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조선 전기의 대외관계


대명 관계


사대교린정책: 명과는 사대친선, 중국 외와는 교린정책.


태조태종 때의 대명관계: 태조 때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요동 정벌 계획과 여진과의 관계를 둘러싸 고 불편한 관계가 형성. 태종 때 양국은 친선하고 교류를 활발히 함.


교류 형식과 목적: 매년 ()정기 사절이 오감.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것이었으나 문화의 수입과 물품의 교역이 이루어짐. 조선은 13공을 주장.

정기 사절

부정기 사절

하정사: 정월초 인사

주청사: 특별 요청을 하기 위한 사신

성절사: 황제 생일

사은사: 중국에 감사할 일이 있을 때

천추사: 황후태자 생일

진하사: 황제 등극, 황태자 책봉 축하

동지사: 동지에 보냄

진위사: 황제, 황후 상사에 조문


특징: 조선은 명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사대 정책이었으나, 명의 구체적인 내정 간섭은 없었다.


무역

교역품: 사신을 통한 공무역이 주로 행하여졌는데, 마필인삼화문석 등을 수출하고 견직물서 적약재문방구도자기 등을 수입.

폐단: 명의 과다한 금은 요구는 세종 때에 마필로 이를 대신하게는 되었으나, 이후 그 요구를 피 하기 위해 국내의 금은광을 거의 폐쇄하기도 하였고, 사치스러운 견직물의 수입으로 국내 수공 업이 위축되기도 하였다.

대명 관계의 변화: 대명 관계는 실리 추구와 국토 확장을 둘러싸고 대립하기도 하였으나, 뒤에는 사림 들의 존화주의로 인해 지나친 친명 정책으로 흐르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대여진 관계: 적극적이며 회유와 토별의 양면 정책


회유책

귀순 장려: 관직 부여, 정착을 위한 토지와 주택 공급.

유숙소 설치: 사절의 왕래 시 북평관 등 설치.

국경 무역 허락: 국경 지방인 경성과 경원에 무역소를 세웠으나, 여진족은 자주 국경을 침입하여 약탈.


강경책

태조때의 대여진 관계: 태조의 두만강 지역 개척.

세종때의 여진 개척: 오늘날의 국경선 개척.

4: 세종 15(1433) 최윤덕 등이 압록강 상류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여연, 우예, 무창, 자성에 군 을 설치.

6: 세종 16(1434) 김종서 등이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온성, 종성, 경원, 회령, 경 흥, 부령에 진을 설치.

야연사준도: 김종서가 4군과 6진을 개척하고 함경도에 있을 때의 고사를 조선 후기에 그린 것이다.

세조성종 때: 신숙주, 윤필상 등이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의 여진족을 토벌.


이후의 대여진 관계

화전양면, 종성과 경원에 무역소를 설치.

국경지방에 많은 진보를 설치하여 전략촌화.

사민정책(태종중종): 삼남 지방의 일부 부유한 주민들을 압록강과 두만강 이주.

토관정책: 여말 선초 평안도함경도제주도 등지의 토착인을 토관 임명. 오래지 않아 향리로 대체.




일본 및 동남아시아와의 관계

일본 및 동남아 국가들에 교린책을 바탕으로 회유책과 강경책을 적절히 적용.

류큐, 시암, 자바 등 동남아시아 각국과도 조공과 진상.

 

붕당정치의 시작


선조(15671608)의 사림 기용

선조는 향촌의 사림을 재기용: 사림 내부에서 대립이 발생하여 동서 분당.

 


붕당정치의 전개 과정


사림 내의

갈등

척신 정치의 잔재 청산을 둘러싸고 갈등. 명종 때 이후 정권에 참여해 온 기성 세력은 개혁에 소극적이었으나, 명종 때 정권에 참여하지 않았다가 새롭게 정계에 등장한 신진 사림들은 사림 정치의 실현을 강력히 주장.

분당

(선조, 1575) 이조전랑직의 문제로 신진 사림의 지지를 받던 김효원과 왕실의 외척이며 기성 사림의 신망을 받았던 심의겸을 중심으로 동서의 분당. 신세력인 동인에는 김효원, 이산해 유성룡, 구세력 서인에는 심의겸, 정철, 윤두수 등.

자기 수양에 역점을 두어 지배자의 도덕적 자기 절제를 통해 부패 방지

백성 통치에 역점을 두어 제도 개혁을 통한 부국 안민에 치중하는 경향

분당

(선조, 1592) 서인 정철이 건저의 문제로 논죄되고, 정여립 모반사건(1598) 등으로 동인은 강경파 북인(이산해, 이발)과 온건파 남인(유성룡, 우성전)으로 분열.

 

남인

퇴계 이황의 제자들이 중심. 향촌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

남명 조식의 제자들로 구성. 왜란 때 의병활동을 주도, 광해군 개혁정치 주도하는 등 실천적인 면이 강함.

대북소북

분당

선조 말기에 북인이 득세, 광해군을 둘러싼 대북파와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로 분열

 

 

대북의 집권

(광해군 원년, 1608) 광해군 즉위 이후 대북파가 집권하면서 소북파 등을 제거

 

o

×

 

서인의 집권

인조반정(1623)으로 집권한 서인은 어영청총융청수어청을 설치하여 세력 강화

 

 

 

효종의 북벌계획

숭명반청 의식이 강한 서인을 등용, 서인의 군사적 기반 강화

 

 

 

남 대립

1차 기해예송(1659)

효종이 승하하자 조대비의 복제를 둘러싸고 서인(송시열)의 기년설 대 남인(윤휴) 3년설 대립. 서인이 이김.

2차 갑인예송(1674)

효종비 인선대비의 상에서 서인의 대공설(9개월)과 남인의 기년설이 대립하여 남인 승리.

 

현종은 증대된 서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허적윤휴 등 남인을 등용. 남인은 예송논쟁을 일으켜 서인과 대립.

 

 

 

 

 

 

 

 

서인

상업과 기술발전에 호의적. 노비속량과 서얼허통에도 적극적. 부국강병에 관심이 많았으며 대신 주도의 정치를 지향.

남인

수취체제의 완화와 자영농 육성에 치중, 상업과 기술발전에 소극적. 왕권강화와 정책 비판에 큰 비중.

 

 

 

 

숙종 때의

서인 집권

(경신환국)

숙종이 즉위하여 남인을 등용하자 남인이 병권을 강화. 이에 남인을 축출하고 서인을 등용하였는데 경신대출척(1680)이라 함. 그 후 서인이 노론(송시열)과 소론(윤증)으로 분열.

 

 

노론

율곡 이이의 제자들인 노론은 송시열을 영수로 하여 명분(대명의리론)을 바탕으로 숭명반청책(북벌론)을 지지. 이후 내부에서 북학파가 성장함으로 서얼허통과 상공업 진흥에 관심.

소론

우계 성혼의 제자들인 소론은 양명학을 수용, 윤증을 영수로 하여 남인과 마찬가지로 성리학과 대외정책에 탄력성을 가지면서 내정개혁에 치중.

 

 

 

 

 

기사환국

(숙종, 1689)

숙종은 장희빈의 소생(연령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는데 서인이 반대하자 서인을 축출하고 남인을 재등용.

 

 

×

갑술옥사

(숙종, 1694)

남인은 서인이 폐비음모를 꾸민다고 하여 옥사를 일으킴. 숙종은 남인을 축출하고 소론을 등용.

×

 

 

 

무고의 옥

(숙종, 1701)

장희빈이 민비를 해하려고 한 사건이 있은 후, 숙종 27년에 민비가 승하하자 숙종은 소론을 축출하고 노론을 중용, 노론이 득세.

 

 

 

×

신임사화

(17212)

경종이 즉위한 이후 소론(유봉희)이 노론(김창집)을 반역죄로 몰아 제거하고 정권 장악.

 

 

 

×

정조의 탕평책

사도세자 문제를 중심으로 시파와 벽파로 분열, 순조 이후 세도정치 등장.

시파벽파

 

 

 

붕당정치의 성격

처음에는 자기 붕당을 군자당이라고 주장하고 상대방을 소인당으로 배척

선배 사림이 물러간 뒤에는 붕당을 모두 군자당으로 간주하고 견제협력

비변사를 통하여 의견을 수렴하는 방식으로 공론을 중시하는 정국 운영

재야에서 서원이나 향교에서 모여 공론을 주도하는 산림이 출현

3. 사림의 성장과 붕당


훈구 사림

훈구파: 조선의 역성혁명 세력의 후예로서 세조 정권에 참여한 공신을 가리킴.

사림파: 조선의 개국을 반대한 세력으로 영남과 기호 지역에서 성리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향촌을 지배.

훈구파

 

사림파

역성혁명파(정도전 등) 세조에 협력

연원

온건파(정몽주 등) 성종이 중용

중앙집권과 부국강병

정책

향촌의 건설교육, 향촌자치 강조, 향약실시 주장

대토지 소유

경제 기반

중소지주층

왕도+패도(권위) 주의

정치관

왕도정치 강조

민간신앙 포용

인식태도

이단 배격 성리학 중심

군사학기술학 중시, 사장 중시

격물치지경험적 학풍

학풍

기술천시, 경학중시

사변주의관념적 학품

단군숭배, 자주민족의식

성향

중국중심의 화이사상, 기자조선

성종은 훈신과 사림간의 세력균형을 이루어 왕권을 확립, 조선 중기 이후 사림정치 기반 조성



사림의 성장과 4대 사화


명칭

연대

원인

발단

가해자

피해자

무오사화

연산군 4

(1498)

훈구파 對 사림파

조의제문

사초문제

이극돈유자광 등 훈구파

사림파조위 만분가

갑자사화

연산군 10

(1504)

궁정세력 

정부세력

윤시폐출 사건

임사홍 등

궁중 측근

윤필상김굉필 등

정부세력

병인사화

연산군 12

(1506)

무오갑자사화의 연장으로서 이전에 화를 입지 않은 나머지에게 죄를 가하기 위하여 일어남.

기묘사화

중종 14

(1519)

조광조 등 신진사림파 對 훈구파

위훈삭제

모반 음모의 모략

남곤심정 등

훈구파

조광조 등 사림파

신사사화

중종 16

(1521)

기묘사화때 안당의 파직

안처겸 일당의 신점남곤 제거모의

송사련(사화 후 당상관)

안당안처겸안처금권전이정숙이충건

을사사화

명종 원년

(1545)

인종 외척 대윤 對 명종 외척 소윤

왕위 계승문제

윤원형 등

소윤파

윤임 등 대윤사림파

정미사화

명종 2

(1547)

윤원로원형 형제의 권력 싸움

괴벽서사건

윤원형/

이기정명순

봉성군송인수이약빙,임형수,권발,이언적

을유사화

명종 4

(1549)

 

이홍남이홍윤

형제의 난언 상주

 

이홍남이홍윤 등



성종(14691494)의 사림 중용: 김종직을 필두로 정계에 등장한 사림 세력이 이조전랑과 3사의 언관직 을 도맡아 훈구 세력의 모순과 비리를 비판.


연산군(14941506)의 폭정: 언관의 활동 제제로 사림 세력이 피해. 무오사화, 갑자사화 발생.


중종(15061544)때 조광조의 개혁정치

정치면

왜구와 야인의 침입에 대비한 왕권호위기구 <정로위설치.

임시합좌기구 <비변사설치, <무학과>를 두어 무술 교육무기 제작.

경제면

도량형 통일사치금지화폐(저화동전사용 장려.

사회면

유교주의적 도덕 원리 정착소격서 폐지승과와 법계 폐지무당의 도성출입 엄금사원건축 금지.

문화면

<주자도감>을 설치하여 동활자 주조 → 「사성통해신증동국여지승람」 편찬.

현량과 설치: 추천에 의해 재행이 뛰어난 선비 28명을 요직에 등용

주자의 철인군주주의 주창, 주자가례, 삼강행실보급.

기신제, 소격서 폐지, 소학교육 장려.

위훈삭탈: 공신 76명의 위훈을 삭제하여 기묘사화의 원인이 됨.


인종(15441545): 중종의 장남으로서 즉위 8개월여만에 승하. 현량과 부활.


⑤ 명종(15451567): 을사사화 발생 이후 정국은 소윤의 주축인 윤원형과 외척이 좌지우지사림은 낙향 하여 성리학이 발달하고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성장.


 

 

관리의 선발과 인사행정


과거(일반전형)

응시자격: 양인이면 누구나 가능하였으나 실제로는 양반들이 교육의 기회를 독점.

분류와 과정


문관 선발

생진과(소과, 생원과(경전)+진사(문예))

합격자(초시+복시)는 유생이 되거나 하급 관리, 문과 응시자격 부여

문과(대과): 식년시, 증광시, 알성시

(식년시의 경우) 초시 합격 정원을 각 도의 인구 비례에 따름

복시에서 33명 선발

국왕 앞에서 전시를 실시하여 33명의 순위를 매김

식년시: 3년마다 실시되는 정기시험

증광시: 큰 경사가 있을 때 또는 작은 경사가 여러 개 겹쳤을 때 실시한 비정기시험

알성시: 국왕이 문묘제례를 올릴 때 성균관 유생에 한하여 실시. 문과무과만 치렀고 문과는 전시만으로 급제자를 선발. 알성시는 왕이 친히 참가한 친림과.



무과: 문과와 같은 절차로 28명 선발


잡과: 기술관 선발시험으로 의과, 음양과, 율과, 역과를 3년마다 시험 실시.


특별전형: 취재는 요직에 나가기 힘들었고(서리나 하급 실무자), 천거, 음서(2품 이상)



인사관리제도


서경: 사간원과 사헌부가 5품 이하 관리 임명에 신분, 경력 등을 조사하여 그 승인을 간여.


상피제: 일정범위 이내의 친족 간에는 같은 관청 또는 통속관계가 있는 관청에서 근무할 수 없거 나, 연고가 있는 관직에 제수할 수 없게 함.


과거는 일당 전제, 세도 정치로 이어지면서 문벌을 양산하는 형식적인 절차로 전락.

군제와 군대


군역의 기본원칙: 양인개병제와 병농일치제.



양인개병제

1660세 양인 장정은 누구나 정군(징집병)보인(=봉족, 정군의 비용부담)이 되어야 했음.

왕족공신고관의 자제는 특수병에 편제. 현직관료학생상인수공업자어민은 면제.

정군은 복무기간에 따라 품계와 녹봉 수여, 서울이나 국경 요충지에서 교대복무.



5위와 영진군(조선 초의 군체계)

㉠ 5정군갑사(직업군인), 특수병(왕족귀족의 자제)로 구성하여 궁궐수도의 방위.

5=의흥위+용양위+호분위+충좌위+충무위 예하에 부----


영진군: 지방군으로서 조선 초기에는 영(병영, 수영)진에서 근무하다 세조 떄에 진관체제에 의해 배치. 연해 각 도에는 수군을 설치.


잡색군: 전직관리, 향리, 서리, 교생, 신량역천인, 노비 등의 예비군으로 평상시에는 본업에 종사, 일정 기간 군사 훈련, 유사시에는 향토 방위 담당. 농민은 합류 불가.



조선 초기의 군사력


조선 초기에는 개병제의 원칙이 비교적 잘 지켜졌다. 세종과 세조 때에는 정규군이 1530여만 명 정도였으며, 보인과 잡색군을 합하면 모두 80100만 명 정도였다.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 군역 대상자를 조사등록시키는 호적 제도와 호패 제도를 강화하였다.


쓰시마 섬을 정벌하고, 46진을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국방력에 따른 것이었다.

각 도에 주요지역을 거진으로 하고 나머지 주변 지역을 진으로 병렬적으로 소속시켜 진관을 편성하여 유사시에는 각 진관의 독자성을 살리도록 하는 체제. 수군도 육군과 같은 방식으로 편제. 전국을 방위 체제로 조직화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방위망이 너무 광범하여 무력함이 드러남. 군사들의 경제 기반이 허약한 점과, 군사 지휘권을 문관 출신의 수령들이 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통과 통신 체계


역원제

: 공문서의 전달 및 관물의 운송을 위해 주요 도로에 설치하였으며 병조에서 관장.

: 교통 요지에 둔 공공 여관으로 공무 수행 중인 관민이 이용.


봉수제: 전국에 약 620여개의 봉수대를 이용.


파발제: 임진왜란 때의 공문 전달을 위한 통신망으로서, 종류에 따라 기발과 보발이 있었다.

2. 통치체제


조선의 통치구조


정치 체제의 법제화: 조선의 중앙 정치는 경국대전으로 법제화되었다.


관직등급: 문반과 무반이 있었고 18등급으로 서열화.

당상관: 왕과 함께 정책을 논의하는 자리에 참여하거나 주요 관서의 책임자가 될 수 있었다.

당하관: 실무 담당.



관계 구분: 중앙관직인 경관직과 지방관직인 외관직으로 나뉨.

㉠ 경관직국정을 총괄하는 의정부 산하 3의정과 6조가 있었음.

이조

문관의 인사

병조

무관의 인사

예조

의식외교학교과거

호조

호구와 조세

형조

법률소송 및 노비문제

공조

토목영선공장


외관직: 8도 휘하 부현으로 나뉨.


특수기관

의금부: 국가 반역죄, 왕명에 의한 양반의 치죄 담당.

승정원: 왕명출납

한성부(한성판윤): 수도행정 치안, 토지나 가옥의 소송

예문관: 왕의 교서 작성. 4관 중 하나.

교서관: 궁중의 서적 간행. 4관 중 하나.

승문원: 외교 문서 작성. 4관 중 하나.

성균관: 국립 대학. 4관 중 하나.

춘추관: 사서 편찬과 보관.



행수법의 운영

계고직비: 품계가 높은 사람이 낮은 관직에 임명되면 그 관직 앞에 자를 붙인다.

계비직고: 품계가 낮은 사람이 높은 관직에 임명되면 그 관직 앞에 자를 붙인다.


계서: 품계는 정1품에서 종9품까지 18등급으로 나뉘고, 6품 이상은 상하의 구분이 있어 총 30단계 의 계서가 있었다.



지방체제


8도 아래에 부, , , 현을 둠. 330여개의 군현 아래에는 면, 리 통(5)를 두었음.

속현 폐지: 모든 군현에 수령 파견.

특수 행정 구역 폐지: 부곡도 일반 군현으로 승격.


향리는 지방행정의 실무자로서 고려 시대와는 달리 신분상승에 제약.


중앙에서는 암행어사를 파견하기도 하였음. 자치를 위해 유향소(향청)를 운영하였고 좌수와 별감 선출. 서울에는 경재소를 두어 유향소와 정부 사이의 연락을 꾀함.

1. 관찰사(2): 도의 관할자. 절도사, 수군절도사 등의 무관직을 겸함. 중요한 정사를 제외하고서는 지방 행정상 절 대권한 행사.

 

2. 수령: 현의 지방관을 통칭하며 행정 체계상 병렬적으로 관찰사 관할 아래에 있었음.

부윤(2): 관찰사와 동격인 부의 우두머리.

대도호부사(3): 대도호부(안동, 강릉, 영흥, 영변, 창원) 를 다스리는 관직.

목사(3): 목을 맡아 다스린 문관.

도호부사(3): 전국의 도호부(경국대전에 의하면 75)를 다스리는 관직.

군수(4) 현령(5) 현감(6)

 

3. 수령의 임무: 수령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조세공납의 징수였다

농업의 장려

향리의 부정 방지

부역의 균등 고려 수령의 5(守令五事)

호구의 확보

소송의 간결

학교의 진흥

군대의 정비

 

4. 유수: 개성강화수원광주는 특별 행정 구역으로 4도라 하고 유수관을 파견하였는데, 국왕에게 직속되어 관찰사의 지시감독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경관이 파견.

 

. 동양의 근세


1. (13681644)


건국: 14세기 후반에 명을 멸망시키고, 한족의 왕조를 재건.

발전: 성조 영락제 시대에 전성기, 정화의 남해 원정으로 명의 국위를 인도양과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떨침.

쇠퇴: 북의 몽고, 남의 왜구, 16세기 말 임진왜란 출병으로 국력 약화.

멸망: 17세기 여진족이 세운 청이 중국을 지배

 

 


. 조선 전기의 정치


1. 근세사회의 전개


조선 건국의 배경

고려 말 신진 사대부의 분화: 신진 사대부들은 공양왕 옹립사전개혁 문제(결정적)로 이색의 온건론 과 정도전의 급진론으로 분화. 사전 개혁을 둘러싸고 대립하던 두 세력은 공양왕 옹립 과정에서 이성 계 세력이 온건파를 축출하고 공양왕을 옹립.

 


과전법의 실시


추진 과정: 이성계를 중심으로 혁명파 사대부 세력은 우왕과 창왕을 잇따라 폐하고 공양왕을 세운 후 (폐가입진) 전제 개혁을 단행하여 조준, 정도전 등이 과전법을 마련.


② 과전법의 역할

구세력과 재야 세력 무마

사대부 우대: 휼양전, 수신전 지급.

농민 우대: 농민에 대한 배려로 경작권을 보호하고 조세율을 조정.

과전법의 결과: 고갈된 재정이 확충되고 신진 관료들의 경제 기반이 마련되었으며, 피폐한 농민 생활 이 개선되었고 국방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조선의 개창: 혁명파는 온건 개혁파를 제거하고 도평의사사를 장악하였다. 이후 이성계는 공양왕의 왕 위를 물려받아 조선을 건국하였다(1392).

 


전제왕권을 위한 노력


태조(13921398) 때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개혁

태조의 3대 정책: 숭유 억불 정책, 중농 억상 정책, 사대교린 정책.

유교를 바탕으로 한 재상중심의 정치 주창(조선경국전)

도읍지의 궁전과 도성문에 명명, 군제와 병법 개혁

요동정벌을 위한 전쟁을 준비

㉤ 「불씨잡변을 저술하여 불교 비판, 성리학을 통치규범화.

 


태종(1400-1419)의 개혁정치

등극전

태종시

위화도 회군시 최영부대 공격주도

정몽주 살해 개국반대세력 제거

공양왕 폐위 이성계 등극주도

사병 혁파, 군사권을 삼군부로

부곡 폐지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정무 이전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쳐 정무 담당

노비변정사업 실시

 

한양 재천도 호패법 실시, 양전사업

선원록 정비 왕위계승권 확립

억불숭유책

육조직계제 실시(6조에서 직접 왕명하달)

사간원을 독립시킴 거북선 개발

원육전속육전(하륜)태조실록 편찬

5부학당 설치 아악서 설치

사원 토지 몰수, 노비 해방

서얼 차대법, 삼가 금지법 제정.

1. 1차 왕자의 난(1398 무인년 8)

방원을 필두로 강씨 왕자들의 지지세력이었던 정도전, 남은 등을 죽이고 세자 방석과 방번마저 살해한 <방원의 난> 또는 <무인정사>. 방원은 일단 방과를 정종(13981400)으로 내세웠고 왕족들의 사병을 혁파하려 하였으며 이 는 2차 왕자난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2. 2차 왕자의 난(14001)

방원의 바로 윗 형인 방간이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가 방원에게 제거되는 <방간의 난> 또는 <박포의 난>. 박포 라는 자가 1등공신이 되지 못하자 방간을 꾀어 난을 일으킴. 방원의 일방적 승리로 끝나고 박포는 바로 사형, 방간 은 유배. <함흥차사> 라는 말 생김.

 




세종(14181450)의 왕도정치

집현전을 통하여 인재 다수 배출: 집현전은 연구경연서연 담당, 일부는 사관 업무, 사령의 제찬과 중국의 고제 연구.

6조직계제를 의정부서사제로 바꾸고 인사와 군사는 왕이 처리하는 왕권신권 조화 이룸.


 

통치제제의 확립


문종(14501452): 29년을 세자로 지내다가 왕위 등극, 3년만에 승하.


단종(14521455): 정치의 실권은 김종서, 황보인 등 재상에게 넘어감.


세조(14551468): 수양대군은 계유정난(계유사화, 1453)을 일으켜 김종서 등을 몰아내고 등극.

의정부서사제에서 육조직제계로 바꾸고 집현전경연 폐지.

㉡ 「국조보감편찬, 경국대전의 호전과 형전을 완성.

유향소 폐지: 이시애의 난(1467) 이후 폐지.

경제사회 정책: 직전법의 시행, 인지의 발명, 호패호적 제도 강화.

국방 강화책: 보법의 제정과 5위제 및 진관 체제 실시.


예종(14681469): 세조의 둘째 아들로서 경국대전 완성.


성종(14691494): 문물제도 완전 정비.

집현전의 후신인 홍문관 설치: 서적관리, 정치 고문, 정승과 주요 관리를 경연에 참가시킴.

경국대전을 편찬, 반포.

5. 근대적 경제생활로의 변화(2)


상업활동의 주역 - 공인과 사상


공인(대동법 실시 이후 나타난 어용 상인)

선혜청상평창진휼청호조 등에서 공가를 받아 물품을 사서 국역으로 세금을 납부.

계를 조직하고 상권을 독점, 물품을 수공업자에게 위탁하여 수공업 성장을 뒷받침.

시전지방 장시를 중심으로 발전, 독점적 도매상인인 도고로 성장.



사상(18세기 이후에 각지에서 활동)


사상의 등장: 17세기 초 도시 근교의 농어민이나 소규모 생산자의 제품을 행상 직판


중도아 등장: 농촌에서 도시로 유입된 인구의 일부가 상업으로 삶을 이어 가고자 하여 시전에서 물건을 떼어다가 파는 중도아가 되기도 하였다.


사상의 활동과 시전의 대책: 후반부터 이현(동대문안), 칠패(남대문 밖), 종루(종로 근방) 등에서 종 래의 시전과 대립. 시전은 금난전권으로 사상을 억압하려 하였으나 사상은 정부와 결탁하여 점포 창설 또는 금난전권의 적용지역을 회피하여 상권 확대.


신해통공(1791):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의 금난전권 철폐.


㉤ 사상의 발전과 종류: 일부가 도고로 성장(만상, 송상, 내상)하여 칠패, 송파 등 도성 주변에서 활동.

객주: 지방의 상업 도시에서 도매, 위탁 판매, 창고, 운송, 숙박, 금융업에 종사하는 도고로서 객상 을 유숙시키기도 하였으며, 개항 이후에는 국제 무역도 담당.

여각: 전국에 퍼져 있는 여인숙으로 숙박업과 더불어 객주와 같은 기능 담당.

경강 상인: 한강을 근거지로 서남 연해안을 오가며 미곡, 소금, 어물 운송판매와 조선.

송상: 주요 상업중심지에 송방(지점)을 설치하여 포목 장악, 인삼을 재배판매하고 대외무역에도 관여.

만상(의주): 대청무역, 내상(부산): 대일무역, 유상(평양)



도고의 성장은 상인의 계층분화 요인이 되었고, 산업 자본주의 발달 전 단계로 성장을 유도.




장시의 형성

18세기 말에 송파장(광주), 원산장(덕원), 강경장(은진), 마산포장(창원) 등이 주요 장시로 부상.

보부상은 전국의 농촌 장시를 하나의 유통망으로 연계시켰고 보부상단 결성.


 

포구에서의 상거래

장시보다 더 큰 규모로 상거래 시행. 18세기 이후 상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상업중심지로 성장.

칠성포, 원산포, 강경포 등의 포구에서 장시가 열리기도 함. 포구에서 선상, 객주, 여각 등이 활동.

 


⑷ 대외무역 활기

대청

무역

17세기 중엽부터 활발, 공무역(경원개시, 회령개시, 중강개시)사무역(책문후시, 중강후시) 실시

수입품

비단, 약재, 문방구

수출품

, 종이, 무명, 인삼

대일

무역

기유약조(1609) 이후 왜관을 중심으로 왜관개시 실시

수입품

, 구리, , 후추

수출품

인삼, , 무명, 청제품의 중계무역

 

서울 유숙소

국경 유숙소

중국

태평관

개시, 후시

여진

북평관

무역소

동평관

왜관



화폐의 보급

18세기 후반 상평통보의 대중화: 유통이 잘 되지 않아 전황 현상이 발생.

대규모 상거래에서 환어음 등의 신용화폐가 이용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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