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성리학의 경직성


조선후기 성리학의 경향


조선후기 성리학의 경향: 비판적 견해나 주장을 사문난적으로 배척하는 교조화 경향.


성리학의 흐름

16세기 중엽부터의 논쟁에서 형성된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의 분열.

17세기 이후의 남인학풍: 서경덕조식 문인의 북인이 인조반정으로 몰락하면서 이황의 남인에 합 류. 이에 남인학풍이 지역에 따라 다양히 전개.

서인 학풍: 인조반정 이후 의리 명분론을 강화. 17세기 말에 노론소론으로 분열. 송시열의 저술 은 서인의 주장을 뒷받침.

18세기 노론 내 송시열 제자들의 호락논쟁: 호론(충청도)는 인물성이론, 낙론(서울경기)은 인물성동론.

호론은 위정척사 사상에 영향, 낙론은 북학사상에 영향.

영남 남인과 노론 사이에 이기론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


성리학에 대한 비판

경향: 17세기 후반부터 주자 성리학을 상대화하고 6경과 제자백가 등에서 사상적 기반을 찾으려 하였다.

윤휴(남인): 서경덕의 영향을 받았으며, 유교 경전에 주자와 다른 독자적인 해석을 하다 서인에 의 해 사문난적으로 몰림.

박세당(소론): 양명학과 노장사상 영향을 받아 사변록을 통해 주자의 학설을 비판하다 서인에 의 해 사문난적으로 몰림.


기타: 정약용은 주자의 해석에 구애되지 않고, 고주(古註)를 참작하여 공자맹자의 본뜻을 찾으려고 노력.

 


양명학의 전래


전래: 중종 때 전래


특징: 치양지설과 지행합일설을 근간으로 한, 교조화된 성리학을 비판.


연구: 경기지방 중심의 재야 소론계열 학자와 불우 종친 출신 학자들이 연구. 18세기 초 정제두에 의해 체계화.

강화학파 형성: 정제두가 형성. 국어학, 역사학, 서화 등에서 새로 운 경지 개척. 실학자들과도 서로 영향.

정제두의 활동: 존언, 만물일체설저술. 그는 일반민을 도덕 실천의 주체로 상정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양반 신분제의 폐지 를 주장.


영향: 박은식(유교구신론)정인보(양명학연론) 등의 국학자가 양명학 을 계승하여 민족운동 전개.

∙「불씨잡변(정도전) - 불교

∙「사변록(박세당) - 성리학

∙「천학고(안정복) - 천주교

∙「전습록변(이황) - 양명학

∙「서학변(신후담) - 천주교

 

 

 

 

 

 

5. 과학기술


과학기구의 발명과 의학서적의 간행


기술발전의 동향

조선 초기(15세기): 훈구파의 입장 등으로 과학기술이 크게 발전.

16세기 이후: 사림의 과학 기술 천시 풍조로 점차 침체


과학(기구)의 발명

시간: 양부일구(해시계), 자격루(장영실)

강우량: 세계 최초 측우기(세종)

토지: 규형과 인지의

천체 관측: 혼천의, 간의, 천상열차분야지도(태조), 새로운 천문도(세 종때 제작하였으나 부전)


수학과 역법의 발달

상명산법과 산학계몽: 수학 교재로 아라비아(사라센) 수학의 영향 받음.

칠정산: 중국 수시력+아라비아 회회력 역법서로 서울을 기준으로 천체 운동을 정확하게 계산.

부여: 은력

신라: 선명력()

고려: 수시력(), 대통력()

조선 전기: 칠정산

조선 후기: 시헌력(아담 샬)

을미개혁: 태양력


의학서적

향약집성방: 세종 때 유효통. 국산 의약제 개발과 조선의학의 학문적 체계 수립. 1천여 병의 치료예방법 소개.

의방유취: 세종 때 김순의. 동양 최대의 의학 백과.

 


인쇄술과 제지술의 발달

태종 때: 주자소를 설치하고 계미자 주조.

세종 때: 갑인자 주조, 식자판 조립법 창안, 조지서(종이 생산).

활자명

주조 연대

재료

계미자

태종

갑인자

세종

병진자

세종

임진자

영조

생생자

정조

정리자

정조

춘추강자

정조

 


농서의 간행과 농업기술의 발전


농서의 간행

농사직설: 세종 때 정초. 현존 최고의 농서로 경험담을 토대로 우리 실정에 맞게 수록. 직파법 권장.

사시찬요: 세조 때 강희맹. 14계절의 농사와 농작물에 관한 주의사항 및 112개월의 행사 등 을 기록.

금양잡록: 성종 때 강희맹. 금양(시흥) 지방 농민들의 경험담을 토대로 저술한 농사목축서. 농사직 설에 없는 내용만을 수록하는 것이 원칙.


농업기술의 발전

농종법 시행: 종자를 밭이랑 위에서 재배.

직파법 시행

23작 시행: 밭농사에서 조보리23작 확산.

이모작 실시: 논농사에서 남부 지방 일부에 벼보리 이모작 실시.

건사리(건경법): 마른 땅에 종자를 뿌려 일정한 정도 자란 다음에 급수.

물사리(수경법): 무논에 종자 직접 뿌림.

모내기(이앙법): 남부 지방에서 고려말에 이어 계속.

시비법 발달: 농경지의 상경화 확립, 휴경제도 거의 사라짐.

가을갈이 보급: 가을에 농작물을 수확한 후 빈 농지를 갈아 엎어 다음해의 농사를 준비.

목화재배 확대: 무명 생산 증가로 화폐처럼 사용.

모시누에치기도 확산되고 양잠관련 농서(산가요록)도 편찬.

 


병서편찬과 무기 제조기술의 발달


병서의 편찬

진도: 태조 때 정도전. 전술부대 편성법.

총통등록: 세종 때. 화약 무기의 제작과 사용법.

병장도설: 세종 때. 그림으로 설명한 군사훈련 지침서.

역대병요: 세종 때. 역대 군담과 전술 정리.

동국병감: 문종 때. 중국과 우리나라(고조선고려 말)의 역대 전쟁사.


무기제조 기술의 발달

거북선: 최초의 철갑선으로 태조때 제작, 충무공이 임난 중 개량.

비거도선: 작고 날쌘 배

화포: 사정거리 최대 1000

화차: 로켓포와 비슷, 신기전 화살 100개 연속발사.

비격진천뢰: 이장손이 임난 중 개발.

 



6. 문학작품과 예술


문학의 다양화


조선 전기 문학의 경향: 초기에는 격식을 존중하고 질서와 조화 표방 점차 개인적 감정 표현 경향 의 가사와 시조


악장문학: 조선 건국의 정당성과 우리 민족의 자주의식 표현 16세기 가사 문학으로 발전


한문학

15세기의 한문학: 문학의 주류 형성. 서거정의 동문선이 대표적 작품.

16세기의 한문학: 사림들이 경학치중 사장경시로 저조.


설화문학: 금오신화, 필원잡기, 용재총화, 패관잡기(문벌제도와 적서 차별 폭로, 임제도 유사)


시조

15세기의 시조: 건국 초 패기(김종서, 남이)/유교적 충절(길재, 원천석)

16세기의 시조: 인간 본연의 순수한 감정, 자연 은둔 생활(황진이, 윤선도)

여류 문인: 신사임당, 허난설현, 황진이

 


조선시대 건축의 특색


조선시대 건축의 특색: 건물 규모를 법으로 규제하여 규모는 작고 검소하였으나 나름대로 위엄을 갖추 고 환경과 조화.

15세기의 건축: 궁궐, 관아, 성문, 학교 등이 중심.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숭례문, 개성 남대문, 평양 보통문 등이 대표적.

16세기의 건축: 서원 건축이 활발(가람배치+주택양식). 옥산 서원(경주), 도산 서원(안동).


왕실의 비호를 받은 불교 건축물

무위사 극락전: 검박하고 단정.

해인사 장경판전: 당시의 과학과 기술을 집약.

원각사지 10층 석탑: 세조때 대리석으로 만든 탑으로 고려 경천사 10층 석탑 모방.

 


공예의 발달


조선시대 공예의 특색: 실용성과 예술성의 조화, 자연미(특히 목공예)와 흔한 재료의 사용.

1. 분청사기는 퇴락한 상감청자에서 연원, 14세기 후반부터 제작을 시작하여 세종 연간을 전후하여 절정.

2. 15세기 후반부터 경기 광주 일대에 백자 관요가 운영되면서 분청사기 생산이 소규모화.

3. 16세기 중엽 이후에는 생산이 급감, 임진왜란 이후에는 백자만 남음.

15세기의 공예: 소박한 회청색의 분청사기 유행

16세기의 공예: 선비들의 취향과 어울리는 세련된 백자가 유행.


 

그림과 글씨의 발달


15세기의 그림: 화원 출신의 그림, 관료 문인화가 출신의 그림. 인물과 산수를 씩씩하고도 낭만적으로 묘사. 중국 역대 화풍을 선택적으로 수용. 무로마치 시대의 미술에 영향을 줌.

안견: 도화서의 화원. 구도 웅장, 필치 섬세. 몽유도원도(이상 세계 묘사), 적벽도가 일본에 현존.

최경: 인물가의 대가로 채희귀한도가 대표작.

강희안: 문인화가로 간결하고 호방. 고사관수도가 대표작.


16세기의 그림: 4군자가 유행.

이상좌: 노비 출신 화원으로 송하보월도가 대표작.

신사임당: 나비오리 등을 섬세하고 정교한 여성적 필치로.

사군자: 이정(대나무), 황집중(포도), 어몽룡(매화)은 삼절로 유명.

이암: 동물화.

글씨

안평대군: 송설체(=조맹부체)를 따르면서 수려하고 활달한 독자적인 글씨.

양사언: 왕희지체를 특기로 하면서 초서에 능하였다.

한호(한석봉): 왕희지체에 우리 고유의 예술성을 가미하여 단정하면서 성실한 석봉체 정립. 중국 에도 이름이 알려졌고 일반인들도 석봉체를 많이 따라 썼다.


 

음악과 무용의 발달


조선 시대 음악의 경향: 백성을 교화하는 수단으로 여겼고 국가 의례와 관련되어 있어 중요시.


음악의 발전

세종

박연: 세종은 박연에게 악기를 개량하거나 만들게 하였고, 아울러 악곡과 악보를 정리하게 하였으 며, 아악을 체계화함으로써 아악이 궁중 음악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세종: 여민락 등 악곡을 짓고 소리의 장단과 높낮이를 표현할 수 있는 정간보를 창안.

성종 때: 성현, 유자광등이 악학궤범을 편찬(동동, 정읍사, 처용가수록)

16 세기: 음악의 주체가 궁중에서 서민사회로 이동하여 속악 발달.


무용

궁중에서 나례춤, 처용무 유행.

서민층에서 농악무, 무당춤, 승무, 산대놀이(탈춤), 꼭두각시놀이(인형극) 등 유행.

3. 성리학의 융성


⑴ 성리학의 두 흐름(훈구파와 사림파)


훈구파(관학파=혁명파, 15세기)

사림파(사학파=온건파, 167세기)

역성 혁명 찬성

원시 유학에 관심

부국강병, 중앙집권화 추구

사장 중시

불교도교 등을 포용

성균관집현전 출신

15세기 민족 문화 창달에 기여

막대한 토지 소유

왕도패도주의

군사학기술학 중시

격물치지경험적 학풍

치인지학 추구(지배로서의 학문)

자주 민족의식(단군숭배)

주례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사용

(주나라의 제도를 기록한 유교 경전)

역성 혁명 반대

성리학 이념에 충실

왕도 정치와 향촌자치 추구(향약실시 주장)

경학 중시

불교도교 등 배척

지방 사학 출신

16세기 이후 사상계 주도

중소 지주충

왕도정치 강조

기술학 천시

사변주의관념적 학풍

수기지학 추구(수신으로서의 학문)

중국중심 화이사상(기자)

3사 장악, 훈구파 비판(사화)

형벌보다는 교화에 의한 통치를 강조

 



⑵ 성리학의 발전(주리론과 주기론)


서경덕조식이언적이 선구자이고, 조식은 노장 사상에 포용적이었으며 학문의 실천성을 특히 강조

이언적

서경덕(불교노장 사상에 개방적)

이황(주리론) - 이기 이원론

이이(주기론) - 일원론적 이기 이원론

원리 중시

도덕과 명분(원리) 강조

일본 성리학에 영향

•「주자서절요, 이학통록

성학십도(군주 자신이 성학을 따를 것을 주장)

 

영남학파에 영향(김성일, 유성룡 등)

예안향약

백운동서원 소수서원으로 사액

도산서원(후진양성)

경험적 세계 중시

현실 개혁에도 관심

실학으로 연결

동호문답

성학집요(현명한 신하가 성학을 군주에게 가르쳐 그 기질을 변화시킬 것을 주장)

기호학파 형성(조헌, 김장생 등)

해주향약, 서원향약

소현서원

•「만언봉사: 10만양병설, 동호문답: 대동법 주장

지나친 도덕주의로 현실적인 부국강병책에는 소홀

 

 

19세기 위정척사, 항일의병

18세기 실학

19세기 개항

 





학파정파의 형성과 대립


① 주리설(주리론)과 주기설(주기론)


영남학파

(동인,

주리론)

남인(이황)

경기도 남인(이익, 정약용) 중농주의 실학

경상도 남인 위정척사 사상

예송 논쟁을 일으킴(남인서인)

수취체제 완화와 자영농 육성 주장

상업기술 발전에 소극적

왕권 강화 중시(갑인예송, 기사환국)

북인(조식)

절의 중시 정인홍, 곽재우 등 의병장 다수 배출

중립 외교(광해군 때) 추진

대동법 시행, 은광 개발 등 사회경제정책 추진

기호학파

(서인,

주기론)

노론

(송시열,

이이)

충정도 노론 - 주기론 고집

서울 노론 - 주리론 포용 북학 사상으로 발전

성리학 신봉, 이단 적극 배격

의리 명분론, 조선중화사상, 척화론 주장

일당 전제화를 시도하여 붕당 정치를 변질시켰다.

계승

한원진 임성주 등이 계승. 19세기 중엽의 최한기는 주기론과 관련된 경험주의 철학을 높은 수준으로 고양.

소론

(윤증, 성혼)

성리학 이해에 탄력적

양명학 연구

내정 개혁 주장



② 심성론 중심(인물성 - 이론 vs 동론)


호론

낙론

충청도 지방 노론 중심의 주장

한원진, 권상화

인물성이론

우리 문화의 자부심으로 청서양에 배타적

위정척사 사상에 영향

서울경기 집장 노론 중심의 주장

이간, 김창협, 이재

인물성동론

서양 등 이질적인 것을 포용하는 입장

북학 사상에 영향

 


예학과 보학의 발달: 예학은 예송논쟁의 구실로, 보학은 양반 문벌강화 역할.




 

4. 불교와 신앙


⑴ 불교 정책불교는 중국을 존중하는 세계관이 없어 유교의 약점을 보완


태조

도첩제 실시로 승려 수 제한, 사찰 증설 금질. 후에 흥천사를 지음.

태종

도첩제 강화. 사원전노비 몰수 등 억불책.

세종

종파 정리, 사원전노비 제한, 화장경행을 금지. 후에 궁중에 내불당 건립.

세조

원각사 건립, 간경도감 설치하여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등 숭상.

성종

도첩제 자체를 폐지

중종

승과 폐지, 법계 폐지, 승려 천민화

명종

문정 왕후의 지원 아레 보우가 중용되고 승과도첩제 부활. 후에 다시 탄압.

16세기

후반

서산 대사와 같은 고승이 배출되어 교리를 가다듬었고, 임진왜란 때 승병의 활약으로 위상 정립.

 


민간신앙


도교

장점: 제천행사는 국가권위 높임, 도교경전은 상무정신 함양. 양생술은 의학발달에 영향. 유교의 문 약에 빠지고 사대에 치우치는 약점 보완.

단점: 행사의 남용으로 국가 재정에 큰 손실 사원 정리 행사 축소

관청: 소격서가 (칠성단)초제를 주관하였으나 16세기 사림의 명분론에 맞지 않아 폐지.

기타: 마니산 초제


민간 신앙

풍수지리설, 도참 사상이 조선 초기 이래로 중요시되어 한양 천도에 반영. 산송문제 대두.

무격 신앙

민간 신앙 보호: 미신행위 금지, 민간신앙을 국가신앙으로 흡수, 무당을 국가가 채용.

삼신 숭배: 환인, 환웅, 단군의 삼신숭배를 국조숭배로 흡수, 구월산에 삼성사 설치제사 동시에 평양에 단군사당 건립제사.

세시 풍속

명당 선호 경향: 불교식으로 화장하던 풍습이 묘지를 쓰는 것으로 바뀌면서 명당 선호 경향이 두 드러졌다.

 

1. 교육 기관


인문 교육 기관: 중앙에 성균관과 4부 학당, 지방에 향교를 두어 각 군현의 인구에 비례하여 정원을 책정.


초등 교육: 서당

입학 대상: 사립 교육 기관으로서 사학이나 향교에 입학하지 못한 선비와 평민 자제들이 교육을 받았다.

입학 연령: 대가 8, 9세부터 15, 16세 정도였다.


중등 교육: 중앙의 4(4부 학당)과 지방의 향교.

사학(4부 학당): 중학동학서학남학이 있었으며, 정원은 각각 100명씩이었다.

㉡ 향교: 현에 각각 하나씩 설립.


③ 고등 교육성균관

명륜당: 유학 강의동 문묘: 공자 등 성현을 모신 곳 

양재: 기숙사 

존경각: 도서관 

비천당: 과거시험장



⑵ 기술 교육

교육 기관: 의학, 역학, 산학, 율학, 천문학, 도교, 회화 등으로 나누어 각각 전의감, 사역원, 호조, 형조, 관상감, 소격서, 도화서 등 해당 관청에서 교육.

학생 수와 교육 내용: 기술 교육은 군현의 크기와 지방의 특성을 고려하여 학생 수와 교육 내용을 조정.



 

2. 민족문화의 성립


민족 문화의 발달배경과 한글 창제

조선 초기 학풍: 집권층인 관학파가 과학기술과 실용 학문을 중시.

한글 창제: 1446년 반포.

 


실록의 편찬


실록의 편찬(태조실록철종실록)

태조실록: 태종때(1413) 편찬.

정종태종실록: 세종때 편찬

광해군 일기, 연산군 일기, 노산군 일기(숙종 때 단종 )

선조현종경종 수정(삭제) 실록


실록의 기록

정종태종실록 편찬 이래 춘추관에 임시관청인 실록청을 설치

왕의 사후에 사초를 정리하여 초정초의 과정을 편년체로 기록.

사초(사관이 국왕 옆에서 기록)와 시정기(각 관청의 문서를 종합하여 춘추관에서 작성)은 사관 이 외 열람 불가.


③ 실록의 보관

세 종

선조광해군

이괄의 난 이후

현재

춘추관 사고

춘추관 사고

춘추관 사고

이괄의 난 때 소실

충주 사고

오대산 사고

오대산 사고

도쿄대로 이전(1923년 지진으로 소실)

성주 사고

태백산 사고

태백산 사고

부산 국가 기록 보관소에 보관

전주 사고

(임진왜란 때 유일 보존)

마니산 사고

정족산 사고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

김일성대학교 보존

묘향산 사고

적상산 사고


국조보감: 실록 중 역대 왕들의 선정과 훌륭한 언행만을 모아서 간행. 왕들의 정치 참고서로 이용.



⑶ (조선 전기역사서의 편찬

(혁명파 사대부의) 성리학적 사관 조선 왕조 개창의 정당화 및 성리학적 통치 규범 확립이 목적

고려국사

정도전

태조 4(1395)

고려전체 역사

편년체

고려 멸망 당위성, 조선건국 합리화

동국사략

권근

하륜

태종 3(1403)

단군고려말

편년체

단군-기자-위만-한사군-삼한-삼국으로 상고사 체계화

15

 

(관학파의) 자주적 사관으로 자주적 입장에서 고려 역사를 재정리

고려사

김종서

정인지

문종 1(1451)

고려시대 역사

기전체

조선 건국 합리화를 위해 고려 말 왜곡(군주 중심의 역사서술)

고려사절요

김종서

정인지

문종 2(1452)

고려시대 역사

편년체

고려사에 누락분 보충추가(신하적 입장에서 서술)

삼국사절요

서거정

노사신

세조성종

삼국시대 역사

편년체

세조는 왕권강화와 부국강병의 목적으로 고조선-고구려-고려 역사체계를 이루려 함

동국통감

서거정

성종15

(1484)

박혁거세공양왕

편년체

3조선(단군, 기자, 위만)과 삼한-삼국-통일신라-고려로 이어지는 흐름, 삼국사절요고려사절요를 기초로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

16

(사림의) 존화주의적 사관으로 우리 역사를 소중화로, 기자 조선을 주목, 고유문화 이단시

동국사략

박상

14741530

 

강목체

15세기 동국통감을 비판요약, 엄정한 도덕적 기준으로 한국사 재정리

기자실기

이이

선조

(1580)

 

 

왕도정치의 기원을 기자에서 찾고 한국유학의 토착화에 기여


 


⑷ (조선 전기지도와 지리서의 편찬


역대제왕

혼일강리도

이무

태종 2(1402)

요하 동쪽의 조선과 일본을 표시한 세계지도로 동양 最古

팔도도

태종 2(1402) 이회 세종 16(1434) 정척 세조 때 양성지의 동국지도

팔도지도

정척,

양성지

세조 9(1463)

인지를 이용한 최초의 실측지도. 압록강 이북까지 기록되어 북방의 관심 표명.

조선방역지도

제용감관원 이이 외 11

명종1213

(155758)

조선 8도 주현도

 

신찬팔도지리지

윤준, 신색

세종 14

(1432)

최초의 인문지리서. 증보한 세종실록에 수록. 각 지방의 연혁, 호구, 토산 등을 기록.

팔도지리지

양성지

세조1성종 8

(14551477)

실록지리지의 미비점을 보완하기 위해 왕명을 받아 제작. 동국여지승람에 묻힘.

동국여지승람

서거정,

노사신

성종 12(1481)

팔도지리지세종실록지리지에 학교, 인물, 사묘, 시문 등 사대부의 취향이 반영된 전국 군현의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

이행, 홍언필

중종 25(1530)

동국여지승람을 증보 간행한 것이 현존

읍지

 

16세기

사림의 관심이 반영되어 각 군현을 단위로 작성된 지도

 


법전과 윤리서, 의례서


① 조선의 법전

구분

시기

편찬자

특징

조선경국전

태조

정도전

여말 선초의 조례를 정리한 최초의 법전

경제문감

태조

정도전

조선의 정치 조직의 초안

경제육전

태조

조준, 하륜

여말 선초의 각종 조례를 정리한 법전

경국대전

세조성종

최항, 노사신

조선의 기본 법전으로 세조 때 착수, 성종 때 교정반포

속대전

영조

김재로

경국대전을 보완

대전통편

정조

김치인

경국대전+속대전

대전회통

고종(대원군)

조두순

대전통편을 보완하여 편찬

육전조례

고종(대원군)

조두순

대전회통에서 빠진 시행 규례 정리


의례서 및 윤리서

삼강행실도(세종): 모범이 될만한 충신, 효자 등의 행적을 그림으로 그려 설명을 붙인 윤리서.

국조오례의(성종): 가의 여러 행사에 필요한 의례 정리서.

이륜행실도: 윤리서.

동몽수지: 어린이 예절 윤리서.




. 근세 사회


1. 문무 양반사회

양천제(양인-천인)

반상제(양반-상민)

법적인 기준, 조선 초기에 어느 정도 관철.

갑오개혁 이전까지 조선의 기본적인 신분제. 법 적으로는 노비만 천인.

현실적 신분, 16세기 이후 고정화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신분제 정착

 


양천제도와 반상관계의 전면화


양반의 삶: 점차 신분 명칭으로 정착.



중인의 생활

광의로는 양반과 상민의 중간신분, 협의로는 기술관.

15세기부터 넓은 의미의 중인으로 형성되어 후기에 독립된 신분층을 이룸.

기술관, 향리, 서리(경아전 녹사서리, 지방의 외아전은 향리), 토관, 군교, 서얼.

역관: 사신을 수행하면서 무역에 관여하여 이득을 보았다.

향리: 토착 세력으로서 수령을 보좌하면서 위세를 부리기도 하였다.

서얼은 중인과 같은 대우를 받아 중서라고 불렸고 문과 불가 무반 등용.

서리와 향리 및 기술관은 같은 신분 간에 혼인하고 직역 세습, 관청주변에 거주.

 


상민의 삶

농민: 상민의 대부분이며 조세공납부역 부담. 출세에 제약은 없었음.

수공업자: 공장으로 불리며 민관영 수공업에 종사, 공장세 납부.

상인: 시전 상인보부상이 국가의 통제아래 상거래에 종사, 상인세 납부.

신량역천

신분은 양인이나 고려 시대에 제염, 어업, 광업, 목축, 봉수, 간척, 도살 등 천역을 담당하던 계층

조예(문관청의 사령), 나장(무관청의 사령), 일수(지방 관청의 하인), 조군(조운선의 사공), 수군(해 군), 봉수군(봉수대 수직자), 역보(역졸) . 군역을 마치면 일반 양인.

 

상업공업광업수산업 종사자는 군역 면제이고 낮은 군직이나 잡직 가능



천민의 구성

노비

천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비자유민으로서 교육, 등용에 제한

재산으로 취급되어 매매상속증여 가능.

고려의 일천즉천제도가 17세기말 현종때 폐지되고 영조때 노비종모법’(1731) 확정.

장예원에서 노비 담당.

조선 초기에 양인으로서 천인이 된 자, 양천 교가소생 부곡민을 양민화. 후기에 양인으로 된 자도 다수.

소유주에 따라 관노(신공 납부, 관청 노동), 사노(외거, 솔거). 국초 관노 < 사노

조선 말기에 농민의 몰락이 심화, 사노비의 수는 격감. 노비신분 세습제 폐지는 1886.

모든 공노비는 60세가 되면 역이 면제. 노비의 신공은 노(남자)는 면포 1, 저화 20장이고 비(여 자)는 면포 1, 저화 10장이다.


㉨ 노비와 타 신분간의 결혼

고려 노비제도의 기본 원칙은 천자수모법+종부법=일천즉천이었다. 이것이 조선에 그대로 계승된다.

1. (노비)+(노비)=자식(노비); 모의 소유자가 자식 소유.

2. (양인)+(노비)=자식(노비); 천자수모법(고려)+노비종모법(조선) 적용되고 모의 소유자가 소유.

3. (노비)+(양인이상)=자식(노비); 종부법 적용되고 부의 소유자가 자식 소유.

4. (양반)+(노비)=자식(노비); 일정 수속을 거치면 얼자(양인)이 된다.

 

   

노비 외에 백정, 광대, 무당, 창기 등이 천민이었다.



 

2. 사회정책 개관


사회정책


정부의 농민통제책

오가작통법: 5호를 1, 5통을 1리로 조직하여 이장(이정)을 두고 위에 면()를 설치. 면장이 권농의 직임을 짐. 임난 후 속오법에 의해 방위조직화.

호패법: 태종 2(1402) 실시하여 3년마다 고쳐 작성.

 


구호시설


환곡

의창

고려 성종 때의 빈민구호기관으로서 중종 20(1525) 진휼청 설치로 폐지

15세기에는 의창 에서, 의창의 원곡 부족으로 기능 수행이 어려워짐

따라서 16세기에는 상평창이 환곡 담당(상평창의 이자는 1).


상평창: 고려 성종 때의 물가조절기관으로서 선조 41(1608) 선혜청 설치로 이에 병합.

사창: 양반 지주층이 운영한 주민 자치 환곡.

의료 시설

전의감: 태조 때 설치한 궁중과 중신의 치료기관 내의원을 분리시켜 삼의사 설치.

혜민서: 민간인의 치료기관.

혜민국과 동서대비원: 수도권 안의 서민 환자 구제와 약제 판매.

제생원: 지방민의 구호와 진료

동서활인서: 여행자, 유랑자의 수용과 구휼

 


법률


형법

형법과 민법은 기본적으로 경국대전에 종합.

실제로는 고려 이래의 대명률(태장도유사+자자+능지처사)에 의거.

반역죄, 강상죄는 연좌법 적용.


민법

주로 관습법에 의거, 가족제도에 관계되는 것은 주자가례에 준함.

민사재판은 관찰사와 수령이 담당.

상속 문제는 성리학 정착 이후로는 종법에 의거.


재판: 항소과정도 있었다.


사법기관

중앙(사헌부, 의금부, 형조, 한성부, 포도청, 장례원)

사헌부, 의금부, 형조: 정치적 중대 사건 담당

한성부: 수도의 일반행정, 토지및 가옥 소송 담당

장례원: 노비 소송 관장.

지방: 관찰사, 지방관, 토포사(진영장이 겸함)


신문고: 태종 2년에 설치하여 의금부에서 관장. 사헌부에서 해결되지 않는 억울한 일을 왕에게 직접 호소.



 

3. 향촌 사회의 모습


향촌 사회


향촌의 개념

: 중앙과 대칭되는 개념으로서 지방관이 파견되는 행정 구역상 군현.

: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면리 단위의 구역.


유향소

계승: 고려 말의 유향소가 지방세력화 하고 이시애의 난과 관계되어 세조 때 폐지했다가 성종 20 (1489) 향청으로 계승.

조직: 지방양반과 유향품관으로 구성되며, () 좌수(향정), 차석인 별감의 향임(2)수령이 임명.

기능: 수령자문향리의 비행을 규찰풍속교정정령시달민의대변향약운영수령의 횡포 견제. 민폐를 끼치는 경우도 다수.


경재소(=경소)

역할

중앙에 재직하는 고위 품관이 출신 지역의 경재소를 관장하여 유향소를 통제, 행사 주선, 공물 상 납에 책임을 지는 중앙-지방 연락기구.

왜란 이후(1603) 지방사족 명단으로 향안 작성, 향규 제정, 향회 집행.

조직: () 당상이 동향인 중 좌수 1, 참상별감 2, 참외별감 2명 임원 임명하고 유향소의 품 관도 임명. 고향의 경저리(=경주인=경인)이 경재소에서 업무 수행.

변화: 경재소 혁파(1603) 후 향소(향청)으로 개칭.


영저리(=영주인): 관찰사가 업무를 보던 감영에서 감영과 지방과 연락 사무를 보던 지방 향리. 폐단 큼.

 


촌락의 구성과 풍습


일반적인 촌락: 면리제 하에서, 반촌민촌 구분이 있었지만 두서너 씨족이 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으 며, 양반평민천민이 함께 살았음.


특수한 마을

교통기관에서: 역촌, 진촌, 원촌

어장과 포구에서: 어촌

수공업품 생산지에서: 점촌


향촌의 공동체 조직

사족: 동계, 동약을 조직하여 촌락민들에 대한 지배력을 신분적으로 강화하고자 하였으며, 지주제 를 통하여 사회경제적 지배를 관철.

일반 백성

동계동약: 사족들만이 참여하다가 임진왜란 이후 양반과 평민층이 함께 참여. 사족 지배 체제가 동요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향도, , 두레

석전: 조선 초기 상무정신을 함양하는 행사.

사림 세력의 성장에 따라 유교에 맞지 않는 것은 음사로 취급. 16세기 후반 이후로는 전통적인 향촌규약과 조직제가 향약으로 대치되고 친족 중심의 동족 부락이 형성.

향도계, 동린계 등의 마을축제는 상조기구로 기능 전환.



 

4. 성리학적 사회 질서


언론과 학문 중시

경연: 국왕과 대신이 한자리에 모여 학술과 토론을 통해 국왕의 학덕 배양.

서연: 세자와 대신이 한자리에 모여 학술과 토론을 통해 세자의 학덕 배양.

상소

구언: 백관의 의견을 묻는 제도.

 


⑵ 예학과 보학


예 학

보 학

종족 내부의 의례 규정

종족의 종적인 내력과 횡적인 종족 관계 확인

종적 단결 강화, 타 종족에 우월 의식 조성

가족과 친족 공동체의 유대를 통해 신분적 우위 확보

16C

중반

주자가례 중심의 생활 규범서가 출현하고 학 문적 연구 시작

16C

후반

성리학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예에 깊은 관심, 가묘와 사당 건립.

17C

양난으로 흐트러진 유교적 질서의 회복이 강 조되면서 더욱 중시. 예치가 강조.

김장생, 정구 등 예학자들이 다수 등장.

결과: 학파 간 전례 논쟁(예송)

영향: 정쟁의 구실, 양반 사대부의 신분적 우 월성을 강조하는 데 이용.

족보의 편찬과 예학의 발달은 조선 후기에 매우 성하여 양반문벌제도 강화에 기여




서원과 향약의 영향


서원의 기능

숭배추모: 이름난 선비나 공신을 숭배하고 그 덕행을 추모.

향촌 사회의 교화에 공헌

향음주례: 가을로 향음주례를 지내는 동안에 인재를 모아 학문도 가르쳤다.


서원

백운동서원(1543): 주세붕이 풍기의 죽계에 설립한 최초의 서원. 이황의 건의로 최초 사액을 받아 소수서원이 됨.

당쟁의 소굴화가 되고 민간 작폐가 심하였음 영조 때 300여개소, 대원 때 600여개소를 철폐하여 소수서원을 포함한 47개소만 남겼다.


향약

정착

중종 때 조광조 등의 사림파가 경재소유향소 철폐를 주장하고 향약 보급을 제안하였으나 성공 하지 못하고 각지에서 개별적 실시

이황에 의해 경상도를 중심으로 보급되다 선조때 본격적으로 보급.

보급: 중국 여씨향약(이황, 이이가 보급)이 최초, 해주향약(이이)이 널리 보급된 조선 후기에 가장 완벽한 향약.

조직: 도약정(회장), 약정(부회장), 직월(간사) 등의 임원을 두어 향청과 서원을 중심으로 운영.



 

5. 근세사회의 변동


신분의 계층분화

양반의 분화: 17세기 후반 붕당정치의 변질(노론의 일당전제화)로 정계에서 배제된 권반들이 향반토반잔반이 됨. 이름만 양반인 잔반의 경우 훈장, 농업, 상공업에 종사.


 

중간계층의 성장


서얼 대우의 변화

임진왜란을 계기로 납속책, 공명첩을 통하여 관직 등용.

정조 때 청요직 진출을 요구: 정조 때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가 규장각 검서관에 기용. 청요직 은 3사의 관직으로 판서정승 진출에 유리.

신해허통(철종 1851): 사관 등용 조치.


중인의 성장: 19세기 중엽 철종 때 대규모의 소청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실패. , 전문직으로서 존재를 부각.


위항문학: 중인을 위시한 평민, 노비 등의 문학을 통틀어 지칭. 시사도 조직.

㉠ 「해동유주: 숙종 때의 문관이자 시인인 홍세태가 편집한 위항시집.


 


노비의 신분상승 추구


노비의 신분상승

조선 후기에 군공과 납속을 통한 신분상승을 꾀하고 있었음.

18세기 전반에 종모법(아버자가 노비라도 어머니가 양민이면 자식이 양민)이 원칙으로 허용되면서 활발.

신분상승에 실패한 노비들은 도망을 가서 임노동자, 머슴, 행상 등으로 생계유지. 남아있는 노비들 이 도망자 신공을 부담.

정부에서는 신공을 줄이기도 하고, 도망 노비들을 찾아내려고도 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함.


공노비의 해방

공노비 중 일부를 입역노비에서 납공노비로 전환.

국가 재정 문제로 서서히 풀어주다 공노비의 신공 징수가 불가능하게 되자 순조 원년에 공노비 6 만 명을 해방.

사노비: 일반 농민이나 공노비에 비하여 더 가혹한 수탈과 사회적 냉대를 받았다. 사노비들도 조선 후 기에 신분 상승을 추구하여 도망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가족제도와 혼인모습의 변화

17세기 이후 가족제도: 가부장제 윤리와 주자가례 생활화로 부계중심화. 친영 제도 정착, 적통 장사상속.

양자 입양 일반화: 조선 후기에는 부계 중심의 가족 제도가 더욱 강화 되었으며, 아들이 없는 집안 에서는 양자를 들이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동성 마을 형성: 부계 위주의 족보를 적극적으로 편찬하였고, 같은 성을 가진 사람끼리 모여 사는 동성 마을을 이루어 나갔다.

혼인형태의 변화: 엄격한 족외혼. 일부일처제와 처첩제. 재가한 여자의 자손은 과거응시관료임명 불 가. 법적 혼인연령은 남 15, 14 이상.


 

인구수의 변동

한양의 인구 변화: 세종 때 1018세기에 20

전체 인구의 변화: 400600(세종) 500(임난 전후) 600(17C) 700(18C) 천만(19C )



 

6. 향촌의 변동


경영형부농(신향)의 출현과 변화된 양반중심의 향촌질서

지배층의 분열

양반이 전호, 임노동자로 전락하는 경우 발생

향반토반들은 문중 중심으로 사우, 서원을 건립하고 청금록향안, 향회, 항약을 통해 결속을 다 지고 동약으로 농민을 지배.

경제의 변화와 부농의 출현

관권을 실질 장악하였던 아전, 서리 등 향리의 세력을 강화하여 향촌질서를 무너뜨리려 하였다.

정부에서도 납속, 향직 등으로 부농의 합법적인 신분상승을 가능케 함.

부농층이 향임직에 진출.

(18세기 후반 이래 향리 세력의 성장에 따른)농민의 수탈 강화

부세가 토지를 중심으로 집중되어 향촌 질서 동요.

또한 전세, 군포, 환곡 등이 공동납제로 촌락에 부과되어 농민은 궁핍, 불만은 고조.

 


7. 농민층의 변동

농민의 분화모습: 농민은 경영형부농이 되거나 상공업으로 전업, 또는 도시광산의 임노동자로 분화. 농토로부터 이탈.

 

양반층의 증가와 임노동자의 출현

양반의 증가: 하층민이 부를 축적하여 공명첩을 사거나 족보를 위조하여 양반 또는 상민이 됨.

임노동자의 출현


 

8. 근대지향적 사회변화


사회불안의 고조

사회의 부패: 18세기 후반에는 정치 기강이 안정, 세도정치가 시작되며 사회가 부패.

부패의 심화: 19세기에 이르러 지배 체제의 모순이 심화. 게다가 1820년의 수재, 이듬해 콜레라, 도적, 이양선이 출몰.

도적의 창궐

화적: 수십 명씩 무리를 지어 지방의 토호나 부상들을 공격.

수적: 배를 타고 강이나 바다를 무대로 조운선이나 상선을 약탈.

 

예언사상의 유행

낭설, 비기(정감록, 토정비결), 도참, 무격신앙, 미륵신앙이 유행

19세기 초엽부터 예언사상이 현저하여 벽서사건이 빈발.

 

천주교의 수용

전래

17세기에 베이징을 왕래하던 사신들에 의해 국내 소개.

학문으로 인식되면서 서학이라 불리며 이익을 비롯한 남인 학자들이 연구.

발전

교리 연구회: 정조 1(1777)에 남인 학자 이승훈, 정약종, 이가환, 권철신, 정약용, 이벽 등이 중심.

민간에 수용: 18세기 후반부터 중인상민을 대상으로 전개하여 큰 호응. 신자가 늘어갈수록 기존 가치관과 갈등을 보였으며, 특히 여성들 사이에서 널리 신봉.

탄압

초기: 정부는 천주교가 유포되는 것에 대하여 내버려 두면 저절로 사라질 것으로 생각. 김범우의 집에서 예배를 보다가 의금부(추조)에 적발체포된 사건으로 금지령을 내리고 천주교 서적 수입 을 금지.

사옥명

시기

내 용

처 형 자

3대 사옥

신해

박해

정조

1791

진산사건, 윤지충의 모친상을 천주교식으로 하다 발각

윤지충(최초의 순교자), 권상연

정조 때에 재상 체제공(시파)이 천주교 신자가 남인을 보호하는 정책을 펼침.

신유

박해

순조

1801

집권 노론 벽파가 남인 시파를 축출하고자 탄압

이승훈, 이가환, 권철신, 주준모, 정약용(강진 유배), 황사영백서사건. 실학이 퇴조.

기해

박해

헌종

1839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세도권 쟁탈전. 상재벽서 남김.

앙베르, 모당, 샤스탕, 조신철

오가작통법척사윤음 발표

병인박해

고종

1866

대원군은 9명의 프랑스 신부 학살, 병인양요의 원인이 됨

대왕대비교령으로 천주교 금압령 이후 3년간 8천명 처형(최대의 박해)

천주교 박해

 


동학의 성립과 전파(1860)

1860년 최제우가 계시를 받아 동악 창시.

전통적인 민족신앙을 바탕으로 유천주교 교리를 흡수. 철학적으로 주기론, 종교적으로 샤머 니즘과 도교에 가까움. 인내천 사상과 후천개벽을 내세우고 조선 왕조를 부정. 민족주의 사상을 지님.

삼남지방에 널리 보급되었으나 최제우가 처형당함(1864). 2대 교주인 최시형의 노력으로 충청도 보 은을 중심으로 성장. 최시형은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정리.

고부 군수 조병갑이 농민을 괴롭히자 전봉준은 농민을 중심으로 동학교도를 이끌어 농민전쟁을 치름. 그러나 전봉준, 최시형 등이 잡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민란의 발생(농민의 항쟁)

수탈하여 이탈한 농민은 유리걸식, 도적떼에 가담하여 화전민, 간도나 연해주로 이주, 품팔이. 유랑을 면하면 압박과 수탈.

계와 두레가 성행하기도 하고 소청벽서괘서로 사회 모순에 항거.

 


홍경래의 난(평안도 농민전쟁)


홍경래의 난(1811)

원인: 세도정치와 서북 지방민의 차별

경과: 몰락 양반인 홍경래가 평안도 가산에서 중소지주 출신인 하층양반과 중소상인을 중심으로 유랑농민과 합세하여 대규모의 민중봉기 일으킴. 청천강 이북 지역 등 8개 군을 장악.

결과: 정주성에서 박기풍, 이효원, 유효원이 이끄는 관군 진압정부군에 의하여 5개월 만에 진압.

의의: 지방세력에 의해 추진된 민란의 선구적 역할. 실패 이후 사회불안은 심화.


진주민란(=임술민란=백건당의 난, 철종 131862)

원인: 조선 후기 수취제도의 모순과 농민 수탈이 배경. 경상도 우병마사 백낙신의 착취와 홍경원의 탐학.

경과: 유계춘 등이 농민을 규합하여 민란을 일으킴.

결과: 정부는 안핵사 박규수를 파견하여 탐관오리 백낙신, 홍병원을 파직하고 주동자를 처벌.

영향: 민란의 전국적 확산을 초래.


개령민란(철종 131863)

발단: 현민 김규진이 현감을 규탄하는 읍폐의 통문을 배포하자 현감이 이를 체포, 구속.

결과: 현민 수천명이 작당하여 현감을 감금하고 간리를 제거하려 난을 일으켰으나 군에게 진압.


정부의 대응

암행어사 파견, 안핵사선무사 보냈으나 효과가 없었다.

삼정 운영 개선을 위한 삼정이정청(1862. 8.)을 설치하였으나 실패.

민란의 의의: 정부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사회의 모순을 자율적, 적극적으로 변혁시키려 하였다는 점에 서 조선 봉건사회 붕괴의 요인.

동요요인

1. 납속책: 선조 때(15C)에 재정궁핍과 구호대책을 강구하기 위한 재정정책의 하나.

2. 공명첩: 숙종(17C) 이후 시행하던 진휼책. 부유층에게 관직(명예직)을 팔아 돈을 얻던 증서

3. 농업 발달 농민분화, 상공업 발달 계층분화

4. 공노비 혁파

신분변화

1. 양반의 몰락: 세도정치로 잔반 증가

2. 중인의 지위향상: 규장각 검서관, 서민문학가, 동학지도자

노비감소

1. 양란 중 노비문서 소각 도망, 유망, 모속(신분속임)

2. 납속, 속오군, 군공에 의해 양인신분 취득

3. 노비종모법이 현종(1669)때 마련, 영조(1731)때 법제화

4. 영조(노비공감법), 고정(1886) 노비세습 폐지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