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실학의 성립
⑴ 실학의 대두
① 배경: 성리학의 사회적 기능 상실․한계 자각, 양난 후 정치․경제 피폐에 따른 자아 발생, 새로운 학 문정신 추구, 청의 실증적 고증학의 영향, 영․정조의 학문장려와 학자 배출, 서(양과)학의 영향, 경제 적변화와 발전, 신분 변동 등.
② 제기: 이수광, 한백겸 등에 의해 제기되어 경세치용, 이용후생, 국학연구로 확산.
③ 한계: 유학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지지세력의 대부분이 몰락 지식인이어서 국가정책에 미반영.
⑵ 실학의 선구
① 정여립(선조): 군주 세습제를 부인하고 ‘천하는 공물’이라고 주장.
② 정인홍(광해군): 성리학 이외의 사상을 폭넓게 수용하여 정신문화와 물질문화를 균형 있게 발전시켜 부국강병과 달성해 보고자 하였고, 이언적, 이황을 비판하다가 유적에서 삭제당함.
③ 이수광
⑶ 실학의 제기(17세기 전반기)와 확산(18세기)
① 이수광: 「지봉유설」에서 천문․지리․관제 및 「천주실의」 등을 소개하여 문화 인식의 폭을 확대.
② 한백겸: 「동국지리지」를 저술하여 우리나라의 역사 지리를 치밀하게 고증하였으며, 토지 소유의 지나 친 편중을 개탄하고 대동법의 확대 실시를 추진.
③ 실학의 확산: 18세기에 가장 활발.
⑷ 경세치용 학파(=중농학파)
① 특징
㉠ 18세기 전반 남인 출신들의 학자들로 이들의 이상은 유교적 이상국가의 실현.
㉡ 토지 제도 개혁을 가장 중시하여지주제 타파와 자영농 육성 주장, 화폐의 폐단 지적.
㉢ 한말 애국계몽사상가와 국학 연구 등에 영향.
② 중농주의 실학자
유형원 (1622~1673) | ∙「반계수록」에서 균전론 주장 ∙자영농을 바탕으로 병농일치의 군사제도, 사농일치의 교육제도 주장. ∙사상의 한계: 적서차별, 군 내의 양천구별, 문음제도와 노비제도 인정 |
이 익 (1681~1763) | ∙「성호사설」에서 한전제 주장하여 토지소유의 평등 요구 ∙6좀론의 폐단 지적: 노비제, 과거제, 양반문벌, 기교(사치․미신), 승려, 게으름 ∙성호학파 형성, 「붕당론」 저술, 화폐폐단 지적 ∙천주교에 비판적인 입장 |
정약용 (1762~1836) | ∙「여유당전서」 500여권 저술 ∙3부작 ⇨ 목민심서(지방관 도리), 경세유표(중앙 정치조직에 대한 의견과 정전제), 흠흠 신서(형옥 담당 관리의 유의사항) ∙3논설 ⇨ 탕론(역성 혁명․로크의 시민 혁명 사상 내포), 원목(정치의 근본과 목민관 강조), 전론(여전제- 공동소유․공동생산) ∙정치개혁론: 향촌 단위의 방위체제 강화 역설 ∙「기예론」: 북학파의 이용후생설과 같은 주장, 기술 혁신․기술 교육 등을 촉구 |
박세당 (1629~1703) | ∙「색경」에서 농가집성을 비판하고 농업 전반에 걸친 의견 제시 ∙윤휴와 함께 「사변록」을 지어 성리학을 비판하다가 사문난적으로 몰림 |
홍만선 (1643~1715) | ∙「산림경제」: 숙종 때 농업과 일상생활에 관한 광범위한 사상을 기술한 소백과사전적인 책 |
서유구 (1764~1845) | ∙「임원경제지」, 「종저보」 |
③ 중농학파의 토지개혁안
균전론 (유형원) | ∙주나라의 정전법에서 영향 ∙관리, 양반, 농민에게 토지의 차등적 재분배 주장 ∙자영농 육성 ⇨ 병농일치로의 환원 ⇨ 군역의 폐단 해결 ∙토지국유제 원칙: 토지매매 금지, 대토지 소유 방지(토지소유의 편중 방지) |
한전론 (이 익) | ∙유형원의 균전론 비판(급진적․비현실성) ∙균전론의 대안으로 한전론 제시(중종 때 요옥의 건의에 따라 50결 상한으로 시행되었다가 실패) ∙가구별 적정 규모의 영업전 지정 ⇨ 매매의 법적 금지, 영업전 이외 소유 토지는 매매 가능 ∙토지소유의 평등화 추구 |
여전제 (정약용) | ∙균전론과 한전론 모두 비판: 토지의 사적 소유 인정은 결국 토지소유의 편중이다. ∙경자유전의 원칙 ∙한 마을(1閭) 단위의 토지 공동소유 ∙주나라의 정전법에서 영향 ∙공동경작, 공동분배 ⇨ 일동의 공동농장제 |
정전제 (정약용) | ∙토지 한 구역을 井(정)자로 9등분하여 8호의 농가가 각각 한 구역씩 경작, 가운데는 8호가 공동 경작하여 조세로 바침. 다산은 토지의 국유를 원칙으로 하고 농민에게만 경작능력을 기준으로 분배 주장. |
⑸ 이용후생 학파(=북학파)
① 특징
㉠ 18세기 전반 노론 출신들의 학자들로 이들의 이상은 유교적 이상국가에서 탈피.
㉡ 부국강병과 이용후생 주장. 서울(도시)를 배경으로 상공업 진흥에 힘씀.
㉢ 개화사상 등에 영향.
② 중상주의 실학자
유수원 (1694~1755) | ∙「우서」: 중국과 조선의 문물을 비교하면서 사회전반의 개혁안 제시 ∙농업에서는 토지 제도의 개혁보다 농업의 상업적 경영과 기술 혁신을 통해 생산성을 높이자고 주장 ∙대상인의 지역사회개발 참여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 혁신 강조, 사농공상의 평등과 전문화 주장 |
홍대용 (1731~1783) | ∙노론 명문 출신으로 성리학적 세계관 부정. ∙「임하경륜」, 「의산문답」: 균전제 주장, 「담헌서」에 수록되어 전함. ∙신분제 철폐, 주자학 극복이 부국강병의 요체라고 믿었음. ∙김석문의 지구회전설을 이어받아 「의산문답」에서 지전설 주장하여 중화사상 비판. |
박지원 (1737~1805) | ∙「열하일기」, 「과농소초」, 「한민명전의」, 「양반전」 ∙한전론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농업생산력의 향상에 관심이 많았다. ∙화폐유통의 필요성, 수레와 선박의 이용, 양반문벌제도의 모순 지적 |
박제가 (1750~1805) | ∙「북학의」: 청에 네 번이나 드나들며 저술, 규장각 검서관 ∙청과의 통상강화, 수레와 배의 이용을 늘릴 것, 절약보다 소비촉진(우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