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성리학의 융성
⑴ 성리학의 두 흐름(훈구파와 사림파)
훈구파(관학파=혁명파, 15세기) | 사림파(사학파=온건파, 16~7세기) |
•역성 혁명 찬성 •원시 유학에 관심 •부국강병, 중앙집권화 추구 •사장 중시 •불교․도교 등을 포용 •성균관․집현전 출신 •15세기 민족 문화 창달에 기여 •막대한 토지 소유 •왕도․패도주의 •군사학․기술학 중시 •격물치지․경험적 학풍 •치인지학 추구(지배로서의 학문) •자주 민족의식(단군숭배) •주례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사용 (주나라의 제도를 기록한 유교 경전) | •역성 혁명 반대 •성리학 이념에 충실 •왕도 정치와 향촌자치 추구(향약실시 주장) •경학 중시 •불교․도교 등 배척 •지방 사학 출신 •16세기 이후 사상계 주도 •중소 지주충 •왕도정치 강조 •기술학 천시 •사변주의․관념적 학풍 •수기지학 추구(수신으로서의 학문) •중국중심 화이사상(기자) •3사 장악, 훈구파 비판(사화) •형벌보다는 교화에 의한 통치를 강조 |
⑵ 성리학의 발전(주리론과 주기론)
서경덕․조식․이언적이 선구자이고, 조식은 노장 사상에 포용적이었으며 학문의 실천성을 특히 강조 | |
이언적 ↓ | 서경덕(불교․노장 사상에 개방적) ↓ |
이황(주리론) - 이기 이원론 | 이이(주기론) - 일원론적 이기 이원론 |
•원리 중시 •도덕과 명분(원리) 강조 •일본 성리학에 영향 •「주자서절요」, 「이학통록」 •성학십도(군주 자신이 성학을 따를 것을 주장)
•영남학파에 영향(김성일, 유성룡 등) •예안향약 •백운동서원 → 소수서원으로 사액 •도산서원(후진양성) | •경험적 세계 중시 •현실 개혁에도 관심 •실학으로 연결 •동호문답 •성학집요(현명한 신하가 성학을 군주에게 가르쳐 그 기질을 변화시킬 것을 주장) •기호학파 형성(조헌, 김장생 등) •해주향약, 서원향약 •소현서원 •「만언봉사」: 10만양병설, 「동호문답」: 대동법 주장 |
지나친 도덕주의로 현실적인 부국강병책에는 소홀 | |
↓ 19세기 위정척사, 항일의병 | ↓ 18세기 실학 ↓ 19세기 개항 |
⑶ 학파․정파의 형성과 대립
① 주리설(주리론)과 주기설(주기론)
영남학파 (동인, 주리론) | 남인(이황) | •경기도 남인(이익, 정약용) → 중농주의 실학 •경상도 남인 → 위정척사 사상 •예송 논쟁을 일으킴(남인↔서인) •수취체제 완화와 자영농 육성 주장 •상업․기술 발전에 소극적 •왕권 강화 중시(갑인예송, 기사환국) | ||
북인(조식) | •절의 중시 → 정인홍, 곽재우 등 의병장 다수 배출 •중립 외교(광해군 때) 추진 •대동법 시행, 은광 개발 등 사회․경제정책 추진 | |||
기호학파 (서인, 주기론) | 노론 (송시열, 이이) | •충정도 노론 - 주기론 고집 •서울 노론 - 주리론 포용 → 북학 사상으로 발전 •성리학 신봉, 이단 적극 배격 •의리 명분론, 조선중화사상, 척화론 주장 •일당 전제화를 시도하여 붕당 정치를 변질시켰다. | 계승 | 한원진 임성주 등이 계승. 19세기 중엽의 최한기는 주기론과 관련된 경험주의 철학을 높은 수준으로 고양. |
소론 (윤증, 성혼) | •성리학 이해에 탄력적 •양명학 연구 •내정 개혁 주장 |
② 심성론 중심(인물성 - 이론 vs 동론)
호론 | 낙론 |
•충청도 지방 노론 중심의 주장 •한원진, 권상화 •인물성이론 •우리 문화의 자부심으로 청․서양에 배타적 •위정척사 사상에 영향 | •서울․경기 집장 노론 중심의 주장 •이간, 김창협, 이재 •인물성동론 •청․서양 등 이질적인 것을 포용하는 입장 •북학 사상에 영향 |
⑷ 예학과 보학의 발달: 예학은 예송논쟁의 구실로, 보학은 양반 문벌강화 역할.
4. 불교와 신앙
⑴ 불교 정책: 불교는 중국을 존중하는 세계관이 없어 유교의 약점을 보완
태조 | 도첩제 실시로 승려 수 제한, 사찰 증설 금질. 후에 흥천사를 지음. |
태종 | 도첩제 강화. 사원전․노비 몰수 등 억불책. |
세종 | 종파 정리, 사원전․노비 제한, 화장․경행을 금지. 후에 궁중에 내불당 건립. |
세조 | 원각사 건립, 간경도감 설치하여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등 숭상. |
성종 | 도첩제 자체를 폐지 |
중종 | 승과 폐지, 법계 폐지, 승려 천민화 |
명종 | 문정 왕후의 지원 아레 보우가 중용되고 승과․도첩제 부활. 후에 다시 탄압. |
16세기 후반 | 서산 대사와 같은 고승이 배출되어 교리를 가다듬었고, 임진왜란 때 승병의 활약으로 위상 정립. |
⑵ 민간신앙
① 도교
㉠ 장점: 제천행사는 국가권위 높임, 도교경전은 상무정신 함양. 양생술은 의학발달에 영향. 유교의 문 약에 빠지고 사대에 치우치는 약점 보완.
㉡ 단점: 행사의 남용으로 국가 재정에 큰 손실 → 사원 정리 행사 축소
㉢ 관청: 소격서가 (칠성단)초제를 주관하였으나 16세기 사림의 명분론에 맞지 않아 폐지.
㉣ 기타: 마니산 초제
② 민간 신앙
㉠ 풍수지리설, 도참 사상이 조선 초기 이래로 중요시되어 한양 천도에 반영. 산송문제 대두.
㉡ 무격 신앙
㉢ 민간 신앙 보호: 미신행위 금지, 민간신앙을 국가신앙으로 흡수, 무당을 국가가 채용.
㉣ 삼신 숭배: 환인, 환웅, 단군의 삼신숭배를 국조숭배로 흡수, 구월산에 삼성사 설치․제사 동시에 평양에 단군사당 건립․제사.
㉤ 세시 풍속
㉥ 명당 선호 경향: 불교식으로 화장하던 풍습이 묘지를 쓰는 것으로 바뀌면서 명당 선호 경향이 두 드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