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성리학의 융성


⑴ 성리학의 두 흐름(훈구파와 사림파)


훈구파(관학파=혁명파, 15세기)

사림파(사학파=온건파, 167세기)

역성 혁명 찬성

원시 유학에 관심

부국강병, 중앙집권화 추구

사장 중시

불교도교 등을 포용

성균관집현전 출신

15세기 민족 문화 창달에 기여

막대한 토지 소유

왕도패도주의

군사학기술학 중시

격물치지경험적 학풍

치인지학 추구(지배로서의 학문)

자주 민족의식(단군숭배)

주례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사용

(주나라의 제도를 기록한 유교 경전)

역성 혁명 반대

성리학 이념에 충실

왕도 정치와 향촌자치 추구(향약실시 주장)

경학 중시

불교도교 등 배척

지방 사학 출신

16세기 이후 사상계 주도

중소 지주충

왕도정치 강조

기술학 천시

사변주의관념적 학풍

수기지학 추구(수신으로서의 학문)

중국중심 화이사상(기자)

3사 장악, 훈구파 비판(사화)

형벌보다는 교화에 의한 통치를 강조

 



⑵ 성리학의 발전(주리론과 주기론)


서경덕조식이언적이 선구자이고, 조식은 노장 사상에 포용적이었으며 학문의 실천성을 특히 강조

이언적

서경덕(불교노장 사상에 개방적)

이황(주리론) - 이기 이원론

이이(주기론) - 일원론적 이기 이원론

원리 중시

도덕과 명분(원리) 강조

일본 성리학에 영향

•「주자서절요, 이학통록

성학십도(군주 자신이 성학을 따를 것을 주장)

 

영남학파에 영향(김성일, 유성룡 등)

예안향약

백운동서원 소수서원으로 사액

도산서원(후진양성)

경험적 세계 중시

현실 개혁에도 관심

실학으로 연결

동호문답

성학집요(현명한 신하가 성학을 군주에게 가르쳐 그 기질을 변화시킬 것을 주장)

기호학파 형성(조헌, 김장생 등)

해주향약, 서원향약

소현서원

•「만언봉사: 10만양병설, 동호문답: 대동법 주장

지나친 도덕주의로 현실적인 부국강병책에는 소홀

 

 

19세기 위정척사, 항일의병

18세기 실학

19세기 개항

 





학파정파의 형성과 대립


① 주리설(주리론)과 주기설(주기론)


영남학파

(동인,

주리론)

남인(이황)

경기도 남인(이익, 정약용) 중농주의 실학

경상도 남인 위정척사 사상

예송 논쟁을 일으킴(남인서인)

수취체제 완화와 자영농 육성 주장

상업기술 발전에 소극적

왕권 강화 중시(갑인예송, 기사환국)

북인(조식)

절의 중시 정인홍, 곽재우 등 의병장 다수 배출

중립 외교(광해군 때) 추진

대동법 시행, 은광 개발 등 사회경제정책 추진

기호학파

(서인,

주기론)

노론

(송시열,

이이)

충정도 노론 - 주기론 고집

서울 노론 - 주리론 포용 북학 사상으로 발전

성리학 신봉, 이단 적극 배격

의리 명분론, 조선중화사상, 척화론 주장

일당 전제화를 시도하여 붕당 정치를 변질시켰다.

계승

한원진 임성주 등이 계승. 19세기 중엽의 최한기는 주기론과 관련된 경험주의 철학을 높은 수준으로 고양.

소론

(윤증, 성혼)

성리학 이해에 탄력적

양명학 연구

내정 개혁 주장



② 심성론 중심(인물성 - 이론 vs 동론)


호론

낙론

충청도 지방 노론 중심의 주장

한원진, 권상화

인물성이론

우리 문화의 자부심으로 청서양에 배타적

위정척사 사상에 영향

서울경기 집장 노론 중심의 주장

이간, 김창협, 이재

인물성동론

서양 등 이질적인 것을 포용하는 입장

북학 사상에 영향

 


예학과 보학의 발달: 예학은 예송논쟁의 구실로, 보학은 양반 문벌강화 역할.




 

4. 불교와 신앙


⑴ 불교 정책불교는 중국을 존중하는 세계관이 없어 유교의 약점을 보완


태조

도첩제 실시로 승려 수 제한, 사찰 증설 금질. 후에 흥천사를 지음.

태종

도첩제 강화. 사원전노비 몰수 등 억불책.

세종

종파 정리, 사원전노비 제한, 화장경행을 금지. 후에 궁중에 내불당 건립.

세조

원각사 건립, 간경도감 설치하여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등 숭상.

성종

도첩제 자체를 폐지

중종

승과 폐지, 법계 폐지, 승려 천민화

명종

문정 왕후의 지원 아레 보우가 중용되고 승과도첩제 부활. 후에 다시 탄압.

16세기

후반

서산 대사와 같은 고승이 배출되어 교리를 가다듬었고, 임진왜란 때 승병의 활약으로 위상 정립.

 


민간신앙


도교

장점: 제천행사는 국가권위 높임, 도교경전은 상무정신 함양. 양생술은 의학발달에 영향. 유교의 문 약에 빠지고 사대에 치우치는 약점 보완.

단점: 행사의 남용으로 국가 재정에 큰 손실 사원 정리 행사 축소

관청: 소격서가 (칠성단)초제를 주관하였으나 16세기 사림의 명분론에 맞지 않아 폐지.

기타: 마니산 초제


민간 신앙

풍수지리설, 도참 사상이 조선 초기 이래로 중요시되어 한양 천도에 반영. 산송문제 대두.

무격 신앙

민간 신앙 보호: 미신행위 금지, 민간신앙을 국가신앙으로 흡수, 무당을 국가가 채용.

삼신 숭배: 환인, 환웅, 단군의 삼신숭배를 국조숭배로 흡수, 구월산에 삼성사 설치제사 동시에 평양에 단군사당 건립제사.

세시 풍속

명당 선호 경향: 불교식으로 화장하던 풍습이 묘지를 쓰는 것으로 바뀌면서 명당 선호 경향이 두 드러졌다.

 

1. 교육 기관


인문 교육 기관: 중앙에 성균관과 4부 학당, 지방에 향교를 두어 각 군현의 인구에 비례하여 정원을 책정.


초등 교육: 서당

입학 대상: 사립 교육 기관으로서 사학이나 향교에 입학하지 못한 선비와 평민 자제들이 교육을 받았다.

입학 연령: 대가 8, 9세부터 15, 16세 정도였다.


중등 교육: 중앙의 4(4부 학당)과 지방의 향교.

사학(4부 학당): 중학동학서학남학이 있었으며, 정원은 각각 100명씩이었다.

㉡ 향교: 현에 각각 하나씩 설립.


③ 고등 교육성균관

명륜당: 유학 강의동 문묘: 공자 등 성현을 모신 곳 

양재: 기숙사 

존경각: 도서관 

비천당: 과거시험장



⑵ 기술 교육

교육 기관: 의학, 역학, 산학, 율학, 천문학, 도교, 회화 등으로 나누어 각각 전의감, 사역원, 호조, 형조, 관상감, 소격서, 도화서 등 해당 관청에서 교육.

학생 수와 교육 내용: 기술 교육은 군현의 크기와 지방의 특성을 고려하여 학생 수와 교육 내용을 조정.



 

2. 민족문화의 성립


민족 문화의 발달배경과 한글 창제

조선 초기 학풍: 집권층인 관학파가 과학기술과 실용 학문을 중시.

한글 창제: 1446년 반포.

 


실록의 편찬


실록의 편찬(태조실록철종실록)

태조실록: 태종때(1413) 편찬.

정종태종실록: 세종때 편찬

광해군 일기, 연산군 일기, 노산군 일기(숙종 때 단종 )

선조현종경종 수정(삭제) 실록


실록의 기록

정종태종실록 편찬 이래 춘추관에 임시관청인 실록청을 설치

왕의 사후에 사초를 정리하여 초정초의 과정을 편년체로 기록.

사초(사관이 국왕 옆에서 기록)와 시정기(각 관청의 문서를 종합하여 춘추관에서 작성)은 사관 이 외 열람 불가.


③ 실록의 보관

세 종

선조광해군

이괄의 난 이후

현재

춘추관 사고

춘추관 사고

춘추관 사고

이괄의 난 때 소실

충주 사고

오대산 사고

오대산 사고

도쿄대로 이전(1923년 지진으로 소실)

성주 사고

태백산 사고

태백산 사고

부산 국가 기록 보관소에 보관

전주 사고

(임진왜란 때 유일 보존)

마니산 사고

정족산 사고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

김일성대학교 보존

묘향산 사고

적상산 사고


국조보감: 실록 중 역대 왕들의 선정과 훌륭한 언행만을 모아서 간행. 왕들의 정치 참고서로 이용.



⑶ (조선 전기역사서의 편찬

(혁명파 사대부의) 성리학적 사관 조선 왕조 개창의 정당화 및 성리학적 통치 규범 확립이 목적

고려국사

정도전

태조 4(1395)

고려전체 역사

편년체

고려 멸망 당위성, 조선건국 합리화

동국사략

권근

하륜

태종 3(1403)

단군고려말

편년체

단군-기자-위만-한사군-삼한-삼국으로 상고사 체계화

15

 

(관학파의) 자주적 사관으로 자주적 입장에서 고려 역사를 재정리

고려사

김종서

정인지

문종 1(1451)

고려시대 역사

기전체

조선 건국 합리화를 위해 고려 말 왜곡(군주 중심의 역사서술)

고려사절요

김종서

정인지

문종 2(1452)

고려시대 역사

편년체

고려사에 누락분 보충추가(신하적 입장에서 서술)

삼국사절요

서거정

노사신

세조성종

삼국시대 역사

편년체

세조는 왕권강화와 부국강병의 목적으로 고조선-고구려-고려 역사체계를 이루려 함

동국통감

서거정

성종15

(1484)

박혁거세공양왕

편년체

3조선(단군, 기자, 위만)과 삼한-삼국-통일신라-고려로 이어지는 흐름, 삼국사절요고려사절요를 기초로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

16

(사림의) 존화주의적 사관으로 우리 역사를 소중화로, 기자 조선을 주목, 고유문화 이단시

동국사략

박상

14741530

 

강목체

15세기 동국통감을 비판요약, 엄정한 도덕적 기준으로 한국사 재정리

기자실기

이이

선조

(1580)

 

 

왕도정치의 기원을 기자에서 찾고 한국유학의 토착화에 기여


 


⑷ (조선 전기지도와 지리서의 편찬


역대제왕

혼일강리도

이무

태종 2(1402)

요하 동쪽의 조선과 일본을 표시한 세계지도로 동양 最古

팔도도

태종 2(1402) 이회 세종 16(1434) 정척 세조 때 양성지의 동국지도

팔도지도

정척,

양성지

세조 9(1463)

인지를 이용한 최초의 실측지도. 압록강 이북까지 기록되어 북방의 관심 표명.

조선방역지도

제용감관원 이이 외 11

명종1213

(155758)

조선 8도 주현도

 

신찬팔도지리지

윤준, 신색

세종 14

(1432)

최초의 인문지리서. 증보한 세종실록에 수록. 각 지방의 연혁, 호구, 토산 등을 기록.

팔도지리지

양성지

세조1성종 8

(14551477)

실록지리지의 미비점을 보완하기 위해 왕명을 받아 제작. 동국여지승람에 묻힘.

동국여지승람

서거정,

노사신

성종 12(1481)

팔도지리지세종실록지리지에 학교, 인물, 사묘, 시문 등 사대부의 취향이 반영된 전국 군현의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

이행, 홍언필

중종 25(1530)

동국여지승람을 증보 간행한 것이 현존

읍지

 

16세기

사림의 관심이 반영되어 각 군현을 단위로 작성된 지도

 


법전과 윤리서, 의례서


① 조선의 법전

구분

시기

편찬자

특징

조선경국전

태조

정도전

여말 선초의 조례를 정리한 최초의 법전

경제문감

태조

정도전

조선의 정치 조직의 초안

경제육전

태조

조준, 하륜

여말 선초의 각종 조례를 정리한 법전

경국대전

세조성종

최항, 노사신

조선의 기본 법전으로 세조 때 착수, 성종 때 교정반포

속대전

영조

김재로

경국대전을 보완

대전통편

정조

김치인

경국대전+속대전

대전회통

고종(대원군)

조두순

대전통편을 보완하여 편찬

육전조례

고종(대원군)

조두순

대전회통에서 빠진 시행 규례 정리


의례서 및 윤리서

삼강행실도(세종): 모범이 될만한 충신, 효자 등의 행적을 그림으로 그려 설명을 붙인 윤리서.

국조오례의(성종): 가의 여러 행사에 필요한 의례 정리서.

이륜행실도: 윤리서.

동몽수지: 어린이 예절 윤리서.




. 근세 사회


1. 문무 양반사회

양천제(양인-천인)

반상제(양반-상민)

법적인 기준, 조선 초기에 어느 정도 관철.

갑오개혁 이전까지 조선의 기본적인 신분제. 법 적으로는 노비만 천인.

현실적 신분, 16세기 이후 고정화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신분제 정착

 


양천제도와 반상관계의 전면화


양반의 삶: 점차 신분 명칭으로 정착.



중인의 생활

광의로는 양반과 상민의 중간신분, 협의로는 기술관.

15세기부터 넓은 의미의 중인으로 형성되어 후기에 독립된 신분층을 이룸.

기술관, 향리, 서리(경아전 녹사서리, 지방의 외아전은 향리), 토관, 군교, 서얼.

역관: 사신을 수행하면서 무역에 관여하여 이득을 보았다.

향리: 토착 세력으로서 수령을 보좌하면서 위세를 부리기도 하였다.

서얼은 중인과 같은 대우를 받아 중서라고 불렸고 문과 불가 무반 등용.

서리와 향리 및 기술관은 같은 신분 간에 혼인하고 직역 세습, 관청주변에 거주.

 


상민의 삶

농민: 상민의 대부분이며 조세공납부역 부담. 출세에 제약은 없었음.

수공업자: 공장으로 불리며 민관영 수공업에 종사, 공장세 납부.

상인: 시전 상인보부상이 국가의 통제아래 상거래에 종사, 상인세 납부.

신량역천

신분은 양인이나 고려 시대에 제염, 어업, 광업, 목축, 봉수, 간척, 도살 등 천역을 담당하던 계층

조예(문관청의 사령), 나장(무관청의 사령), 일수(지방 관청의 하인), 조군(조운선의 사공), 수군(해 군), 봉수군(봉수대 수직자), 역보(역졸) . 군역을 마치면 일반 양인.

 

상업공업광업수산업 종사자는 군역 면제이고 낮은 군직이나 잡직 가능



천민의 구성

노비

천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비자유민으로서 교육, 등용에 제한

재산으로 취급되어 매매상속증여 가능.

고려의 일천즉천제도가 17세기말 현종때 폐지되고 영조때 노비종모법’(1731) 확정.

장예원에서 노비 담당.

조선 초기에 양인으로서 천인이 된 자, 양천 교가소생 부곡민을 양민화. 후기에 양인으로 된 자도 다수.

소유주에 따라 관노(신공 납부, 관청 노동), 사노(외거, 솔거). 국초 관노 < 사노

조선 말기에 농민의 몰락이 심화, 사노비의 수는 격감. 노비신분 세습제 폐지는 1886.

모든 공노비는 60세가 되면 역이 면제. 노비의 신공은 노(남자)는 면포 1, 저화 20장이고 비(여 자)는 면포 1, 저화 10장이다.


㉨ 노비와 타 신분간의 결혼

고려 노비제도의 기본 원칙은 천자수모법+종부법=일천즉천이었다. 이것이 조선에 그대로 계승된다.

1. (노비)+(노비)=자식(노비); 모의 소유자가 자식 소유.

2. (양인)+(노비)=자식(노비); 천자수모법(고려)+노비종모법(조선) 적용되고 모의 소유자가 소유.

3. (노비)+(양인이상)=자식(노비); 종부법 적용되고 부의 소유자가 자식 소유.

4. (양반)+(노비)=자식(노비); 일정 수속을 거치면 얼자(양인)이 된다.

 

   

노비 외에 백정, 광대, 무당, 창기 등이 천민이었다.



 

2. 사회정책 개관


사회정책


정부의 농민통제책

오가작통법: 5호를 1, 5통을 1리로 조직하여 이장(이정)을 두고 위에 면()를 설치. 면장이 권농의 직임을 짐. 임난 후 속오법에 의해 방위조직화.

호패법: 태종 2(1402) 실시하여 3년마다 고쳐 작성.

 


구호시설


환곡

의창

고려 성종 때의 빈민구호기관으로서 중종 20(1525) 진휼청 설치로 폐지

15세기에는 의창 에서, 의창의 원곡 부족으로 기능 수행이 어려워짐

따라서 16세기에는 상평창이 환곡 담당(상평창의 이자는 1).


상평창: 고려 성종 때의 물가조절기관으로서 선조 41(1608) 선혜청 설치로 이에 병합.

사창: 양반 지주층이 운영한 주민 자치 환곡.

의료 시설

전의감: 태조 때 설치한 궁중과 중신의 치료기관 내의원을 분리시켜 삼의사 설치.

혜민서: 민간인의 치료기관.

혜민국과 동서대비원: 수도권 안의 서민 환자 구제와 약제 판매.

제생원: 지방민의 구호와 진료

동서활인서: 여행자, 유랑자의 수용과 구휼

 


법률


형법

형법과 민법은 기본적으로 경국대전에 종합.

실제로는 고려 이래의 대명률(태장도유사+자자+능지처사)에 의거.

반역죄, 강상죄는 연좌법 적용.


민법

주로 관습법에 의거, 가족제도에 관계되는 것은 주자가례에 준함.

민사재판은 관찰사와 수령이 담당.

상속 문제는 성리학 정착 이후로는 종법에 의거.


재판: 항소과정도 있었다.


사법기관

중앙(사헌부, 의금부, 형조, 한성부, 포도청, 장례원)

사헌부, 의금부, 형조: 정치적 중대 사건 담당

한성부: 수도의 일반행정, 토지및 가옥 소송 담당

장례원: 노비 소송 관장.

지방: 관찰사, 지방관, 토포사(진영장이 겸함)


신문고: 태종 2년에 설치하여 의금부에서 관장. 사헌부에서 해결되지 않는 억울한 일을 왕에게 직접 호소.



 

3. 향촌 사회의 모습


향촌 사회


향촌의 개념

: 중앙과 대칭되는 개념으로서 지방관이 파견되는 행정 구역상 군현.

: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면리 단위의 구역.


유향소

계승: 고려 말의 유향소가 지방세력화 하고 이시애의 난과 관계되어 세조 때 폐지했다가 성종 20 (1489) 향청으로 계승.

조직: 지방양반과 유향품관으로 구성되며, () 좌수(향정), 차석인 별감의 향임(2)수령이 임명.

기능: 수령자문향리의 비행을 규찰풍속교정정령시달민의대변향약운영수령의 횡포 견제. 민폐를 끼치는 경우도 다수.


경재소(=경소)

역할

중앙에 재직하는 고위 품관이 출신 지역의 경재소를 관장하여 유향소를 통제, 행사 주선, 공물 상 납에 책임을 지는 중앙-지방 연락기구.

왜란 이후(1603) 지방사족 명단으로 향안 작성, 향규 제정, 향회 집행.

조직: () 당상이 동향인 중 좌수 1, 참상별감 2, 참외별감 2명 임원 임명하고 유향소의 품 관도 임명. 고향의 경저리(=경주인=경인)이 경재소에서 업무 수행.

변화: 경재소 혁파(1603) 후 향소(향청)으로 개칭.


영저리(=영주인): 관찰사가 업무를 보던 감영에서 감영과 지방과 연락 사무를 보던 지방 향리. 폐단 큼.

 


촌락의 구성과 풍습


일반적인 촌락: 면리제 하에서, 반촌민촌 구분이 있었지만 두서너 씨족이 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으 며, 양반평민천민이 함께 살았음.


특수한 마을

교통기관에서: 역촌, 진촌, 원촌

어장과 포구에서: 어촌

수공업품 생산지에서: 점촌


향촌의 공동체 조직

사족: 동계, 동약을 조직하여 촌락민들에 대한 지배력을 신분적으로 강화하고자 하였으며, 지주제 를 통하여 사회경제적 지배를 관철.

일반 백성

동계동약: 사족들만이 참여하다가 임진왜란 이후 양반과 평민층이 함께 참여. 사족 지배 체제가 동요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향도, , 두레

석전: 조선 초기 상무정신을 함양하는 행사.

사림 세력의 성장에 따라 유교에 맞지 않는 것은 음사로 취급. 16세기 후반 이후로는 전통적인 향촌규약과 조직제가 향약으로 대치되고 친족 중심의 동족 부락이 형성.

향도계, 동린계 등의 마을축제는 상조기구로 기능 전환.



 

4. 성리학적 사회 질서


언론과 학문 중시

경연: 국왕과 대신이 한자리에 모여 학술과 토론을 통해 국왕의 학덕 배양.

서연: 세자와 대신이 한자리에 모여 학술과 토론을 통해 세자의 학덕 배양.

상소

구언: 백관의 의견을 묻는 제도.

 


⑵ 예학과 보학


예 학

보 학

종족 내부의 의례 규정

종족의 종적인 내력과 횡적인 종족 관계 확인

종적 단결 강화, 타 종족에 우월 의식 조성

가족과 친족 공동체의 유대를 통해 신분적 우위 확보

16C

중반

주자가례 중심의 생활 규범서가 출현하고 학 문적 연구 시작

16C

후반

성리학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예에 깊은 관심, 가묘와 사당 건립.

17C

양난으로 흐트러진 유교적 질서의 회복이 강 조되면서 더욱 중시. 예치가 강조.

김장생, 정구 등 예학자들이 다수 등장.

결과: 학파 간 전례 논쟁(예송)

영향: 정쟁의 구실, 양반 사대부의 신분적 우 월성을 강조하는 데 이용.

족보의 편찬과 예학의 발달은 조선 후기에 매우 성하여 양반문벌제도 강화에 기여




서원과 향약의 영향


서원의 기능

숭배추모: 이름난 선비나 공신을 숭배하고 그 덕행을 추모.

향촌 사회의 교화에 공헌

향음주례: 가을로 향음주례를 지내는 동안에 인재를 모아 학문도 가르쳤다.


서원

백운동서원(1543): 주세붕이 풍기의 죽계에 설립한 최초의 서원. 이황의 건의로 최초 사액을 받아 소수서원이 됨.

당쟁의 소굴화가 되고 민간 작폐가 심하였음 영조 때 300여개소, 대원 때 600여개소를 철폐하여 소수서원을 포함한 47개소만 남겼다.


향약

정착

중종 때 조광조 등의 사림파가 경재소유향소 철폐를 주장하고 향약 보급을 제안하였으나 성공 하지 못하고 각지에서 개별적 실시

이황에 의해 경상도를 중심으로 보급되다 선조때 본격적으로 보급.

보급: 중국 여씨향약(이황, 이이가 보급)이 최초, 해주향약(이이)이 널리 보급된 조선 후기에 가장 완벽한 향약.

조직: 도약정(회장), 약정(부회장), 직월(간사) 등의 임원을 두어 향청과 서원을 중심으로 운영.



 

5. 근세사회의 변동


신분의 계층분화

양반의 분화: 17세기 후반 붕당정치의 변질(노론의 일당전제화)로 정계에서 배제된 권반들이 향반토반잔반이 됨. 이름만 양반인 잔반의 경우 훈장, 농업, 상공업에 종사.


 

중간계층의 성장


서얼 대우의 변화

임진왜란을 계기로 납속책, 공명첩을 통하여 관직 등용.

정조 때 청요직 진출을 요구: 정조 때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가 규장각 검서관에 기용. 청요직 은 3사의 관직으로 판서정승 진출에 유리.

신해허통(철종 1851): 사관 등용 조치.


중인의 성장: 19세기 중엽 철종 때 대규모의 소청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실패. , 전문직으로서 존재를 부각.


위항문학: 중인을 위시한 평민, 노비 등의 문학을 통틀어 지칭. 시사도 조직.

㉠ 「해동유주: 숙종 때의 문관이자 시인인 홍세태가 편집한 위항시집.


 


노비의 신분상승 추구


노비의 신분상승

조선 후기에 군공과 납속을 통한 신분상승을 꾀하고 있었음.

18세기 전반에 종모법(아버자가 노비라도 어머니가 양민이면 자식이 양민)이 원칙으로 허용되면서 활발.

신분상승에 실패한 노비들은 도망을 가서 임노동자, 머슴, 행상 등으로 생계유지. 남아있는 노비들 이 도망자 신공을 부담.

정부에서는 신공을 줄이기도 하고, 도망 노비들을 찾아내려고도 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함.


공노비의 해방

공노비 중 일부를 입역노비에서 납공노비로 전환.

국가 재정 문제로 서서히 풀어주다 공노비의 신공 징수가 불가능하게 되자 순조 원년에 공노비 6 만 명을 해방.

사노비: 일반 농민이나 공노비에 비하여 더 가혹한 수탈과 사회적 냉대를 받았다. 사노비들도 조선 후 기에 신분 상승을 추구하여 도망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가족제도와 혼인모습의 변화

17세기 이후 가족제도: 가부장제 윤리와 주자가례 생활화로 부계중심화. 친영 제도 정착, 적통 장사상속.

양자 입양 일반화: 조선 후기에는 부계 중심의 가족 제도가 더욱 강화 되었으며, 아들이 없는 집안 에서는 양자를 들이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동성 마을 형성: 부계 위주의 족보를 적극적으로 편찬하였고, 같은 성을 가진 사람끼리 모여 사는 동성 마을을 이루어 나갔다.

혼인형태의 변화: 엄격한 족외혼. 일부일처제와 처첩제. 재가한 여자의 자손은 과거응시관료임명 불 가. 법적 혼인연령은 남 15, 14 이상.


 

인구수의 변동

한양의 인구 변화: 세종 때 1018세기에 20

전체 인구의 변화: 400600(세종) 500(임난 전후) 600(17C) 700(18C) 천만(19C )



 

6. 향촌의 변동


경영형부농(신향)의 출현과 변화된 양반중심의 향촌질서

지배층의 분열

양반이 전호, 임노동자로 전락하는 경우 발생

향반토반들은 문중 중심으로 사우, 서원을 건립하고 청금록향안, 향회, 항약을 통해 결속을 다 지고 동약으로 농민을 지배.

경제의 변화와 부농의 출현

관권을 실질 장악하였던 아전, 서리 등 향리의 세력을 강화하여 향촌질서를 무너뜨리려 하였다.

정부에서도 납속, 향직 등으로 부농의 합법적인 신분상승을 가능케 함.

부농층이 향임직에 진출.

(18세기 후반 이래 향리 세력의 성장에 따른)농민의 수탈 강화

부세가 토지를 중심으로 집중되어 향촌 질서 동요.

또한 전세, 군포, 환곡 등이 공동납제로 촌락에 부과되어 농민은 궁핍, 불만은 고조.

 


7. 농민층의 변동

농민의 분화모습: 농민은 경영형부농이 되거나 상공업으로 전업, 또는 도시광산의 임노동자로 분화. 농토로부터 이탈.

 

양반층의 증가와 임노동자의 출현

양반의 증가: 하층민이 부를 축적하여 공명첩을 사거나 족보를 위조하여 양반 또는 상민이 됨.

임노동자의 출현


 

8. 근대지향적 사회변화


사회불안의 고조

사회의 부패: 18세기 후반에는 정치 기강이 안정, 세도정치가 시작되며 사회가 부패.

부패의 심화: 19세기에 이르러 지배 체제의 모순이 심화. 게다가 1820년의 수재, 이듬해 콜레라, 도적, 이양선이 출몰.

도적의 창궐

화적: 수십 명씩 무리를 지어 지방의 토호나 부상들을 공격.

수적: 배를 타고 강이나 바다를 무대로 조운선이나 상선을 약탈.

 

예언사상의 유행

낭설, 비기(정감록, 토정비결), 도참, 무격신앙, 미륵신앙이 유행

19세기 초엽부터 예언사상이 현저하여 벽서사건이 빈발.

 

천주교의 수용

전래

17세기에 베이징을 왕래하던 사신들에 의해 국내 소개.

학문으로 인식되면서 서학이라 불리며 이익을 비롯한 남인 학자들이 연구.

발전

교리 연구회: 정조 1(1777)에 남인 학자 이승훈, 정약종, 이가환, 권철신, 정약용, 이벽 등이 중심.

민간에 수용: 18세기 후반부터 중인상민을 대상으로 전개하여 큰 호응. 신자가 늘어갈수록 기존 가치관과 갈등을 보였으며, 특히 여성들 사이에서 널리 신봉.

탄압

초기: 정부는 천주교가 유포되는 것에 대하여 내버려 두면 저절로 사라질 것으로 생각. 김범우의 집에서 예배를 보다가 의금부(추조)에 적발체포된 사건으로 금지령을 내리고 천주교 서적 수입 을 금지.

사옥명

시기

내 용

처 형 자

3대 사옥

신해

박해

정조

1791

진산사건, 윤지충의 모친상을 천주교식으로 하다 발각

윤지충(최초의 순교자), 권상연

정조 때에 재상 체제공(시파)이 천주교 신자가 남인을 보호하는 정책을 펼침.

신유

박해

순조

1801

집권 노론 벽파가 남인 시파를 축출하고자 탄압

이승훈, 이가환, 권철신, 주준모, 정약용(강진 유배), 황사영백서사건. 실학이 퇴조.

기해

박해

헌종

1839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세도권 쟁탈전. 상재벽서 남김.

앙베르, 모당, 샤스탕, 조신철

오가작통법척사윤음 발표

병인박해

고종

1866

대원군은 9명의 프랑스 신부 학살, 병인양요의 원인이 됨

대왕대비교령으로 천주교 금압령 이후 3년간 8천명 처형(최대의 박해)

천주교 박해

 


동학의 성립과 전파(1860)

1860년 최제우가 계시를 받아 동악 창시.

전통적인 민족신앙을 바탕으로 유천주교 교리를 흡수. 철학적으로 주기론, 종교적으로 샤머 니즘과 도교에 가까움. 인내천 사상과 후천개벽을 내세우고 조선 왕조를 부정. 민족주의 사상을 지님.

삼남지방에 널리 보급되었으나 최제우가 처형당함(1864). 2대 교주인 최시형의 노력으로 충청도 보 은을 중심으로 성장. 최시형은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정리.

고부 군수 조병갑이 농민을 괴롭히자 전봉준은 농민을 중심으로 동학교도를 이끌어 농민전쟁을 치름. 그러나 전봉준, 최시형 등이 잡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민란의 발생(농민의 항쟁)

수탈하여 이탈한 농민은 유리걸식, 도적떼에 가담하여 화전민, 간도나 연해주로 이주, 품팔이. 유랑을 면하면 압박과 수탈.

계와 두레가 성행하기도 하고 소청벽서괘서로 사회 모순에 항거.

 


홍경래의 난(평안도 농민전쟁)


홍경래의 난(1811)

원인: 세도정치와 서북 지방민의 차별

경과: 몰락 양반인 홍경래가 평안도 가산에서 중소지주 출신인 하층양반과 중소상인을 중심으로 유랑농민과 합세하여 대규모의 민중봉기 일으킴. 청천강 이북 지역 등 8개 군을 장악.

결과: 정주성에서 박기풍, 이효원, 유효원이 이끄는 관군 진압정부군에 의하여 5개월 만에 진압.

의의: 지방세력에 의해 추진된 민란의 선구적 역할. 실패 이후 사회불안은 심화.


진주민란(=임술민란=백건당의 난, 철종 131862)

원인: 조선 후기 수취제도의 모순과 농민 수탈이 배경. 경상도 우병마사 백낙신의 착취와 홍경원의 탐학.

경과: 유계춘 등이 농민을 규합하여 민란을 일으킴.

결과: 정부는 안핵사 박규수를 파견하여 탐관오리 백낙신, 홍병원을 파직하고 주동자를 처벌.

영향: 민란의 전국적 확산을 초래.


개령민란(철종 131863)

발단: 현민 김규진이 현감을 규탄하는 읍폐의 통문을 배포하자 현감이 이를 체포, 구속.

결과: 현민 수천명이 작당하여 현감을 감금하고 간리를 제거하려 난을 일으켰으나 군에게 진압.


정부의 대응

암행어사 파견, 안핵사선무사 보냈으나 효과가 없었다.

삼정 운영 개선을 위한 삼정이정청(1862. 8.)을 설치하였으나 실패.

민란의 의의: 정부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사회의 모순을 자율적, 적극적으로 변혁시키려 하였다는 점에 서 조선 봉건사회 붕괴의 요인.

동요요인

1. 납속책: 선조 때(15C)에 재정궁핍과 구호대책을 강구하기 위한 재정정책의 하나.

2. 공명첩: 숙종(17C) 이후 시행하던 진휼책. 부유층에게 관직(명예직)을 팔아 돈을 얻던 증서

3. 농업 발달 농민분화, 상공업 발달 계층분화

4. 공노비 혁파

신분변화

1. 양반의 몰락: 세도정치로 잔반 증가

2. 중인의 지위향상: 규장각 검서관, 서민문학가, 동학지도자

노비감소

1. 양란 중 노비문서 소각 도망, 유망, 모속(신분속임)

2. 납속, 속오군, 군공에 의해 양인신분 취득

3. 노비종모법이 현종(1669)때 마련, 영조(1731)때 법제화

4. 영조(노비공감법), 고정(1886) 노비세습 폐지

 

 

국내에서의 민족운동


민족교육의 추진


문맹퇴치운동

31운동 이전: 기독교 계통의 주일학교와 YMCA 중심의 한글교육.

31운동 이후: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어학회에서 전개.

문자 보급 운동: 조선일보는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라는 표어 아래 운동 시작(1929). 당시 조선일보와 귀향 학생들에 의하여 추진된 이 운동은 농촌 계몽과 문맹 퇴치에 큰 성과.

브나로드 운동: 1,600만 명이 문맹자라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하여 이들에게 우리글을 가르치면서, 한편으로는 미신 타파, 구습 제거, 근검 절약 등 생활 개선을 꾀하려고 하였다(1932).

일제의 탄압: 1935년에 조선 총독부는 문맹 퇴치 운동을 금지하게 하였다.


민립대학 설립운동(1923)

1910년 윤치호, 남궁억 등이 민립대학 설치를 요구.

1920년 이상재, 장덕수 등이 조선교육협회를 조직하여 민간대학 설치를 결의. 1923년 민립대학 기 성회를 조직하여 모금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좌절. 이후로도 연희 전문 학교, 보성 전문 학교, 이화 학당 등을 대학으로 승격시키려고 하였으나 일제는 1924년 경성제대를 설치하여 저지.


과학 대중화 운동

배경: 일제의 식민지 교육에 과학 교육 부재, 경성제대 제외하고는 한국인을 위한 교육 기관이 부 족, 31운동 이후 과학 진흥의 필요성 인식, 열강의 과학 기술 진흥, 안창남의 고국 방문 비행.

전개: 동아일보를 비롯한 민족지와 잡지 등에서 과학의 대중화 주장. 발명 학회과학 문명 보급 회(1924)가 과학의 중요성을 계몽하면서 민립 대학과 연구 기관의 설립, 외국 유학 기금 적립을 추진. 발명 학회는 과학조선을 창간하고, ‘과학의 날을 정하여 전국적인 과학 행사를 열었다. 과 학 지식 보급회는 생활의 과학화, 과학의 대중화를 주장하였으며, 과학 도서의 간행, 강연회, 전시 회 등의 개최에 노력. 이들 단체는 주요 도시에 지부를 설치하고 조직을 확대해 나갔으나, 30년대 말 일제의 강요로 일제가 만든 과학 단체에 흡수.



경제투쟁의 전개


민족기업의 육성(일제의 규제로 소규모 공장의 건설에서 두드러졌다)

민족 기업의 성격: 순수한 한국인만으로 운영, 한국인의 기호에 맞는 제품 생산.

공장 규모의 발전: 1920년대까지는 소상인수공업자들의 소규모 생산, 20년대에는 노동자 수가 200인이 넘는 공장도 출현.

경공업 관련 기업의 설립: 서울, 평양, 대구, 부산 등 대도시에서 순수 민족 자본의 직포 공장, 메 리야스 공장, 고무신 공장 등 설립.

기업의 유형

지추 출신: 호남지방 지주들의 경성방직(1919), 영남지방 지주들의 무역회사인 백산상회.

서민 출신: 평양에서 발전하기 시작한 메리야스고무공업은 중요한 민족기업 분야.

물산 장려 운동의 전개

민족계 은행: 경남합동은행, 삼남은행, 경일은행, 호남은행.

1930년대 민족 기업: 30년대에 들어와 영세한 민족 기업은 일본의 독점 자본과의 경쟁에서 점차 밀려났고, 전시 체제하에서는 총독부의 물자 통제로 큰 타격을 받았다. 총독부는 기업 정비령을 통하여 민족 기업을 억압하여 강제 청산하거나 일본 공장으로 흡수 합병시켰다.


물산장려운동

자작회: 청년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각자 저축하고 필수품은 가능한 만들어 사용하자는 운동.

물산장려회(1922): 조만식, 김동원 등을 중심으로 평양에서 조직.

조선물산장려회(1923): 물산장려회의 활동이 호응을 얻자 종교계, 교육계 인사 등을 규합하여 서 울에서 조직되어 1940년대까지 계속. 민족 자본의 육성을 위하여 소비 절약이 필요하다고 보고, 국산품 애용, 근건 저축, 생활 개선, 금주금연 운동 등의 실천 요강을 내걸고 활동하였다. 민족 주의자들이 주도하였고 사회주의자들은 불참.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추진되었으나, 일제의 탄압으 로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소작쟁의


1920년대: 31운동 이후에 시작하여 30년 전후에 최고조. 1920년대 전반기에는 소작인 조합이 중 심이 되었고 20년대 후반기에는 농민 조합이 소작 쟁의를 주도. 농민운동은 주로 소작쟁의로 전 개, 소작권 이동 문제, 소작료 인하 문제(관계쟁의), 지세와 공과금 부담 문제, 횡포한 마름 처벌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각지에서 소작인회, 농민조합 등을 결성. 공산주의자의 지도로 조직된 농민조합은 전국적으로 80여개나 되었는데, 함경도 지방의 농민조합이 가장 격렬. 각지에 결성된 단체는 조선노동공제회, 조선노농총동맹, 조선농민총동맹(1927. 9)등과 결합하여 대항. 1920년대의 대표적인 소작 쟁의로는 1924년 암태도 소작쟁의로 악질 지주와 일본 경찰에 맞서서 소작료를 낮 추었고, 19261923년 악질 일본인 지주를 상대로 한 요천 소작쟁의 등이 있다.


1930년대: 농민의 투쟁은 지하 농민 조합을 통하여 전개되었고, 19341937년의 명천농민투쟁이 가장 유명하다. 1930년대부터 조직된 혁명적(적색)농민조합운동은 적색 농민조합의 지도하에 식민 지 지배에 정면 대항하는 항일 농민 폭동이다. 함남 정평과 함북 명천지역이 가장 대표적이다. 1930 년대 농민운동의 두드러진 특징은 혁명적 농민운동조합이 80여개 군도에서 활발하게 전개 되었다는 점이다. 주로 소작관계의 개선, 농촌개량, 농업정책 반대 등으로 그 이전의 합법적 투쟁 과는 다르다. 30년대 이후의 소작 쟁의는 항일 운동의 성격을 띠며 더욱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대 상의 범위, 규모, 기간이 확대되고 장기화되어갔으며 형태도 대중적 봉기 형태로 옮아가고 있었 다. 특히 동양척식 주식회사 농장의 소작 쟁의는 항일 운동의 성격을 띠었다.



노동쟁의


1920년대: 노동자들은 노동환경 개선을 위하여 조선노동공제회(1920. 4), 조선노동총동맹(1927. 9) 의 전국적 단체와 평양노동연맹, 경성노동연맹, 진주노동연맹회, 원산노동연합회, 인천노동연맹, 부산노동연맹 등의 지역 단체를 결성하여 투쟁하였다. 1924년 결성한 조선노농총동맹은 전국 260 개 노동농민운동단체 53천명의 회원을 포괄하였다. 1920년대 대표적인 노동자 투쟁으로는 부 산 부두 노동자 5000여인 파업, 1923년 평양 양말공장 노동자 쟁의 등이 있다.


1920년대 후반: 서울, 인천, 목포 등의 대도시에 한정되던 노동 쟁의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영흥 노동자 총파업 등 대중화하는 양상을 보였다. 1928년의 원산 총파업은 최대의 투쟁이었다. 19289월 문평 석유 공장의 감독 고다마가 조선인 노동자를 구타하여 시작된 총파업은, 원산 노련위원장 김태영이 동요하여 실패하였다. 원산 총파업은 노동 운동이 항일적 성격을 띤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1930년대: 훨씬 조직적정치적 성격을 띠었으며,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동맹파업도 빈번하였다.

운동

내용

단체 및 활동

1920년대

1930년대

농민 운동

(소작 쟁의)

소작료 인하, 소작권 이전 반대

생존권 투쟁의 성격

 

항일 운동의 성격

사회주의계와 연계

 

각지의 농민 조합, 소작인 조합

암태도 소작 쟁의(1924)

조선 농민 총동맹(1927)

노동 운동

(노동 쟁의)

임금 인상, 근로 조건 개선

노동자의 생존권 요구 운동

노동 운동이 항일 투쟁의 성격 으로 전환

규모와 쟁의 횟수의 증가

조선 노동 총동맹

적색 노동 조합

원산 노동자 총파업(1928)

 


사회운동


사회주의 사상의 대두

수용: 레닌이 약소 민족의 독립 운동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이후, 1920년대에 들어와 사회주의 사상을 처음 받아들인 사람은 러시아와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 운동가들로 민족 독립과 함 께 계급 해방을 추구하였다.

초기의 사회주의 운동: 소수의 지식인이나 청년, 학생이 중심이었고 노동자, 농민의 참여는 오히 려 적었다.

사회주의 운동의 확대: 국내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노동농민청년학 생여성 운동과 형평 운동등이 전개되기 시작.


사회주의 사상의 유입 결과

내부의 갈등: 사회주의 운동에는 그 노선에 따라 이해를 달리하는 계열이 있어 마찰과 갈등이 심화.

민족주의 운동과 대립

민족 유일당 운동의 대두


사회주의 세력

형성배경: 상해 고려공산당(1920), 연해주의 공산당, 도쿄의 무정부주의 운동, 조선공산당이 대두. 민족주의계와 마찰을 일으키기도 하다, 1925년 치안유지법 공포 이후 민족 유일당 운동이 전개.

 

단체

중심인물

활동내용

한인사회당

(1918. 2)

이동휘

볼셰비키 찬성 정치세력 최초의 공산단체. 전로한족회 주도세력은 불참.

한인공산당

(1920. 8)

이동휘, 여운형, 김립, 안병찬

한인사회당 주도세력이 대한국민의회와의 관계를 끊고 상해에 건너가 여운형 등과 함께 조직.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1921. 5)

한명세, 이훈, 최고려

러시아에 귀화한 교포를 중심으로 한 단체로 사회주의 혁명을 우선시.

상해파 고려공산당

(1921. 5)

이동휘, 김립

식민지화과정에서 망명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민족회방을 우선 과제로 삼음.


공산당의 결성과 그 활동 

1

조선공산당

1925. 4 김재봉

김재봉을 책임비서로 화요회와 북풍회가 참여. 산하에 고려공산청년동맹을 두었으며 1925. 11 신의주 사건(청년회원이 변호사 구타)으로 파괴. 기관지 조선지광

2

조선공산당

1925. 12 강달영

강달영을 책임비서로 하여 다시 조직. 권오설 책임비서인 고려공산청년회도 재조직. 국민당 시도도 하였으나 610만세운동으로 탄로해체.

3

조선공산당

1926. 9 김철수, 김준연,

한위건, 안광천

ML(통일공산당) 김철수를 파견해 승인을 받고, 안광천이 책임비서일 때 신간회 결성에 적극 참가하였으나 조직이 탄로나 200여명이 검거되어 1928. 2월 해체. 기관지 대중신문, 이론투쟁, 현단계.

4

조선공산당

1928. 3. 차금봉

해외활동을 주력하다가 7월에 해체. 기관지 조선지광, 혁명, 불꽃등이 있다.

코민테른은 4차 조공해체 후 192812월 테제를 발표. 조공은 해방 후 19459월 박헌영이 재건.


공산당의 재건과 노동자 농민운동: 1930년대 이후 지하운동을 통해서 재건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지역별로 고립분산적이어서 통일성이 없었다. 박헌영이 1939년 서울에서 경성콤그룹을 조직하 였으나 1941년 해체된다. 이들은 운동방향을 공산주의 혁명운동으로 이끌어 갔다. 이같은 운동은 민족역량을 분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국내 공산주의자들은 해방 후 박헌영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였으며, 중도좌파정당을 흡수하여 남로당(1946. 11)으로 개편되었다.





610만세 운동(1926)

배경: 1926426일 순종이 승하하자 순종의 인산일을 기하여 제2차 조공의 간부였던 권오설 은 운동을 계획하고 민족주의 세력과 제휴.

경과결과: 우연히 삐라가 발견되어 계획의 핵심 인물들이 대부분 검거되었으나, 조직을 보존한 학생들은 밀고 나갔다. 이 운동은 민족 유일당 운동과 신간회 결성을 촉진하는 요인이 되었다.



광주학생운동(1929)

원인: 19291030일 광주-나주간의 한일 통학생이 충돌하여, 113일 대규모 충돌로 비화.

경과: 학생들은 학생 투쟁 지도 본부를 설치하고 11122차 시위 전개. 서울 학생들은 12914일에 운동을 전개.

결과: 193031일에 대규모 시위를 전개하려 하였으나 일경의 사전 검거로 실패.

의의: 5개월 동안 전국의 각급 학교 학생 54,000명이 참여한 광주학생운동은 31운동 최대의 민 족적 항거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성진회(광주지역 비밀결사)와 신간회가 지원.

탄압정치 반대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관료교관 배격 식민지교육 철폐 치안유지법 반대



신간회(1927-1931)

배경

1920년대 중반 이후 민족 개량주의가 등자하고 민족주의 계열이 비타협적 민족주의와 민족 개량주의로 분화

민족 개량주의자들은 참정권 운동’, ‘자치운동을 제창하였으며, 

일제가 허용 하는 범위내에서의 정치 운동, 교육과 산업의 진흥을 제시.

결성: 192611월에 발표된 정우회 선언은 조선 사회주의 운동의 방향전환을 촉구한 글로서 민 족 유일당 운동에서 하나의 전기가 되었다. 19271민족 단일당’, ‘민족협동전선이라는 구호 아래 조직 계획이 발표되고 215일 창립 대회가 열렸다. 이상재가 회장, 권동진이 부회장으로 선출되고, 정치적경제적 각성 촉구 단결 공고, 기회주의 부인 의 강령이 채택되었다. 19275월에는 근우회(김활란)가 창립되어 신간회 산하 단체로 가입하였다. 신간회 중앙 본부는 민중의 권익을 옹호하며 일제와 투쟁하였다.

해소: 1929년에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의 진상보고를 위한 민중 대회를 계획한 일이 발각되어 다수 의 지도 인사가 검거. 이후 중안 간부가 새로 구성되었으나 좌우 노선의 갈등으로 내분이 발생하 였다. 또한 1930년 이후 중앙이 보인 타협적 태도나 방관적 자세는 회의를 불러일으켰다. 코민테 른의 12월 테제(1928) 이후 쿠시넨 의견서(1932. 5)는 민족연합전선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신 간회는 19315월 대회를 열고 해소.

신간회의 결의문

 

민중대회 개최 시위운동 전개 여론 환기

 

 

 

 

신간회의 주장 내용

 

한국어 교수

일본인의 한국 이민 반대

한국인 특별취제법 철폐

동양척식주식회사 폐지

8시간 노동과 최저임금

 

 

한국인 착취기관 철폐

한국인 본위의 교육 실시

과학과 사상연구의 자유보장

소년부녀자 노동운동

노동권 확립

신간회의 결의문

 

민중대회 개최 시위운동 전개 여론 환기

 

 

 

 

신간회의 주장 내용

 

한국어 교수

일본인의 한국 이민 반대

한국인 특별취제법 철폐

동양척식주식회사 폐지

8시간 노동과 최저임금

 

 

한국인 착취기관 철폐

한국인 본위의 교육 실시

과학과 사상연구의 자유보장

소년부녀자 노동운동

노동권 확립

 

  

배경: 31 운동을 비록한 국내외 항일 독립 운동에서 여성들의 참여가 그들의 의식을 계발.

활동: 문맹 퇴치, 구습 타파, 생활 개선의 실현을 위한 여성 교육 계몽 운동.

여성 단체의 조직

1920년대 초(민족주의의 영향 아래 계몽 차원)조선 여자 교육회조선 여자 청년회(계몽)

│ ├조선 여자 기독교 청년회

│ └지방: 야학, 강연회 등

1920년대 중반: 사회주의 운동과 결합되는 모습으로 변화

결과: 1920년대 후반에는 여성 직업 단체들이 조직되어 보다 많은 참여가 이루어짐.



여성 운동과 학생 운동

전개: 천도교 청년회가 소년부를 설치함으로써 본격화, 이후 천도교 소년회로 독립하여 어린이날 제정.

발전: 전국적 조직체인 조선 소년 연합회(1927)가 결성. 방정환과 조철호 등이 소년 운동 전개.

분열: 지도자들 사이의 사상과 이념 대립으로 분열.

중단: 일 전쟁 발발 후, 일제가 한국의 청소년 운동을 일체 금지시킴으로써 중단.

목표: 1920년대 초에 전국의 청년 운동 단체는 100개가 넘었으며, 표면적으로는 품성 도야, 지식 계발, 체육 장려를 내세웠고, 실제로는 민족의 생활과 역량 향상을 목적으로 하였다.

활동: 학교야학, 금주회, 저축 조합 등.

조선 청년 총동맹(1924):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의 분열을 수습하기 위하여 조직.

전개 과정: 대개는 동맹 휴학의 형태로 전개. 초기에는 시설 개선이나 일인 교원 배척 등의 요구가 많 았고, 후기에는 식민지 노예 교육 철폐, 조선 역사의 교육, 교내 조선어 사용, 학생회 자치, 언론집회 의 자유 등의 요구가 대두.

광주학생항일운동(1929)

배경: 백정들은 갑오개혁에 의해 법적으로는 해방되었으나 사회적으로 계속 차별받고 있었다.

전개: 진주에서 이학찬을 중심으로 조선 형평사를 창립하고(1923) 운동 전개.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고 애정은 인류의 본령이다. 그러한 까닭으로 우리는 계급을 타파하고 칭호를 폐지하여 우리도 참다 운 인간이 되는 것을 기하자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형평 대회 취지문

성격: 신분 해방 운동을 넘어서 민족 해방 운동의 성격까지 내포.

와해: 1920년대 말 내부적으로 이념적 갈등을 겪으면서 급진파와 온건파 사이에 대립이 격화. 또한 일 제의 탄압 강화로 더욱 약화.

성격의 변화: 1930년대 중반 이후에는 회원의 순수한 경제적 이익 향상 운동으로 변화.




애국지사들의 활약


장인환전명운(1908): 스티븐스 사살.

안중근(1909)

이재명(1909): 이완용에게 부상을 입혔다.

강우규(1919):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저격.

김익상(19211922): 1921년 조선 총독부에 폭탄 투척, 1922년 상해에서 다나카 대장 저격.

김상옥(1923): 의열단원으로 종로 경찰서에 폭탄 투척.

박열(1923): 도쿄에서 일본 천황 암살계획을 세우다 체포.

김지섭(1924): 의열단원으로 일본 궁궐에 폭탄 투척.

나석주(1926): 의열단원으로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에 폭탄 투척.

이봉창(1932): 애국단원으로 일본 천황 저격 실패. 이 사건을 계기로 상하이 사변 발발.

윤봉길(1932): 애국단원으로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 천장절및 전승 축하식전에 폭탄을 투척하여 시 라카와 등을 살해. 이후 중국의 장 제스는 임점에 대한 지원 강화.

그 외 상하이에서 주중 일본 공사를 사살하려 했던 백정기, 친일파 민원식을 사살한 양근환 등이 대표적인 애국 지사.


참고: 의열단과 한인 애국단

의열단(1919): 김원봉이 지린에서 조직.

한인 애국단(1926): 김구를 중심으로 상하이에서 조직, 활동이 가장 두드러졌다.






4. 일제의 민족성 말살정책과 민족 문화의 수호


민족말살정책


병참기지화 정책

배경: 1920년대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경제 공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경제 블록을 형성하여 한반도 의 노동력과 자원의 수탈이 가중.

투자시장화: 1920년대 회사령 철폐로 회사설립을 신고주의로 전환. 조선 수력전기회사가 설립되어 (1926) 부전강의 수력 개발, 흥남 질소비료공장 설립(1927).

만주 사변(1931) 이후: 중화학공업육성정책, 남면북양정책, 농촌진흥운동(농민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미봉책, 19321940), 군수공업 촉진- 재벌이 중심이 되어 군수공업과 광업개발(금광 석탄)

중일전쟁(1937) 이후: 민족말살정책.


침략전쟁의 확대

만주사변(1931. 9. 18): 일제는 심양 교외 유조구의 만주 철도를 폭파하여 만주를 점령.

상해사변(1932. 1): 유럽의 눈을 상해로 돌린 다음 만주국 세움(1932. 3. 1). 규탄을 받자 국제연맹 탈퇴(1933)

중일전쟁(1937. 7): 노구교 사건을 계기로 발발하여, 중국 침략을 시작.

태평양 전쟁(1942. 12. 7): 이른바 대동아 전쟁’.


민족말살정책: 중일전쟁 발발과 함께 시작.

육군특별지원병령

1938. 2

중일전쟁 직후의 조선청년 동원(18,000명 동원)

국가총동원법

1938. 2

일본 내 동법의 조선내 적용 시작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

1938. 7

지방연맹직장연맹 조직

국민징용령

1939

1939년부터 모집, 1940년부터 알선 형식으로 133146만 징집

공출제도

1939

식량 영단을 설치하고 식량 강제 수탈

학도병제

1943

조선인 전문학교대학교 학생을 징집하여 총 4,500명 동원

징병제

1944

종전까지 약 20여만 징병

여자 정신대근무령

1944. 8

1240세 여성 수십만을 강제 동원, 이 중 57만이 위안부로 성적 노리개 역할.

기타

근로동원으로 어린 국민학생과 중학생들을 군사시설 공사에 동원, ‘근 로보국대로 여성들을 토목공사에 동원, ‘애국부인회라는 어용단체 설립.

산미 증식 계획 재개: 개인에게까지 할당

경제생활 규제: 식량 배급, 미곡 공출, 가축 수탈

금속 그릇의 공출: 농구, 식기, 제기, 교회사원의 종까지 징발.

패전 후에는 류큐나 중국 하이난 섬 등지에서 한국인을 대량 학살.


국가 총동원체제로 전환

신사참배 강요

1936. 8

11신사 원칙하에 궁성요배 강요

황국신민화정책

1938

내선일체 구호 하에 황국신민 서사 암기

한국어 교육금지

1938

일본어 사용 강요

한국사 교육금지

1938

일본 역사에 편입

창씨개명

1939. 11

조선민사령 에정, 전국민 4/5 개명

동아일보, 조선일보 폐간

1940. 8

문장, 인문평론등 한글잡지도 폐간

조선어학회 사건

1942

강제로 해산하고 관계자 투옥학살

사상범 통제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1936), 조선 정보위원회(1937), 사상보국연맹(1938), 조 선사상범 예비구금령(1941)


민족문화 말살


 

민족문화의 수호


일제의 한국문화 연구

고적조사위원회(1910): 고적조사도보(15) 편찬.

법전조사국: 한국의 관습풍속을 연구하다 31운동 이후 중추원에 이관.

조선사편수회: 총독부 내의 기관으로 조선사(35), 조선사료총간(21), 조선사료집진(3) 등 간행.

청구학회(1930): 한국만주 등 극동문화 연구 단체. 학술지 청구학총


종교 탄압

기독교: 안악 사건(1910), 105인 사건(1912)이 날조되었고, 31운동 이후에는 많은 교회 지도자들 이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고 하여 체포투옥되었다. 1930년대 후반 이후에는 신사 참배가 강요되 었으며, 이를 반대하는 종교 계통의 학교는 폐쇄되고, 기독교 지도자들은 투옥되었다.

1. 안악 사건(1910): 안중군의 동생 안명근이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자 국내에 들어와 자금을 모금하다가 검거 된 것을 기화로 황해도 지방의 교육종교계의 관련 인사 160명을 총독 사살 계획에 연루시켜 체포.

2. 105인 사건(1912):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를 구실로 신민회 회원을 체포. 신민회 해산의 계기가 되었다.

불교: 사찰령, 승려법 제정으로 탄압.

천도교대종교: 민족 종교는 일제의 간섭이 특히 심하였다.


한국사의 왜곡: 단군 조선의 부정, 식민 사관의 전개.


민족문화의 수호운동


조선학 운동(1934): 문일평안재홍정인보 등이 1934여유당전서의 간행을 계기로 전개. 이 들 외에 백남운 등이 주축. 과거 민족주의 역사학이 국수적낭만적이었음을 비판하고 민족과 민 중을 다같이 중요시하면서 우리문화의 고유성과 세계성을 동시에 확보.


유물사관 도입(19301940)

특징: 사적 유물론에 입각하여 한국사를 세계사적 보편성 위에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식민 사학의 정체성 이론을 반박,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정신 사관도 비판.

대표자: 연합성 신민주주의를 제창한 온건 좌익 백남운은 조선사회경제사(1933), 조선봉건사회 경제사(1937) 저술.

이 외에도 이청원 조선역사독본, 박극채 이조사회경제사, 김광진, 진석담 등이 있다.


진단학회(1934): 청구 학회를 중심으로 한 일본 어용 학자들의 왜곡된 한국사 연구에 반발하여 순 수학문으로 역사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결집하여 진단학보발간. 이병도(실증 사학의 대표자, 한국고대사연구), 이상백, 김상기, 이윤재, 이희승, 송석하, 손진태, 신석호 등 참여. 실증사학 도입.


조선어학회(1941): 한글날과 맞춤법 통일안 제정, 한글발간. 우리말 큰사전 편찬을 준비하다 이 중화, 장지영, 최현배 이희승 등 수십명이 투옥되고 이윤재한증은 옥사(조선어학회 사건, 1942)


신민족주의 사학

특징: 194050년대에 주로 연구되었으며, 민족주의 사학을 계승하여 자주적 민족 국가를 수립하 고, 민족적 자유와 평등을 실현한다는 입장에서 역사적 사실을 재평가하고 민족사를 체계화하고 자 하였다.

학자: 손진태는 신민족주의를 통한 민족 단결과 평등친화자주독립을 주장하였으며, 조선민족 사개론」․「조선민족설화의 연구」․「국사대요등을 저술. 안재홍 조선상고사감, 홍이섭 조선과 학사



문예활동


문학: 일제 말기는 한국 문학의 암흑기였고, 이광수 일장기가 날리는 곳이 내 자손의 일터최남 선 조선인의 일본화가 조선 문화의 당면 과제노천명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서정주 오장 마쓰이 히데오 송가등이 친일 활동을 하였다.


음악: 국내(홍난파-봉선화, 현제명), 국외(안익태-애국가, 코리아 환상곡), 동요(홍난파-고향의 봄, 윤극영-반달)


미술: 동양화(안중식-한국의 전통회화 전승발전), 서양화(고희동-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자화상, 이중섭-부부), 기타(전형필-문화재 수집보호, 고유섭-한국탑파연구」․「조선미술문화사 총론). 동양 화가인 김은호 등은 친일.


연극

31운동 이전: 신파극의 유행

31운동 이후: 극예술협회(1921), 극예술연구회(1931, 연극공연을 계몽수단으로 간주), 토월회 (19231926, 박승희김기진이 조직한 근대연극회, 민중각성 촉구)

중일전쟁 이후: 일제 탄압으로 오락지향성 돌변, 일제찬양연극 공연, 연극공연에 일본어 사용.

일제 말기: 일본어를 쓰지 않는 연극은 공연히 허가되지 않아 연극은 질식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영화: 나운규의 아리랑(1926). 이후 1940년 일제의 조선 영화령 발표로 탄압.

일제 말에 이광수, 최남선 등이 조직한 친일적 문인조직. 조선음악가협회, 조선연극협회도 같은 성격.


아동문화: 방정환이 어린이를 창간(1922), 어린이날 제정, 조철호는 소년군(소년단) 창설(1922).

3. 민족운동의 성장


식민통치의 강화


문화통치의 실시(19191930)

일본에 절대 충성하는 자로써 관리를 강화.

친일적 인물을 물색하고 친일단체를 만든다.

각종 종교단체에서 친일파가 최고지도자가 되게 하고 일본인을 고문으로 앉힌다.

친일적 민간인에게 편의와 원조를 제공하고 친일적 지식인을 대량으로 장기적 안목에서 육성한다.

양반유생으로 직업이 없는 자에게 생활방도를 만들어 주고 선전과 민정정찰에 이용(대동사문회, 유교진흥회).

조선인 부호에게는 노동자농민과의 대립을 인식시키고 일본자본을 도입(조선인소작인상조회).

유지가 이끄는 친일단체 교풍회, 진흥회를 만들어 회유이용(대동동지회, 국민협회).

실시배경과 목적: 기만정책임

내용

총독임명 제한철폐: 문관도 임명될 수 있게 하였으나 식민지 전 기간 동안 사이토가 해군대장, 나 머지는 육군대장.

보통경찰제 실시: 사실은 고등계 사찰기구 신설, 경찰의 수와 장비를 더욱 증가.

언론출판통제의 완화: 31운동의 가장 두드러진 성과로 조선일보(1920. 3), 동아일보(1920. 4)등 민족신문 발행을 허가하였으나, 기사검열을 강화하여 탄압.

전시용 중추원을 확대하고 도군에 평의회협의회를 기만적형식적으로 운영.

교육의 기회증대: 학제를 개정, 경성제대 설립(1926), 그러나 고등교육은 계속 억제.

치안유지법 공포(1925): “일본의 국체 및 정체의 변형과 사유 재산을 부인하는 자는 징역 10년에 처한다.”


일제 독점 자본의 침투

1920년대

본격적인 침투: 1차대전을 계기로 성장한 일제 독점 자본은 1920년대부터 한국에 본격적으로 침 투하기 시작. 광업, 비료, 섬유 회사 등을 설립하고 우리나라의 공업 생산을 장악해 나감.

중공업 정책 실시: 1926년 함경도에 부전강 수력 발전소가 완성되고, 다음 해에 그 전력을 이용한 조선 질소 비료 공장이 흥남에 세워지면서 중공업 투자 시작.

1930년대

일본이 만주와 중국을 침략함에 따라 우리나라는 병참 기지가 되어 일본인의 중공업 투 자가 더욱 증가.


식량의 수탈

산미증식계획(19201933): 일본의 공업화정책으로 자국의 식량생산이 부족하자 조선을 식량공급기 지화 하는 것이 의도.

산미증식계획 하에 영세한 농민들은 소작쟁의를 일으켰으며, 단작형 농업구조로 단순화.

세계 경제공황(1933)으로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 산미증식계획 중단.

 


대한민국 임시정부(1919. 41945. 8)


임시정부의 의의와 수립과정

대한국민의회(1919. 2. 25)

블라디보스톡

대통령: 손병희/국무총리: 이승만

조선민국임시정부(1919. 4. 9)

서울

정도령: 손병희/부도령: 이승만

대한민국임시정부(1919. 4. 10)

상해

의정원 의장: 이동녕/국무총리: 이승만

신한민국정부(1919. 4. 17)

철산의주지역

집정관: 이동휘/국방총리: 이승만

한성정부(1919. 4. 23.)

서울

(국내에서 13도 국민 대표 명의로)

집정관 총재: 이승만/국무총리 총재: 이동휘


㉠ 「우리역사에 따른 임시정부 단체


대한민국의회

(연해주 1919. 2)

노령정부

│➡

 

 

 

 

창조파

 

 

대한민국임시정부

(상해 1919. 4. 10)

대한민국임시정부(1919. 9)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한 상해 임시정부로 최초의 민주 공화제 정부

국민대표회의(1923. 1)

이승만의 불신임과 독립운동 전체 방향 전환 문제

현상 유지파

 

 

한성정부

(서울 1919. 4. 23)

 

 

개조파

 

북간도의 군정부

(1919)


임시정부의 수립과정

구분

연도(지역)

내용

초기

1919. 4(상해)

국무총리: 이승만, 의정원 의장: 이동녕, 내무총장: 안창호

1차 개헌

1919 (상해)

대통령 중심제(이승만12월 박은식), 국무총리: 이동녕, 3권 분립 제도

2차 개헌

1925 (상해)

국무령 중심의 내각책임 지도제(김구, 이상룡, 양기탁, 안창호, 홍진)

사법권 조항 규정

3차 개헌

1927 (상해충칭)

국무위원 중심제(주석: 이동녕, 국문총리: 김구 등 11)

사법권 조항 폐지

4차 개헌

1940. (충칭)

주석 지도 체제(주석: 김구)

5차 개헌

1944

주석(김구)부주석(김규식) 중심체제 다시 심판원 조항 규정

개헌과 정치형태


임시정부의 활동

연통제의 조직: 비밀 조직망으로서 서울(총판), (독판), (군감), (면감)의 조직.

군자금의 지원: 만주에서 쇼의 이륭양행, 부산 안희제의 백산상회, 애국공채.

외교활동: 김규식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1919. 5), 구미위원부 설치.

언론편찬사업: 독립신문 간행(1919. 8), 사료편찬소 일 관계 사료집

무장활동: 상하이에 육군 무관 학교 설립, 광복군 사령부, 광복군 총영, 육군주만참의부를 두었다. 광복군을 조직(1940)하여 총사령관에 지청천 임명. 1941년에 대일대독 선전포고, 1943년에는 버 마전선에도 참가.


임시정부의 분열과정

독립전쟁론과 외교론의 갈등

새 정부 통합 교섭 당시 연해주의 노령 정부는 외교부와 교통부만 상해에 두고, 정부와 의정원은 동포가 많이 사는 간도나 연해주 지방으로 옮길 것을 제안(독립전쟁론).

상해 정부는 외교론에 근거하여 상해를 고수.

외교론의 문제점: 임정이 독립전쟁을 방기, 이론의 갈등이 내부 분열 유발, 독립운동 단체 및 무 장세력 통합 기회가 무산.

외교적 실패

위임통치 청원서(1919. 2): 이승만이 미국 정부에 제출하여 임정의 권위 추락, 민족적 망신.

파리 강회회의 본회의에 김규식 참여 거부당함.

워싱턴 회의에도 이승만서재필이 참여하지 못하고, 회의에서는 일본의 과잉 인구문제 해결을 위한 식민지 필요만이 역설.

국민대표회의(1923. 1): 70여 단체 140명이 참석.

ⓐ 3개의 파

가. 창조파: 무력항쟁 강조조선공화국 수립 주장, 임정의 완전 해체와 새 정부의 구성을 주장. 원세 훈김규식김창숙박은식신채호이동휘 등 민족주의 좌파계열과 노령 공산주의 등 80여명 의 지지를 얻었음.

나. 개조파: 실력양성을 우선으로 자치운동과 외교활동을 강조, 임정의 개조를 주장. 안창호와 상해파 공산주의자 등 57명 정도가 지지.

다. 현상유지파: 이동녕김구.

임정은 1925년 이승만을 탄핵파면하고 박은식을 제2대 대통령으로 추대, 헌법 개정과 조직 개편 추진.

 



한인의 국외 이주와 독립 운동


한인의 국외 이주

19세기 중엽의 국외 이주

배경: 조선인들이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간도와 연해주 등지로 본격적인 이주를 하게 된 직접적 인 동기는 열악한 경제 상황을 타개하려는 것이었다.

지리적 여건: 이 지방들은 한반도와 연접해 있어서 이동이 쉬웠고, 풍토 역시 우리나라와 비슷.

이민 형태: 그 이전에도 변경 지대의 조선인 중에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간도 땅에서 농사를 짓고 가을이면 타작한 곡식을 가지고 돌아오는 계절 출가 이민이 있기는 하였지만 많은 수는 아 니었다.

을사 조약(1905) 이후의 국외 이주

배경: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이에 반감을 품은 인사들 가운데 일부가 국외로 이주.

이민 형태: 일제의 탄압을 피한 정치적 망명자들의 이주가 급증.

국권 강탈(1910) 이후의 국외 이주

배경: 국내에서 활동하던 의병과 애국지사들은 중국, 연해주, 미국, 일본 등으로 망명하여 본격적 인 국외 독립 운동을 전개하려 하였다.

전개: 민족 운동가들은 주로 서북간도를 비롯한 남북만주와 시베리아 연해주에서 독립 전쟁 을 위한 기지 건설을 활발히 추진하였다.

지리적 여건: 이 지역은 국내 진공이 유리한 국경 지역이라는 점 이외에도 수많은 한인들이 이주 하여 폭넓은 한인 사회를 형성하고 있어서 지역 주민들의 협조와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이민 형태: 대부분의 독립 운동 단체들은 경제 및 교육 단체를 표방. 그들은 향후 독립 전쟁을 위 하여 동포들의 생활 대책을 강구하는 목적과 대중적인 운동 방법으로 경제 활동을 강조.


 

독립군의 항전


독립군의 편성(1920년대 전후)


만주

대한독립단(서간도): 1919년 박장호, 조맹선, 백삼규 등이 조직.

서로군정서(남만주): 1920년 이상룡, 여준, 지청천 등이 활약.

북로군정서: 1919년 서일, 김좌진 등 대종교도들이 중심.

대한독립군: 1919년 홍범도 지휘, 본부는 봉오동.

대한독립군비단: 1919년 장백현에서 이희삼 등이 조직.

의군부: 김덕원, 김평식 등이 조직.

광복단: 1920년 봉천에서 김성극, 홍두식 등이 조직.

태극단: 1919년 조인관, 김동준 등이 조직.

광한단: 1920년 현정경, 이호원 등이 조직.

광복군 사령부: 1920년 조병준 등이 조직.

광복군 총영: 1920년 광복군 사령부가 오동진에 의해 개편되어 임시정부 산하군단으로 발전.

광정단: 1922년 장백현에서 대한독립군비단+흥업단+태극단+광복단. 김호익윤덕포 등이 활약.


연해주

혈성단: 1920년 헤이룽장성에서 김국초, 김태일 등이 조직.

신민단: 1919년 블라디 보스토크에서 한광휘 등이 조직.

경비대


미국

국민군단: 1919년 하와이를 중심으로 박용만 등이 조직.

비행사 양성소

소년병 학교 등


국내

천마산대: 31운동 이후 평북 천마산에서 최시흥, 최지풍 등이 조직.

보합단: 1920년 의주에서 김동식, 백운기 등이 조직. 군자금을 모금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보 내고, 친일파를 숙청하는 데 힘썼다.

의용단: 1919년 평양에서 홍석운, 김동혁 등이 조직.

구월산대: 1920년 이명서, 이근영 등이 구월산에서 조직.

태극단: 1942년 이상호 등이 조직.

보민회: 1919년 최창규 등의, 본부를 홍경현에 둔(후에 봉천 이전) 반민족적 단체. 후신으로 조선 인민회와 권농회.



독립군의 승리와 수난


봉오동 전투(1920. 6)

독립군 부대들의 국내 진입 작전에 시달리던 일본군이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하였으나 삼 둔자에 매복해 있던 독립군에게 섬멸당함(삼둔자 전투).

일본군은 19206, 1개 대대의 병력으로 독립군 소탕 시작.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은 화룡현을 출발하여 함북 종성현의 일제 국경 수비대를 격파, 일본군 남 양 수비대 1개 중대를 기습.

일본군은 661개 대대 병력으로 공격해오고 대한독립군은 최진동의 군무도독부와 안무의 국 민회군과 합세하여 격파(봉오동 전투), 반격하는 일본군을 맞아 77일 대승리.


청산리 대첩(1920. 10)

봉오동 전투의 보복으로 일본군은 중국 마적과 짜고 학살과 훈춘성의 일본공사관을 방화한 훈춘 사건(1920. 10. 2)을 조작, 이것을 구실로 3만명의 한국인을 학살.

북로군정서 부대는 서대피구를 출발하여 안도현의 백두 밀림으로 이동 중, 화룡현 청산리에서 적 의 포위를 당함.

김좌진 부대는 배수진을 치고 1020일 독립군의 매복 지점에 당도한 일본군 선발 부대를 기습 하고, 3차례에 걸친 적의 반격을 격퇴. 이후 김좌진 부대는 후퇴를 하고, 그 와중에 일본군은 양 쪽에서 자기편을 공격하여 많은 사상자를 냄.

10여 차례의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 1254명 사살, 아군은 60명 전사90명 부상.


간도참변(=경신참변, 1920. 10): 일본군은 192010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독립군은 물론 비전투원 동포에 조선군(국내), 관동군(관동), 포조군(연해주)를 동원하여 무차별 살상, 체포, 강간, 방화 자행.


자유시 참변(=흑하사변, 1921)과 미쓰야 협정

간도참변 후 독립군 주립부대는 밀산부(만 국경지대)에 집결하여, 서일을 총재로 대한독립군 단을 조직(1921. 4)하고 노령으로 이동.

소련 영내의 자유시로 이동한 독립군은 적색군(적군, 소련군)과 백색군(백군, 반혁명군)의 내전에 서 적군을 도왔다.

독립군은 약소 민족을 지원한다는 적색군에게 이용당하고 무장 해제까지 당하였다. 이것은 시베 리아의 일본군이 백색군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전에서 승리한 적군이 독립군의 무장을 강제로 해산하려 하자 독립군은 무수한 사상자를 내었다.

미쓰야 협정: 만주 군벌 장작림 장군은 19256월 조선 총독부 미쓰야와 미쓰야 협정을 체결하 고 재만 조선인의 독립운동 단속, 체포자의 일본 영사관 인도를 약속함.

지린성 만보산에서 일제의 한중 양국 이간책으로 만보산 사건이 발생하여 재만 동포의 생존에 위협.


독립군의 재정비와 통합

독립 운동 단체들의 통합운동 전개로 민정기관과 군정기관을 갖춘 삼부 성립. 완전한 통합은 이 루지 못함.

(육군주만)참의부(1923): 백광운, 최석순, 윤세용 등이 압록강 대안에 임시정부직할 하에 편성.

  정의부(1924): 지청천과 오동진 등이 지린성과 봉천성을 중심으로 조직.

  신민부(1925): 김좌진 등이 북만주 일대에서 자유시 참변 이후 노령에서 돌아온 독립군을 중심으 로 결성.

혁신 의회(1928): 북만주의 독립 운동 세력인 김좌진, 지청천, 김동산 등을 중심으로 결성. 이를 통치하는 정당의 성격을 띤 한국 독립당과 군사 조직인 한국 독립군이 결성.

1929년 삼부는 국민부로 통합: 남만주에서 수립되고, 조선 혁명당의 군사 조직으로 조선 혁명군 결성.


만주사변 이후의 독립군 활동

1930년대는 만주간도 지역에서 해방 운동 주도, 따라서 함경도평안도의 노동자농민 투쟁이 격렬.

만주를 통치하던 중국 군벌이 구국군으로 저항. 여러 노력으로 1932년에 각지의 소규모 유격대가 만들어지고 항일유격대로 발전. 동만주의 유격대는 거의 조선인, 북만주는 한중연합. 항일 유격대는 인민 혁명 정부를 수립하고 개혁 실시.

일제는 항일 유격대를 토벌키 위하여 19331936년 만주 파견군 규모를 40만으로 증강, 보갑제집단부락민생단 등을 실시.

항일 유격대는 민족 통일 전선 조직체를 건설하고 재만 한인 조국 광복회(약칭 조국광복회)’193656월 경 창립.

만주사변(1931) 이후 독립군 일부는 한중연합군을 결성하였고, 만주를 일본이 장악하자 중국대 륙이나 연해주로 분산되었는데, 중국 본토로 들어간 독립군은 광복군에 합류.

한국 독립군(지청천)과 중국 호로군: 쌍성보, 대전자령 전투, 사도하자 전투, 동경성 전투 등지에서 일만 연합군과 전투를 전개하여 대승.

조선 혁명군(양세봉)과 중국 의용군: 흥경성 전투, 영릉가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격파.

항일유격대와 조국광복회의 협력 전투. 조아범(중국인)이 이끄는 부대는 압록강 연안으로 진출하여 후위를 담당, 주수동(중국인)최현이 이끄는 함북 무산으로 진공하여 보조 타격을 담당, 보천보 공격의 주공 방향은 김일성 부대가 맡는다는 계획을 19373월 서강 회의에서 수립.

193764일 밤10시 주력부대에서 선발된 150여명의 원정대를 김일성이 지휘하여 전투를 시작했다. 이 전투로 일제의 모든 기관들이 불타고, 일본인들은 처형당했다고 북한이 주장.


일 전쟁 무렵 독립군

독립군의 동향: 1930년대 중반 이후, 독립군의 대부분은 한국 광복군에 참여하였고. 만주 잔류 독 립군은 중국 항일군과 함께 항일 연군을 편성하여 항전을 계속함.

조국광복회의 조직(1936): 중국 공산당의 동북 인민 혁명군(1933)을 확대 개편한 동북 항일 연군 의 조선인 간부들이 민족 연합(통일)전선을 실현하고 독립적인 인민 정부를 수립한다는 목적 아 래 조직. 국내의 민족주의자 및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함경도 일대에도 조직을 확대.


 

광복군의 대일항전


광복군 결성(1940. 9)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각지의 무장독립군을 모아 김구, 김규식, 지청천 등을 중 심으로 충칭에서 광복군을 창설하고, 지청천을 사령관, 이범석을 참모장으로 하였음.

1942년 조선의용대(김원봉, 1938)을 흡수하고 그를 부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조직을 보강.


대일선전포고(1941): 대일대독 선전포고문을 발표하고, 버마인도전선에서 영국군과 연합작전 수행.


국내진입작전: ‘국내 정진군으로 특수훈련을 받고 459월 국내진입 계획을 세웠으나, 미국의 일본 제압으로 인하여 이미 광복이 됨으로써 실현되지 못함.

. 일본 제국주의와 민족수호운동


1. 일제의 식민지 정책


무단정치

임시총독 - 이토 히로부미

1- 데라우치(1910. 10, 무단정치)

2- 하세가와(1916. 10, 31운동 당시)

3- 사이토 마코토(1919. 8, 문화정치)

4- 우가키(1927. 4)

5- 야마나시(1927. 12)

 

6- 사이토 마코토(1929. 8)

7- 우가키(1931. 8)

8- 미나미 지로(1936. 8, 민족말살정치)

9- 고이소(1942. 5)

10- 아베 노부유키(1944. 7)


조선총독부: 무관출신 총독을 정점으로 헌병경찰제 실시. 정무총감과 경무총감.


강압정치

1910년대는 무단통치의 시기.

데라우치는 범죄즉결령(1910. 12), 경찰범 처벌규칙(1912. 3), 조선형사령(1912. 3), 조선태형령(1912. 3), 조선감옥령(1912. 3) 등 악법 제정.

헌병경찰제도: 헌병이 민사 경찰의 임무까지 수행하고 행정관, 검사, 재판관의 역할까지 행하며 즉 결심판 행함.

일반 관리에서부터 교원에 이르기까지 제목과 제모에다가 칼까지 차게 함.

한국인의 정치참여를 위장: 자문기관으로 중추원을 두었으나 회합이 없었음.

 


식민지 경제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실시(19121918)

토지조사령(1912): 토지조사국(1910)에 신고하면 그 소유권을 인정받는 기한부 신고제.

목적: 토지조사령을 발표하여 근대적 소유권이 인정되는 토지 제도를 확립한다고 선전하였으나, 실 제로는 한국인의 토지를 약탈하고 지주층을 회유하기 위한 것이었다.

방법: 토지 신고제가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며, 신고 기간도 짧고 절차가 복잡하여 기회를 놓친 사 람이 많았다.

미신고지국공유지를 불법 탈취한 것이 전 통토의 40%, 마을이나 문중 소유의 토지와 산림, 초원 황무지 등도 강탈.

수탈한 토지는 동양척식주식회사 또는 한국에 이주한 일본인에게 염가로 불허.

결과: 지주의 소유권만 인정되어 지주제가 강화. 1918년에는 3%의 지주가 50% 이상의 경작지를 소유. 소작 농가는 77%나 되었고 5070%의 소작료를 내게 되었다. 농민은 영세화되었으며 고리 대에 희생되어 화전민이 되거나 만주연해주로 이주.


임업어업광업부문

임업: 삼림법(1908)을 제정. 삼림령(1911)을 공포하면서 전 산림의 50% 이상을 총독부와 일본인이 강점. 압록강두만강 유역의 목재를 대대적으로 벌채.

어업: 1910년 이후 다수의 일본 어부들이 한국에 이주하여 황금 어장을 독점, 조선어업령(1911)에 의해 황실 및 개인소유 어장이 일본인 소유로 재편성.

광업: 조선광업령(1915) 공포와 병행하여 각지의 광산을 조사하여 이를 일본인 재벌에게 불하.


상업금융부문

총독부는 철도통신항만 등을 독점경영, 담배소금인삼은 전매.

회사령(1910): 회사설립에 허가제를 실시하여 자본형성을 견제. 1920년에는 민족 자본가층을 항일 의 대열에서 탈락시키기 위하여 신고제로 바꾸었고 이와 더불어 관세철폐로 일본의 독점 자본주의 진출을 적극 후원.

금융: 조선은행(1911), 조선식산은행(1918), 동양척식주식회사가 금융계를 장악, 지방에는 금융조합 이 침투. 세금도 대폭 강화.


식민지 경제정책의 결과

무역이 일본 중심으로 개편: 수출의 90%, 수입의 65%가 일본으로 집중. 잡곡담배를 수출하 고 옷감경공업 제품을 수입.

 


식민지 교육


일제 식민지 교육의 본질: 한국인의 민족성과 자주성을 말살하여 한민족을 일본의 하등 부용국민으로 만드는 것.

1
(1911)

일본어를 국어라고 하여 학습강요

사립학교규칙(1911. 10), 서당규칙(1918. 2)

우민화교육: 보통실업전문기술교육

 

3

(1938)

고등보통학교를 중학교로 개칭

초둥학교 시설 확장(11)

우리말 교육과 국사교육 금지

황국신민서사 제정, 암송제창 강요

2

(1922)

사범학교 설치, 대학교육 허용

교육시설이 31교로 확대

보통학교는 6, 고등보통학교는 5

4

(1943)

민족교육기관을 탄압


조선교육령


일제의 식민사관(조선반도사1910)

타율성론: 반도적성격론, 남한경영설, 만선사관, 임나일본부설

정체성론 사회경제사학

당파성론

일선동조론

 



2. 독립운동의 방향과 31 운동


약소 민족의 시련


파리 강회 회의(1919. 1): 1차대전의 뒤처리를 위하여 소집되었고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14개조의 평 화 원칙을 기본 원칙으로 하였다.

민족 자결주의: 패전국러시아의 식민지에만 적용되었음.

공산주의 세력 확대: 코민테른을 결성(1919), 반제국주의 민족 운동 및 약소 민족의 독립 운동 지원.



아시아 각국의 민족 운동


중국

54운동(1919): 파리 강화 회의에서 일본의 21개조 요구를 인정한 것을 원인으로, 베이징 대학생 을 중심으로 21개조 요구를 철회하고 친일 관리의 파면을 요구.

1차 국공 합작(1924): 쑨 원의 국민당이 중국 공산당과 제휴.

장 제스의 중국 통일: 난징에 국민 정부를 수립하고 베이징의 군벌 정부를 타도하여 통일(1924).


인도

간디: 완전 자치 주장, 비폭력불복종의 민족 운동 전개.

네루: 완전한 독립 요구.


오스만 제국

1차대전의 패배: 영토 상실, 소국으로 전락.

케말 파샤의 개혁: 오스만 제국의 술탄 퇴위, 터키 공화국 수립, 근대화 작업의 추진.

 



31운동 이전의 독립운동


국내의 독립운동


독립의군부(1912): 고종의 밀지를 받아 임병찬 등이 의병과 유생을 규합한 복벽주의 단체.

활동: 일본의 총리 대신과 조선 총독에게 국권 반환 요구서를 제출.


(대한(조선))광복단(1913): 채기중 등이 조직하여 각도에 지부를 설치. 만주에도 지부를 두어 독립 군 간부를 양성하였으며 군자금도 수집.


천도교국단(1914): 천도교 계통의 이종일 등이 조직.


조선국권회복단(1915): 대구에서 이시영, 서상일 등이 시회(詩會)를 가장하여 조직. 경찰서를 습격,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단체와도 연결한 공화주의 단체.

활동: 한일 합방 후 시도한 전국 규모의 첫 번째 항일 운동 단체로서, 만주연해주의 독립 단체 와 연계 투쟁을 하였고, 파리 강화 회의에 보낼 독립 청원서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대한(조선)광복회(1915): 채기중의 대한광복단을 개편하여 박상진, 김좌진 등이 군대식으로 조직한 공화주의 단체.

활동: 의병 출신자를 비롯하여 신교육을 받은 인사들이 참여하였으며, 근대 공화 정치를 지향. 국 외 독립 운동 기지 건설을 위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고, 친일파를 처단.


조선국민회(19151918): 장일환이 평양 숭실학교 학생과 기독교 청년을 중심으로 조직.

활동: 해외의 독립 운동가와 연락하며 군자금 모금과 무기 구입을 위해 활약.


자진회(1915): 함난 단천에서 자립 교육을 목표로 결성되었으나 곧 해산.

민단조합(1915): 한말 의병장 이동하를 중심으로 조직하여 군자금을 수집.

조선산식장려계(1917): 경성고보 교원양성소 내의 비밀결사조직.


기타: 송죽회(1913), 자립단(1915), 신명단(1915)


 

독립운동 기지의 건설


국내: 신민회(19071911)는 안창호, 이동녕, 이승훈, 양기탁, 박은식 등이 조직. 북간도와 연해 주 등지에서 항일운동의 거점 마련.


북간도 지역(19세기 후반에는 농민들의, 20세기 이후에는 민족의식이 확고한 사람들이 이주)

삼원보: 이시영이상용 등이 조직한 서간도의 조직.

한흥동: 이상설이승희 등이 조직한 밀산부의 조직.

경학사(1910): 대종교인들인 이시영이동녕이상룡 등이 만주에서 조직한 독립운동 단체의 시 초. 자치기관으로 기능하였고, 1914년 부민단으로 개편. 이후 백서농장을 건설(1917)하여 훈련+농 사. 신흥강습소(1919년 신흥무관학교로)를 설치.

항일 운동의 약화: 1930년대에 들어와 일제의 대륙 침략으로 만주의 무장 부대 활동이 점차 약화.

서전서숙: 이상설이 만주 용정에 세운 학교.


연해주(블라디보스토크)

한민회(1905): 해조신문등 발행, 한민학교(1909)를 중심으로 교육활동.

13도 의군(1910): 한말의 대표적인 의병의 통합체로, 유생 의병장인 유인석이 조직.

성명단(1910): 시베리아에서 유인석이상설 등이 조직, 8천명 애국자의 선언문을 채택.

권업회(1911): 이종덕 등이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조직, 한인 사회의 경제적 이익을 증진시키고 민족 교육 운동을 추진.

대한광복군정부(1914): 이상설과 이동휘를 정부통령으로 하는 최초의 임시정부. 독립군의 무장 항일운동의 기반이자 민간정부 탄생의 단초.

전로한족회 중앙총회(1917): 시베리아 한인의 핵심단체.

한인사회당(1917): 볼셰비키 혁명의 영향으로 이동휘 등이 하바로프스크에서 결성. 1921년 고려공 산당으로 개명.

대한국민의회(1919): 블라디보스토크의 전로한족회 중앙총회가 정부 형태로 개편(노령 정부)된 것 으로서 고창일 등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

1920년대: 시베리아 내전이 종식되고 볼셰비키가 정권을 장악한 후, 1920년 초에는 한국인의 무장 활동을 금지하고 무장 해제를 강요함으로써 민족 운동이 약화.

1930년대: 1937년에 연해주의 한인들은 소련 당국에 의하여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고, 그 과 정에서 수많은 한인이 희생되고 재산을 잃게 되었다.


상하이(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긴밀한 협력 관계가 편리한 것이 배경)

동제사(1911): 신규식, 박은식, 조소앙 등이 결성한 비밀 결사. 중국 국민당 인사까지 참여시켜 신 아 동제사로 개편(1913)하여 박달 학원 설립.

신한혁명당(1915): 박은식, 신규식이 중심이 되어 결성. 복벽주의에서 출발하였으나, 1917년 황제 권을 포기하고 국민 주권주의와 공화주의를 표방하면서 임시 정부와 같은 단체를 결성하는 내용 의 대동 단결 선언(1917) 제창(최초의 애국 계몽 운동과 의병 운동을 최초로 통합 시도).

신한청년당(1918): 여운형김구김규식장덕수 등이 조직하여 김규식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1919)


미주(20세기 초부터 하와이의 사탕수수 밭 노동 희망자와 그 가족의 이주)

하와이 이주민: 일제가 하와이 이민을 금지한 1905년 말까지 7천여 명이 하와이로 이주하여 혹사.

미국 본토: 대부분 유학생이나 관리 출신.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소수의 인삼 장수와 지식인들이 이주.

하와이서부터 시작하여 신민회(1903), 한인합성협회(1907)등 다수의 조직이 결성.

공립협회(1905):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조직.

국민회(1909): 공립협회와 합성협회가 합동하여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조직, 후에 대한인국민회로 개명.

한인소년병학교(1909): 박용만이 헤이스팅스에서 설립. 박용만은 그 후 국민군단(1914)를 결성하여 1917년에 약소국민회의에 참가.

대한인국민회(1910): 외교 활동 전개. 임정 수립 이후에는 의연금을 송금하였으며, 구미 위원부의 활동을 적극 지원.

흥사단(1913): 안창호가 로스엔젤레스에서 조직. 군인 양성과 외교 및 교민 교화에 노력하였으며, 동광잡지 발행.

구미 위원부(1919): 이승만이 미국 워싱턴에 설치한 임정의 외교 사무소로 서재필이 운영하던 한 국 통신부와 주 파리 위원회를 흡수. 영문 월간지 한국평론을 발행하여 일제 침략을 고발하기도 하였으나, 구체적 외교 성과는 없었다.

멕시코 동포: 승무 학교를 세워 독립군 양성.


일본: 조선유학생학우회(1912), 조선기독교청년회(1906), 도쿄의 동아동맹회(1915), 최팔용이 28독 립선언식을 추진한 조선청년독립단(1918)등이 활약. 일본에로의 이주는 19세기 말에는 유학생이, 국권 강탈 후에는 농민들이 산업 노동자로 취업 이주가 많았다.


 

31운동


배경

국제적 분위기

1910년대 말의 민족자결주의 물결.

볼셰비키 혁명 후 신정부의 레닌은 민족자결의 원칙하에 식민지 이권을 모두 포기한다고 선언.

윌슨 대통령은 191811차대전의 전후 처리 문제에 대해 강화원칙 제시.

해외 독립운동단체의 동향

대한국민회는 191812재미 한인 전체 대표 회의를 소집하고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를 파견 하여 독립을 호소할 것을 결의.

신한청년단도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할 것을 협의.

19192월 조소앙이 작성하고 민족대표자 39인이 서명한 지린의 무오독립선언 발표.

일본인들이 고종을 독살하였다는 소문이 반일감정을 고조.

28 독립선언(1919): 재일 조선 유학생들은 도교 조선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독립선언서와 민족대회 소집 청원서를 각국 대사관, 일본 정부와 의회, 조선총독부, 각 언론사에 발송. 학생 총회 이후 일본 의회를 향해 시위행진을 감행.




과정

추진: 민족대표자 33(천도교의 손병희 등 15, 불교의 한용운 등 2, 기독교의 이승훈 등 16) 과 학생들과의 결합 하에 추진.

민족대표의 계획: 총대표 손병희를 추대하고 31일 정오를 기해 탑골 공원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한 후 일제히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 지방에도 미리 조직을 짜서 독립선언서와 독립청원서, 독립의견서 등을 작성하고 인쇄배부 문제등을 결정.

계획의 실행

민족대표 측: 31일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만세삼창을 하고 독립 선언서의 공약 3장을 낭독 한 후 경무 총감부에 전화를 걸어 체포되었다.

학생 측: 오후 2시 반경 정재용이라는 학생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외침.

운동의 확산

31일 서울, 평양, 의주, 원산을 시발점으로 3월 하순4월 상순에는 하루 최고 60회 이상까지 투쟁.

청년 학생이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여 장날을 이용해 확산.

단계

1단계(점화기)

2단계(도시 확대기)

3단계(농촌 확산기)

범위

주요 도시

도시를 중심으로 확대

농촌, 국외로도 확산

주체 및 구성원

민족 대표(종교계)

학생

학생 주도

상인, 노동자 참여

농민 적극 참여

전개 양상

독립 선언서 배포

비폭력주의

만세 시위

만세 시위

철시

 

무력적인 저항

 

 

노동자들은 파업시위로, 학생들은 동맹 휴학가두연설, 상인수공업자는 폐점철시, 하급 관 리와 일본인 회사의 사무원들은 태업퇴직의 방법으로 투쟁.해외의 시위

지린: 무오 독립선언을 발표하였던 지린에서는, 31운동이 일어나자 각지에서 시위 전개.

만주 용정,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미국 필라델피아에서도 시위 전개.

일본: 28 독립선언을 하였던 도쿄 유학생들은 31운동 봉기 소식을 듣자 시위 전개, 오사카의 동포들도 뒤이어 시위 전개.


일제의 대응

헌병, 경찰, 군인, 소방대원을 동원하고 일본 내의 보병 6개 대대 이상을 증파. 수원제암리 처살사 건(1921)을 일으킴.

415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에 관한 것이라는 악법을 만들어 대대적으로 검거하고 고문과 악형을 가함.

4월 중순 이후 항쟁은 하강 국면에 접어들었고, 여파는 1920년까지 계속.


운동의 성격: 투쟁이 산발적분산적으로 이루어지고 지도가 부재하였지만, 민족 단결의 정신적 기반 을 마련.


운동의 의의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우리 한민족의 존속을 입증.

일제의 식민통치에 큰 타격을 주어 문화통치로 전환케 함.

민족운동의 방향 및 주도층을 바꾸었음. 1920년대의 노동운동, 농민운동의 바탕이 됨.

무장독립운동이 본격 추진.


영향

대한민국임시정부(1919. 4)의 수립, 일제의 문화통치 전환.

54운동(1919), 인도의 무저항운동, 중동지역의 민족운동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

 

2.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의 항쟁



을미의병의 활동(1895)

단발령이 직접적 계기, 을미사변으로 처음 거병. 고종과 명성황후 척족의 지원도 있었다.

의병장: 처음 문석봉(보은), 유인석(제천), 이소응(춘천), 박준영(이천여주), 민용호(강릉), 김복한(홍주), 곽종석(산청), 이강년(문경), 기우만(장성)

해산: 아관파천, 단발령 철회, 국왕의 해산권고조칙에 따라 해산(많은 부대가 근왕주의적 의식이 있었음).

 


을사조약과 민족의 저항

민족의 저항

상소 운동: 조병세, 이상설, 안병찬 등은 을사조약에 서명한 대신들의 처벌과 조약의 폐기를 황제 에게 요구.

항일 순국: 민영환(대국민 유서), 좌의정 조병세, 전대사헌인 송병선, 학부 주사 이상철 등이 자결.

5적 암살단

항일 언론: 시일야방성대곡(황성신문), 을사조약불인친서(대한매일신보).

외교적 노력: 워싱턴 특사 헐버트와 헤이그 특사 이상설, 이준 이위종 파견.

을사 조약 후의 민족 운동의 방향: 애국 계몽 운동과 의병의 항전.

 


을사의병과 병오의병


을사의병

원인: 을사조약 체결.

의병장과 의병대: 민종식(충청도 정주), 원용팔(강원도 원주), 김순현신돌석정용기(경상도), 최익 현기우만고상순(전라도 태인) 등 농민을 중심으로 노동자, 지식인, 학생, 활빈당 세력이 참여.

의병의 활동

민종식 부대: 조약 체결 뒤에 사직하고 1000여 명 규모로 1906519일 충청도 서해안 지역의 홍주성(홍성)을 장악.

신돌석 부대: 1906년 영해에서 봉기한 3천여명까지 달한 의병부대로 경상도 일대에 명성을 떨침.


병오의병(1906 1906. 6): 충청강원경상전라경기 등 60여개 군에서 활동. 1906 후반기1907년 전반기에는 서울 주변에까지 활동.

 


정미의병(1907)


군대해산

19078월에 일제는 군대 정리라는 명목으로 군대 해산. 박승환의 자결은 시가전을 강력히 전개 하는 계기가 되었다. 원주 진위대(민긍호), 강화 분견대(유명규) 등 지방 군인들도 봉기.

군대 해산 이후 의병의 양상: 전투력 강화, 의병 투쟁의 전국화, 평민군인 출신의 의병장 대두.

의병장: (평민)군인 출신으로 민긍호김덕제지홍윤연기우박준성손재주현덕호, 평민 출 신으로 신돌석홍범도김수민안계홍 등.


서울진공작전(1907 1908 )

관동 의병장 이인영은 각지의 의병 부대를 양주에 1만여 명 집결.

의병 부대는 이인영을 13도 총대장, 허위를 군사장으로 삼아 13도 창의군을 결성(1907. 12)하고 다 음해 1월부터 서울 진공 작전 개시.

의병 부대는 서울의 각국 영사관에 의병을 국제법상 교전 단체로 승인해 줄 것을 요구하는 통문을 돌리고, 서울 총공격에 앞서 허위의 300명 선발대가 먼저 서울에 접근케 하였음.

선발대는 연결이 끊어진 상태에서 후퇴하고, 부친상을 당한 이인영은 허위에게 맡기고 귀향하여 작전 실패. 좌절 이후 의병활동은 평민의병장 의병 부대의 주도로 유격 전술을 실시.


국내 진공 작전: 홍범도와 이범윤이 지휘하는 간도와 연해주 일대의 의병 부대가 국내 진공 작전을 꾀 하였다.


일제의 남한 대토벌 작전

의병 활동이 거세지자 일제는 조선 정부군을 배후에서 지휘하던 방식을 직접 진압으로 바꿈.

삼광정책: 민긍호 전사, 이인영이강년 사형, 허위 옥사. 1909. 910월의 초토화 작전은 의병의 최대 중심지였던 전라도 지방을 주요 대상으로 하였음.

1913년에 황해도의 헌병 파견소를 공격하였던 마지막 의병장 채응언이 1915년에 체포되기까지 활 동은 면면히 이어졌으나 남한 대토벌 이후 의병은 만주 등지로 활동을 옮김.

 


항일 의병 전쟁의 한계성

의병의 무력적 열세

내적 요인: 의병을 주도한 양반 유생층이 전통적 지배 질서의 유지를 고집하였으므로 대다수 농민 의 병들과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외적 요인: 을사조약이 강요된 후에는 외교권이 상실되어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국제적 지원도 기대할 수 없었다.


 

애국계몽운동


(을사조약 전후의 항일의병 전개 즈음의)애국계몽운동의 성격

변법개화사상가: 서양의 자유평등민권사상을 옹호, 근대시민국가 수립을 목표. 일본과 협력하 는 길을 찾다가 침략이 가속화될수록 친일파로 전락. 일진회가 대표적 예임.

혁신적 유학자 출신의 지식인들: 황성신문이나 대한매일신보 계열의 인사들. 1910년 이후에는 중국 으로 망명. 신민회가 대표적 단체.


경제자립운동

1880년대의 근대적 상업자본

대동상회, 장통회사가 출현하였다. 인삼의 재배와 판매로 자본을 축적한 개성 상인들은 종삼 회사 를 설립하였으며, 군산에서는 미곡 무역을 담당하는 호상 상회가 설립되었다. 갑오개혁 이전에는 회사 수가 전국 각지에 40여 개에 달하였다.

성격: 초기에는 동업자 조합의 성격을 띠었고, 이후 근대적 형태의 주식회사도 설립되었다.

1890년 이후 근대적 상업자본

배경: 정부의 상공업 진흥 정책에 맞추어 내국인의 기업 활동이 활발.

일본 자본가들의 진출: 대규모의 운수 회사를 설립하고 해상과 육상의 운수업을 지배.

민족 자본의 토대 마련: 이운사(1892), 대한협동우선회사(1900), 인천윤선주식회사(1900), 통운사 (1901), 부하철도회사(1898), 대한철도회사(1899), 해서철광회사(1900), 수안금광회사(1903), 대한직 조공장(1897), 김창덕 직조공장(1902).

근대적 산업 자본의 성장

유기 공업: 개항 이전에 이미 발달했던 유기 공업과 야철 공업을 계승하여 서울에 조선 유기 상 회라는 합자 회사가 설립.

면직물 공업: 개항 이전에 농가 부업 단계에 머물러 있던 면직물의 생산은 외국산 면직물의 수입 으로 큰 타격을 받았지만, 대한 직조 공장, 종로 직조사 등의 직조 공장이 설립되어 발동기를 이 용한 생산 활동을 전개.

기타: 이를 전후하여 연초 공장, 사기 공장들도 설립.

금융부문: 1890년 이래 조선은행(관료 자본 중심의 민간 은행, 심상훈), 한일은행, 제국은행(민병한) 등이 창립 1년도 못되어 폐쇄.

한성은행(1897): 김종한이 설립, 해방 이후 조흥은행으로 발전, 현재 신한은행.

천일은행(1899): 민병석심상훈 등이 설립, 현재 우리은행.

결과: 이들 은행은 1905년에 일제가 실시한 화폐 정리 사업을 계기로 몰락하거나 자주성을 잃고 변질되기도 하여 한국의 금융은 사실상 일제에 장악.

1900년대 은행경영: 한국인 은행으로 농공은행보통은행, 일본인 은행으로 제일은행한국은행팔십은행백삼십은행주방은행밀양은행일본흥업은행.


국채보상운동(1907): 대구에서 김광재서상돈이 국채보상기성회를 조직하여 금연운동을 시작으로 서 울여자교육회대한부인회, 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제국신문 등이 1,300만원을 갚는 운동을 일으 킴. 통감부가 간사 양기탁을 횡령 누명으로 구속하는 등 방해를 하여 실패.



애국계몽단체와 언론활동


보안회

(1904)

송수만심상진원세성 등이 일본의 황무지개척 요구를 철회. 농광회사(이도재)를 설립하여 개간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일진회의 반민족행위를 규탄하다 일본의 압력으로 해산.

헌정연구회

(1905)

이준양한묵윤효정 등이 입헌정치의 수립을 목표로 활동. 통감부가 설치된 직후에 해산. 일진회의 반민족 행위를 규탄.

대한자강회

(1906. 4)

헌정연구회를 이끌던 윤효정이 장지연심의성 등과 함께 조직. 교육개발, 식산흥업, 외세배격을 구호로 25개 지회를 두고 월보를 간행. 1907년 통감부에 의해 해산. 고종퇴위 반대운동을 벌였다.

대한협회

(1907. 11)

대한자강회의 후신으로서 천도교의 오세창권동진 등이 조직. 산업, 교육, 애국계몽 운동을 전개하고 70개소의 지회를 두었으나, 통감부 통치를 문명지도로 긍정하면서 친일적 색채를 드러내기 시작함.

서북학회(이갑): 평양황해도의 학술단체로 서북 학보 발행, 순회 강연.

한북흥학회(이준이동휘): 함경도의 학술단체로 교육구국운동계몽강연토론운동청년운동 전개.

기호흥학회(이광종): 경기충청도의 학술단체로 기호 학보 발행, 기호 학교 설립.

호남학회(이채): 전라도의 학술단체로 호남 학보 발행.

관동학회(남궁억): 강원도의 학술단체로 황성신문 발행.

교남학회(박정동): 경상도의 학술단체로 교남교육회잡지 발간.

 

영남학회(장지연): 대한 자강회 조직.

대동학회(김윤식): 대동 전수 학교 설립.

흥사단(안창호): 흥사단보 발행.

여자교육회(진학신): 양규 의숙 설립.

신민회

(1907. 4)

안창호이동녕양기탁이승훈 등 서북지방의 기독교 신자 및 학교, 학생들로 조직.

표면적으로는 애국계몽단체였으나 이면으로는 남만주 삼원보, 밀산부 한흥동, 신흥 무 관 학교 등 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노력.

안창호의 대성학교(평양), 이승훈의 오산학교(정주)건립, 태극서관(대구), 자기회사(평 양) 건립 등의 활동. 조선 광문회(고전 간행) 1911105인 사건으로 해산.

4대 강령으로 사상 고취 동지 발견단합 상공업기관 건설 교육기관 설립.


애국계몽단체


한성순보(18831884)

박영효 등 개화파가 박문국에서 발간한 순간 관보. 한성주보(18861888)가 됨.

독립신문(18961899)

서재필 등이 발행한 독립협회 기관지. 한글판, 영문판.

황성신문(18981910)

남궁억 등 개신유학자들의 중류지. 국한문 혼용. 장지연의 논설로 80일 정간.

제국신문(18981910)

이종일의 부녀자 대상의 순한글 대중지.

매일신문(18981899)

1898. 4의 협성회보를 발전시킨 순한글 일간지. 독립협회 해산으로 폐간. 대중지로 개화사상을 펴며 국민의 각성 촉구.

대한매일신보

(19051910)

영국인 베델이 창간한 국한문한글영문판의 신민회 기관지. 영일동맹 덕으로 검열을 면제받고 주필 양기탁이 일인불가입이라 계시. 박은식, 신채호 등이 항일논조를 펴며 을사조약불인친서의병활동서양문물 소개를 함. 베델은 1909년 병사하였으나 1910년까지 간행되다 총독부에 매수되어 매일신보로 속간.

만세보(19061907)

천도교의 후원으로 오세창이 창간. 일진회를 공격하고 사회진보주의를 제창. 대한신문으로 변질.

대한민보(19091910)

대한협회의 기관지로 국민신보(일진회)에 대항.

경향신문(19061959)

국문의 가톨릭교회 주간 기관지.

경남일보(19091914)

김홍조, 최초의 지방신문으로 영남 유림들이 장지연 초빙.

한말 5대지: 황성신문, 제국신문, 대한매일신보, 만세보, 대한민보

친일신문: 경성일보(총독부, 1906), 국민신문(이용구, 1906), 대한신문(이인직, 1927), 법정신문(이완용, 1909), 매일신보(1910).

기타 민족지: 신한민보(미국), 해조신문(1910, 연해주, 신채호)

언론활동(신문)


민족교육운동과 종교활동

동문학

고종 20(1883)

정부가 세운 영어 강습 기관으로 통역관 양성.

육영공원

고종 23(1886)

정부가 세운 최초의 관립 학교로 미국인 교사를 초빙하여 상류층 자제들에게 영어, 수학, 지리학, 정치학 등 근대 학문을 교육

(동도서기적)민족교육운동

갑오개혁 때 교육입국의 조서가 발표(1895)되며 소사범외국어 학교 등 각종 관립학교 설 립. 민족교육은 을사조약 이후부터 절정.

연대

학교명

설립자

위치

연대

학교명

설립자

위치

고종 20(1883)

원산학사(최초근대사립)

정현석

원산

광무 10(1906)

신성보성여학교

진명여학교

보성여학교

서전서숙

미 북장로회

엄귀비

엄귀비

이상설

선천

서울

서울

간도

고종 23(1886)

배재학당(최초사립학교)

이화여학고(최초여사립)

경신학교

북감아펜젤러

북감스크렌튼

북장언더우드

서울

서울

서울

융희 1 (1907)

대성학교

오산학교

오성학교

신흥학교

안창호

이승훈

서북학회

신민회

평양

정주

서울

삼원보

고종 27(1890)

정신여학교

미 북장 엘러스

서울

광무 1 (1897)

숭실학교(최초지방사립)

미 북장 베이드

평양

융희 2 (1908)

기호학교

동덕여자의숙

기호흥학회

조동식

서울

서울

광무 2 (1898)

배화여학교

미 남감리회

개성

광무 7 (1903)

숭의여학교

미 북장로회

평양

 

광무 9 (1905)

보성학교

양정의숙

휘문의숙

이용익

엄주익

민영휘

서울

서울

서울

한말 주요 사립학교

천주교

1886 프 수호통상조약 이후 선교활동 자유화.

∙「경향창간

일제 강점기: 만주에서 의민단 조직 무장항일투쟁, 고아원양로원 등 사회 사업

개신교

1884년 알렌이 장로교, 1885년 아펜젤러가 감리교 전래.

서북지방에서 큰 호응, 서재필이상재윤치호 등이 대표자

서울의 기독교인들은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전신) 조직 일제의 동양전도관

국권침탈 후: 민족운동 전개 극심한 탄압 일제 말기: 신사참배 거부(1935)

천도교

(1906)

3대 교주 손병희는 친일적인 이용구가 시천교를 설립하여, 이와 결별하고 동학을 천도교로.

이용익과 더불어 출판사 보성사 설립, 보성학교와 동덕여학교 인수, 만세보기관지.

231운동인 자주호국선언을 계획(1922)

사회운동 전개 조선농민사 조직: 신파의 개량주의적 민족운동

대종교

(1909)

창립 단시 단군교라 칭하며 나철, 오기호 등이 발전.

1910년에 다수 애국지사들이 가담, 간도연해주등 해외 항일운동의 정신적 지주(정신문화운동)

중광단(1910) 북로군정서: 무장항일투쟁(청산리 전투) 전개

유 교

민주주의 이념에 적응하려는 움직임 나타남.

양명학에도 주목하여, 양명학자 박은식은 유교구신론(1909) 주장. 일제의 대동학회

불 교

민족 불교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만해 한용운이 불교유신론(1913) 주장 일제의 본원사

원불교

1916 박중빈이 창시, 개간사업과 저축운동 전개.

기본교서 원불교 전서: 교화, 교육, 자선의 3대사업 전개

새생활운동 전개 일부는 친일행각

종교활동

 


국어학과 신문학운동


국어학 분야

갑오개혁 후: 정부에서 편집국과 인쇄국을 두어 국한문 혼용의 교과서를 편찬, 국문연구소(1907)을 두어 주시경지석영최광옥 등이 국어 정리.

조선어연구회(1921): 국문연구소를 모체로 이윤재최현배 등이 조직. ‘가갸날제정, 기관지 한글발간.

조선어학회(19311942): 표준어를 제정하고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1932), 우리말 큰사전편찬을 착수. 우리말 큰사전은 한글학회(1946)1957년 완성편찬.

국문표기방법의 통일: 유길준 조선문전(1895), 이봉운 국문정리(1897), 지석영 신정국문(1905), 주시경 국어문법(1906), 유길준 대한문전(1909)


국사분야

국사교과서의 간행: 장지영김영택현채

현채: 유년필독서, 동국사략등을 저술. 대체로 안정복의 동사강목을 서양식 역사서술 체계 에 맞춰 축약한 신사체.

이 시기 국사연구의 경향: 고대사 연구에 치중, 민족주의적 주체성을 강조(단재), 국사의 대중화에 관심.

민족사관: 박은식에서 시작하여 신채호의 역사적 민족사관 정립, 둘에 의해 정립되어 정인보안재 홍문일평 등에 계승. 주로 실학자들의 저술을 정리. 민족사학은 현대의 근대적주체적 역사관 정립에 크게 기여.

국학자

저서

연구활동

신채호

을지문덕전, 최도통전, 천희당시화, 이태리건국 3걸전

독사신론」 ⇨역사 서술상의 주체를 민족으로 설정하고 민족주의 사학의 연구 방향 제시

조선혁명선언」 ⇨ 의열단의 이념. 민중의 폭력 혁명으로 독립 쟁취를 부르짖음.

<해조신문> 간행

 

신민회에 참여.

(화랑) 사상: 조선사연구초에서 묘청의 난을 낭가사상의 대표로 인정, 민족사관 정립

∙「조선상고사(1931): 역사는 -非我의 투쟁.

대륙사관 단군부여고구려발해

기자위만 제거, 한군현 부정

임시 정부에서 국민 대표 회의 개최를 주장하는 등 창조파의 주동 역할을 하다 무정부주의자로 변신.

박은식

(백암)

유교구신론(양명학적), 안중근전, 서사건국지, 연개소문전, 한국독립운동지혈사, 학규신론, 왕양명실기

 

조선혼: 한국통사이 존재하여 불멸하면 (나라)는 때맞추어 부활한다.”

한국통사는 최초의 한국근대사(1915)이다.

신규식과 동제사 조직, 임정 대통령으로 활약

정인보

(위당)

조선사연구, 양명학연론

‘5천년간 조선의 얼동아일보 게재.

신채호의 민족주체사상 계승발전

실학의 전통 정리

문일평

호암집, 한미50년사

조선역사학의 대중화 문제에 큰 관심

근현대사 연구 치중 세종을 민족대표로

최남선

아시조선, 조선정신, 고사통, 조선독립운동사, 단군론, 조선역사

사상.

불암문화론으로 일선동조론에 대항. ‘조선 정신

이능화

조선기독교 및 외교사, 한국도교사, 한국불교통사

종교민속 방면의 연구

홍이섭

조선과학사

전형필

오세창의 지도로 문화재 수집

장지연

∙「대한강역고, 백두산정계비고」 ⇨ 민족 주체성 과 조국 정신 고취

∙「조선유교연원, 대한최근사

조국정신

장도빈

조선사상사(1925), 잡지 서울간행, 발해사 연구의 개척

∙「대한위인전(민족주의 사학)

 

손진태

조선민족사개론, 국사대요, 한국민족문화의 연구

민족사관에 대한 비판과 극복

황 현

매천야록

현 채

동국사략(1907)․「유년필독등 교과서 저술, 월남망국사 번역소개.

이광수

민족개조론, 민족적 경륜민족주의 우파

안재홍

조선상고사감

민족정기 고조선 사회의 발전 체계화

신간회 참가, 신민족주의 제기

안 확

조선문명사(1923)

정 교

대한계년사(고종 이후 근대사)

한용운

조선독립의 서, 불교유신론

불교의 미신적 요소를 배격하고 자주성을 회복하려는 근대화 운동

국학자와 민족주의 사학자

외국인의 역사연구

헐버어트: 대한기년, 한국통사, 한국최근사

그리피스: 은둔의 나라 한국

맥켄지: 한국의 비극

그라젠제프: 근대한국


문학분야

신소설

신체시 운동이 친일문학 쪽으로 흘러가자 한문학을 계승하면서 자주정신을 고취하는 문학풍조가 생겼는데, 신채호는 천의당시화를 대한매일신보에 게재.


기타 문학

계몽문학, 창가, 민속 가면극, 고희동, 김정희를 잇는 전통 회화.

번역문학: 게일 천로역정, 헐버트 사민필지, 윤치호 이솝이야기」․「걸리버 여행기」․「 로빈슨 표류기

. 일제의 주권침탈과 구국운동


1. 일제의 주권침탈


러일전쟁(19041905)

러일전쟁의 배경

러시아의 행동: 해군기지 획득을 위하여 마산목포 등을 조차하려다 일본의 반대로 실패(1899). 청의 의화단 사건 때 만주에 파병(1900).

일본의 행동: 1차 영일동맹을 체결(1902). 미국도 영국과 함께 일본을 지지.

러시아는 군사기지 획들을 위하여 압록강 입구 용암포 조차를 시도하다가 일본이 저지(1903).

러일전쟁

戰前(전전) 정세: 대한제국은 국외중립을 선언(1904. 1). 일본은 러시아군의 만주철병이 이행되지 않자 러시아에 협상을 제의, 러시아는 39°선을 경계로 그 이북의 특권을 주장하고 일본은 압록강 을 중립지대로 하고 그 이남 지배를 주장하였으나 러시아의 반대로 좌절.

전쟁 발발: 협상이 결렬되자 일본은 밤에 인천뤼순항의 러시아 함대에 기습공격을 가한 후(1904. 2. 8), 5만의 병력을 인천에 상륙시켜 서울을 점령. 공식 선전 포고는 210.

일본의 승전: 19051일 뤼순 요새 장악, 3월에는 봉천 교외세서 러시아 육군 격퇴. 5월에는 남해 에서 발틱 함대를 격파하여 승세를 쥠. 일본의 승세에는 영국과 미국의 지원도 한몫함.

가쓰라-테프트 밀약(1905. 7)과 제2차 영일동맹 협약(1905. 8)

한국에 대한 일본의 정치군사경제상의 특별권리 승인.

러시아는 사할린 남반부를 일본에 할양.

뤼순다롄의 러시아 권리를 일체 일본에 양도.

양국 군대는 만주에서 동시에 철수하고 상호 이권을 존중.

만주철도는 관성자장춘을 경계로 양국이 분할.

포츠머드 강화조약(1905. 9): 일본의 우세가 확실하고 러시아도 자국의 혼란으로 장기전을 바라지 않자, 일본은 미국에 중재를 요청. 포츠머드 강화조약으로 일본은 조선에서 독점적 지위를 국제적 으로 인정받음.

 


일제의 침략


한일 의정서(1904. 2)

한국은 일본의 시정개선에 대한 충고를 용납한다.

일본은 한국 왕실을 친의로써 안전하게 한다.

일본은 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보장한다.

한국 황제는 영토에 위험이 있을 때에는 특별조치를 취하고, 편의를 도모할 것이며 전략상 중요한 지점을 임의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

한국은 일본의 승인 없이 제3국과 협정을 맺지 못한다.

결과: 국외중립 붕괴, 러시아와 체결한 모든 조약이 폐기. 이후 일본은 한국의 통신망, 항해권, 어 업권을 차지하고 경부선과 경의선 부설. 황무지 개척안을 요구.


1차 한일협약(=한일 협정서, 1904. 8)

황무지 개척권을 철회한 일본은 일본인 고문관 초빙을 강요. 전황이 일본에게 유리하게 되자 대한 방침 및 대한시설강령 마련(1904. 5)

대한방침

일본제국은 한국에 대해 정사상 및 군사상에 있어서 보호의 실권을 거두고 경제상으로 더욱 우리 이권의 발전을 도모한다.

 

 

대한시설강령 6개 조항

방비 완전(일본군대의 본격적 한국 주둔)

외정 감독(일본의 한국 외교 감독)

재정 감독 교통기관 장악(철도부설 중심)

척식 도모

한일 협정서 체결(외무대신 서리 윤치호-일본공사 하야시)

조선정부는 일본이 추천하는 일본인 1명을 재정고문으로 초빙하여 자문한 후에 시행.

일본이 추천하는 외국인 1명을 외교고문으로 초빙.

조약체결이나 그 밖의 중요한 외교안거는 사전에 일본과 협의하에 시행.

한일 협정서의 결과

재정고문 메카다, 외교고문 스티븐스 파견. 협정에 없는 경찰고문 마루야마, 군사고문 노즈, 학무 고문에 시데하라가 초빙되어 고문정치 실시.

각국에 파견된 한국 공사가 모두 소환.

메카다의 금본위제 확립과 화폐정리사업.

화폐정리사업(1905)

 

제일은행(1905. 3 이래 통화발행권 소유) 신화폐를 만들어 엽전(상평통보) 및 백동화와 교환하는 조치.

백동화는 종을 개당 25, 종을 1, 종을 무효로 등급을 나누어 교환. 종이 백동화 전체의 2/3.

한국 상인들은 새화폐를 신용치 않고 토지나 가옥에 투자하여 자본이 고갈.

새 화폐의 가치가 등귀하여 일본인들은 이익.

화폐정리사업은 일본 상인의 경제적 진출의 길이 되었고 민족경제를 말살. 결국 일본이 조선금융 지배.

참정대신 한규설 ──┐

탁지부대신 민영기 반대

궁내부대신 이재극 ──┘

법무대신 이하영

내무대신 이지용 ──┐

외무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을사오적

농상부대신 권중현

학부대신 이완용 ──┘

박제순 대신 이하영을 을사오적에 속한다고 보기도 한다.

화폐정리사업(1905)

 

제일은행(1905. 3 이래 통화발행권 소유) 신화폐를 만들어 엽전(상평통보) 및 백동화와 교환하는 조치.

백동화는 종을 개당 25, 종을 1, 종을 무효로 등급을 나누어 교환. 종이 백동화 전체의 2/3.

한국 상인들은 새화폐를 신용치 않고 토지나 가옥에 투자하여 자본이 고갈.

새 화폐의 가치가 등귀하여 일본인들은 이익.

화폐정리사업은 일본 상인의 경제적 진출의 길이 되었고 민족경제를 말살. 결국 일본이 조선금융 지배.

참정대신 한규설 ──┐

탁지부대신 민영기 반대

궁내부대신 이재극 ──┘

법무대신 이하영

내무대신 이지용 ──┐

외무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을사오적

농상부대신 권중현

학부대신 이완용 ──┘

박제순 대신 이하영을 을사오적에 속한다고 보기도 한다.


③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 1905.11)

190511월 초순 전권 대표로 조선에 들어온 이토 히로부미는 을사5적신을 이용하여 을사조약 체결. 고종은 끝까지 반대.

일제는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초대 통감은 이토) 설치. 해외 한국공사관과 재한 외국공사관 폐쇄, 독도와 간도가 상실.

조약 체결 후 23일 지나서야 일반에 알려짐. 시일야방성대곡논설. 나철오기호 등은 5적 암살단 조직.


한일 신협정(=정미 7조약, 1907)

조약 체결전의 정세: 일제는 고종을 헤이그 특사사건(1907. 6)을 트집잡아 강제로 폐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케 하였으며 융희연호 사용. 고종의 퇴위로 연일 시위, 일진회 기관지 국민신보사옥 파괴.

조약 체결: 이토는 순종 즉위 직후 협박하여 한일신협약 체결. 내정간섭 권한까지 강탈.

한국정부는 시정개선에 있어서 통감의 지휘를 받는다.

한국정부의 법령제정과 행정상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받는다.

한국의 사법사무는 일반 행정사무와 구별한다.

한국 고등관리의 임명은 통감의 동의에 의한다

한국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관리로 채용한다.

한국정부는 통감의 승인없이 외국인을 한국관리로 채용하지 않는다.

1904827일에 조인된 한일협약 제1항을 폐지(재정고문 초빙을 폐지).

결과: 차관정치가 실시되어 통감이 내정권 장악, 일본인 장관이 전결권 소유.

   

합방 후의 조선에는 소위 천황의 대권으로 통치.

일체의 정무를 무관 총독이 독재.

통치기구는 가능한 한 간단히.

총독부 회계는 특별회계로 할 것.


군사권사법권경찰권의 박탈과 국권의 상실

군사권 박탈: 이토와 하세가와가 한국군대를 강제 로 해산. 해산일에 시위보병 제1대대장 박성환이 자살, 장병들이 일본군대와 시가전을 벌이고 각지 의 의병들과 합류. 

보안법과 신문지법 제정으로 언론활동 봉쇄.

기유각서(1909) 조인: 이토 후임인 통감 소네가 사법권과 감옥사무 박탈.

소네 후임으로 데라우치가 통감이 되어 19106월에 합방 준비로 도쿄에서 한국의 경찰권 이양의 조약을 맺고 7월에 부임.

일제는 황성신문대한민보대한매일신보 등을 폐간시킨 뒤 일진 회를 앞세워 이용구송병준으로 하여금 합방촉진성명등을 발표.

합방조약(1910. 8. 총리대신 이완용-마지막 통감 데라우치)

합방에 대한 국제적 반응: 독 지지, 청 경계.

 

일본의 토지 약탈

개항 초기: 농민들에게 돈을 빌려 주었다가 농토를 차압하기도 하고 농토를 저당잡고 고리 대금업을 하다가 그것을 헐값으로 사서 점차 농장을 확대.

일 전쟁 이후: 일본의 대자본가들이 대거 진출하여 전주, 군산, 나주 일대에서 대규모의 농장을 경영.

일 전쟁 이후- 본격적 토지 약탈

철도 부지 약탈: 일본은 경인선경부선을 부설하면서 철도 부지 중 국유지는 무상으로 약탈하였 고, 사유지는 조선 정부가 소유자로부터 사들여 제공하도록 강요.

군용지 약탈: 필요한 지역을 거의 제한 없이 무상으로 차지하였고, 군용지를 핑계로 주둔지 근처의 토지를 대량으로 약탈.

황무지 개간: 일본은 조선의 황무지 개간과 역둔토의 수용을 통하여 토지 약탈을 꾀하였다.

토지 약탈 목적: 국권 피탈 무렵에 일본이 차지한 토지는 15천만 평에 이르렀는데, 식민지화를 위한 기초 작업이었다.

 


간도와 독도


간도

1907년 경에는 간도 주민 3/4가 한민족.

백두산 정계비: 숙종 38(1712)에 접반사 박권과 오라총관 목극동 사이에 국경 확정.

간도 귀속문제: 고종 18(1881) 청은 간도개간 사업을 벌인다는 구실로 한민족의 철수를 요구.

해결: 정계비 토문강의 해석을 청은 두만강으로, 조선은 송화강 상류로 보아 영토분쟁 발생. 조선 은 1883년에 어윤중을 서북경략사로, 1885년에 이중하를 토문감계사로, 1902년에 이범윤을 북변 간 도관리사로 파견하여 우리 영토임을 확인.

간도 파출소 설치(1902): 일본은 통감부 설치 이후에도 간도에 파출소를 설치하여 관할하였다.

간도협약(1909): 일본은 만주에 푸순탄광권과 안봉선철도를 부설하는 권리를 얻어내는 대가로 간도 를 청의 영유로 인정.


독도

지증왕 때 이사부가 정벌(512)하여 우리 영토로 편입. 1693년에 안용복은 울릉도에 침입한 일본 어 부를 축출하고 막부에 건너가서 우리 영토임을 확인(일본 사료 통항일람).

독도는 현종 때(1849) 프랑스 포경선 리앙쿠르가 발견하여 리앙쿠르 섬이라고 하였고, 영국은 호넷 섬이라고 하였다.

일본은 1905년에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시켰으나 광복으로 수복. 독도 관련 문헌으로는 문헌비고, 통문관지, 매천야록, 고지도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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