⑷ 영조(1724~1776)의 완론탕평
① 즉위 초의 사건
㉠ 즉위 직후 탕평교서를 발표. 소론 과격파를 축출하고 노론을 다시 불러들이는 을사처분을 시행
㉡ 노론 준론자 축출(1727): 이들이 소론 공격을 일삼자 축출.
㉢ 이인좌의 난(1728): 소론․남인 등의 일부 과격분자들이 영조의 왕위 자체를 부정함.
㉣ 기유처분(1729): 노론․소론 가운데 자신의 탕평책을 따르는 온건파(완론자)들을 고르게 등용함. 이 후 점차 능력 위주로 인사정책을 시행.
② 즉위 중반의 치적
㉠ 균역법 시행(1750)
㉡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 세 군문이 도성을 나누어 방위하는 체제 갖춤
㉢ 사형수에 대한 삼심제 시행
③ 노론의 우세: 한때 탕평의 원리에 의하여 노론과 소론이 공존하였으나, 나주 괘서 사건 등 소론 강경파 가 자주 변란을 일으켰으며, 사도 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영조를 지지한 노론이 절대적으로 우세해지고 소론의 정치적 입장이 약화.
3대 유폐 | 붕당, 사치, 음주를 3가지 유폐로 지정 | ||
신문고 | 태종 때의 항소제도를 부활 | ||
속대전(1746) | 경국대전의 속전으로서 왕명에 따라 문신 김재로에 의해 편찬. | ||
무원록 재간 | 법의학서 | ||
기로과 | 왕․왕비․대비․대왕대비 등이 6, 70세가 되었을 때를 경축하기 위해 60세 이상의 선비를 대상으로 실시한 과거시험 | ||
권농정책 | 노가집성의 대량 보급 | ||
노비공감법 | 노비의 국가에 대한 공역 부담을 경감 | ||
탕평책 | 완론탕평을 시행하는 한편 탕평책을 육성 | ||
균역법 | 균역청을 설치하고 군포를 1필로 경감 | ||
동국문헌비고 | 홍봉한의 한국학 백과사전 | ||
속병장도설 | 무예법을 재정리한 병서 | 속오례의 | 「국조오례의」를 보완한 의례집 |
⑸ 정조(1776~1800)의 준론탕평
1. 시파: 영조의 덕이 없음을 비난하고 사도 세자의 죽음은 지나치다는 입장으로 노론의 일부와 불우했던 남인, 소론 계통. 2. 벽파: 사도 세자의 근실하지 못함을 비판하고 사도 세자의 죽음은 당연하다는 입장으로 영조를 지지한 노론 강경 파들이 많았다. |
① 배경: 노론은 영조 때 사도 세자 사건을 계기로 시파와 벽파로 분파.
② 준론탕평: 편전의 이름을 탕평실이라고 하여 적극적 탕평책을 실시함. 영조 때의 척신과 환관을 제거. 노론과 소론의 일부 세력과 남인 계열이 중용됨.
제언절목 | 제언의 수리와 신축(1778) | ||||
주관지 | 형조의 사례집 | ||||
규장각 | 비서실의 기능과 문한 기능, 과거 시험 주관과 문신 교육의 임무를 더 부여 | ||||
장용영 | 국왕의 친위부대 | ||||
신해통공 |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의 금난전권 철폐(1791) | ||||
활자 | 정리자, 한구자, 생생자(목판) 주조 | ||||
홍재선서 | 자서전 | ||||
일성록 | 일기 | ||||
대전통편 | 「경국대전」을 원전으로 규장각 제도를 법제화, 이를 통해 서얼발탁. | ||||
탁지지 | 호조의 사례집 | ||||
문체반정운동 | 노론 벽파를 견제키 위함 | ||||
초계문신제 | 당하간 이하 관리를 재교육에 의해 시험을 거쳐 승진시킴 | ||||
화성(수원성) | 화성 행차시 백성들과의 접촉을 통하여 백성들의 의견을 정치에 반영하고자 함 | ||||
수령권한강화 | 수령이 향약을 직접 주관하게 함 | ||||
동문휘고 | 조선의 외교 문서집 | 규장전운 | 음운서 | 무예도보통지 | 병법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