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려 사회의 특징

문벌 귀족 사회

개방적 사회

계층 간의 이동 가능

대가족 중심 사회: 귀족에서 양민(평민)까지 대가족 단위로 편성, 성과 본관을 갖기 시작하였으며 평민 도 성을 사용.

 


2. 신분의 기본틀

상류층

귀족: ()왕족왕실 외척5품 이상의 관리. 무반은 천시. 고려 귀족은 개경에 집결.

문벌귀족: 경원 이씨는 문종 때부터 인종 때까지 80년간 왕실의 외척이 되었다. 이 밖에도 경주 김씨 (김부식)해주 최씨(최충)파평 윤씨는 고려의 대표적 문벌귀족 이었다.

호족세력이 중앙관리로

개국공신 계열

신라 6두품 계열이 과거를 거쳐서 정치세력 편입

중인계급이 성장하였다

무신 정변으로 무신이 새로운 집권세력이 되었다.

고려 후기의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

권문세족

 

신진사대부

몰락하지 않은 문벌귀족이 권문세족화

무인세력이 성장한 경우

부원세력(역관, 응방, 환관, 결혼 등)

위화도 회군 이후, 전제 개혁으로 농장을 상실 하고 세력이 약화

등 장

무신 집권기에 약한 영향력 행사 충선왕 때 등장 공민왕이 권문세족에 대항하고자 대거 등용, 주로 과거를 통함

 

 

대지주로서 주로 부재지주

경제기반

지방 중소 지주층(지방향리), 자작농

중앙의 첨의부나 밀직사 고관, 도평의사사 구성원

영 향 력

자기 지방 향촌에서 영향력 행사

문학적 소양 부족

특 징

능문능리, 문학적 소양 갖춤

의존국가

유학, 불교세력과 결탁

학문배경

성리학(신진 지식층)

최영, 이인임 등

대 표 자

정도전, 조준 등

 

중간층

종래의 귀족 중에서 하급 관리가 분리되어 중간층이 형성됨.

유형

서리(잡류): 중앙 관청의 실무 담당.

남반: 궁중의 실무 담당.

향리: 지방 행정의 실무 담당.

군반: 직업 군인으로 하급 장교.

역리: 지방의 역을 관리.

각 지방 호족 출신의 향리는 호장, 부호장(향직의 우두머리)을 배출하는 지방의 실질적 지배층으로 하 위의 향리와는 구별되었다.

특징: 남반, 군반, 잡류, 향리는 세습직. 직역에 상응하는 토지를 국가에서 받았다.

 

양민: 조세와 국역의 의무를 부담하였으며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음.

백정(직역을 부여받지 않아 토지가 없는 농민)과 농민: 백정은 양인의 주류로서 수취 대상임. 백정은 과거 응시가(실제로 불가능) 가능하고 선군제에 의해 신분 변동이 가능.

상인과 수공업자: 농민보다 천시.

특수 행정 구역 거주자

부곡민: 양인의 하층부로서 향부곡민은 농업에 종사하고 관직에 제약, 소민은 수공업에 종사. 고려 후기에는 향, , 부곡민들이 일반 양인의 지위로 승격되었고 조선 초기에는 향, 소 부 곡 폐지.

(육상 교통 종사), (수로 교통 종사), 화척(양수척, 수렵, 도살업), 진척(뱃사공), 재인(광대), 창 기 등도 양인의 하층부에 속하였다.

세금 부담: 양민인 군현민과 구별되는 특수 행정 구역인 향부곡에 거주한 이들 특수 집단은 양민에 비하여 더 많은 세금 부담을 지고 있었다.

거주 제한: 거주 하는 곳도 소속 집단 내로 제한.

신분 변동: 일반 군현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경우 군현을 부곡 등으로 강등시키기도 하였다.

 

천민층

양인과의 혼인이 법적으로 금지. 천교혼일 경우 그 자녀는 일천즉천+종모법 원칙이 적용.

노비가 천인신분의 다수를 차지하여 호적에 등록되어 관리. 원칙적으로 국역의 부담이 없었다.

노비는 군공이 있더라도 관직에 나갈 수는 없었으나, 외거 노비는 축재 양인 관직이 가능하였다.

외거노비는 농경생활을 하여 재산 축적이 가능하였고, 국학 입학은 금지되었다.

형부의 도관에서 노비를 담당하였고 노비는 재산처럼 취급받는 비자유민이었다. 남자는 상고머리, 여 자는 짧은치마를 입었다.

공노비

입역노비

궁중중앙 관청지방관아에서 급료를 받고 잡역에 종사

외거노비

지방에 거주하며 농업에 종사 농경 수입 중 규정된 액수를 관청에 납부

사노비

솔거노비

귀족이나 사원에서 직접 부리는 노비로 주인과 함께 생활

외거노비

주인과 따로 살며 농업에 종사 일정량의 신공을 바침

 




3. 백성들의 삶

농민의 공동의식

향도: 공동체 조직

의미: 불교 신앙의 하나로 위기가 닥쳤을 때를 대비하여 향나무를 바닷가에 묻었다가, 미륵을 만나 구원받고자 하는 염원의 활동을 매향이라고 하며, 이 활동을 하는 무리들을 향도라고 하였다.

유적: 사천 매향비(1387): 향나무를 묻고 세운 것으로서, 내세의 행운과 국태민안 기원.

향도의 역할

신라

석탑, 불상 등을 조성, 법회에서의 대규모 노동력 및 경제력을 제공하는 불교적 신앙활동단체.

고려

전기

불교적 성격을 지는 지방자치단체적 성격으로 군이나 현의 주민이 거의 모두 구성원이 되는 대규모 것.

후기

불교적 성격에서 향촌의 자치공동체적 성격으로 발전. 종교적 축제뿐만 아니라 부조적 기능하는 소모임.

조선

전기

향촌공동체 음사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사신(祠神)행위를 통해 계, 두레 등과 상호 발전을 모색.

후기

두레와 상두군으로 분화발전하여 농업경영에서의 신분제적 강제성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운영되었다.

 

사회 정책

성종의 농민보호책

농번기 때 농민을 잡역동원하는 것 금지.

재해시에 면책법(재해가 4할 이상이면 조를 면제, 6할 이상이면 조포 면제, 7할 이상이면 조역 면제).

이자가 원곡과 같은 액수가 되면 그 이상의 이자를 받지 못함.

권농 정책: 황무지를 개간할 경우 일정 기간 면세, 토지신과 5곡신에게 제사, 왕이 직전을 경작.

 

사회 시설 설치

흑창(태조때 설치한 춘대추납 기구) 의창(성종때 개창한 곡물비축 기관으로 진대법의 발전)

상평창: 성종 12년에 개경서경12목에 설치한 곡식베로 가격을 조절하는 물가안정기구.

국립 의료기관: 정종 때 개경의 동서 대비원과 서경의 대비원 문종 때에 동서 대비원으로 확장

혜민국-가난한 환자들에게 무료로 약 지급

구제도감, 구급도감: 재해에 대비한 임시 관서 제위보

 

법률과 풍습

법체계와 운영: 형법은 당률을 모방한 71조 법률과 보조법률, 일상생활에 관계되는 것은 관습법 중심 으로 운영. 대개의 사건은 지방관이 처결.

형벌의 종류: (볼기 10-50), (곤장 60-100), (징역 1-3)는 지방관이, (유배 2-3천리), (교수형, 참수형)는 중앙에서 집행, 문종 때에는 사형에 대하여 3심제를 도입하였다.

형벌

중죄: 반역죄, 불효죄 등 사람의 기본 도리를 어기는 죄.

형벌 집행 보류: 귀양형을 바은 자가 부모상을 당하였을 때 유형지에 도착하기 전에 7일간의 휴 가를 주어 상을 치를 수 있도록 하였다. 70세 이상의 노부모를 두고 봉양할 가족이 없는 경우 는 형 집행을 보류하기도 하였다.

혼인 풍습

초기: 여자는 18세 전후, 남자는 20세 전후에 결혼. 고려 초에 왕실에서는 근친혼이 성행.

중기 이후: 근친혼의 풍습이 사라지지 않아 사회 문제로 대두. 일부일처제가 일반적.

상장 제례는 국가의 경우 유교적 규범에 따라, 민간에서는 토착 신앙과 융합된 불교의 전통 의식과 도 교 신앙의 풍속을 따랐다.

불교 행사: 연등회(2. 15. 1. 15), 토착+불교 행사 팔관회(개경 11. 15/서경 12. 15 서경 10. 15)

고유 명절: 정월 초하루, 삼짇날, 단오(상류층은 단오에 격구 시행), 유두, 추석

 

고려의 가족제도

주요 가족제도 요약

내용

고려 시대

조선 시대

입증

첩을 두는 문제

일부일처제

처첩제

박유의 상소문

시집살이 여부

시집살이 않는 여성, 처가살이 하는 남성

시집살이 여성, 처가살이 않는 남성

속담의 유래

과부는 친정으로 돌아감

재산토지 상속

자식 균등 상속

토지는 적장자 단독 상속, 후기에 균분

장자 우선 상속

손변의 송사

제사 의무

윤행

장자 우선 제사

관습

호적 기록

자녀의 순서에 따라 기록. 며느리 동거 가능, 사위 동거

아들 먼저 기록

호적

재산 소유

아내, 남편 따로

부계중심의 재산소유

호적

노비 소유

여성 소유는 여성이

부계중심의 재산소유

호적

이혼 문제

자유. 일방적 이혼 통고 없음.

금지. 수절 강요(칠거지악)

고려도경 사료와 아들 선호사상

호적상 남녀우열

양측적 친족 사회

부계 중심 사회

호적

여성 호주

아버지 사망 경우 어머니가 호주

아버지 사망 경우 장남 호주

호적

여성의 지위

사위와 외손자에게까지 음서의 혜택이 있었다.

공을 세운 사람은 부모는 물론 장인과 장모도 함께 수상.




4. 여말의 사회변화

무신 집권기 사회의 동요

관원의 난명종 3년 정중부 세력의 횡포를 제거하고 의종의 복위를 꾀한 동북변방마사 김보당(문신) 의 실패(1173)

교종 승려들의 반항

명종 4년 서경유수 조위총(무신)이 지방군을 이끌고 궐기하였으나 실패(1174)

민란: 무신정권 직후부터 약 30년간 전국 각처에서 민란 발생

석영사의 난(최초의 남도민란)

경주 명학소 망이망소이의 난: 이후 명학소는 충순현으로 승격되고 향부곡의 폐지현상 대두.

전주에서 기두, 죽동 등의 관노(경대승 집권기)

진주에서 공사노비+협천 부곡민

개경에서 최충헌의 사노 만적이 난을 일으킴(신종 1198)

기타 경북 운문(청도)의 사미, 초전(울산)의 효심이 명종 때.

부흥 운동

최광수의 난: 서경에서 고구려 부흥을 표방.

이연년의 난: 담양에서 백제 부흥을 표방.

김사미효심의 난: 이후 운문, 초전에서 신라 부흥을 표방.

무신 정변의 영향

정치 면: 문벌 귀족 사회의 붕괴로 귀족 사회에서 관료 체제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경제 면: 이 시기에 지배층에 의한 대토지 소유는 더욱 늘어났다.

사회 면: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농민과 천민의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사상 면: 무신 정권의 후원으로 조계종이 발달하였다.

문화 면: 유학은 쇠퇴, 패관 문학과 시조 문학은 발달하였다.

 

몽고와의 전쟁과 백성의 시련

원 간섭기 사회풍속의 변화

정치면: 2성이 첨의부로, 6부를 4사로 통합. 일본 정벌을 위하여 개경에 설치하였던 정동행성이 연락기 관으로 존속. 감찰 기관 순마소. 내정 간섭 다루가치.

몽고의 경제적 수탈

인적 수탈: 원은 공려라 하여 고려의 처녀들을 뽑아 갔다. 결혼 도감을 통하여 원으로 끌려갔다.

물적 수탈: , 인삼약재(응방).

친원 세력의 대두: 무신 집권기 이후, 특히 원 간섭기 이후에 역관, 향리, 평민, 부곡민, 노비, 환관 중에 서 전공을 세우거나 몽고 귀족과의 혼인을 통해서 또는 몽고어에 능숙하여 출세하는 사람이 다수. 친 원 세력이 권문세족으로 성장.

풍속의 교류

몽고풍: 변발, 몽고식 복장, 몽고어가 궁중과 지배층을 중심으로 확산.

고려양: 고려의 의복, 그릇, 음식 등이 몽고에 전파.

문화의 교류: 최초의 심양왕인 충선왕은 원나라에 학문 연구소인 만권당을 설치하여 원의 조맹부와 이 제현 등 학자들 등 학문 교류의 기회 마련.

4. 귀족 문화


문학의 발달

고려 시대 한문학의 추이(고려는 한문학이 가장 융성하던 시대)

전기: 독자적이고 자주적인 모습

사회가 귀족화되며 당시송문을 모방하는 보수화.

무신 집권기: 문신들의 좌절감이 낭만적현실 도피적인 수필 형식에 나타남(국순전, 파한집).

최씨 집권기: 정계에 등용된 문신들이 현실을 표현하는데 관심을 기울임.

고려 후기: 신진 사대부들이 경기체가를 창작. 패관문학, 가전체가 유행.

작품명

작가

연대

내용

작품명

작가

연대

내용

국순전

임춘

인종

술을 의인화

죽부인전

이곡

공민왕

대나무 의인화

공방전

임춘

인종

엽전을 의인화

저생전

이첨

고려말

종이 의인화

국선생전

이규보

고종

술과 누룩을 의인화

정시자전

석식영암

고려말

지팡이 의인화

청강사자현부전

이규보

고종

거북을 의인화

   


작품

작가

연대

내용

작품

작가

연대

내용

수이전

박인량

문종

최초의 설화. 삼국유사, 해동고승전에 일부 전함

역옹패설

이제현

충선왕

패관문학의 대표작으로 익제난고마지막 부분에 수록

파한집

이인로

고종

시화, 문담, 경주평양개성의 풍습 소개 자주정신 강조

익제난고

이제현

충선왕

역사책에 나오지 않는 이문, 인물평, 시문 등을 기록한 문집

보한집

최자

고종

야사, 기생 이야기(파한집 보충)

목은집

이색

충숙왕

시문집 55

백운소설

이규보

고종

시화와 문담 수집

동국이상국집

이규보

고종

동명왕편과 상정고금예문의 내용이 실려 있음

포은집

정몽주

공양왕

시문집 4

  

 

장르

작품

지은이

내용

비고

장르

작품

지은이

내용

경기

체가

한림별곡

한림제유

귀족 풍류생활

고종

청산별곡

?

현실도피, 짝사랑 노래

죽계별곡

안축

고향 경치

충숙왕

서경별곡

평양에서의 이별가

관동별곡

안축

관동 경치

충숙왕

쌍화점

남녀상열지사

장가

정과정

정서

충신연주지사

향가계

고려가요

동동

남녀상열지사

처용가

신라 처용가의 발전

사모곡

어머니의 자식 사랑

도이장가

예종

개국공신 추도

가시리

이별가

정석가

왕의 수복을 기원

  

 

작품명

종류

작자

연대

내용

동명왕편

서사시

이규보

명종

자유로운 문장체, 동국이상국집에 실림

 

 

진화

명종

문화적 자신감을 표현

제왕운기

서사시

이승휴

충렬왕

상권에는 중국의 역대를 하권은 우리나라의 역대를 서사시로

동국이상국집

문집

이규보

고종

53권의 문집으로 동명앙편수록

균여전

전기

혁연정

문종

보현십원가 11수 수록

 

 


 

건축과 조각의 변화

고려시대의 건축

주심포 양식

통일신라 시대에 전래, 고려 전기 유행. 맞배지붕이 대부분이면서 장중하고 우아하며 간소함.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음. 󰃚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신라계승), 수덕사 대웅전(모란들국화 벽화)

다포양식

원 간섭기 이후 전래, 조선 전기 유행. 우직각, 팔작지붕이 대부분이고 주심포보다 화려하면서도 장엄. 공포가 기둥 사이에도 있음. 󰃚 석왕사 응진전, 성불사 응진전, 심원사 보광전

궁궐과 사원이 중심이었으나 현전하는 것이 거의 없다. 고려의 건축은 경사진 지대에 층단식으로 지었고, 배흘림 기둥, 처마 끝과 주춧돌의 각도를 30° 내외로 조절하여 태양광선의 흡수가 용이.

  

건축물

전기

궁궐과 사원이 중심이었으나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다

현화사와 흥왕사(흥왕사는 12년에 걸쳐 막대한 인원과 경비로 제작)

개성 만월대의 궁궐 터로는 웅대한 모습을 살필 수 있다

후기

13세기 이후에 지은 건물들은 일부 남아 있다

봉정사 극락전(안동, 최고의 목조건축물, 주심포양식의 엔타시스 기둥)

부석사 무량수전(영주, 고려의 대표적 건축물, 주심포, 신라를 계승한 고려 제일의 작품)

부석사 조사당(영주, 목조건축물로서 벽에 사천왕상, 보살상 벽화)

수덕사 대웅전(예산, 대표적 건축물로 모란, 들국화 벽화)

석왕사 응진전, 석불사 응진전, 심원사 보광전(셋 모두 원의 영향 받은 다포양식)

석 탑

개성 불일사 5층 석탑

흥국사지 석탑: 신라 양식 계승

현화사 7층 석탑, 월정사 89층탑: 평면이 8각이나 6각의 형태(송의 영향)

경천사 10층 석탑: 목조건축양식을 본뜸(원의 영향)

대부분의 석탑: 탑신이 높고 옥개석이 작음, 옥개석만 포개놓은 듯함, 다각다층탑이 다수

부 도

지광국사 현묘탑흥법국사 실상탑공주 갑사부도

구례 연골사지 북부도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 혜진탑

불 상

대형 철불: 광주 춘궁리 철불

대형 석불: 논산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 안동의 이천동 석불 등이 지역 특색을 잘 드러냄

부석사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

주로 석불과 금등불이 주류, 대형 철불 주조도 유행.

조형미는 신라보다 퇴화. 자유 분방함과 향토적 특색의 불상이 다수.

 



공예의 발달

자기의 발달: 고려 자기는 신라와 발해의 기술을 토대로 송의 자기 기술을 받아들여 11세기에 독자적 인 순수청자를 개척.

순수청자

음각청자

상감청자

(원료 산지로 강진부안 유명)

분청사기

(원 북방가마)

순수백자청화백자

철사백자진사백자

 

11C

1213C

15C전후

17C

 

서긍의 고려도경(1123)에서는 고려자기(비색 청자)에 대해 상세 설명하면서도 삼강청자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은입사 기술과 나전 칠기 공예도 발달

범종: 신라 양식을 그대로 계승하였음. 천흥사종, 용주사종, 탑산사종 등이 유명.

귀족문화

유교문화와 불교문화의 융합

지방호족들이 문화의 주역으로 등장

문화의 폭이 확대

공예미술(나전칠기, 고려자기, 불교미술) 발달

지방문화

불교회화

고려청자

금속공예

양류 관음상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소박한 토기

둔마리 고분벽화

청동 은입사 포류 수금무늬 정병

 

 

 

고려

인쇄술

의천에 의해 속장경 조판

고려

화약

최무선이 원상인 이원에게서

은입사

청동제품에 상감

수시력

역법(칠정산내외편)

월정사 89층 석탑

다각다층탑 대표

목화

정천익 재배 의생활에 혁신

대성악(=아악)

궁중 음악

아라비아(사라센) 문화

아라비아 숫자 등 조선 산술발전

도자기

상감기법은 고려 독자적

임제종

공민왕 왕사 보우가 전래

 

송설체

고려후기 유행 조맹부의 서체

경천사지 10층 석탑

라마불교의 영향, 원각사지 탑원형

농상집요

이암이 화북농법 소개

성리학

 

천산대렵도

북화의 영향으로 필치가 뚜렷

석왕사 응진전

다포양식으로 조선 건축에 영향

 

 

 

서체그림음악

서체

초기

구양순체

굳세고 힘찬 글씨체로 최우, 유신, 탄연 등이 유명

왕희지체

홍근, 석혼수

후기

조맹부체

= 송설체, 유려한 글씨체로 이암, 이강 등이 유명

 

그림: 도화원 소속 전문화원과 문인이나 승려의 문인화로 양분. 후기에는 사군자 중심(부전)

이령의 예성강도: 현재 부전

공민왕의 천산대렵도: 원대 북화에서 영향

불화: 혜허의 관음보살도가 대표적 작품

사경화(불경 삽화)의 유행

사찰과 고분의 벽화: 부석사 조사당 벽화의 사천왕상과 보살상이 유명

 

음악: 아악(송에서 수입하여 궁중음악으로 발전), 향악(당악의 영향을 받은 속악), 악기는 송에서 40.

가면극과 산대극: 처용무, 산대극이 널리 유행.

 

 

3. 과학 기술


천문학과 의학의 발달

국자감에서 율학산학서학 등을 교육, 잡과의 실시.

천문학: 사천대(서운관)에서 천문과 역법 담당. 사천대의 관리들이 첨성대에서 관측 업무 수행.

역법: 고려 초에는 신라 때의 선명력()을 사용하였으나, 충선왕 때에는 원의 수시력을 채용. 공민왕 때에는 명의 대통력 사용.

의학

담당 관청: 의료 업무를 맡은 태의감에서 교육 실시, 의과 시행.

약국 개설: 개경에 약국이 개설

중기: 독자적 처방인 향약방이 발전.

후기: 향약구급방(고종 1236)은 질병 처방과 국산 약재 180여종을 소개한 현존 最古의 의학 서적.

 


인쇄술과 제지술의 발달

건국 초부터 개경과 서경에 도서관을 설치하고 서적포에서는 목판 인쇄술을 사용.

금속활자 인쇄: 12C13C초 무렵에 이루어져 다품종 소량인쇄에 적합.

③ 「상정고금예문(인종 1234)를 금속 활자로 찍었다는 내용이 동국이상국집에 전하기만 함. 청주 흥덕 사에서 간행한 직지심체요절(우왕 1377)이 현존 최고의 금속 활자본으로 공인, 프랑스에 보관.

제지술도 발달하여 전국적으로 닥나무의 재배를 장려하고 종이 제조의 전담 관서를 설치.

서적원 설치: 공양왕 때 설치되어 주자와 인쇄 담당.



⑶ 농업기술의 발달과 농업 생산력의 증대

 

권농 정책

광종

황무지 개간의 규정을 마련하여 토지 개간을 장려하였다.

성종

각 지방의 무기를 거둬들이고 이를 농기구로 만들어 보급하였다.

토지의 개간과 간척

고려 중기까지는 묵은 땅, 황무지, 산지 등의 개간이 주로 이루어졌으나, 후기에는 해안 지방의 저습지가 간척되기 시작하였다. 강화도 피난 시기 이후에는 강화도 지방을 중심으로 추진. 서해안 지방의 간척 사업은 조수간만의 차가 적은 시기를 주로 사용.

수리 시설

김제의 벽골제와 밀양의 수산제가 개축, 소규모의 제언(저수지)이 확충되고 해안의 방조제 등이 축조.

이앙법

11, 직파법이 행해지다 고려 말에는 남부 지방 일부에서 이앙법이 보급

윤작법

보리23작의 윤작법이 보급

심경법

소를 이용해서 땅을 깊게 가는 방법

시비법

가축의 배설물을 거름으로 사용, 풀이나 나무를 태운 재를 거름으로 사용

녹비법

콩과 작물을 심은 뒤 갈아엎어 비료로 사용

농상집요

이임이 원에서 수입하여 전파.

목화

공민왕 때 문익점이 전래, 정천익이 재배


 

화약 제조 기술과 조선 기술

화약 제조 기술: 대몽 항쟁기 최무선의 끈질긴 노력으로 원으로부터 화약 제조법을 터득. 고려 정부는 화통도감(우왕 1377)을 설치하고 최무선을 중심으로 화약과 화포를 제작. 최무선과 박위가 화포로 왜구 격퇴.

조선술의 발달

대형 범선: 송과의 해상 무역이 활발해짐에 따라 96척 길이의 대형 범선이 제조.

조운선: 조운 체계의 확립과 함께 등장.

주로 해안 지방의 조창에 배치: 대형 조운선으로 1,000석의 곡물 적재 가능.

주로 한강 유역의 조장에 배치: 소형 조운선으로 200석 정도의 곡물 적재.

13세기 후반: 원의 강요에 따라 일본 원정에 필요한 전함 수백 척을 짧은 기간에 건조.

고려 말: 배에 화포를 설치하여 왜구 격퇴, 또한 배의 구조를 화포 사용에 알맞게 개조하였을 것으 로 추정.

2. 불교와 신앙


불교 장려정책

태조

훈요십조에서 연등회와 팔관회 장려, 이엄경유를 왕사국사로 받들었다.

광종

승과제도 마련, 최초의 왕사에는 탄문, 국사로 혜거를 추대. 귀법사를 화엄종의 본찰로 삼았고, 교선 양자를 각각 통합하려 하였다.

현종

연등회팔관회 부활, 대장경 조판 시작.

문종

흥왕사를 건립. 승려에게 별사전 지급.

숙종

의천(숙종의 아우이자 문종의 4)

 

시기

특징

초기

5(화엄종 중심)9산의 사상적 대립이 계속됨

광종 - 교종은 교종대로, 선종은 선종대로 각각 통합 뒤 다시 전체적 통합에 관심(천태종)

균여 - 귀법사를 화엄종의 본찰로 삼고 분열된 종파를 수습하려 하였다

제관 - 천태사교의

의통 - 중국 천태종 13대 교조

* 건국 직후에는 호족 출신이 권력을 잡으면서 선종의 영향력이 컸으나, 점차 중앙 집권 체제가 강화되면서 체제 옹호적인 교종이 성행.

중기

왕실과 귀족의 지원을 받은 화업종과 법상종이 나란히 융성

법상종의 발달: 유식 사상을 바탕으로 의식에 치중.

화엄종의 융성: 의천은 귀족들의 호화로운 불교 의식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하여 불교 혁신 운동을 전개하였고, 흥왕사의 주지가 되어 이곳을 중심으로 화엄종의 교세를 크게 진작시켰다.

의천흥왕사를 근거로 화엄종 중심의 교종을 통합하려 하였음

숙종의 후원을 받아 국청사를 중심으로 (해동)천태종을 개창.

원종문류, 석원사림, 천태사교의주 저술.

교관겸수 주창: 교종 중심의 교선 융합을 주장.

무신

시대

선종이 발달하고, 문신들의 피난처로의 교종이 무신정권과 충돌하여 탄압받음.

조계종 발달: 보조국사 지눌이 통합(최씨 정권이 정책적으로 후원)

결사(신앙단체)의 유행수선사(순천) 결사(1208): 창립자 지눌이 송광사를 중심으로 독경수행노동에 주력하는 운동을 전개하여 개혁적 승려들과 지방민의 큰 호응을 받음.

백련사(강진) 결사(1204): 요세가 만덕사를 중심으로 전개한 법화 신앙의 천태종 단체. 법화 신앙을 중점으로 기층 사회의 교화에 노력하여 지방민의 지지 받음.

각훈: 화엄종의 대가, 해동고승전 저술, 최우 팔만대장경 조판

원간

섭기

라마불교의 전래

인도 선종의 전래: 인도 승려 지공이 전파

보우에 의한 임제종(중국 선종) 전래, 보우 등이 부패한 교단을 정비하려 하였으나 실패.

폐해

면세, 면역, 군역 기피의 소굴화

농장 소유, 고리대(장생고), 상업활동(양조업)

불교의 미신화, 승려의 비행





불교 종파의 정리(천태종과 조계종)

  

천태종

조계종

고려 전기(숙종)

교종 중심(+) 절충 교관겸수

의천(원효의 화쟁사상을 계승)

지관(생각 중단, 지혜로서 사물 관조)

왕실-귀족, 안정기

중심사찰: 국청사

화엄종으로 교선을 통합

[신편제종교장총록]

정화운동: 백련사(요세) 묘련사 변질

교려 후기

선종중심(+선 통합) 선교겸수

지눌 혜심(유불일치설) 성리학의 토대

정혜쌍수돈오점수

무신, 혼란기

중심사찰: 송광사(순천)

조계종으로 교선을 통합

9산선문 통합

정화운동: 수선사(지눌혜심)

 

대장경의 조판

개념과 특징: 불교 경전을 집대성한, (교리)(규범)(경과 율의 해석)으로 구성된 대장경. 호국 과 현세 구복적인 목적이 있음.

1차 대장경

교장

2차 대장경

1012(현종 2)1087(선종 4)

1096(숙종 2) 인간

1236(고종 23)1251(고종 38)

=초조 대장경

=정장=초판고본대장경

신편제종교장총록(불서목록)

1073(문종 27)1090(선종 7)

=8만 대장경

=재조 대장경

거란대비

현종선종

6,000원글 대구 부인사에

몽고 침입때 소실

교토 남선사에 일부 전함

최근 해인사 비로자나불좌상에서 60점 발굴

의천이 송일본 등에서 수집

광의의 의미에서 1차 대장경

흥왕사 [교장도감] 설치

4,700권 인쇄, 논소초 구성

선종관계의 것은 일절 없음

몽고 3차 침입때 소실

송광사에 일부 전함

몽고 침입시 최우가 강화도 대장도감에서 조판

선원사에 보관

선초 해인사로 이전

국보로서 해인사 장경각에 완성

고려불교의 자기완성

이규보는 대장 각판 군신 기고문을 씀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불국사(석굴암), 종묘, 팔만대장경, 창덕궁, 화성(1997), 고인돌(2000. 11), 경주 고적지구 (2000. 11)

유네스코 지정 기록문화유산: 조선왕조실록(1997), 훈민정음(1997), 승정원일기(2001), 직지심경(2001)

유네스코 지정 무형문화유산: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2001), 판소리(2003)

 

 

 

도교와 풍수지리설의 발달

도교: 불로장생과 현세구복을 추구하는 도교는 국가의 비호를 받으며 숭상

전개: 예종 때 도교 사원인 도관이 처음 건립되었고 여러 곳에서 초제가 성행. 교단을 성립하지는 못하고 민간 신앙으로 전개.

도교 행사: 팔관회(초제+민간신앙+불교), 초제(하늘과 별들에 제사).

풍수지리설

고려 초: 개경서경 명당설이 유포.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의 이론적 근거가 됨.

문종 때: 북진 정책의 퇴조와 함께 한양 명당설이 대두하여 남경으로 승격(남경길지설)

숙종 때: 남경에 궁궐을 지어 왕이 몇 달씩 머물기도 함.

예종 때: 풍수지리설 비록을 집대성한 󰡔해동비록󰡕 편찬(부전). 

1. 유학의 발달과 역사서

유학의 발달(치국의 이념)

초기

(자주적,

주체적)

태조

최언위, 최응, 최지몽 등의 6두품계통 유학자들

광종

과거제도로 유학에 능숙한 관료들이 등용. 문필을 담당하는 문한 기구 정비.

성종

유교정치사상 정립, 교육기관 정비. 최승로의 시무 28.

중기(보수적)

최충(문종)

해동공자. 9재 학당 설립. 훈고학적 유학에 철학적 경향 불어넣음.

김부식(인종)

보수적이면서 현실적인 유학.

후기(위축)

무신 정변 후 문벌 귀족 몰락

말기

성리학



교육 제도


교육 기관의 정비

태조: 건국 후 신라 계통의 학자 등용, 개경 과 서경에 학교 설립

성종

교육 조서의 반포

지방 교육: 향교 설치

문신 월과법 시행. 개경에는 비서성, 서경 에는 수서원 등 도서관 설치

성종이 중앙의 문신들에게 매월 시 3편과 부 1편을, 지방 관리들에게는 1년에 1회씩 글을 지어 바치게 했던 제도.


사학의 발달과 관학 진흥책

관학

중앙 국자감, 지방 향학

사학

최충의 9재학당(문헌공도), 사학 12

관학진흥책

숙종

국자감에 서적포 설치 서적 간행

예종

9재 모방 7재 설치, 국자감을 국학 개칭, 양현고(장학재단), 청연각보문각(도서관+학문 연구소)

인종

개경에 경사 6학 정비, 향교를 중심으로 지방 교육을 강화

충렬왕

양현고의 부실을 보충하기 위한 재단 섬학전 설치, 국학을 성균관 개칭, 공자 사당인 문묘 건립.

공민왕

성균관 부흥



 


⑶ 사서의 편찬


전기

유학의 발달과 더불어 유교적 역사서술체계 확립

7대실록

거란의 침입으로 불타자 현종은 태조목종대의 실록을 새로 간행(부전)

편년통록

고려 의종때 김관의의 저작으로 왕실 권위확보(왕건 가계)와 고려왕조 중흥 기원을 빈 유교적 서술(부전)

기타

편년통재(작자 미상, 부전), 고금록(문종, 박인량, 부전), 속편년통재(예종, 홍관, 부전)

중기

삼국사기

현존하는 한국 최고의 역사서. 여초 구삼국사를 기본으로 한 기전체 사서.

후기

무신난, 대몽항쟁 이후 자주의식을 바탕으로 전통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목적으로 편찬

삼국유사

단군을 민족시조로 내세움

제왕운기

충렬왕 13(1287) 이승휴가 유교적 입장에서 중국(상권), 한국(하권)의 현전 역대 서사시.

상권: 반고, 하권: 단군충렬왕까지의 역대와 사적을 7언 또는 5언시로.

단군을 개국의 국조로, 발해를 국사로 부각하는 역사적 자주성이 있으나 원의 지배와 충렬의 치세를 개발기발무유벽이라고 칭송하는 한계.

해동고승전

고종. 각훈. 왕명에 의해 우리 불교사상을 종교적 입장에서 정리(2권 현전)

동명왕편

이규보가 동명왕을 칭송한 일종의 민족서사시.

말기

정통 의식과 대의명분을 강조하는 성리학적 유교사관이 대두

사략

이제현 저술. 지금은 사략에 실린 사료만 현전. 왕권을 중심으로 국가 질서를 회복의식.



고려 초기

고려 중기

무신집권기

대몽항쟁기

고려 말기

고구려 계승의식

신라 계승의식

고구려 계승의식

고조선 계승의식

유교사관

삼국사기

자주사관

동명왕편」「삼국유사」「제왕운기

성리학적 사관

고려국사」「동국사략

 

 

 

 

 

 

성리학의 수용


기존사상의

한계

불교는 지나치게 관념론()에 흐르고 도교는 양생()에 치우쳐 편파적, 성리학은 양자를 통합한 객관적 관념론의 철학체계이자 진보적 윤리체계임.

수입

고려 충렬왕 때 안향이 최초로 수입

발전

충선왕

백이정, 이제현, 박충좌 염복원명선조맹부와 사귀고 돌아옴

충숙왕

안축, 이곡, 이색 성리학 심화

공민왕

정몽주, 정도전, 이숭인 성리학 연구교육의 본격화

영향

종래의 훈고학적인 유학이 철학적인 유학으로 변화

분열

온건파(후에 사림파)와 급진파(후에 관학파)로 나뉘어 대립

여말선초의

성리학

실천적 기능을 강조, 소학과 주자가례를 권장하고 볼교의 폐단을 비판, 불교를 대체한 새로운 국가 이념으로 부상.

 

4. 조선 후기의 외교


대청 외교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표면상 사대관계였으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생각을 함. 대청 적개심은 상존하는 가운데 북벌정책이 장기간 고수되기도 하였음.

청의 국력이 신장되자 북학론이 힘을 얻고, 청의 요청에 1658년에 나선정벌(1차 변급, 2차 신유장군)을 하기도 하였음.


 

대일 외교


왜란 이후 국교가 단절된 일본은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여 쓰시마 도주를 통해 국교를 재개하려 하였음.

조선은 유정(사명당)을 파견하여 일본과 강화하고 포로 7천명을 데리고 왔음(1607).

기유약조(1609): 국교 회복, 부산포에 왜관 설치(세견선 20, 세사미두 100)하고 조선은 쌀무명인삼 수출. 은을 수입하고 청에 수출.

조선통신사(16091811): 조선의 문화학문기술을 전파하고 막부 정권의 대외적인 인정.

울릉도독도 정책:

조선 후기에 일본 어민들이 울릉도독도를 침범하자 안용복이 쫓아내고 일본에 건너가 조선의 영 토임을 확인.

그래도 계속되자 19세기 말 조선은 초기의 공도정책을 포기하고 김옥균을 제도 개척사로 임명하고 울릉도에 군을 설치하며 이주를 장려.




<독도 관련 기록들>

1. 삼국사기 신라 지증왕 본기, 이사부 열전

신라 지증왕 13(512) 이사부가 울릉도(우산국)를 흡수한 이래 한국의 고유 영토가 되었다.


2. 고려사

독도가 우산국 영역임을 밝히고 있으며, 고려 고종 때 최우가 우산국에 사민 정책을 시도했으나 풍랑으로 실패하 였다.


3. 조선 태종(1417)

섬 주민을 본토로 옮겨 살게 하는 공도 정책 실시로 울릉도와 독도 관리가 소홀해졌다.


4. 세종실록지리지 강원도 울진현 조(1454)

무릉도(울릉도)와 별도로 우산도(독도)의 존재를 형제섬으로 처음 기록하였다.


5. 동국여지승람(1481)신증동국여지승람(1531)

독도(우산도)와 울릉도는 행정 구역상 강원도 울진현에 속한다고 명시하고 신증동국여지승람 팔도총도에서 울릉도와 우산도(독도)를 별개의 두 섬으로 구성되었다고 기록하고 그려 넣고 있다


6. 은주시청합기(1667)

울릉도(당시 일본 호칭 竹島)와 독도(당시 일본 호칭 松島)는 고려 영토이고 일본의 서북쪽 경계는 은기도를 한계 로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7. 1691

도쿠가와 막부 관백(집정관)은 울릉도(및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재확인하고 일본 어부들의 독도 출어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음을 조선 측에 알려줬다.


8. 숙종 19(1693) 안용복

울릉도 부근에서 조업하다 일본 어부의 불법 어로를 발견하고 일본으로 가 조선 영해임을 주장한 바 있는데, 숙종 22(1696) 울릉도에서 조업 중 다시 일본 어부의 불법 어로를 확인하고 스스로 울릉우산양도감세관이라 가칭하고 일본에 다시 건너가 시마네 현 호키주 태수에게 일본 어선의 범경 사실을 항의, 사과받고 돌아왔다.


9. 헌종 15

독도가 유럽에 알려진 것은 1849년 프랑스 포경선 리앙쿠르호에 의해 리앙쿠르암초로 불리면서이다.


10. 메이지 초기

일본인들은 울릉도와 독도로 진출하여 울릉도를 마츠시마 섬, 독도를 다케시마라 불렀다.


11. 1881

울릉도 공도 정책을 지양하고 육지 사람들이 건너가 개발을 시작하면서 독도를 울릉도민의 여름철 어업 기자로 이 용하였다.


12. 대한제국(1900)

울릉도를 울릉군으로 승격시키고 독도의 두 개 섬인 죽도석도를 울릉군에서 관할한다는 내용의 칙령을 관보 1716호에 게재하였다.


13. 일 전쟁 중(일 협정서 이후)

일제는 독도를 1905 2월 한국 몰래 다케시마라는 이름으로 시마네현에 불법 편입시켰다. 을사조약 이후인 1906  4월 비로소 한국에 편입 사실이 알려졌다(울릉 군수 심흥택에게 사실 고지).


14. 광무 10(1906)

독도는 예로부터 우산도, 삼봉도, 가지도, 석도 등으로 불려 왔는데, 오늘날의 명칭인 독도로 처음 쓰인 것은 울릉 군수 심흥택의 울릉군수 보고서에서 本郡所屬獨島라는 기록과 한말 지사 황현의 매천야록에서였다.


15. 1946

연합국 최고 사령부는 지령( 677, 1033)에서 독도를 본래 한국 영토로 확인해 일본의 영토에서 제외하였다. 그 국제법적 효력은 아직도 살아 있다.


16. 1952

연합국은 일본을 재독립시켜 주기로 하고 이에 앞서 1951년 대일본강화조약을 체결하려 하였다연합국은 그 준비 로 1950년 연합국의 구일본 영토 처리에 관한 합의서를 작성하였다이 합의서 제 3항에서 한국에 반환할 영토 는 한반도 본토와 그 주변의 모든 섬인데그 대표적 예로 제주도거문도울릉도와 함께 독도를 리앙쿠르 바위섬 이라는 서양 호칭으로 명기하여 한국에 반환해 한국 영토로 처리됨을 극히 명료하게 밝혔다.  

 

3. 세도정치


몰락하는 왕권


세도정치의 시작: 정조 때 홍국영


순조(18001834) 때의 세도정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 노론 벽파 세력이 집권하여 신유박해를 통해 규장각 인물을 몰아내 고 장용영을 혁파하였으며 훈련도감을 회복시켜 장악.

정순왕후 사후 김조순이 그의 딸을 왕비로 들이고 국사가 되어 정치를 전담, 위시한 안동 김씨가 반남 박씨, 풍양 조씨의 협력으로 요직을 독점.

순조 말년에 효명세자(익종)의 대리청정을 하며 조만영(풍양 조씨)이 그의 딸을 세자비로 들여 안 동 김씨와 세력분쟁.


헌종(18341849) 때의 세도정치

헌종 즉위 후(1834) 순조비 순원왕후(김조순의 딸)이 청정하여 헌종 6년까지 계속.

조인영이 영의정이 되고 순원왕후가 물러난 뒤 왕 8년 친정이 시작되고 정권은 풍양 조씨에에 감.


철종(18491863) 때의 세도정치: 헌종이 후사 없어 철종이 즉위하자 순원왕후가 후견정치. 김문근의 딸로 철종비를 삼아 안동 김씨의 세도.


 

세도정치기의 권력 구조

붕당의정부6조 모두 유명무실. 비변사는 더욱 비대해짐.

권력 구조: 2품 이상의 고위직만이 기능 발휘, 그 아래 관리들은 행정 실무만 전담.

 


세도정치의 악영향

정치기강의 문란: 과거제도 문란, 매관매직 성행, 암행어사의 부정.

수령과 아전의 수탈: 농민과 상공업자가 수탈 대상.

삼정의 문란: 전정군정환곡의 문란이 극에 달함.

1. 전정의 문란

진결: 경작하지 않은 땅이나 황폐한 땅에 징세하는 것

은결: 토지 대장에 기록되지 않은 땅, 신개간지 등에 징세하는 것

백지징세: 공지에 징세하는 것

도결: 사적으로 소비한 공금을 보충하기 위해 정액 이상의 세를 거두는 것

2. 군정의 문란: 인징, 족징, 백골징포, 황구첨정, 강년채, 마감채

3. 환곡의 문란

늑대: 필요 이상의 미곡을 강제로 대여하여 이자를 수취

허류: 창고에는 하나도 없으면서 장부에는 있는 것처럼 꾸미는 것

반작: 출납 관계에 대한 허위 문서를 작성하는 것

반백: 반은 겨를 섞어서 대여하여 이자를 사취하는 것

분석: 미곡에 겨를 섞어서 늘려 대여하고 남는 양을 사취하는 것

탄정: 흉년에 강제로 징수하여 감한 부분을 사취

가분: 저장해야 할 부분을 대여하여 이자를 받는 것


상품 화폐 경제의 성장 둔화: 잉여 생산물의 거의 모두를 빼앗기는 실정에서 상품 화폐 경제도 이 시 기에는 그 성장이 둔화.

민란의 발생: 소청벽서 운동에서 시작하여 민란으로 확대.

왕권의 약화: 세도가의 인사권리와 권력 독점.

지배층의 개혁의지 상실: 세도가와 야합하며 고증학에 치우침.

영조(17241776)의 완론탕평


즉위 초의 사건

즉위 직후 탕평교서를 발표. 소론 과격파를 축출하고 노론을 다시 불러들이는 을사처분을 시행

노론 준론자 축출(1727): 이들이 소론 공격을 일삼자 축출.

이인좌의 난(1728): 소론남인 등의 일부 과격분자들이 영조의 왕위 자체를 부정함.

기유처분(1729): 노론소론 가운데 자신의 탕평책을 따르는 온건파(완론자)들을 고르게 등용함. 이 후 점차 능력 위주로 인사정책을 시행.


즉위 중반의 치적

균역법 시행(1750)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 세 군문이 도성을 나누어 방위하는 체제 갖춤

사형수에 대한 삼심제 시행


노론의 우세: 한때 탕평의 원리에 의하여 노론과 소론이 공존하였으나, 나주 괘서 사건 등 소론 강경파 가 자주 변란을 일으켰으며, 사도 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영조를 지지한 노론이 절대적으로 우세해지고 소론의 정치적 입장이 약화.

3대 유폐

붕당, 사치, 음주를 3가지 유폐로 지정

신문고

태종 때의 항소제도를 부활

속대전(1746)

경국대전의 속전으로서 왕명에 따라 문신 김재로에 의해 편찬.

무원록 재간

법의학서

기로과

왕비대비대왕대비 등이 6, 70세가 되었을 때를 경축하기 위해 60세 이상의 선비를 대상으로 실시한 과거시험

권농정책

노가집성의 대량 보급

노비공감법

노비의 국가에 대한 공역 부담을 경감

탕평책

완론탕평을 시행하는 한편 탕평책을 육성

균역법

균역청을 설치하고 군포를 1필로 경감

동국문헌비고

홍봉한의 한국학 백과사전

속병장도설

무예법을 재정리한 병서

속오례의

국조오례의를 보완한 의례집


 



정조(17761800)의 준론탕평

1. 시파: 영조의 덕이 없음을 비난하고 사도 세자의 죽음은 지나치다는 입장으로 노론의 일부와 불우했던 남인, 소론 계통.

2. 벽파: 사도 세자의 근실하지 못함을 비판하고 사도 세자의 죽음은 당연하다는 입장으로 영조를 지지한 노론 강경 파들이 많았다.


배경: 노론은 영조 때 사도 세자 사건을 계기로 시파와 벽파로 분파.


준론탕평: 편전의 이름을 탕평실이라고 하여 적극적 탕평책을 실시함. 영조 때의 척신과 환관을 제거. 노론과 소론의 일부 세력과 남인 계열이 중용됨.

 

제언절목

제언의 수리와 신축(1778)

주관지

형조의 사례집

규장각

비서실의 기능과 문한 기능, 과거 시험 주관과 문신 교육의 임무를 더 부여

장용영

국왕의 친위부대

신해통공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의 금난전권 철폐(1791)

활자

정리자, 한구자, 생생자(목판) 주조

홍재선서

자서전

일성록

일기

대전통편

경국대전을 원전으로 규장각 제도를 법제화, 이를 통해 서얼발탁.

탁지지

호조의 사례집

문체반정운동

노론 벽파를 견제키 위함

초계문신제

당하간 이하 관리를 재교육에 의해 시험을 거쳐 승진시킴

화성(수원성)

화성 행차시 백성들과의 접촉을 통하여 백성들의 의견을 정치에 반영하고자 함

수령권한강화

수령이 향약을 직접 주관하게 함

동문휘고

조선의 외교 문서집

규장전운

음운서

무예도보통지

병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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