 국내에 잡입, 선교 활동을 하여 신자가 점차 늘어났고, 의주, 동래 등지를 통하여 서양 상품이 불법 유입되고 있었음.


국내의 반응: 애로우호 사건(1858)과 베이징 조약(1860) 체결 등이 위기의식을 조성하여 동학, 위정척사, 개화사상의 대두.




쇄국정책의 강행: 병제병오신척

병인박해(66.1) - 제너럴셔먼호(66.8) - 병인양요(66.9) - 오페르트도굴사건(68) - 신미양요(71) - 척화비(71~72)

병인양요(고종 31866)

원인: 대원군은 처음에는 천주교에 관대. (철종 이후 이미 베르누, 리델 등 프랑스 선교사가 활동) 연해주를 차지한 러시아가 경흥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자(1864) 대원군은 신도 남종삼의 건의에 따라 프랑스 신부를 이용하여 견제하려 하였으나 거절.

경과: 청국에서 탄압하자 대원군도 탄압. 벽파 조두순의 배외정책 압력과 천주교의 만연이 조선 유교사회를 말살시킨다 하여 고종 3년에 남종삼, 정의배 등 신도 8천여명과 프랑스 신부 9명 사형. 탄압을 계속한 병인사옥(=병인박해, 66.1) 발생.

결과: 탈출한 리델 신부가 프랑스 극동함대의 로즈 제독에게 사실 보고. 프랑스 정부는 신부의 처 형을 구실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고자 극동함대 7, 1천 군사를 끌고 강화도 점령. 대원군은 훈 련대장 이경하 휘하에 순무영을 설치하여 대응, 이항로 등의 척사론자 등과 한성근 문수산성, 양 헌수 정족산성 전투로 승리. 프랑스군은 40여 일만에 물러나며 약탈과 방화 자행.


오페르트 사건(1868): 고종 32차에 걸친 통상요구를 거절당한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프랑스 신 부 페론과 함께 충청도 아산만에 상륙하여 관청을 습격하고 남연군의 무덤을 도굴하려다 실패. 유 생들은 존화 양이론 주장, 대원군은 쇄국 의지 강화.


신미양요(1871)

원인: 병인양요 이전에 미국 상선 제네럴 셔먼호가 대동강에서 통상을 요구하다 평양군민과 충돌하여 선원과 배가 소실.

경과: 미 대통령 그란트의 명을 받은 베이징 주재 미국 공사 로오는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 에게 조선 정벌을 명하여 5척의 군함과 1,200명 군대를 보내 강화도를 공격. 미국은 초지진을 함락하고 광성진 포대까지 점령.

결과: 어재연이 이끄는 경군과 강화 수비군이 광성진과 갑곶에서 대항하여 20일 만에 물리치고 어재연은 전사.



쇄국정책의 강화

대원군은 척사교서를 반포. 주요 지역에 척화비 건립(1871). 해국도지의 영향으로 전함 수뢰포 완성.

하지만 대원군 하야 후 척화비는 상당수 철거되게 된다.



2. 문호 개방


개항의 배경

흥선 대원군의 하야: 고종이 성인이 되고 서원 철폐에 대한 지방 유림의 반발과 왕후 및 개화파의 통 상개화론에 밀려, 대원군이 1873년에 물러남.

통상 개화론의 성장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등이 당시의 조선 사회는 개방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지만 개방이 불가피 하다고 주장. 역관이었던 오경석은 해국도지, 영환지략등 개화 서적을 접하기도 하고, 승려 이동인을 비롯하여 중인과 상민 계층에서도 개화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출현.

고종과 노론 북학을 계승한 통상 지지파인 명성황후 일족(민태호, 민영목 등)이 집권.

고종과 개화추진세력의 입장: 전면적인 서양화는 아닌 동도서기론.

급진 개화파: 북학을 계승한 대외통상 개화론자들(김옥균, 김홍집, 홍영식, 서광범 등)은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하는 입헌군주제 혹은 서양식 공화정 추진. 변법개화사상으로 발전하고 사회진화론과 연결되 어 공리주의로 나아감.

1. 역사지리서: 해국도지(위원), 영환지략(세계여), 지구전요(최한기), 보법전기(왕도), 서유견문(유길준)

2. 정치법률서: 조선책략(황쭌셴), 만국공법」․「이언(정관응)

3. 자연 과학 서적: 격물입문(Martin), 박물신편(Hobson)

 


일본과의 관계와 조약 체결

일본 국내의 입장: 18세기 이후 국학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854년 미국에게 개항당한 일본은 메이지 유신의 신정부 수립을 알리며 조선과 다시 수교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함. 일본에서 정한론이 대두하였으나 온건파의 반대로 후퇴. 조선은 일본과 외교 단절.

정한론이 보류되자 집권당은 18744월 대만을 침공하였으나 청국의 반대로 배상금을 받고 물러나 조선으로 주의 집중.

병자수호조약(강화도 조약)과 개항

운요호 사건: 18754월 일본 군함 3(춘일호, 운요호, 제이정묘호)이 부산에 출현. 8월 운요호는 강화도에 접근하여 조선 측의 발포를 유도하였고, 조선의 공격에 즉각 반격하며 영종도에 상륙하여 약탈과 살육 감행.

강화도조약 체결(1876): 일본의 요구에 조선정부는 박규수, 신헌의 의견을 들어 조선 대표 신헌과 일본대표 구로다 사이에 전문 12개조의 불평등 통상수호조약 체결.

내 용

의 미

조선은 자주국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

청의 종주권 부인 의미, 일본의 침략 의도

15개월 후에 양국은 서로 사신을 파견.

김기수, 김홍집을 수신사로 파견

개항장에서 일본상인의 무역과 조계 설정 등.

 

20개월 이내에 부산과 그 밖의 두 항구 개항.

부산(경제적), 원산(군사적), 인천(정치적) 개항

일본은 조선연안을 자유로이 측량할 수 있다.

주요 군사 기지를 점령하기 위한 것으로 주권 침해

양국의 민간무역활동에서 관리의 불간섭.

 

일본은 조선이 지정한 항구에 영사 파견.

 

치외법권 인정

가장 독소적

조일수호조규부록

조선 내에서 일본외교관의 여행자유

개항장에서 일본거류민의 거주지역(통행거리 사방 10)

일본화폐의 유통허용 등

조일통상장정(=조일무역규칙) 잠정적 통상협정

일본의 수출입품에 비과세

양곡의 무제한 유출 등

(천재지변시 사전 통고후 수출 금지 가능)

강화도 조약에 따른 조일수호조규부록(1876)과 조일통상장정(1876. 7.)

개정된 조일통상장정(1883, 민영목-죽첨진일랑): 수출입 상품에 대한 관세, 조일통상에 대한 절차규정, 최혜국 대우, 방곡령 실시시 일본에 사전예고 등.

일본과 조약 체결 후 정부의 입장: , 일본, 서양세력에 대해 세력균형 정책 실시. 미수호통상 조약(1882) 체결.

강화도 조약의 의의: 부산 일본의 선택으로 원산(군사적 목적), 인천(정치적 목적) 개항. 1883년 통 상장정으로 일제는 침략의 발판 마련. 우리나라는 보호조치를 취할 수 없게 됨. 식민지의 계기.


 


서양제국과의 통상장정체결

미 수호 통상 조약(1882)

체결 배경: 조선 책략이 국내 지식층에 유포되어 미국과 외교를 하여야 한다는 주장 제기.

조약의 체결: 청과 이해관계가 일치되어 신헌-리홍장-슈펠트 사이에 체결.

조약의 내용

양국 중 한 나라가 제3국의 압박을 받을 경우 서로 도와 준다.

영사 재판에 의한 치외 법권과 최혜국 대우.

조약의 성격: 서양과 맺은 최초의 조약으로 불평등 조약.

1. 전래: 주일 청국 참사관으로 있던 황 쭌셴이 동양 3국이 펼쳐야 할 외교 정책을 쓴 것으로, 2차 수신사 김홍집이 소개(1880).

2. 요점: 러시아의 남하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중국, 미국, 일본과 결속해야 한다. 서양의 기술을 배워야 한다. 예수와 주자를 동격으로 표현.

3. 영향: 개화 운동을 자극, 위정척사 운동을 강화.

청은 일본의 조선지배를 차단하려고 조청 상민수륙무역장정(1882) 체결: 치외법권, 청상인의 내지통상 권연안어업권

청의 추천을 계기로 한 열강과의 통상조약: 영국(1882. 4, 민영목), 독일(1882. 5, 조영하), 이탈리아 (1884. 5, 김병시), 러시아(직접, 1884. 7, 김병시), 프랑스(1886, 김만식, 직접), 오스트리아(1892, 권 재형), 필리핀(1901, 박제순), 벨기에(1901, 박제순), 덴마크(1902, 유기환) .

영 수호 통상 조약(1882): 서양 최초의 통상 요구로 최혜국 대우와 내지 통상권 규정.

러 수호 통상 조약(1884): 일의 반대로 지연, 직접 수교.

불 수호 통상 조약(1886): 천주교 반대 문제로 지연, 천주교 신앙 및 선교 자유 허용.

 


개화운동

신문물 수입

수신사(18761881): 1차 김기수(1876), 2차 김홍집(1880) 파견. 김기수는 일동기유, 수신사 일기 저술, 김홍집은 황쭌셴 조선책략과 정관응 이언소개.

신사유람단(1881): 박정양, 어윤중, 홍영식 등이 일본의 근대기관을 살피고 돌아옴. 수행원 중 유길 준, 윤치호 등은 유학.

영선사(1881) 김윤식 등을 톈진에 파견, 학생들의 근대 기술에 대한 기본 지식과 정부의 재정 지원 부족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년만에 귀국. 영선사를 계기로 기기창(1883) 설치.

보빙사(1883): 미국 측의 푸트 공사 파견에 대한 답례로 민영익을 전권대사로 하여 미국에 파견. 사절단은 대부분 개화에 뜻을 둔 젊은이들.

개화운동

고종의 개혁: 규장각 기능 부활, 1881년 청을 모방한 통리기무아문(총리대신)과 산하 12(당상관) 설치. 5군영을 2영으로 개편(무위영장어영)으로 개편하고 별기군(교련병대) 신설.

사대사: 대중국 외교

교린사: 교린외교

군무사: 군대통솔

변정사: 변방사무외국정탐

통상사: 통상무역

기계사: 기계제조

선함사: 선박군함제조 감독

군물사: 병기제조

기연사: 왕래 선박 순찰

어학사: 외국어언어문자

전선사: 인선

이용사: 물품조달

일본의 사정: 자유민권운동가들이 흥아회를 조직하여 아시아 연대론주장. 뒷날 김옥균의 삼국합 종론(삼화주의)’, 안경수의 일청한 동맹론에 영향.

<현대 경제사 간단요약 표>


1950

농지 개혁 실시

1953

1차 화폐 개혁

1962

2차 화폐 개혁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시작(SOC 시작)

1965

일 협정 조인

1970

경부 고속 국도 개통새마을 운동 시작

1973

1차 석유 파동(아랍 산유 6개국 원유가 인상)

1977

수출 100억 달러 달성

1979

2차 석유 파동(석유 수출 기구 원유가 평균 59% 인상)

1993

금융 실명제 실시(김영삼 정부)쌀 개방 관련 담화

1995

WTO 체제 출범수출 1,000억 달러 돌파

1996

OECD 가입

1997

IMF 구제금융 신청

2001

IMF 위기 탈피, WTO 뉴라운드 출범

 



. 경제 발전을 위한 노력


1. 광복 직후의 경제 혼란


일제하의 경제


광복 후 경제 혼란

미군정기의 경제적 어려움: 높은 인플레이션, 원자재와 소비재 부족, 식량 부족 등.

미군정과의 갈등

소작료 인하 요구:

미군정은 일본이 가지고 있던 토지를 비롯한 재산을 인수하여 산하 기관인 신한 공사에서 관리

소작료를 1/3로 낮추고, 지주가 일방적으로 소작 계약을 깨뜨리지 못하게 하는 등 부분적으로 농민의 요구 수용

그러나 소작료의 추가 인하와 금납제를 요구하는 농민들과 갈등이 커져 갔다.

101 대구 봉기: 19469월에는 철도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대구 등 여러 곳의 민중 봉기로 이어 졌다.

자원과 시설 부족 




경제 회복을 위한 노력

1공화국의 경제 정책 기본 방향: 공 균형 발전, 소작제 철폐, 기업활동 자유, 사회 보장 제조, 인플레이션 극복 등.

경제 안정 시책 추진: 일본인들이 소유했던 공장을 민간인에게 불하(46년 2월부터)하여 산업 자본의 형성이나 신흥 재벌 형성의 계기가 되었다.


농지 개혁법(1949. 6)

목적: 농민생활의 향상과 국민경제의 균형 발전을 위해 경자유전의 원칙 하에 실시.


방법: 이 법은 이듬해에 일부 수정되어 실시되었는데, 산림과 임야를 제외3정보 이상의 농지를 가진 부재지주의 농지를 국가에서 유상 매입하고 영세 농민에게 3정보를 한도로 유상 분배 하여 5년간 수확량의 30%씩을 상환토록 하였다.

결과: 소작농이었던 농민들이 자기 농토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산업자본주의 형성에 기여하였다. 또한 지주계급은 소멸되고, 농업은 자본주의 경제체제 안에 포섭되었다.

의의: 625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농지개혁이 이루어져 남한의 공산화 방지에 일조.


한계

소작농의 부담 가중: 개혁 이전에 지주계층은 소작인에게 자기들의 토지를 강매.

농지개혁 기간의 연장: 한국전쟁 발발로 기간의 연장이 불가피.

- 연장이 왜 한계냐면, 이렇게 시간을 질질 끌게 되면 지주들이 법의 변화로 인해 불리한 점들에 대한 대비를 할 수 있게 되므로, 사실상 그 부담이 소작인들에게 전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개혁 이전에 소작인에게 강매했다는 그런 점 등)

신흥지주계층과 소작제의 부활 현상: 지주계층의 사전 강매에 따른 경제적 부담과 유상분배에 따른 빈농의 곤란으로 자기소유 농지를 되팔게 되었고 부농이 이를 겸병하는 현상 발생.

산림과 임야의 제외: 농지만을 대상.

지주의 개혁대상 제외: 3정보 이상의 땅도 지주들이 매각하여서 개혁 대상에서 제외.


 

남한

북한

개혁안

농지 개혁법(산림, 임야 제외)

토지 개혁법(전 토지)

법령 공포

19496(19503월 개정)

- 기출: 신한공사랑 아무런 관련 없다. 신한공사는 46.2~48.3까지 존속했다.

19463

- 기출: 우리보다 먼저니까, 우리가 이에 영향을 미쳤다고 하면 틀린다.

원칙

유상 매입, 유상 분배

- 기출: 좌우합작 7원칙(46.10) 때 보면 "몰수, 유조건 몰수" 이런 문구가 있는데, 이거랑 헷갈리면 안 된다.

무상 몰수, 무상 분배

토지 상한선

3정보

5정보

 



2. 경제 발전

한국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피해

생산 시설의 파괴: 남한은 생산 시설의 42%가 파괴. 특히 경인 지방에 밀집되어 있던 섬유 공업과 인 쇄 공업 분야가 격심.

물가 폭등과 물자 부족

 


1950년대 후반 경제 복구 사업

경제 복구 사업의 본격화

삼백 산업: 1950년대(이승만 정권)에 제분(밀가루), 제당(설탕), 섬유 공업(면방직)이 성장한다.

- 기출: 52년~58년(이승만 정권)에는 미국이 "무상 원조"를 했고, 60년대 박정희 정권 때부터는 "유상 차관"을 들여오게 된다.

- 기출: 면방직, 설탕, 밀가루 등의 "3개의 하얀색" 소비재 산업을 "삼백"산업이라 한다.

취약한 경제 구조

수입에 의존: 소비재 산업은 성장, 생산재 산업은 발전하지 못함. 생산재에서 원료까지 수입에 의존.

미복구와 원조 감소: 농업 분야의 복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원조가 줄어들면서 어려움을 겪음.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추진


경제 개발 계획의 수립 과정

최초 계획: 1공화국 하에서 작성된 7개년 계획.

수정: 2공화국에 의해 5개년 계획안으로 수정.

- 기출: "5개년" 계획의 최초 "제안"은 2공화국 장면내각이다.

- 기출: 5개년 계획의 "실시(62년~66년)"는 박정희 정권 때이고, 그 중에서도 군정(61.5~63.10) 때 시작됐다.

본격적 실시: 516 군사 정변 후 군사 정부에 의해 재수정되어 1962년부터 실천.


경제 개발 계획의 추진 과정

1960년대: 1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에서는 기간 산업의 육성과 경공업 신장에 주력.

1970년대: 34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에서는 중화학 공업의 육성과 광공업 비중이 증가.


1

19621966

경제 자립 달성을 위한 공업화 기반 구축

군정~제3공화국

2

19671971

SOC를 시작하긴 했는데, 아직 경공업이 대세이다.

중화학 공업은 아직 시작 안 했다.

제3공화국 시절 때의 일이다.

3

19721976

중화학 공업 중점 개발

10월 유신 직전이라 볼 수 있다. 72년 1월에 실시했으니.

4

19771981

국민 경제의 균형과 조화, 복지 사회 건설

제4공화국 때의 일이다.

5

19821986

경제 안정 기반 정착, 국민 복지 증진

6

19871991

능률과 형평을 토대로 한 경제 선진화 달성

7

19921996

경제의 선진화와 통일에 대비한 경제의 내실화 및 효율화 추구

 


성과

사회 간접 시설의 확충.

간척 사업이 진행되고 작물의 품종 개량이 이루어져 식량 생산도 증대.

19621981년 사이에 수출이 비약적으로 증가.

- 기출: 77년에 100억달러 달성한다.

국내 자본의 축적이 이루어져 외국 자본에 의존하던 자본 구조가 어느 정도 개선.

폐단: 소수의 재벌. 산읍의 수출 의존도 심화.

1980년대 중반 이후(전두환 정권): 3저 호황으로 물가가 안정되고 수출이 크게 늘어나 무역 수지가 흑자로 돌아섰으나, 전체 경제의 외국 의존도는 더욱 증가.

경제 개발 계획의 문제점: 국민 간의 소득 격차, 정부 주도형의 경제 체제 등.

 





. 현대 사회의 변화

2. 산업화와 도시화

농촌 문제

새마을 운동: 1970년대에 제창되어 근면, 자조, 협동을 기본 정신으로 삼음.

 

4. 노동 운동

정부의 통제와 노동 운동의 활성화

정부의 통제: 1980년대 중반기 이전만 해도 노동자의 단체 교섭권과 단체 행동권을 크게 재한.

노동 운동의 활성화: 1987년 이후 정치적인 민주화와 함께 노동 운동도 활성화. (87년 6.29 민주화 선언 이후)


국민 연금법

1986

국민의 노령 또는 폐질, 사망에 대하여 연금 급여를 실시.

의료 보험 제도 확대

1989

전 국민을 대상으로 국민 의료 보험 제도 실시.

고용 보험 제도

1995

실직자가 다시 취업할 때까지 생계를 보장.

국민 연금 제도

1998

 

국민 건강 보험법

1999

국민의 질병, 부상에 대한 예방, 진단, 치료

재활과 출산, 사망 및 건강 증진에 대하여 보험 급여 실시

남녀 차별 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

1999

 

국민 기초 생활 보장법

1999

최소한의 기초 생활 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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