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왜란과 호란


임진왜란


① 대일관계 연표

쓰시마섬 정벌

세종 1419

이종무가 병선 227, 병사 17,000명을 이끌고 왜구의 근절 약속받음.

삼포개항

세종 1426

부산포(동래), 염포(울산), 제포(창원) 개항

계해약조

세종 1443

제한된 조공 무역(세견선 50, 세사미두 200)

삼포왜란

중종 1510

3포 폐쇄, 비변사 설치

임신약조

중종 1512

계해약조의 절반(세견선 25, 세사미두 100), 제포만 개항

사량진왜변

중종 1544

무역 단절, 일본인 왕래 금지

정미약조

명종 1547

세견선 25, 인원 제한 규정 위반시 벌칙 강화

을묘왜변

명종 1555

국교 단절, 비변사의 기능 강화

임진왜란

15921598

정유재란(1597), 비변사의 상설기구화로 왕권과 의정부, 6조 약화.

통신사 파견

16071811

막부 장군 취임시마다 축하사절단 파견

기유약조

광해군 1609

국교 회복, 부산포에 왜관 설치(세견선 20, 세사미두 100)


왜란 전의 국내정세

붕당 간 일본에 대한 견해 차이: 통신사 황윤길(서인)은 침략, 김성일(동인)은 불침 보고. 당시 우 위를 점했던 동인의 의견 접수.

일본의 침략: 159220만의 군사를 이끌고 <정명가도>를 표면적 이유로 침략. 조선은 초기에 패전을 거듭.



⑵ 왜란의 발발

왜군의 침략: 15924월에 침략 개시. 부산진과 동래성에서 정발과 송상현이 분전하였으나 함락.

왜군의 북상: 왜의 육군은 세 길로 나누어 한양을 향하여 북상. 조정에서는 이일과 신립으로 하여금 막 게 하였다. 신립은 충주에서 배수진을 치고 싸웠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왜군은 한양을 점령하고 북상을 계속하여 평양과 함경도 지방에까지 침입.

 


수군의병의 반격

왜군의 작전: 육군이 북상함에 따라 수군이 남해와 황해를 돌아 물자를 조달하면서 육군과 합세.


 

충무공의 활약


군사력 정비: 왜란 1년 전에 전라 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은 판옥선과 거북선을 개발하고 전함과 무기 를 정비하여 수군을 훈련시키고 군량미를 저장.


수군의 승리

옥포 해전: 이순신 지휘의 수군이 왜선 30여 척을 격파하여 최초 승리 기록.

사천당포당항포(고성) 해전: 사천 전투에서는 거북선을 최초로 사용.

한산도 해전: 적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학날개 전법) 적선 100여 척을 전파.

의의: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여 곡창 지대인 전라도 지방을 지키고 왜군의 침략 작전을 좌절시켰다.

의병: 전직관리사림승려 휘하 농민 의병이 유격전술로 왜군에 타격. 전란이 장기화되면서 의병은 관군화.

곽재우

경상도 의령에서 거병, 진주에서 김시민과 함께 활약.

김천일

전라도 나주에서 거병, 진주 혈전에서 활약.

조 헌

충청도 옥천에서 거병, 승장 영규와 합세하여 청주를 수복하고 고경명 등과 함께 전사. 700의총

고경명

전라도 장흥에서 거병, 금산에서 전사하였다.

정문부

함경도 경성에서 거병, 경성길주 일대를 회복.

김덕령

전라도 담양에서 거병, 광주남원에서 활약.

유 정

금강산에서 일어난 승장으로 사명당이라 부르며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

휴 정

묘향산에서 일어난 승장으로 서산대사라 부르며 제자로는 유정, 영규 등이 있다.





임진왜란 중의 군비 강화

훈련도감을(삼수미세 징수) 설치하고 속오군 창설.

무기발명: 거북선(태종), 비격진천뢰(이장손), 화차(변이중)


 

임란의 과정과 영향


왜군의 일시후퇴: 전 국민의 저항으로 행주산성 등에서 격파.

조선은 훈련도감을 설치, 삼수병 양성. 지방군 편제를 속오군체제로 변경. 화포 개량 조총 제작.

이후 명의 2차 원정군인 이여송이 5만 군사로 평양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벽제관 전투의 패배로 휴전회담 추진.


정유재란: 3년여에 걸친 휴전회담이 결렬.

명 연합군이 왜군을 직산에서 격퇴.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대승하자 왜군은 남해안 일대로 재후퇴.

노량 해전에서 패주하는 왜군에 공격하고 충무공은 전사, 豊臣秀吉의 사망으로 왜군 완전철수.

우리 역사상 3대첩

살수 대첩(을지문덕), 귀주 대첩(강감찬), 한산도 대첩(이순신)

왜란의 3대첩

한산도 대첩(이순신), 진주 대첩(김시민), 행주 대첩(권율)

충무공의 3대첩

한산도 대첩(최대), 명량 해전, 노량 해전


왜란의 영향

인구 감소: 왜군에 의한 살상, 기근과 질병으로 인구가 크게 감소. 포로 수만 명 발생.

국가 재정 감소: 토지가 17054만결로 감소, 토지 대장과 호적이 대부분 소실되어 식량이 부족.

사고손실: 4대 사고 중 전주사고를 제외하고 손실

문화재소실: 불국사, 경복궁, 서적, 실록 등이 왜군의 약탈과 방화로 소실.

서적의 편찬: 동의보감(허준), 징비록(유성룡), 난중일기(충무공)

신분제의 동요: 납속법 실시, 공명고신첩공명면역쳡공명고신첩 등의 공명첩 발급. 이몽학의 난.

농촌의 피폐: 인구의 격감과 농촌의 황폐화

대동법 실시의 동기 제공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막부 성립, 전쟁 중에 북방의 여진족이 청을 건국.

선조 29(1596) 왕실 서얼 출신인 이몽학은 부친으로부터 쫓겨나서 충청도 일대를 방랑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모속관 한현의 부하가 되었는데, 민심이 정부로부터 멀어지자 승려노비 등을 규합하여 충청도에서 난을 일으켜 인근 5개 고을을 차례로 정복. 이몽학은 관군의 선무 공작을 받은 부하에게 피살당하고 홍가신에 의해 토벌.

일본에서 전래된 문물: 담배, 고추, 호박, 토마토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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