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대한민국 정부 수립


한국 문제의 유엔 상정

배경: 소위원회의 결렬로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이관하기로 결정.

2차 유엔 총회의 결의(1947. 11)

선거를 통한 독립 정부 수립 결정

미국은 한만도 문제를 유엔에 상정하고, 유엔은 한반도에서 합법적이고 정통성 있는 정부 수립이 필요하다고 결정

그리고 이를 위해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을 구성하고

인구비례에 의한 총선거를 통하여 통일된 독립 정부를 한반도에 수립하도록 하였다.

소련의 반대: 소련은 남한까지도 공산화하려 하였기 때문에 반대,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이 북한에 들어오는 것조차 거절.

유엔 소총회의 결의(1948. 2):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총선거 실시를 결정.


# 시간순 정리

● 2차 유엔총회(47.11): 인구비례, 유엔한국임시위원단 고고

● 소련의 반대(48.1): 인구비례 총선거 싫은데요.

● 유엔소총회(48.2): 그럼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하죠. - 사실상 분단 결정과 다를 바 없음

● 삼천만동포에읍고함(48.2, 김구): 유엔소총회 하기 전에 먼저 발표했다.

● 그러고 4월에 4.3 사건이 일어나는데 약 1년간 지속되고

● 4김회의(48.4)도 4월에 열리긴 했는데, 성과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지만 결국 대세를 바꾸지는 못했던 듯하고

● 그러는 와중에 5.10 총선거는 실시되게 되고, 

● 제헌국회가 5월 선거 직후 만들어지고, 

● 제헌헌법은 7월에 만들어지고(제헌절 7.17),

● 1대 대선이 간선으로 8월에 열려서 48.8.15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게 된다.




510 총선거 반대 운동

남북 협상(북 연석 회의)

배경: 유엔 소총회의 결의(48. 2)로 남북분단이 기정사실화.

과정

ⓐ 남북지도자회의

김구와 김규식은 남한 단독정부의 수립을 반대하고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 김두봉에게 남북지도자회의를 제안개최되었다(1948. 45)

ⓑ 북한의 수정제의

북한에서도 인민군 창설, 헌법초안 등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를 마쳤지만 

남북회담의 규모를 확대하여 열 것을 수정제의 하였다.

결과

남북한이 각각 미국과 소련을 배경으로 단독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큰 성과는 없었다.

북한은 남북지도자회의를 북한정권의 수립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려 하였다.

의의: 통일민족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자주적 노력이었고, 남북 분단을 극복하기 위한 주체적 평화통일 논의의 일환이었다.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총선거 반대운동의 전개

좌익의 반대 투쟁

총파업의 단행: 남로당의 지령에 따라 전평 산하의 노조 30만명이 파업을 단행하여 통신, 운수, 전기 공급이 중단 되었다.

제주도 43 사건

남한 단독 선거 반대, 미군 철수, 극우 테러의 반대 등의 구호를 내걸었던 공산주의자 유격대와 

군, 경찰, 극우 청년 단체 등으로 구성된 토벌대 사이에서 

많은 양민이 희생.

남북협상파의 노력: 남북지도자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김구와 김규식은 통일정부의 수립을 추구하면서 510 총선거의 불참을 선언.


510 총선거 실시(1948. 5. 10)

결과

김구 등 남북 협상파가 대거 불참한 가운데 유엔의 결의와 국민의 열망에 따라 단독 선거가 실시되었고

무소속이 가장 많이 당선(53)되었으나 이승만의 독촉 계열(56)과 한민당 계열(29 )이 압승.

의의: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보통선거로서 21세 이상의 모든 국민에게 평등한 투표권 부여.

한계: 북한과 제주도 일부 지역에서는 총선거가 실시되지 못하였다. 남북협상파와 사회주의계는 총선거 불참.

제헌 국회 개원(1948. 5. 31): 북한의 의석을 남겨 놓은 채 개회.

의장에 이승만, 부의장에 신익희와 김동원이 선출.

대통령 중심제를 중심으로 하되 대통령은 국회에서 선출하도록 하는 내각제 요소를 담고 있었다.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 국회의장 신익희, 대법원장 김병로, 국무총리 이범석이 임명.

헌법 제정(1948. 7. 17):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국회는 단원제로 하는 민주 공화국 체제의 헌법을 제정.

정부 수립(1948. 8. 15): 제헌 국회에서 이승만을 대통령, 이시영을 부통령으로 선출하고 대한민국의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

유엔 총회 승인(1948. 12. 12): 3차 유엔 총회에서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승인.

.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1. 정부수립의 과정


단독 정부 수립의 추진


배경: 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실패하자, 미국과 소련은 별도의 정부를 세우는 데 관심.


내용

북한

소련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사실상의 정부를 세워 통치 체제를 확립

또한 남한으로 세력을 확대하려 노력하였으며광복 이후 남한에서의 공산주의 활동은 점점 무력 투쟁화.

남한: 이승만 등은 독립 국가 수립을 주장.

 



우익의 통합 노력


배경

북한(김일성)과 남한(이승만)에서 각기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진행되자 

뜻 있는 인사 들은 남북분단을 우려.



좌우 합작 위원회(1946. 7)의 활동


구성

남한에서 이승만의 정읍 발언 이후 단독 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자

남북 분단을 우려한 김규식, 여운형 등이 좌우 합작 운동을 전개하였고 

좌우 합작 7원칙을 발표(1946. 10).



① 

조선의 민주 독립을 보장한 3상 결정에 의하여 

남북을 통한 좌우 합작으로 민주 임시 정부를 수립할 것.


소 공동 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할 것.


③ 

토지 개혁에 있어 몰수, 유조건 몰수, 체감 매상 등으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 분여하며

시가지의 기지 및 대건물 을 적정 처리하며 중요 산업을 국유화하며

사회 노동 법령 및 정치적 자유를 기본으로 지방 자치에의 확립을 속히 실시하며

통화 및 민생 문제 등을 급속히 처리할 것.


④ 

친일파 민족 반역자를 처리할 조례를 합작 위원회에서 입법 기구에 제안하여

입법 기구로 하여금 심리 결정하여 실시케 할 것.


⑤ 

남북을 통하여 현 정권 하에 검거된 정치 운동자의 석방에 노력하고 

남북 좌우의 테러적 행동을 일체 즉시로 제 지토록 노력할 것.


⑥ 

입법 기구에 있어서는 권능과 구성 방법, 운영 등에 관한 대안을 

본 합작 위원회에서 작성하여 적극적으로 실행 을 기도할 것.


전국적으로 자유가 절대 보장되도록 노력할 것.





미군정의 지원

남조선과도입법위원의 구성(1946. 12. 12): 

좌우합작위원회와 한국민주당계를 주축으로 하였는데 

여운형의 중도좌파는 입법기구 조직에 반대하며 합작위원회에서 탈퇴.


간선을 통하여 

45명의 민선 위원(한민당계+이승만 계열)

45명의 관선 위원(좌우 합작파 중심)으로 

입법 의원(의장: 김규식)이 설치되어 과도 정부라 부르며 

형식상의 행정권을 한국인에 위임.


안재홍을 민정장관, 김용무를 대법원장으로 하고 남조선과도정부를 설치.

휴회되웠던 미소 공동위원회도 재개.



실패와 그 이유

국내

국내 좌우파의 반대가 심하였으며, 핵심 인물인 여운형이 암살되고(1947. 7), 

단독정부수립 을 주장하던 이승만이 미국에 건너가 개인적으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국외

미국 정책이 소련과의 냉전으로 인하여 트루만 독트린과 마샬플랜 등 강경책으로 선회하면서 좌우합작 지원방침을 철회하고

한국의 문제를 국제연합에 상정하여 유엔감시하에 남북한 총 선거를 통한 한국통일안을 가결함으로써 실패.

결과

소 공동위원회는 완전히 결렬되고

좌우합작위원회도 해체.

소 공동 위원회


1(1946. 3)

목적: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안의 실천과 임시 민주정부의 수립 문제를 논의.

장소: 서울 덕수궁

결과

  ㅁ 소련은 신탁 통치 결정을 지지하는 정치 단체만을 미소 공동 위원회의 협의 대상으로 참여시키자고 주장하였으나

  ㅁ 미국은 모든 정치 단체를 참여시켜야 한다고 주장함

결국 결렬.


2(1947. 5)

장소: 서울 덕수궁

경과: 소 양국의 의견 차를 좁힐 수 없었다.

결과

  ㅁ 미국은 한국 문제를 4개국 외상 회담에 맡기자고 제의

  ㅁ 하지만 모스크바 회의에서 합의된 사항이 아니라는 소련의 반대 

  ㅁ 무기휴회에 들어간 뒤 미국이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상정함으로써 완전히 결렬.

결말: 소 간의 협의 대상 선정 문제와 인구 비례에 의한 입법 의원 선출 문제의 대립으로 결렬.

 




5. 공산 세력의 움직임


민주주의 민족 전선 결성(1946. 2)

조직

  ㄱ. 목적: 남한의 좌익 정당과 사회 단체는 과도 정부 수립에 참여할 목적으로 

  ㄴ. 주체: 여운형, 박헌영, 허헌, 백남운, 김원봉을 중심으로 통일 전선 조직을 결성.

강령: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 지지, 소 공동 위원회 지지, 친일파 민족 반역자 처단 등.

 

조선 정판사 위조 지폐 사건(1946. 5)

주도: 좌익 통일전선인 민주주의 민족 전선이 주도.

내용: 남한의 경제 혼란과 당비 조달을 위해 1,300만원의 위조 지폐를 만듦.

결과

미군정이 공산당에 강경책을 실시하는 계기가 되어 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가 정간되고 좌익과 미 군정의 대립이 심화.

지하로 숨어 든 공산주의자들은 대규모 폭동과 서울철도 소요를 일으켰다.

영향: 조선 공산당은 전술을 공세로 전환하고 미군정에 투쟁 노선으로 선회하는 전술 채택(1946. 7)

4. 미군정


출범(1945. 9. 9): 남한에 진주한 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이 군정을 포고, 아놀드 소장이 군정 장관에 취임.


한국에 대한 입장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부정

ㅇ 중국과 친밀하고 민족주의적 성격을 지닌 임정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ㅇ 주석인 김구와 임정 요인들을 개인자격으로만 귀국 허용.

조선인민공화국의 부정

 

한계성

미국은 한국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총독부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여 

친일파가 미군정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그 세력이 보존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정당의 난립(194510월 현재 54개의 정당이 등록)


한국 민주당(1945. 9. 16)

중심인물: 송진우, 김성수 등 민족주의 계열이 중경 임시 정부 지지를 명분으로 조직.

특징: 요인들이 미군정에 참여하였으며, 친미적인 우익 정부 수립을 위한 미군정의 후원을 받아 강 력한 정치 세력으로 부상.


조선공산당(1945, 9. 16)

조직: 노동자, 농민을 주축으로 도시 소시민, 지식인 등으로 구성.

중심인물: 공산주의자 박헌영을 중심.

정책: 대지주 토지의 무상몰수를 주장.

단체의 결성: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을 결성.


국민당(1945. 9. 24)

중심인물: 안재홍, 김규식 등 중도 우파 세력을 중심으로 결성.

성격: 신민주주의신민족주의를 표방하여 좌우통합을 하고자 하였고, 임시 정부 지지 표명.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1945. 10. 25)

중심인물: 이승만이 귀국하여 결성.

성격: 남한의 우익 정당들을 잠정 통합하는데 성공.

결과: 좌익은 독촉에 참여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좌우익의 대립이 더욱 심화.


한국 독립당(1945. 11): 김구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여 활동 전개.


조선 인민당(1945. 11. 12)

중심인물: 여운형 등 중도 좌파 세력.

성격: 중도 좌파 정당으로 미소의 원조와 민족 국가 건설을 노선으로 하고 진보적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좌우 합작을 추진.

민족 자주 연맹(1947. 12): 김규식을 중심으로 좌우 합작 노선을 전개, 남북 연석 회의를 주도하고 단독 정부 수립에 불참.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1945. 12)

배경: 38선을 경계로 한반도가 분단되고, 남과 북에 군정이 실시되는 가운데, 3국 외상은 한반도 문제를 협의.

내용: 한국에 임시 민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미소 공동 위원회를 설치하고, 최고 5년 동안 미4개국의 신탁 통치하에 두기로 결정.

결과

반탁운동의 전개

신탁통치의 결정이 전해지자 전 국민이 반대 운동을 전개.

비상정치회의(김구),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이승만)이 비상국민회의를 결성하여 신탁통치에 반대 (1946. 2).

찬탁운동의 전개

처음에는 반탁이었으나, 소련의 사주를 받아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정을 수용하기로 바꿈.

우익의 비상국민회의에 맞서 좌익의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조선민족혁명당, 천도교청우당 등이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결성.

좌우익의 대립 격렬: 국내정치세력은 반탁과 찬탁으로 양분되어 격렬히 대립.

3. 국토의 분단


열강의 한국 문제 논의


카이로 회담(1943. 11)

참가국: 미국(루스벨트)영국(처칠)중국(장제스)

내용: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해방시키며 독립시킬 것을 선언했다.

의의: 최초로 한국의 독립을 약속했다.

● 팁: 카이로 회담은 좋은 것임.


포츠담 선언(1945. 7)

참가국: 미국(트루먼)영국(처칠 애틀리)소련(스탈린)중국(장제스)

내용: 카이로 선언(한국의 독립)을 재확인했다.

 


분단의 원인

얄타 회담(1945. 2)

참가국: 미국(루스벨트)영국(처칠)소련(스탈린)

내용: 미국은 미소 양군이 38선을 경계로 각각 진주할 것을 제안. 맥아더의 일반 명령 1(1945. 8. 15)에서 공식 확정했다.

민족의 분단이 고착화됐다.

● 팁: 얄타는 나쁜 것임.


소 군정의 실시

남한: 남한에 주둔한 미군 아놀드가 군정 장관인 군정을 실시하며 친미적인 우익 정부의 수립을 후원했다.

북한: 소련군과 공산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민족주의 인사들을 숙청하고 정권 수립의 기반을 닦았다.

결과: 스스로의 능력이나 의지와는 관계없이 민족 분단의 비극을 맞이했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1945. 8. 15)

조직: 광복 당시 최초의 정치 단체로 친일 세력을 제외한 여운형(온건 좌파)이 조선건국동맹을 모체로 안재홍(민족주의, 온건 우파) 등과 함께 발족했다.

지도자: 위원장 여운형, 부위원장 안재홍.

한계: 송진우, 김성수(임정 지지) 등 민족주의 우파세력이 불참했다.

활동 내용

치안대 설치

북한 지역을 포함한 145개 지부 조직

식량대책위원회 설치: 식량 회복에 주력했다.

건국 강령의 발표: 자주독립 국가의 건설, 민주주의 정권 수립, 국내 질서의 자주적 유지 등.

조선 인민 공화국의 선포(1945. 9. 6)

배경: 좌파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우파 민족주의자들이 탈퇴했다.

목적: 건준은 남한 지역에 미군이 진주한다는 소식을 듣고 미군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기 위하여 조선 인민 공화국을 선포.

조직의 보완

가. 이승만을 주석, 여운형을 부주석, 허헌을 국무총리로 임명하였다.

나. 그러나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조선 공산당 계열이 실권을 장악하여 좌익 정부나 다름없었다.

결과: 우익 인사들은 이 단체를 외면했고, 미군정도 성명으로(1945. 10. 10)이 단체를 부정하였으며, 결국 건준은 해체.

. 중국과 일본의 변화


1. 구분

중국

2차대전 참전: 일본의 대륙침략에 맞서 공 합작으로 단결해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내전의 발발: 2차대전 종료와 함께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와 마오쩌둥의 공산당 사이의 전면적 전쟁이 재개되었다.

인민공화국의 성립

4년간 지속된 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여 국민당 정부는 타이완으로 축출되고, 마오쩌둥을 주석으로 공산당 정부가 수립되었다.


일본

식민지 상실: 타이완과 조선이 독립하였다.

연합국의 지배: 미국을 중심으로 구성된 연합군의 최고사령부가 7년 간 지배하도록 하였다.

미국의 경제 지원: 미국은 냉전체제하에서 일본의 일정한 역할을 기대하며 경제적 지원을 강화하였다.


2. 결과

냉전체제의 강화: 한반도를 둘러싼 냉전체제와 그 대결 양상이 더욱 강화하였다.

일본과 중국의 동서 체제에 편입

- 일본은 미국 중심의 자유민주주의 진영을 이루어 남한과 연결되었다.

- 중국은 소련 중심의 공산주의 진영을 이루어 북한과 연결되었다.

한국전쟁의 계기가 됨한반도 주변 냉전체제가 고조되어 양 진영간에 직접 대결로 나타났다.

 


 

. 한국의 현대 사회


1. 광복 직전의 건국 준비 활동


대한민국 임시 정부민족주의 계열의 활동

한국 독립당(1940. 4):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민족주의 계열 단체인 한국독립당(조소앙), 한국국민당(김구), 조선혁명당(이정천등을 한국 독립당으로 통합하였다.

대한민국 건국 강령(1941 제정/공포)

특징: 일본의 패망에 대비하여 조소앙의 3균주의를 토대로 하였다.

주요내용:

보통선거의 실시, 의무교육의 실시, 토지의 국유화와 빈농우선분배대규모 생산기관의 국유화와 중소기업의 사영, 노동자농민지식인상인의 단결, 적산(敵産)의 국유화 등이 있다.

 

사회주의 계열의 활동

조선 독립 동맹(1942. 7): 

화북 지방에서 김두봉을 주석으로 하여 조선 의용군을 거느리고중국 팔로군과 연합하여 항일 전쟁을 수행했다.


건국 강령

보통 선거에 의한 민주 공화국 수립남녀평등과 의무교육 실시조선의 일본 대기업 국영화와 토지의 분배일제에 협력한 기업의 몰수 분배 등이 있다.


조선의용군의 조직

화북지방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는데, 특히 호가장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고 해방 후에는 인민군에 편입되었다.

 

국내의 건국 준비 활동

조선 건국 동맹 조직(1944. 8): 여운형 등을 중심으로 좌우합작, 노동자농민층까지 흡수. 광복 직후 건준 조직했다.

건국 강령: 일제의 타도와 민주주의 국가 건설, 토지국유화 등이 있다.

 

건국 준비 활동의 공통 강령: 민주 공화국을 수립하고자 했다.

 



2. 민족의 광복

광복의 배경: 사회 전 영역에 걸친 독립 운동, 국제적 분위기가 있다.

광복의 요인: 연합군의 승리, 독립 투쟁의 결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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