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세도정치


몰락하는 왕권


세도정치의 시작: 정조 때 홍국영


순조(18001834) 때의 세도정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 노론 벽파 세력이 집권하여 신유박해를 통해 규장각 인물을 몰아내 고 장용영을 혁파하였으며 훈련도감을 회복시켜 장악.

정순왕후 사후 김조순이 그의 딸을 왕비로 들이고 국사가 되어 정치를 전담, 위시한 안동 김씨가 반남 박씨, 풍양 조씨의 협력으로 요직을 독점.

순조 말년에 효명세자(익종)의 대리청정을 하며 조만영(풍양 조씨)이 그의 딸을 세자비로 들여 안 동 김씨와 세력분쟁.


헌종(18341849) 때의 세도정치

헌종 즉위 후(1834) 순조비 순원왕후(김조순의 딸)이 청정하여 헌종 6년까지 계속.

조인영이 영의정이 되고 순원왕후가 물러난 뒤 왕 8년 친정이 시작되고 정권은 풍양 조씨에에 감.


철종(18491863) 때의 세도정치: 헌종이 후사 없어 철종이 즉위하자 순원왕후가 후견정치. 김문근의 딸로 철종비를 삼아 안동 김씨의 세도.


 

세도정치기의 권력 구조

붕당의정부6조 모두 유명무실. 비변사는 더욱 비대해짐.

권력 구조: 2품 이상의 고위직만이 기능 발휘, 그 아래 관리들은 행정 실무만 전담.

 


세도정치의 악영향

정치기강의 문란: 과거제도 문란, 매관매직 성행, 암행어사의 부정.

수령과 아전의 수탈: 농민과 상공업자가 수탈 대상.

삼정의 문란: 전정군정환곡의 문란이 극에 달함.

1. 전정의 문란

진결: 경작하지 않은 땅이나 황폐한 땅에 징세하는 것

은결: 토지 대장에 기록되지 않은 땅, 신개간지 등에 징세하는 것

백지징세: 공지에 징세하는 것

도결: 사적으로 소비한 공금을 보충하기 위해 정액 이상의 세를 거두는 것

2. 군정의 문란: 인징, 족징, 백골징포, 황구첨정, 강년채, 마감채

3. 환곡의 문란

늑대: 필요 이상의 미곡을 강제로 대여하여 이자를 수취

허류: 창고에는 하나도 없으면서 장부에는 있는 것처럼 꾸미는 것

반작: 출납 관계에 대한 허위 문서를 작성하는 것

반백: 반은 겨를 섞어서 대여하여 이자를 사취하는 것

분석: 미곡에 겨를 섞어서 늘려 대여하고 남는 양을 사취하는 것

탄정: 흉년에 강제로 징수하여 감한 부분을 사취

가분: 저장해야 할 부분을 대여하여 이자를 받는 것


상품 화폐 경제의 성장 둔화: 잉여 생산물의 거의 모두를 빼앗기는 실정에서 상품 화폐 경제도 이 시 기에는 그 성장이 둔화.

민란의 발생: 소청벽서 운동에서 시작하여 민란으로 확대.

왕권의 약화: 세도가의 인사권리와 권력 독점.

지배층의 개혁의지 상실: 세도가와 야합하며 고증학에 치우침.

영조(17241776)의 완론탕평


즉위 초의 사건

즉위 직후 탕평교서를 발표. 소론 과격파를 축출하고 노론을 다시 불러들이는 을사처분을 시행

노론 준론자 축출(1727): 이들이 소론 공격을 일삼자 축출.

이인좌의 난(1728): 소론남인 등의 일부 과격분자들이 영조의 왕위 자체를 부정함.

기유처분(1729): 노론소론 가운데 자신의 탕평책을 따르는 온건파(완론자)들을 고르게 등용함. 이 후 점차 능력 위주로 인사정책을 시행.


즉위 중반의 치적

균역법 시행(1750)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 세 군문이 도성을 나누어 방위하는 체제 갖춤

사형수에 대한 삼심제 시행


노론의 우세: 한때 탕평의 원리에 의하여 노론과 소론이 공존하였으나, 나주 괘서 사건 등 소론 강경파 가 자주 변란을 일으켰으며, 사도 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영조를 지지한 노론이 절대적으로 우세해지고 소론의 정치적 입장이 약화.

3대 유폐

붕당, 사치, 음주를 3가지 유폐로 지정

신문고

태종 때의 항소제도를 부활

속대전(1746)

경국대전의 속전으로서 왕명에 따라 문신 김재로에 의해 편찬.

무원록 재간

법의학서

기로과

왕비대비대왕대비 등이 6, 70세가 되었을 때를 경축하기 위해 60세 이상의 선비를 대상으로 실시한 과거시험

권농정책

노가집성의 대량 보급

노비공감법

노비의 국가에 대한 공역 부담을 경감

탕평책

완론탕평을 시행하는 한편 탕평책을 육성

균역법

균역청을 설치하고 군포를 1필로 경감

동국문헌비고

홍봉한의 한국학 백과사전

속병장도설

무예법을 재정리한 병서

속오례의

국조오례의를 보완한 의례집


 



정조(17761800)의 준론탕평

1. 시파: 영조의 덕이 없음을 비난하고 사도 세자의 죽음은 지나치다는 입장으로 노론의 일부와 불우했던 남인, 소론 계통.

2. 벽파: 사도 세자의 근실하지 못함을 비판하고 사도 세자의 죽음은 당연하다는 입장으로 영조를 지지한 노론 강경 파들이 많았다.


배경: 노론은 영조 때 사도 세자 사건을 계기로 시파와 벽파로 분파.


준론탕평: 편전의 이름을 탕평실이라고 하여 적극적 탕평책을 실시함. 영조 때의 척신과 환관을 제거. 노론과 소론의 일부 세력과 남인 계열이 중용됨.

 

제언절목

제언의 수리와 신축(1778)

주관지

형조의 사례집

규장각

비서실의 기능과 문한 기능, 과거 시험 주관과 문신 교육의 임무를 더 부여

장용영

국왕의 친위부대

신해통공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의 금난전권 철폐(1791)

활자

정리자, 한구자, 생생자(목판) 주조

홍재선서

자서전

일성록

일기

대전통편

경국대전을 원전으로 규장각 제도를 법제화, 이를 통해 서얼발탁.

탁지지

호조의 사례집

문체반정운동

노론 벽파를 견제키 위함

초계문신제

당하간 이하 관리를 재교육에 의해 시험을 거쳐 승진시킴

화성(수원성)

화성 행차시 백성들과의 접촉을 통하여 백성들의 의견을 정치에 반영하고자 함

수령권한강화

수령이 향약을 직접 주관하게 함

동문휘고

조선의 외교 문서집

규장전운

음운서

무예도보통지

병법서

 

 

2. 당쟁과 탕평


환국정치


환국

기사환국: 숙종 15(1689) 후궁 소의 장씨의 소생을 원자로 책봉하는 문제를 계기로 서인이 축출 되고 다시 남인이 정권을 장악.

갑술환국: 숙종 20(1694) 폐비 민씨 복위 운동을 반대하던 남인이 화를 입어 실권하고 서인이 재 집권하게 된 사건. 갑술옥사 또는 갑술경화라고도 함.

무고의 옥: 숙종 27(1701) 인현황후 사후 장희빈의 처소에서 신당이 발견되자 장희빈에게 사약이 내려짐. 소론은 세자를 위해 용서해 줄것을 간청했으나 숙종은 소론 세력을 귀양 보내거나 파직시 킴. 소론은 세력이 축소되고 노론이 대거 조정에 진출함.


숙종(16741720)의 재위기간은 당쟁의 절정기였음. 예송논쟁으로 왕실의 권위가 실추되자 왕이 편당 적 조치를 취하여 환국을 불러오게 됨.


이러한 정치적 동향은 17세기 후반 이후 상품 화폐경제 발달에서 비롯함.


결국 향촌 사회에서의 지주제와 신분제의 동요는 사족중심의 향촌 지배질서를 어렵게 하였고 붕당정 치의 기반도 무너지게 하였음.

 


붕당 정치의 변질 결과


왕위 계승 문제: 사사가 빈번히 발생, 외척의 정치적 비중 상승, 정쟁의 초점이 왕위 계승으로 맞춰짐.

벌열 가문의 권력 독점

양반층의 분화

서원의 남설: 특정 가문의 선조를 받드는 사우와 뒤섞여 도처에 건립. 특히 갑술환국(1694) 이후 남인 의 본거지인 경상도 지방에서 심하게 나타났음.



⑶ 탕평론

 

기원

󰡔서경󰡕홍범조에서 비롯함.

실시원인

붕당정치의 문제점: 극단적 정쟁, 집권욕으로 사리에 집착, 사회분열, 왕권약화

본질

탕평론은 정치적 균형관계를 정립하는 것으로 왕권전제가 목표

왕에 의한 타율적 세력균형 유지는 붕당정치가 변질된 17세기 후반에 제기

숙종(16741720)

탕평책

탕평론이 처음 제기 명목상의 탕평, 조제보합론 없음

노론 중심의 일당 전제화로 실패, 편당적 조처로 환국이 일어났음

경종 때의 상황

경종(17201724) 왕세제(영조)와 대리청정 문제로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격화.

영조의 완론탕평

즉위 초 탕평교서반포, 실패

온건론자를 등용하여 탕평파 육성(완론탕평) 일종의 조제보합론

노론과 소론을 교대로 기용하여 정국이 불안

이조낭관이 행사하던 낭천권과 천거권 박탈

정조의 준론탕평

노론 벽파를 물리치고 남인 시파를 고루 등용

엄격한 준론 탕평을 실시

근본적인 당쟁의 모순을 시정할 수는 없었다

탕평론의 결과

탕평책은 왕권 강화를 도모하고, 정국 안정을 위한 미봉책에 불과

 

 

. 조선 후기의 정치


1. 통치제제의 변화


지배체제의 동요


비변사의 기능 강화

비변사의 구성원: 현직 정승, 공조를 제외한 5조의 판서와 참판, 각 군영대장, 대제학, 강화 유수.

임진왜란 이후 비변사는 거의 모든 국가 현안을 다루게 되었고 의정부와 6, 왕권 약화.


3사의 기능 변화: 상대세력 비판을 통한 자기세력 유지에 급급.


이조와 병조의 전랑들도 인사권과 후임자 천거권을 불합리하게 행사.



군제의 개혁

군 영

설치 시기

방어 지역

특 징

구성

경제 기반

훈련도감

선조

수도

삼수병(포수, 살수, 사수)

장번 급료병(용병)

삼수미세(2.2)

어영청

인조

수도

효종 때 북벌 운동의 본영

번상병

보인

총융청

인조

경기 일대

북한 산성 중심

속오군

자담

수어청

인조

광주 및 부근

남한 산성 중심

속오군

자담

금위영

숙종

왕실(수도)

5군영 체제 완성

번상병

보인


중앙군의 개편: 5군영 체제

임기응변으로 설치: 대외 관계와 국내 정세의 변화에 따라 임기응변적으로 설치.

용병화: 신분제 동요와 부역제의 해이, 수취 체제의 변동 등으로 결국 용병제 도입.

서인의 군사적 성격: 실질적으로는 서인 정권의 군사적 기반.


지방군의 개편

16세기에 제승방략체제로 전환.

왜란 중에 다시 진관체제로 복구하고 속오군체제를 채택.

제승방략체제: 유사시 필요한 방어처에 각 지역의 병력을 총동원하여 중앙에서 파견된 장수가 지휘하는 체제.

속오군체제: 양천혼성군이나 양반이 노비와 함께 편성되는 것을 꺼려하여 상민과 노비들만 남게 되었음.


 

수취체제의 변혁

전세는 영정법, 공납은 대동법, 군역은 균역법으로 바뀜.

사족에서 수령과 향리 중심의 지배체제로 변화되면서 농민 수탈은 가혹해짐.

농민의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호패법과 오가작통제를 다시 강화함.

광해군의 정책


(후금)의 건국: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한 누르하치가 1616년 칸에 올라 국호를 후금이라 하고, 선 양에 도읍함.


광해군의 중립외교

후금 토벌을 위한 명의 군사 요청에 광해군은 도원수 강홍립과 1만 군사를 출병시키며 형세를 살 펴 진퇴를 결정하라고 명령.

助明軍(조명군, 명을 돕는 군대 = 강홍립의 군대)은 명이 불리한 상황에 처하자 금에 항복. 조선은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음.

이후에도 광해군은 명의 원군 요청과 후금에 대하여 적절히 대처함.

광해군(16081623): 당쟁으로 임해군, 영창대군을 역모로 죽이고(계축사화),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등 패륜을 많이 저질렀으며 한편 서적편찬 등 내치에 힘쓰고 명나라와 후금에 대한 양면 정책으로 난국에 대처함. 인조반정으로 폐위됨. 광해군 당시에는 북인정권이었음.


문화 시책: 동의보감편찬, 소실된 사고를 5개 사고로 재정비.


 

정묘호란(1627)


인조(16231649)의 즉위: 인조반정으로 즉위하고 서인들이 집권. 친명배금 정책으로 후금을 자극하게 됨.

원인

친명배금 정책: 서인 정권의 친명배금 정책이 후금을 자극.

가도 사건: 명나라 장군 모문룡이 후금이 차지한 요동 지방을 빼앗기 위하여 평안도 가도에 주둔 함으로써 후금을 긴장시켰다.

이괄의 난(1624):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평안도 영변에 좌천되자 부하를 이끌 고 반란을 일으킴. 반란은 실패하였고 이괄은 부하에 의해 살해당함.


경과: 후금은 광해군을 위한 보벅을 명분으로 평안도 의주를 거쳐 황해도 평산에 진주(1627), 철산 용 골산성의 정봉수와 의주의 이립 등은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합세하여 접전. 후금의 군대는 보급로가 끊어지자 강화를 제의.


결과: 후금의 1차 목표는 중국 대륙의 장악이었고, 조선도 아직 적극적으로 항전할 힘이 없어서 화의는 쉽게 이루어졌다. 조선과 후금은 형제 관계를 맺음.


 

병자호란(1636. 12.1637. 1.)


원인: 후금은 1632년 만주 전역을 석권하고 북경을 공격. 청은 양국을 형제에서 군신관계로 고칠 것과 다량의 조공을 요구.


주화론과 주전론의 대립: 대세가 주전론으로 기울자 청은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1636).


경과

청 태종이 대군을 이끌고 서울을 점령(1636).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하려 하였으나 청에 의해 길이 막혀 소현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피난.

1만의 조선군은 12만의 청군과 45일 전투 후 주화파인 최명길 등이 중심이 되어 청과 화의.


결과: 조선은 청과 군신관계 성립, 3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을 인질로. 10년의 볼모생활 끝에 세 자와 봉림대군은 환국, 세자는 2개월 만에 사망. 효종(봉림대군)은 북벌 계획을 추진하였으나 뜻을 이 루지 못함.


영향

국토의 황폐화: 청군이 거쳐간 서북 지역은 약탈과 살육으로 황폐.

청에 대한 반감


 

북벌계획


효종(16491659)의 북벌계획: 북벌론은 청을 정벌하고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자는 주장이다.

효종은 송시열, 송준길, 김상헌, 이완 등의 북벌론자들을 기용하고 어영청내삼청을 기병화, 화포 를 제작, 성곽을 준비. 그러나 효종의 사후에 북벌론은 희미해짐.


숙종 때에도 청의 정세 변화를 이용하여 윤휴를 중심으로 북벌론이 다시 제기되었으나 단행하지는 못 하였음.


북벌론의 정치적 악용

서인 정권 유지 수단: 패전의 책임을 져야 할 서인들의 정권 유지 수단으로 북벌론이 이용됨.

서인의 남인 진출 견제책: 인조는 서인 중 일부 소장파들의 강경한 척화 주전론이 청의 침략을 불 러들였다고 생각하여 일부 남인을 등용. 그러나 서인들은 북벌론을 주장하면서 반대 세력들의 진 출을 견제하려 하였다.


18세기에 북학론이 대두되어 대청인식 변화, 청과의 군신관계는 대한제국때까지 계속됨.

 

5. 왜란과 호란


임진왜란


① 대일관계 연표

쓰시마섬 정벌

세종 1419

이종무가 병선 227, 병사 17,000명을 이끌고 왜구의 근절 약속받음.

삼포개항

세종 1426

부산포(동래), 염포(울산), 제포(창원) 개항

계해약조

세종 1443

제한된 조공 무역(세견선 50, 세사미두 200)

삼포왜란

중종 1510

3포 폐쇄, 비변사 설치

임신약조

중종 1512

계해약조의 절반(세견선 25, 세사미두 100), 제포만 개항

사량진왜변

중종 1544

무역 단절, 일본인 왕래 금지

정미약조

명종 1547

세견선 25, 인원 제한 규정 위반시 벌칙 강화

을묘왜변

명종 1555

국교 단절, 비변사의 기능 강화

임진왜란

15921598

정유재란(1597), 비변사의 상설기구화로 왕권과 의정부, 6조 약화.

통신사 파견

16071811

막부 장군 취임시마다 축하사절단 파견

기유약조

광해군 1609

국교 회복, 부산포에 왜관 설치(세견선 20, 세사미두 100)


왜란 전의 국내정세

붕당 간 일본에 대한 견해 차이: 통신사 황윤길(서인)은 침략, 김성일(동인)은 불침 보고. 당시 우 위를 점했던 동인의 의견 접수.

일본의 침략: 159220만의 군사를 이끌고 <정명가도>를 표면적 이유로 침략. 조선은 초기에 패전을 거듭.



⑵ 왜란의 발발

왜군의 침략: 15924월에 침략 개시. 부산진과 동래성에서 정발과 송상현이 분전하였으나 함락.

왜군의 북상: 왜의 육군은 세 길로 나누어 한양을 향하여 북상. 조정에서는 이일과 신립으로 하여금 막 게 하였다. 신립은 충주에서 배수진을 치고 싸웠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왜군은 한양을 점령하고 북상을 계속하여 평양과 함경도 지방에까지 침입.

 


수군의병의 반격

왜군의 작전: 육군이 북상함에 따라 수군이 남해와 황해를 돌아 물자를 조달하면서 육군과 합세.


 

충무공의 활약


군사력 정비: 왜란 1년 전에 전라 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은 판옥선과 거북선을 개발하고 전함과 무기 를 정비하여 수군을 훈련시키고 군량미를 저장.


수군의 승리

옥포 해전: 이순신 지휘의 수군이 왜선 30여 척을 격파하여 최초 승리 기록.

사천당포당항포(고성) 해전: 사천 전투에서는 거북선을 최초로 사용.

한산도 해전: 적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학날개 전법) 적선 100여 척을 전파.

의의: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여 곡창 지대인 전라도 지방을 지키고 왜군의 침략 작전을 좌절시켰다.

의병: 전직관리사림승려 휘하 농민 의병이 유격전술로 왜군에 타격. 전란이 장기화되면서 의병은 관군화.

곽재우

경상도 의령에서 거병, 진주에서 김시민과 함께 활약.

김천일

전라도 나주에서 거병, 진주 혈전에서 활약.

조 헌

충청도 옥천에서 거병, 승장 영규와 합세하여 청주를 수복하고 고경명 등과 함께 전사. 700의총

고경명

전라도 장흥에서 거병, 금산에서 전사하였다.

정문부

함경도 경성에서 거병, 경성길주 일대를 회복.

김덕령

전라도 담양에서 거병, 광주남원에서 활약.

유 정

금강산에서 일어난 승장으로 사명당이라 부르며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

휴 정

묘향산에서 일어난 승장으로 서산대사라 부르며 제자로는 유정, 영규 등이 있다.





임진왜란 중의 군비 강화

훈련도감을(삼수미세 징수) 설치하고 속오군 창설.

무기발명: 거북선(태종), 비격진천뢰(이장손), 화차(변이중)


 

임란의 과정과 영향


왜군의 일시후퇴: 전 국민의 저항으로 행주산성 등에서 격파.

조선은 훈련도감을 설치, 삼수병 양성. 지방군 편제를 속오군체제로 변경. 화포 개량 조총 제작.

이후 명의 2차 원정군인 이여송이 5만 군사로 평양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벽제관 전투의 패배로 휴전회담 추진.


정유재란: 3년여에 걸친 휴전회담이 결렬.

명 연합군이 왜군을 직산에서 격퇴.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대승하자 왜군은 남해안 일대로 재후퇴.

노량 해전에서 패주하는 왜군에 공격하고 충무공은 전사, 豊臣秀吉의 사망으로 왜군 완전철수.

우리 역사상 3대첩

살수 대첩(을지문덕), 귀주 대첩(강감찬), 한산도 대첩(이순신)

왜란의 3대첩

한산도 대첩(이순신), 진주 대첩(김시민), 행주 대첩(권율)

충무공의 3대첩

한산도 대첩(최대), 명량 해전, 노량 해전


왜란의 영향

인구 감소: 왜군에 의한 살상, 기근과 질병으로 인구가 크게 감소. 포로 수만 명 발생.

국가 재정 감소: 토지가 17054만결로 감소, 토지 대장과 호적이 대부분 소실되어 식량이 부족.

사고손실: 4대 사고 중 전주사고를 제외하고 손실

문화재소실: 불국사, 경복궁, 서적, 실록 등이 왜군의 약탈과 방화로 소실.

서적의 편찬: 동의보감(허준), 징비록(유성룡), 난중일기(충무공)

신분제의 동요: 납속법 실시, 공명고신첩공명면역쳡공명고신첩 등의 공명첩 발급. 이몽학의 난.

농촌의 피폐: 인구의 격감과 농촌의 황폐화

대동법 실시의 동기 제공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막부 성립, 전쟁 중에 북방의 여진족이 청을 건국.

선조 29(1596) 왕실 서얼 출신인 이몽학은 부친으로부터 쫓겨나서 충청도 일대를 방랑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모속관 한현의 부하가 되었는데, 민심이 정부로부터 멀어지자 승려노비 등을 규합하여 충청도에서 난을 일으켜 인근 5개 고을을 차례로 정복. 이몽학은 관군의 선무 공작을 받은 부하에게 피살당하고 홍가신에 의해 토벌.

일본에서 전래된 문물: 담배, 고추, 호박, 토마토 등.

 

4. 조선 전기의 대외관계


대명 관계


사대교린정책: 명과는 사대친선, 중국 외와는 교린정책.


태조태종 때의 대명관계: 태조 때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요동 정벌 계획과 여진과의 관계를 둘러싸 고 불편한 관계가 형성. 태종 때 양국은 친선하고 교류를 활발히 함.


교류 형식과 목적: 매년 ()정기 사절이 오감.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것이었으나 문화의 수입과 물품의 교역이 이루어짐. 조선은 13공을 주장.

정기 사절

부정기 사절

하정사: 정월초 인사

주청사: 특별 요청을 하기 위한 사신

성절사: 황제 생일

사은사: 중국에 감사할 일이 있을 때

천추사: 황후태자 생일

진하사: 황제 등극, 황태자 책봉 축하

동지사: 동지에 보냄

진위사: 황제, 황후 상사에 조문


특징: 조선은 명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사대 정책이었으나, 명의 구체적인 내정 간섭은 없었다.


무역

교역품: 사신을 통한 공무역이 주로 행하여졌는데, 마필인삼화문석 등을 수출하고 견직물서 적약재문방구도자기 등을 수입.

폐단: 명의 과다한 금은 요구는 세종 때에 마필로 이를 대신하게는 되었으나, 이후 그 요구를 피 하기 위해 국내의 금은광을 거의 폐쇄하기도 하였고, 사치스러운 견직물의 수입으로 국내 수공 업이 위축되기도 하였다.

대명 관계의 변화: 대명 관계는 실리 추구와 국토 확장을 둘러싸고 대립하기도 하였으나, 뒤에는 사림 들의 존화주의로 인해 지나친 친명 정책으로 흐르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대여진 관계: 적극적이며 회유와 토별의 양면 정책


회유책

귀순 장려: 관직 부여, 정착을 위한 토지와 주택 공급.

유숙소 설치: 사절의 왕래 시 북평관 등 설치.

국경 무역 허락: 국경 지방인 경성과 경원에 무역소를 세웠으나, 여진족은 자주 국경을 침입하여 약탈.


강경책

태조때의 대여진 관계: 태조의 두만강 지역 개척.

세종때의 여진 개척: 오늘날의 국경선 개척.

4: 세종 15(1433) 최윤덕 등이 압록강 상류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여연, 우예, 무창, 자성에 군 을 설치.

6: 세종 16(1434) 김종서 등이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온성, 종성, 경원, 회령, 경 흥, 부령에 진을 설치.

야연사준도: 김종서가 4군과 6진을 개척하고 함경도에 있을 때의 고사를 조선 후기에 그린 것이다.

세조성종 때: 신숙주, 윤필상 등이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의 여진족을 토벌.


이후의 대여진 관계

화전양면, 종성과 경원에 무역소를 설치.

국경지방에 많은 진보를 설치하여 전략촌화.

사민정책(태종중종): 삼남 지방의 일부 부유한 주민들을 압록강과 두만강 이주.

토관정책: 여말 선초 평안도함경도제주도 등지의 토착인을 토관 임명. 오래지 않아 향리로 대체.




일본 및 동남아시아와의 관계

일본 및 동남아 국가들에 교린책을 바탕으로 회유책과 강경책을 적절히 적용.

류큐, 시암, 자바 등 동남아시아 각국과도 조공과 진상.

 

붕당정치의 시작


선조(15671608)의 사림 기용

선조는 향촌의 사림을 재기용: 사림 내부에서 대립이 발생하여 동서 분당.

 


붕당정치의 전개 과정


사림 내의

갈등

척신 정치의 잔재 청산을 둘러싸고 갈등. 명종 때 이후 정권에 참여해 온 기성 세력은 개혁에 소극적이었으나, 명종 때 정권에 참여하지 않았다가 새롭게 정계에 등장한 신진 사림들은 사림 정치의 실현을 강력히 주장.

분당

(선조, 1575) 이조전랑직의 문제로 신진 사림의 지지를 받던 김효원과 왕실의 외척이며 기성 사림의 신망을 받았던 심의겸을 중심으로 동서의 분당. 신세력인 동인에는 김효원, 이산해 유성룡, 구세력 서인에는 심의겸, 정철, 윤두수 등.

자기 수양에 역점을 두어 지배자의 도덕적 자기 절제를 통해 부패 방지

백성 통치에 역점을 두어 제도 개혁을 통한 부국 안민에 치중하는 경향

분당

(선조, 1592) 서인 정철이 건저의 문제로 논죄되고, 정여립 모반사건(1598) 등으로 동인은 강경파 북인(이산해, 이발)과 온건파 남인(유성룡, 우성전)으로 분열.

 

남인

퇴계 이황의 제자들이 중심. 향촌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

남명 조식의 제자들로 구성. 왜란 때 의병활동을 주도, 광해군 개혁정치 주도하는 등 실천적인 면이 강함.

대북소북

분당

선조 말기에 북인이 득세, 광해군을 둘러싼 대북파와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로 분열

 

 

대북의 집권

(광해군 원년, 1608) 광해군 즉위 이후 대북파가 집권하면서 소북파 등을 제거

 

o

×

 

서인의 집권

인조반정(1623)으로 집권한 서인은 어영청총융청수어청을 설치하여 세력 강화

 

 

 

효종의 북벌계획

숭명반청 의식이 강한 서인을 등용, 서인의 군사적 기반 강화

 

 

 

남 대립

1차 기해예송(1659)

효종이 승하하자 조대비의 복제를 둘러싸고 서인(송시열)의 기년설 대 남인(윤휴) 3년설 대립. 서인이 이김.

2차 갑인예송(1674)

효종비 인선대비의 상에서 서인의 대공설(9개월)과 남인의 기년설이 대립하여 남인 승리.

 

현종은 증대된 서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허적윤휴 등 남인을 등용. 남인은 예송논쟁을 일으켜 서인과 대립.

 

 

 

 

 

 

 

 

서인

상업과 기술발전에 호의적. 노비속량과 서얼허통에도 적극적. 부국강병에 관심이 많았으며 대신 주도의 정치를 지향.

남인

수취체제의 완화와 자영농 육성에 치중, 상업과 기술발전에 소극적. 왕권강화와 정책 비판에 큰 비중.

 

 

 

 

숙종 때의

서인 집권

(경신환국)

숙종이 즉위하여 남인을 등용하자 남인이 병권을 강화. 이에 남인을 축출하고 서인을 등용하였는데 경신대출척(1680)이라 함. 그 후 서인이 노론(송시열)과 소론(윤증)으로 분열.

 

 

노론

율곡 이이의 제자들인 노론은 송시열을 영수로 하여 명분(대명의리론)을 바탕으로 숭명반청책(북벌론)을 지지. 이후 내부에서 북학파가 성장함으로 서얼허통과 상공업 진흥에 관심.

소론

우계 성혼의 제자들인 소론은 양명학을 수용, 윤증을 영수로 하여 남인과 마찬가지로 성리학과 대외정책에 탄력성을 가지면서 내정개혁에 치중.

 

 

 

 

 

기사환국

(숙종, 1689)

숙종은 장희빈의 소생(연령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는데 서인이 반대하자 서인을 축출하고 남인을 재등용.

 

 

×

갑술옥사

(숙종, 1694)

남인은 서인이 폐비음모를 꾸민다고 하여 옥사를 일으킴. 숙종은 남인을 축출하고 소론을 등용.

×

 

 

 

무고의 옥

(숙종, 1701)

장희빈이 민비를 해하려고 한 사건이 있은 후, 숙종 27년에 민비가 승하하자 숙종은 소론을 축출하고 노론을 중용, 노론이 득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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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사화

(17212)

경종이 즉위한 이후 소론(유봉희)이 노론(김창집)을 반역죄로 몰아 제거하고 정권 장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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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탕평책

사도세자 문제를 중심으로 시파와 벽파로 분열, 순조 이후 세도정치 등장.

시파벽파

 

 

 

붕당정치의 성격

처음에는 자기 붕당을 군자당이라고 주장하고 상대방을 소인당으로 배척

선배 사림이 물러간 뒤에는 붕당을 모두 군자당으로 간주하고 견제협력

비변사를 통하여 의견을 수렴하는 방식으로 공론을 중시하는 정국 운영

재야에서 서원이나 향교에서 모여 공론을 주도하는 산림이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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