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왕

정치

경제/사회

문화

인조

(1623~1649)

1. 이괄의난(1624)

2. 정묘호란(1627)-정봉수(의병)

강화도로 피신

정봉수의 용골산성전투

3. 병자호란(1636)

남한산성으로 피신

청과 군신관계 수립

4. 총융청, 수어청 설치

5. 서인집권, 남인참여

(당파연립, 비판적 공존체제)

1. 조선통보를 새로 주조하여 개경에서 통용

2. 영정법실시

3. 중강, 회령, 경원 개시

1. 벨테브레이 표류(박연)

효종

(1649~1659)

1. 북벌운동

(충청지역산림중용)

2. 서인집권, 남인참여

3. 나선정벌(흑룡강)

4. 어영청확대(2만명)

1. 대동법확대(충청, 전라)

2. 설점수세제(호조별장제)

3. 조선통보를 널리 유통

1. 시헌력채용(김육의주장)

시헌력 : 서양인 선교사 아담 샬이 만든 역법

2. 하멜의 표류(하멜표류기)

현종

(1659~1674)

1. 기해예송(서인우세)

2. 갑인예송(남인우세)

3. 서인집권, 남인참여

 

 

숙종

(1674~1720)

1. 2차 북벌론(윤휴 제기)

청의 정세변화 이용

2. 경신환국(1680)

남인제거, 서인집권

서인분열(노론, 소론)

3. 기사환국(1689)

서인제거, 남인집권

4. 갑술환국(1694)

남인제거, 서인집권

5. 무고의옥(1701)

희빈장씨 사사

6. 일당전제화대두

왕권 불안정, 정치불안

7. 백두산정계비건립

8. 안용복의 활동

(독도, 울릉도 귀속문제확인)

9. 금위영 설치(궁궐수비)

10. 탕평론 제기(인사관리)

1. 상평통보 상용화

2. 장길산의 활동

(황해도 구월산)

3. 대동법 전국실시

1. 윤휴와 박세당(사문난적)

윤휴 : 유교경전에 대한 독자적해석시도 (원시 6경 중시)

박세당 : 양명학과 노장사상의 영향으로 주자의 학설 비판 (사변록 저술)

경종

(1720~1724)

1. 신임사화(1721~1722)

노론 약화, 소론 정국주도

 

 

영조

(1724~1776)

1. 이인좌의 난(1728)

2. 완론탕평(탕평파 육성)

3. 군영정비(수성윤음 반포)

4. 산림을 정치권에서 배제

5. 서원 200여개 소 정리

6. 이조 전랑의 권한 축소

(자청권, 3사 선발권 혁파)

7. 청계천 준설사업 실시

1. 사법제도 개혁

무원록(형벌제도 개선)

사형수 3심제 적용

2. 균역법실시

3. 노비종모법 법제화

(양인 증가책의 일환)

4. 신문고 제도 부활

5. 격쟁, 상언제도 활성화

1. 속대전 편찬(법전)

2. 동국문헌비고 편찬

(한국학 백과사전)

3. 속오례의 편찬

4. 성균관에 탕평비 건립

5. 이중환-택리지 편찬

정조

(1776~1800)

1. 준론탕평(적극적 탕평)

2. 장용영설치

3. 규장각설치

4. 시파(남인, 소론계열)정국 주도

5. 초계문신제도

6. 수령의 권한강화(향약주관)

7. 화성능행

백성과의 소통

8. 자청권 완전 혁파

1. 신해통공(금난전권혁파)

육의전은 제외

2. 신해박해(윤지충처형)

천주교 전례문제

3. 장인등록제폐지

민간수공업 발달

공장안 폐지

4. 상언, 격쟁 활발

5. 이덕무, 박제가, 서이수, 유득공이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되었음 (서얼출신)

6. 서얼, 노비차별 완화

7. 제언절목 반포

1. 수원 화성(거중기)

대유둔전, 만석거, 만년제

2. 대전통편(법전)

3. 탁지지(호조기능 정리)

4. 무예도보통치(병법서)

5. 동문휘고(외교문서 정리)

6. 추관지(형사법, 재판제도 정리)

7. 일성록(세계기록문화유산)

8. 정약용(한강주교설계, 거중기)

9. 만천명월주인옹(초월적군주)

10. 문체반정(박지원-패관소품체 비판)

11. 고금도서집성 5,000권 수입()

순조

(1800~1834)

1. 노론 벽파 정국주도

(정순왕후 김씨)

훈련도감 정상화

장용영 혁파

2. 안동김씨세도(김조순)

3. 홍경래의 난(1811)

청천강 이북

1. 신유박해(1801)

천주교 신자 대탄압

2. 중앙 관서 공노비 66,000명 해방(1801)

3. 쌀 폭동(1833)

경강상인+싸전

 

헌종

(1834~1849)

1. 풍양조씨세도(조만형)

1. 기해박해

2. 병오박해(김대건 순교)

 

철종

(1849~1863)

1. 안동김씨세도(김좌근)

2. 임술농민봉기(1862)

단성, 진주 민란이 계기

함흥~제주까지 전국적 민란

삼정이정청 설치

1. 중인층의 소청운동(실패)

2. 신해허통(1851)

서얼의 청요직 허통

3. 동학창시(최제우, 1860)

1. 대동여지도(김정호, 1861)


4. 조선 후기의 외교


대청 외교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표면상 사대관계였으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생각을 함. 대청 적개심은 상존하는 가운데 북벌정책이 장기간 고수되기도 하였음.

청의 국력이 신장되자 북학론이 힘을 얻고, 청의 요청에 1658년에 나선정벌(1차 변급, 2차 신유장군)을 하기도 하였음.


 

대일 외교


왜란 이후 국교가 단절된 일본은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여 쓰시마 도주를 통해 국교를 재개하려 하였음.

조선은 유정(사명당)을 파견하여 일본과 강화하고 포로 7천명을 데리고 왔음(1607).

기유약조(1609): 국교 회복, 부산포에 왜관 설치(세견선 20, 세사미두 100)하고 조선은 쌀무명인삼 수출. 은을 수입하고 청에 수출.

조선통신사(16091811): 조선의 문화학문기술을 전파하고 막부 정권의 대외적인 인정.

울릉도독도 정책:

조선 후기에 일본 어민들이 울릉도독도를 침범하자 안용복이 쫓아내고 일본에 건너가 조선의 영 토임을 확인.

그래도 계속되자 19세기 말 조선은 초기의 공도정책을 포기하고 김옥균을 제도 개척사로 임명하고 울릉도에 군을 설치하며 이주를 장려.




<독도 관련 기록들>

1. 삼국사기 신라 지증왕 본기, 이사부 열전

신라 지증왕 13(512) 이사부가 울릉도(우산국)를 흡수한 이래 한국의 고유 영토가 되었다.


2. 고려사

독도가 우산국 영역임을 밝히고 있으며, 고려 고종 때 최우가 우산국에 사민 정책을 시도했으나 풍랑으로 실패하 였다.


3. 조선 태종(1417)

섬 주민을 본토로 옮겨 살게 하는 공도 정책 실시로 울릉도와 독도 관리가 소홀해졌다.


4. 세종실록지리지 강원도 울진현 조(1454)

무릉도(울릉도)와 별도로 우산도(독도)의 존재를 형제섬으로 처음 기록하였다.


5. 동국여지승람(1481)신증동국여지승람(1531)

독도(우산도)와 울릉도는 행정 구역상 강원도 울진현에 속한다고 명시하고 신증동국여지승람 팔도총도에서 울릉도와 우산도(독도)를 별개의 두 섬으로 구성되었다고 기록하고 그려 넣고 있다


6. 은주시청합기(1667)

울릉도(당시 일본 호칭 竹島)와 독도(당시 일본 호칭 松島)는 고려 영토이고 일본의 서북쪽 경계는 은기도를 한계 로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7. 1691

도쿠가와 막부 관백(집정관)은 울릉도(및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재확인하고 일본 어부들의 독도 출어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음을 조선 측에 알려줬다.


8. 숙종 19(1693) 안용복

울릉도 부근에서 조업하다 일본 어부의 불법 어로를 발견하고 일본으로 가 조선 영해임을 주장한 바 있는데, 숙종 22(1696) 울릉도에서 조업 중 다시 일본 어부의 불법 어로를 확인하고 스스로 울릉우산양도감세관이라 가칭하고 일본에 다시 건너가 시마네 현 호키주 태수에게 일본 어선의 범경 사실을 항의, 사과받고 돌아왔다.


9. 헌종 15

독도가 유럽에 알려진 것은 1849년 프랑스 포경선 리앙쿠르호에 의해 리앙쿠르암초로 불리면서이다.


10. 메이지 초기

일본인들은 울릉도와 독도로 진출하여 울릉도를 마츠시마 섬, 독도를 다케시마라 불렀다.


11. 1881

울릉도 공도 정책을 지양하고 육지 사람들이 건너가 개발을 시작하면서 독도를 울릉도민의 여름철 어업 기자로 이 용하였다.


12. 대한제국(1900)

울릉도를 울릉군으로 승격시키고 독도의 두 개 섬인 죽도석도를 울릉군에서 관할한다는 내용의 칙령을 관보 1716호에 게재하였다.


13. 일 전쟁 중(일 협정서 이후)

일제는 독도를 1905 2월 한국 몰래 다케시마라는 이름으로 시마네현에 불법 편입시켰다. 을사조약 이후인 1906  4월 비로소 한국에 편입 사실이 알려졌다(울릉 군수 심흥택에게 사실 고지).


14. 광무 10(1906)

독도는 예로부터 우산도, 삼봉도, 가지도, 석도 등으로 불려 왔는데, 오늘날의 명칭인 독도로 처음 쓰인 것은 울릉 군수 심흥택의 울릉군수 보고서에서 本郡所屬獨島라는 기록과 한말 지사 황현의 매천야록에서였다.


15. 1946

연합국 최고 사령부는 지령( 677, 1033)에서 독도를 본래 한국 영토로 확인해 일본의 영토에서 제외하였다. 그 국제법적 효력은 아직도 살아 있다.


16. 1952

연합국은 일본을 재독립시켜 주기로 하고 이에 앞서 1951년 대일본강화조약을 체결하려 하였다연합국은 그 준비 로 1950년 연합국의 구일본 영토 처리에 관한 합의서를 작성하였다이 합의서 제 3항에서 한국에 반환할 영토 는 한반도 본토와 그 주변의 모든 섬인데그 대표적 예로 제주도거문도울릉도와 함께 독도를 리앙쿠르 바위섬 이라는 서양 호칭으로 명기하여 한국에 반환해 한국 영토로 처리됨을 극히 명료하게 밝혔다.  

 

3. 세도정치


몰락하는 왕권


세도정치의 시작: 정조 때 홍국영


순조(18001834) 때의 세도정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 노론 벽파 세력이 집권하여 신유박해를 통해 규장각 인물을 몰아내 고 장용영을 혁파하였으며 훈련도감을 회복시켜 장악.

정순왕후 사후 김조순이 그의 딸을 왕비로 들이고 국사가 되어 정치를 전담, 위시한 안동 김씨가 반남 박씨, 풍양 조씨의 협력으로 요직을 독점.

순조 말년에 효명세자(익종)의 대리청정을 하며 조만영(풍양 조씨)이 그의 딸을 세자비로 들여 안 동 김씨와 세력분쟁.


헌종(18341849) 때의 세도정치

헌종 즉위 후(1834) 순조비 순원왕후(김조순의 딸)이 청정하여 헌종 6년까지 계속.

조인영이 영의정이 되고 순원왕후가 물러난 뒤 왕 8년 친정이 시작되고 정권은 풍양 조씨에에 감.


철종(18491863) 때의 세도정치: 헌종이 후사 없어 철종이 즉위하자 순원왕후가 후견정치. 김문근의 딸로 철종비를 삼아 안동 김씨의 세도.


 

세도정치기의 권력 구조

붕당의정부6조 모두 유명무실. 비변사는 더욱 비대해짐.

권력 구조: 2품 이상의 고위직만이 기능 발휘, 그 아래 관리들은 행정 실무만 전담.

 


세도정치의 악영향

정치기강의 문란: 과거제도 문란, 매관매직 성행, 암행어사의 부정.

수령과 아전의 수탈: 농민과 상공업자가 수탈 대상.

삼정의 문란: 전정군정환곡의 문란이 극에 달함.

1. 전정의 문란

진결: 경작하지 않은 땅이나 황폐한 땅에 징세하는 것

은결: 토지 대장에 기록되지 않은 땅, 신개간지 등에 징세하는 것

백지징세: 공지에 징세하는 것

도결: 사적으로 소비한 공금을 보충하기 위해 정액 이상의 세를 거두는 것

2. 군정의 문란: 인징, 족징, 백골징포, 황구첨정, 강년채, 마감채

3. 환곡의 문란

늑대: 필요 이상의 미곡을 강제로 대여하여 이자를 수취

허류: 창고에는 하나도 없으면서 장부에는 있는 것처럼 꾸미는 것

반작: 출납 관계에 대한 허위 문서를 작성하는 것

반백: 반은 겨를 섞어서 대여하여 이자를 사취하는 것

분석: 미곡에 겨를 섞어서 늘려 대여하고 남는 양을 사취하는 것

탄정: 흉년에 강제로 징수하여 감한 부분을 사취

가분: 저장해야 할 부분을 대여하여 이자를 받는 것


상품 화폐 경제의 성장 둔화: 잉여 생산물의 거의 모두를 빼앗기는 실정에서 상품 화폐 경제도 이 시 기에는 그 성장이 둔화.

민란의 발생: 소청벽서 운동에서 시작하여 민란으로 확대.

왕권의 약화: 세도가의 인사권리와 권력 독점.

지배층의 개혁의지 상실: 세도가와 야합하며 고증학에 치우침.

영조(17241776)의 완론탕평


즉위 초의 사건

즉위 직후 탕평교서를 발표. 소론 과격파를 축출하고 노론을 다시 불러들이는 을사처분을 시행

노론 준론자 축출(1727): 이들이 소론 공격을 일삼자 축출.

이인좌의 난(1728): 소론남인 등의 일부 과격분자들이 영조의 왕위 자체를 부정함.

기유처분(1729): 노론소론 가운데 자신의 탕평책을 따르는 온건파(완론자)들을 고르게 등용함. 이 후 점차 능력 위주로 인사정책을 시행.


즉위 중반의 치적

균역법 시행(1750)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 세 군문이 도성을 나누어 방위하는 체제 갖춤

사형수에 대한 삼심제 시행


노론의 우세: 한때 탕평의 원리에 의하여 노론과 소론이 공존하였으나, 나주 괘서 사건 등 소론 강경파 가 자주 변란을 일으켰으며, 사도 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영조를 지지한 노론이 절대적으로 우세해지고 소론의 정치적 입장이 약화.

3대 유폐

붕당, 사치, 음주를 3가지 유폐로 지정

신문고

태종 때의 항소제도를 부활

속대전(1746)

경국대전의 속전으로서 왕명에 따라 문신 김재로에 의해 편찬.

무원록 재간

법의학서

기로과

왕비대비대왕대비 등이 6, 70세가 되었을 때를 경축하기 위해 60세 이상의 선비를 대상으로 실시한 과거시험

권농정책

노가집성의 대량 보급

노비공감법

노비의 국가에 대한 공역 부담을 경감

탕평책

완론탕평을 시행하는 한편 탕평책을 육성

균역법

균역청을 설치하고 군포를 1필로 경감

동국문헌비고

홍봉한의 한국학 백과사전

속병장도설

무예법을 재정리한 병서

속오례의

국조오례의를 보완한 의례집


 



정조(17761800)의 준론탕평

1. 시파: 영조의 덕이 없음을 비난하고 사도 세자의 죽음은 지나치다는 입장으로 노론의 일부와 불우했던 남인, 소론 계통.

2. 벽파: 사도 세자의 근실하지 못함을 비판하고 사도 세자의 죽음은 당연하다는 입장으로 영조를 지지한 노론 강경 파들이 많았다.


배경: 노론은 영조 때 사도 세자 사건을 계기로 시파와 벽파로 분파.


준론탕평: 편전의 이름을 탕평실이라고 하여 적극적 탕평책을 실시함. 영조 때의 척신과 환관을 제거. 노론과 소론의 일부 세력과 남인 계열이 중용됨.

 

제언절목

제언의 수리와 신축(1778)

주관지

형조의 사례집

규장각

비서실의 기능과 문한 기능, 과거 시험 주관과 문신 교육의 임무를 더 부여

장용영

국왕의 친위부대

신해통공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의 금난전권 철폐(1791)

활자

정리자, 한구자, 생생자(목판) 주조

홍재선서

자서전

일성록

일기

대전통편

경국대전을 원전으로 규장각 제도를 법제화, 이를 통해 서얼발탁.

탁지지

호조의 사례집

문체반정운동

노론 벽파를 견제키 위함

초계문신제

당하간 이하 관리를 재교육에 의해 시험을 거쳐 승진시킴

화성(수원성)

화성 행차시 백성들과의 접촉을 통하여 백성들의 의견을 정치에 반영하고자 함

수령권한강화

수령이 향약을 직접 주관하게 함

동문휘고

조선의 외교 문서집

규장전운

음운서

무예도보통지

병법서

 

 

2. 당쟁과 탕평


환국정치


환국

기사환국: 숙종 15(1689) 후궁 소의 장씨의 소생을 원자로 책봉하는 문제를 계기로 서인이 축출 되고 다시 남인이 정권을 장악.

갑술환국: 숙종 20(1694) 폐비 민씨 복위 운동을 반대하던 남인이 화를 입어 실권하고 서인이 재 집권하게 된 사건. 갑술옥사 또는 갑술경화라고도 함.

무고의 옥: 숙종 27(1701) 인현황후 사후 장희빈의 처소에서 신당이 발견되자 장희빈에게 사약이 내려짐. 소론은 세자를 위해 용서해 줄것을 간청했으나 숙종은 소론 세력을 귀양 보내거나 파직시 킴. 소론은 세력이 축소되고 노론이 대거 조정에 진출함.


숙종(16741720)의 재위기간은 당쟁의 절정기였음. 예송논쟁으로 왕실의 권위가 실추되자 왕이 편당 적 조치를 취하여 환국을 불러오게 됨.


이러한 정치적 동향은 17세기 후반 이후 상품 화폐경제 발달에서 비롯함.


결국 향촌 사회에서의 지주제와 신분제의 동요는 사족중심의 향촌 지배질서를 어렵게 하였고 붕당정 치의 기반도 무너지게 하였음.

 


붕당 정치의 변질 결과


왕위 계승 문제: 사사가 빈번히 발생, 외척의 정치적 비중 상승, 정쟁의 초점이 왕위 계승으로 맞춰짐.

벌열 가문의 권력 독점

양반층의 분화

서원의 남설: 특정 가문의 선조를 받드는 사우와 뒤섞여 도처에 건립. 특히 갑술환국(1694) 이후 남인 의 본거지인 경상도 지방에서 심하게 나타났음.



⑶ 탕평론

 

기원

󰡔서경󰡕홍범조에서 비롯함.

실시원인

붕당정치의 문제점: 극단적 정쟁, 집권욕으로 사리에 집착, 사회분열, 왕권약화

본질

탕평론은 정치적 균형관계를 정립하는 것으로 왕권전제가 목표

왕에 의한 타율적 세력균형 유지는 붕당정치가 변질된 17세기 후반에 제기

숙종(16741720)

탕평책

탕평론이 처음 제기 명목상의 탕평, 조제보합론 없음

노론 중심의 일당 전제화로 실패, 편당적 조처로 환국이 일어났음

경종 때의 상황

경종(17201724) 왕세제(영조)와 대리청정 문제로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격화.

영조의 완론탕평

즉위 초 탕평교서반포, 실패

온건론자를 등용하여 탕평파 육성(완론탕평) 일종의 조제보합론

노론과 소론을 교대로 기용하여 정국이 불안

이조낭관이 행사하던 낭천권과 천거권 박탈

정조의 준론탕평

노론 벽파를 물리치고 남인 시파를 고루 등용

엄격한 준론 탕평을 실시

근본적인 당쟁의 모순을 시정할 수는 없었다

탕평론의 결과

탕평책은 왕권 강화를 도모하고, 정국 안정을 위한 미봉책에 불과

 

 

. 조선 후기의 정치


1. 통치제제의 변화


지배체제의 동요


비변사의 기능 강화

비변사의 구성원: 현직 정승, 공조를 제외한 5조의 판서와 참판, 각 군영대장, 대제학, 강화 유수.

임진왜란 이후 비변사는 거의 모든 국가 현안을 다루게 되었고 의정부와 6, 왕권 약화.


3사의 기능 변화: 상대세력 비판을 통한 자기세력 유지에 급급.


이조와 병조의 전랑들도 인사권과 후임자 천거권을 불합리하게 행사.



군제의 개혁

군 영

설치 시기

방어 지역

특 징

구성

경제 기반

훈련도감

선조

수도

삼수병(포수, 살수, 사수)

장번 급료병(용병)

삼수미세(2.2)

어영청

인조

수도

효종 때 북벌 운동의 본영

번상병

보인

총융청

인조

경기 일대

북한 산성 중심

속오군

자담

수어청

인조

광주 및 부근

남한 산성 중심

속오군

자담

금위영

숙종

왕실(수도)

5군영 체제 완성

번상병

보인


중앙군의 개편: 5군영 체제

임기응변으로 설치: 대외 관계와 국내 정세의 변화에 따라 임기응변적으로 설치.

용병화: 신분제 동요와 부역제의 해이, 수취 체제의 변동 등으로 결국 용병제 도입.

서인의 군사적 성격: 실질적으로는 서인 정권의 군사적 기반.


지방군의 개편

16세기에 제승방략체제로 전환.

왜란 중에 다시 진관체제로 복구하고 속오군체제를 채택.

제승방략체제: 유사시 필요한 방어처에 각 지역의 병력을 총동원하여 중앙에서 파견된 장수가 지휘하는 체제.

속오군체제: 양천혼성군이나 양반이 노비와 함께 편성되는 것을 꺼려하여 상민과 노비들만 남게 되었음.


 

수취체제의 변혁

전세는 영정법, 공납은 대동법, 군역은 균역법으로 바뀜.

사족에서 수령과 향리 중심의 지배체제로 변화되면서 농민 수탈은 가혹해짐.

농민의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호패법과 오가작통제를 다시 강화함.

광해군의 정책


(후금)의 건국: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한 누르하치가 1616년 칸에 올라 국호를 후금이라 하고, 선 양에 도읍함.


광해군의 중립외교

후금 토벌을 위한 명의 군사 요청에 광해군은 도원수 강홍립과 1만 군사를 출병시키며 형세를 살 펴 진퇴를 결정하라고 명령.

助明軍(조명군, 명을 돕는 군대 = 강홍립의 군대)은 명이 불리한 상황에 처하자 금에 항복. 조선은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음.

이후에도 광해군은 명의 원군 요청과 후금에 대하여 적절히 대처함.

광해군(16081623): 당쟁으로 임해군, 영창대군을 역모로 죽이고(계축사화),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등 패륜을 많이 저질렀으며 한편 서적편찬 등 내치에 힘쓰고 명나라와 후금에 대한 양면 정책으로 난국에 대처함. 인조반정으로 폐위됨. 광해군 당시에는 북인정권이었음.


문화 시책: 동의보감편찬, 소실된 사고를 5개 사고로 재정비.


 

정묘호란(1627)


인조(16231649)의 즉위: 인조반정으로 즉위하고 서인들이 집권. 친명배금 정책으로 후금을 자극하게 됨.

원인

친명배금 정책: 서인 정권의 친명배금 정책이 후금을 자극.

가도 사건: 명나라 장군 모문룡이 후금이 차지한 요동 지방을 빼앗기 위하여 평안도 가도에 주둔 함으로써 후금을 긴장시켰다.

이괄의 난(1624):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평안도 영변에 좌천되자 부하를 이끌 고 반란을 일으킴. 반란은 실패하였고 이괄은 부하에 의해 살해당함.


경과: 후금은 광해군을 위한 보벅을 명분으로 평안도 의주를 거쳐 황해도 평산에 진주(1627), 철산 용 골산성의 정봉수와 의주의 이립 등은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합세하여 접전. 후금의 군대는 보급로가 끊어지자 강화를 제의.


결과: 후금의 1차 목표는 중국 대륙의 장악이었고, 조선도 아직 적극적으로 항전할 힘이 없어서 화의는 쉽게 이루어졌다. 조선과 후금은 형제 관계를 맺음.


 

병자호란(1636. 12.1637. 1.)


원인: 후금은 1632년 만주 전역을 석권하고 북경을 공격. 청은 양국을 형제에서 군신관계로 고칠 것과 다량의 조공을 요구.


주화론과 주전론의 대립: 대세가 주전론으로 기울자 청은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1636).


경과

청 태종이 대군을 이끌고 서울을 점령(1636).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하려 하였으나 청에 의해 길이 막혀 소현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피난.

1만의 조선군은 12만의 청군과 45일 전투 후 주화파인 최명길 등이 중심이 되어 청과 화의.


결과: 조선은 청과 군신관계 성립, 3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을 인질로. 10년의 볼모생활 끝에 세 자와 봉림대군은 환국, 세자는 2개월 만에 사망. 효종(봉림대군)은 북벌 계획을 추진하였으나 뜻을 이 루지 못함.


영향

국토의 황폐화: 청군이 거쳐간 서북 지역은 약탈과 살육으로 황폐.

청에 대한 반감


 

북벌계획


효종(16491659)의 북벌계획: 북벌론은 청을 정벌하고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자는 주장이다.

효종은 송시열, 송준길, 김상헌, 이완 등의 북벌론자들을 기용하고 어영청내삼청을 기병화, 화포 를 제작, 성곽을 준비. 그러나 효종의 사후에 북벌론은 희미해짐.


숙종 때에도 청의 정세 변화를 이용하여 윤휴를 중심으로 북벌론이 다시 제기되었으나 단행하지는 못 하였음.


북벌론의 정치적 악용

서인 정권 유지 수단: 패전의 책임을 져야 할 서인들의 정권 유지 수단으로 북벌론이 이용됨.

서인의 남인 진출 견제책: 인조는 서인 중 일부 소장파들의 강경한 척화 주전론이 청의 침략을 불 러들였다고 생각하여 일부 남인을 등용. 그러나 서인들은 북벌론을 주장하면서 반대 세력들의 진 출을 견제하려 하였다.


18세기에 북학론이 대두되어 대청인식 변화, 청과의 군신관계는 대한제국때까지 계속됨.

 

5. 왜란과 호란


임진왜란


① 대일관계 연표

쓰시마섬 정벌

세종 1419

이종무가 병선 227, 병사 17,000명을 이끌고 왜구의 근절 약속받음.

삼포개항

세종 1426

부산포(동래), 염포(울산), 제포(창원) 개항

계해약조

세종 1443

제한된 조공 무역(세견선 50, 세사미두 200)

삼포왜란

중종 1510

3포 폐쇄, 비변사 설치

임신약조

중종 1512

계해약조의 절반(세견선 25, 세사미두 100), 제포만 개항

사량진왜변

중종 1544

무역 단절, 일본인 왕래 금지

정미약조

명종 1547

세견선 25, 인원 제한 규정 위반시 벌칙 강화

을묘왜변

명종 1555

국교 단절, 비변사의 기능 강화

임진왜란

15921598

정유재란(1597), 비변사의 상설기구화로 왕권과 의정부, 6조 약화.

통신사 파견

16071811

막부 장군 취임시마다 축하사절단 파견

기유약조

광해군 1609

국교 회복, 부산포에 왜관 설치(세견선 20, 세사미두 100)


왜란 전의 국내정세

붕당 간 일본에 대한 견해 차이: 통신사 황윤길(서인)은 침략, 김성일(동인)은 불침 보고. 당시 우 위를 점했던 동인의 의견 접수.

일본의 침략: 159220만의 군사를 이끌고 <정명가도>를 표면적 이유로 침략. 조선은 초기에 패전을 거듭.



⑵ 왜란의 발발

왜군의 침략: 15924월에 침략 개시. 부산진과 동래성에서 정발과 송상현이 분전하였으나 함락.

왜군의 북상: 왜의 육군은 세 길로 나누어 한양을 향하여 북상. 조정에서는 이일과 신립으로 하여금 막 게 하였다. 신립은 충주에서 배수진을 치고 싸웠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왜군은 한양을 점령하고 북상을 계속하여 평양과 함경도 지방에까지 침입.

 


수군의병의 반격

왜군의 작전: 육군이 북상함에 따라 수군이 남해와 황해를 돌아 물자를 조달하면서 육군과 합세.


 

충무공의 활약


군사력 정비: 왜란 1년 전에 전라 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은 판옥선과 거북선을 개발하고 전함과 무기 를 정비하여 수군을 훈련시키고 군량미를 저장.


수군의 승리

옥포 해전: 이순신 지휘의 수군이 왜선 30여 척을 격파하여 최초 승리 기록.

사천당포당항포(고성) 해전: 사천 전투에서는 거북선을 최초로 사용.

한산도 해전: 적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학날개 전법) 적선 100여 척을 전파.

의의: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여 곡창 지대인 전라도 지방을 지키고 왜군의 침략 작전을 좌절시켰다.

의병: 전직관리사림승려 휘하 농민 의병이 유격전술로 왜군에 타격. 전란이 장기화되면서 의병은 관군화.

곽재우

경상도 의령에서 거병, 진주에서 김시민과 함께 활약.

김천일

전라도 나주에서 거병, 진주 혈전에서 활약.

조 헌

충청도 옥천에서 거병, 승장 영규와 합세하여 청주를 수복하고 고경명 등과 함께 전사. 700의총

고경명

전라도 장흥에서 거병, 금산에서 전사하였다.

정문부

함경도 경성에서 거병, 경성길주 일대를 회복.

김덕령

전라도 담양에서 거병, 광주남원에서 활약.

유 정

금강산에서 일어난 승장으로 사명당이라 부르며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

휴 정

묘향산에서 일어난 승장으로 서산대사라 부르며 제자로는 유정, 영규 등이 있다.





임진왜란 중의 군비 강화

훈련도감을(삼수미세 징수) 설치하고 속오군 창설.

무기발명: 거북선(태종), 비격진천뢰(이장손), 화차(변이중)


 

임란의 과정과 영향


왜군의 일시후퇴: 전 국민의 저항으로 행주산성 등에서 격파.

조선은 훈련도감을 설치, 삼수병 양성. 지방군 편제를 속오군체제로 변경. 화포 개량 조총 제작.

이후 명의 2차 원정군인 이여송이 5만 군사로 평양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벽제관 전투의 패배로 휴전회담 추진.


정유재란: 3년여에 걸친 휴전회담이 결렬.

명 연합군이 왜군을 직산에서 격퇴.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대승하자 왜군은 남해안 일대로 재후퇴.

노량 해전에서 패주하는 왜군에 공격하고 충무공은 전사, 豊臣秀吉의 사망으로 왜군 완전철수.

우리 역사상 3대첩

살수 대첩(을지문덕), 귀주 대첩(강감찬), 한산도 대첩(이순신)

왜란의 3대첩

한산도 대첩(이순신), 진주 대첩(김시민), 행주 대첩(권율)

충무공의 3대첩

한산도 대첩(최대), 명량 해전, 노량 해전


왜란의 영향

인구 감소: 왜군에 의한 살상, 기근과 질병으로 인구가 크게 감소. 포로 수만 명 발생.

국가 재정 감소: 토지가 17054만결로 감소, 토지 대장과 호적이 대부분 소실되어 식량이 부족.

사고손실: 4대 사고 중 전주사고를 제외하고 손실

문화재소실: 불국사, 경복궁, 서적, 실록 등이 왜군의 약탈과 방화로 소실.

서적의 편찬: 동의보감(허준), 징비록(유성룡), 난중일기(충무공)

신분제의 동요: 납속법 실시, 공명고신첩공명면역쳡공명고신첩 등의 공명첩 발급. 이몽학의 난.

농촌의 피폐: 인구의 격감과 농촌의 황폐화

대동법 실시의 동기 제공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막부 성립, 전쟁 중에 북방의 여진족이 청을 건국.

선조 29(1596) 왕실 서얼 출신인 이몽학은 부친으로부터 쫓겨나서 충청도 일대를 방랑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모속관 한현의 부하가 되었는데, 민심이 정부로부터 멀어지자 승려노비 등을 규합하여 충청도에서 난을 일으켜 인근 5개 고을을 차례로 정복. 이몽학은 관군의 선무 공작을 받은 부하에게 피살당하고 홍가신에 의해 토벌.

일본에서 전래된 문물: 담배, 고추, 호박, 토마토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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