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사림의 성장과 붕당
⑴ 훈구 對 사림
① 훈구파: 조선의 역성혁명 세력의 후예로서 세조 정권에 참여한 공신을 가리킴.
② 사림파: 조선의 개국을 반대한 세력으로 영남과 기호 지역에서 성리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향촌을 지배.
훈구파 |
| 사림파 |
역성혁명파(정도전 등) → 세조에 협력 | 연원 | 온건파(정몽주 등) → 성종이 중용 |
중앙집권과 부국강병 | 정책 | 향촌의 건설․교육, 향촌자치 강조, 향약실시 주장 |
대토지 소유 | 경제 기반 | 중소지주층 |
왕도+패도(권위) 주의 | 정치관 | 왕도정치 강조 |
민간신앙 포용 | 인식태도 | 이단 배격 성리학 중심 |
군사학․기술학 중시, 사장 중시 격물치지․경험적 학풍 | 학풍 | 기술천시, 경학중시 사변주의․관념적 학품 |
단군숭배, 자주민족의식 | 성향 | 중국중심의 화이사상, 기자조선 |
성종은 훈신과 사림간의 세력균형을 이루어 왕권을 확립, 조선 중기 이후 사림정치 기반 조성 |
⑵ 사림의 성장과 4대 사화
명칭 | 연대 | 원인 | 발단 | 가해자 | 피해자 |
무오사화 | 연산군 4년 (1498) | 훈구파 對 사림파 | 조의제문 사초문제 | 이극돈․유자광 등 훈구파 | 사림파, 조위 「만분가」 |
갑자사화 | 연산군 10년 (1504) | 궁정세력 對 정부세력 | 윤시폐출 사건 | 임사홍 등 궁중 측근 | 윤필상, 김굉필 등 정부세력 |
병인사화 | 연산군 12년 (1506) | 무오․갑자사화의 연장으로서 이전에 화를 입지 않은 나머지에게 죄를 가하기 위하여 일어남. | |||
기묘사화 | 중종 14년 (1519) | 조광조 등 신진사림파 對 훈구파 | 위훈삭제․ 모반 음모의 모략 | 남곤․심정 등 훈구파 | 조광조 등 사림파 |
신사사화 | 중종 16년 (1521) | 기묘사화때 안당의 파직 | 안처겸 일당의 신점․남곤 제거모의 | 송사련(사화 후 당상관) | 안당․안처겸․안처금, 권전, 이정숙, 이충건 |
을사사화 | 명종 원년 (1545) | 인종 외척 대윤 對 명종 외척 소윤 | 왕위 계승문제 | 윤원형 등 소윤파 | 윤임 등 대윤, 사림파 |
정미사화 | 명종 2년 (1547) | 윤원로․원형 형제의 권력 싸움 | 괴벽서사건 | 윤원형/ 이기, 정명순 | 봉성군, 송인수, 이약빙,임형수,권발,이언적 |
을유사화 | 명종 4년 (1549) |
| 이홍남, 이홍윤 형제의 난언 상주 |
| 이홍남, 이홍윤 등 |
① 성종(1469~1494)의 사림 중용: 김종직을 필두로 정계에 등장한 사림 세력이 이조전랑과 3사의 언관직 을 도맡아 훈구 세력의 모순과 비리를 비판.
② 연산군(1494~1506)의 폭정: 언관의 활동 제제로 사림 세력이 피해. 무오사화, 갑자사화 발생.
③ 중종(1506~1544)때 조광조의 개혁정치
정치면 | 왜구와 야인의 침입에 대비한 왕권호위기구 <정로위> 설치. 임시합좌기구 <비변사> 설치, <무학과>를 두어 무술 교육, 무기 제작. |
경제면 | 도량형 통일, 사치금지, 화폐(저화․동전) 사용 장려. |
사회면 | 유교주의적 도덕 원리 정착, 소격서 폐지, 승과와 법계 폐지, 무당의 도성출입 엄금, 사원건축 금지. |
문화면 | <주자도감>을 설치하여 동활자 주조 → 「사성통해」, 「신증동국여지승람」 편찬. |
㉠ 현량과 설치: 추천에 의해 재행이 뛰어난 선비 28명을 요직에 등용
㉡ 주자의 철인군주주의 주창, 「주자가례」, 「삼강행실」 보급.
㉢ 기신제, 소격서 폐지, 「소학」교육 장려.
㉣ 위훈삭탈: 공신 76명의 위훈을 삭제하여 기묘사화의 원인이 됨.
④ 인종(1544~1545): 중종의 장남으로서 즉위 8개월여만에 승하. 현량과 부활.
⑤ 명종(1545~1567): 을사사화 발생 이후 정국은 소윤의 주축인 윤원형과 외척이 좌지우지. 사림은 낙향 하여 성리학이 발달하고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