⑸ 광해군의 정책
① 청(후금)의 건국: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한 누르하치가 1616년 칸에 올라 국호를 후금이라 하고, 선 양에 도읍함.
② 광해군의 중립외교
㉠ 후금 토벌을 위한 명의 군사 요청에 광해군은 도원수 강홍립과 1만 군사를 출병시키며 형세를 살 펴 진퇴를 결정하라고 명령.
㉡ 助明軍(조명군, 명을 돕는 군대 = 강홍립의 군대)은 명이 불리한 상황에 처하자 금에 항복. 조선은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음.
㉢ 이후에도 광해군은 명의 원군 요청과 후금에 대하여 적절히 대처함.
광해군(1608~1623): 당쟁으로 임해군, 영창대군을 역모로 죽이고(계축사화),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등 패륜을 많이 저질렀으며 한편 서적편찬 등 내치에 힘쓰고 명나라와 후금에 대한 양면 정책으로 난국에 대처함. 인조반정으로 폐위됨. 광해군 당시에는 북인정권이었음. |
③ 문화 시책: 「동의보감」 편찬, 소실된 사고를 5개 사고로 재정비.
⑹ 정묘호란(1627)
① 인조(1623~1649)의 즉위: 인조반정으로 즉위하고 서인들이 집권. 친명배금 정책으로 후금을 자극하게 됨.
㉠ 원인
㉠ 친명배금 정책: 서인 정권의 친명배금 정책이 후금을 자극.
㉡ 가도 사건: 명나라 장군 모문룡이 후금이 차지한 요동 지방을 빼앗기 위하여 평안도 가도에 주둔 함으로써 후금을 긴장시켰다.
㉢이괄의 난(1624):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평안도 영변에 좌천되자 부하를 이끌 고 반란을 일으킴. 반란은 실패하였고 이괄은 부하에 의해 살해당함.
② 경과: 후금은 광해군을 위한 보벅을 명분으로 평안도 의주를 거쳐 황해도 평산에 진주(1627), 철산 용 골산성의 정봉수와 의주의 이립 등은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합세하여 접전. 후금의 군대는 보급로가 끊어지자 강화를 제의.
③ 결과: 후금의 1차 목표는 중국 대륙의 장악이었고, 조선도 아직 적극적으로 항전할 힘이 없어서 화의는 쉽게 이루어졌다. 조선과 후금은 형제 관계를 맺음.
⑺ 병자호란(1636. 12.∼1637. 1.)
① 원인: 후금은 1632년 만주 전역을 석권하고 북경을 공격. 청은 양국을 형제에서 군신관계로 고칠 것과 다량의 조공을 요구.
② 주화론과 주전론의 대립: 대세가 주전론으로 기울자 청은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1636).
③ 경과
㉠ 청 태종이 대군을 이끌고 서울을 점령(1636).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하려 하였으나 청에 의해 길이 막혀 소현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피난.
㉢ 1만의 조선군은 12만의 청군과 45일 전투 후 주화파인 최명길 등이 중심이 되어 청과 화의.
④ 결과: 조선은 청과 군신관계 성립, 3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을 인질로. 10년의 볼모생활 끝에 세 자와 봉림대군은 환국, 세자는 2개월 만에 사망. 효종(봉림대군)은 북벌 계획을 추진하였으나 뜻을 이 루지 못함.
⑤ 영향
㉠ 국토의 황폐화: 청군이 거쳐간 서북 지역은 약탈과 살육으로 황폐.
㉡ 청에 대한 반감
⑻ 북벌계획
① 효종(1649~1659)의 북벌계획: 북벌론은 청을 정벌하고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자는 주장이다.
㉠ 효종은 송시열, 송준길, 김상헌, 이완 등의 북벌론자들을 기용하고 어영청․내삼청을 기병화, 화포 를 제작, 성곽을 준비. 그러나 효종의 사후에 북벌론은 희미해짐.
② 숙종 때에도 청의 정세 변화를 이용하여 윤휴를 중심으로 북벌론이 다시 제기되었으나 단행하지는 못 하였음.
③ 북벌론의 정치적 악용
㉠ 서인 정권 유지 수단: 패전의 책임을 져야 할 서인들의 정권 유지 수단으로 북벌론이 이용됨.
㉡ 서인의 남인 진출 견제책: 인조는 서인 중 일부 소장파들의 강경한 척화 주전론이 청의 침략을 불 러들였다고 생각하여 일부 남인을 등용. 그러나 서인들은 북벌론을 주장하면서 반대 세력들의 진 출을 견제하려 하였다.
④ 18세기에 북학론이 대두되어 대청인식 변화, 청과의 군신관계는 대한제국때까지 계속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