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갑오개혁(1894)



개혁의 배경


일본의 개혁건의

오오토리 공사로 하여금 189465개조의 내정개혁안을 제시하였으나 조선은 노인정회담(1894. 7. 10)에서 개혁 전에 일본군의 철퇴를 요구. 또한 개혁의 내용이 조선의 헌장과 대개가 같고 새로운 사항은 교정청(1894. 6.)에서 개혁을 실시하고 있다는 이유로 조선이 거절하였다.


개혁의 강행(경복궁 침입)

일본은 경복궁 점령(94.6.21) 후 대원군을 입궐시켜 집정토록 하고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여 친일계와 중립계로 정부를 개편.

이른바 1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된다. 여기에는 대원군도 몇 달 정도 같이 하게 된다. 물론 대원군은 실질적 힘은 크지 않았다고 한다.


개혁의 추진

당시 일본은 청과 전쟁 중(94.5~)이라 개혁에 관여할 여유가 없어서 새 정부는 거의 독자적으로 개혁을 추진

신정부는 군국기무처(1894. 7.)라는 회의기구를 설치하고 김홍집을 총재관으로, 또 박정양과 유길준 등 17명의 회의원을 중심으로 5개월 동안 존속하며 208건의 개혁안을 의결.

- 즉 군국기무처는 나름 독자적/자주적인 기관이었다. 일본이 경복궁 점령하고 난리를 피우긴 했지만 그건 그렇게 거대한 군대가 와서 점령한 것도 아니었고, 일본은 사실상 청과의 전쟁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1차 김홍집 내각에서 실시한 1차 갑오개혁은 자주적인 부분이 상당히 많이 있었다.

- 그러나 승기를 잡기 시작한 94년대 후반부터는 간섭을 하기 시작한다.

- 그리고 대체로 "김홍집", "흥선대원군" 이 두 인물만 1차 김홍집 내각의 인물로 알고 있는데, "박정양", "유길준" 역시 중책을 맡았다고 한다. 특히 기출에서 "박정양"을 키워드로 하여 해당 문제가 1차 내각에 관련된 문제인 것을 알아야 했던 것도 있다.




실시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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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 정리>

1) 1차 갑오개혁(94.6~94.11): 1차 김홍집 내각 (feat. 흥선대원군, 박정양, 유길준)

2) 2차 갑오개혁(94.11~95.7): 2차 김홍집/박영효 연립 내각

  - 홍범 14조(94.12)도 2차 개혁 시기에 있음

  - 2차 개혁 이후에 3차 김홍집 내각(95.7~95.9, 친러 by 삼국간섭으로 러시아 대세)

  - 이후 을미사변(95.8)도 있었고, 춘생문사건(95.11)도 있었다.

3) 3차 갑오개혁(95.11~96.2, =을미개혁): 4차 김홍집 내각 (until 아관파천)

- 3차 갑오(을미)개혁의 시작 시기를 95.9로 보는 견해도 있다.

- 3차 갑오개혁을 4차 내각이 했다면, 그럼 3차 김홍집 내각은 무슨 개혁을 실시했나? 2차 개혁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도 있고, 그냥 3차 개혁을 시작했다고 생각해도 되는데, 한편으로는 개혁 측면에서 약간 과도기적인 부분이라서 그냥 간단히 생각하자면 개혁이 없었다고 봐도 큰 문제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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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개혁(1894. 71894. 12)

군국기무처에서 단행한 208건의 개혁으로 중앙정치조직 및 관료제, 신분제, 재정, 화폐개혁. 이른바 갑오개혁.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세를 잡자 조선을 적극적으로 간섭.


2차 개혁(1894. 111895. 5)

대원군이 개혁에 불만을 품고 청군, 동학군과 내통하며 고종을 퇴위시켜 일본세력을 제거하려 하자 이노우에가 공사로 나와 대원군을 제거하고 급진적인 박영효를 입국시켜 김홍집과 연립내각 조직.

- 2차 개혁은 2차 김홍집 내각에서 실시하는데, 2차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이라고 더 많이 부른다.

18941240명의 일인고문관이 입국하여 중추원에서 개혁을 주도, 홍범 14조가 반포(1895. 1)되고 23부제 등 지방제도와 사법제경찰제학제 등이 개혁.

2차 개혁은 일본이 삼국간섭에 의해 세력이 약화되는 과정이어서 조선, 특히 박영효의 주도하에 단행. 박영효가 명성왕후 일파에 의해 제거됨에 따라 개혁은 중단.

- 제거가 사실은 살해를 뜻하는 경우가 많은데, 박영효는 죽은 게 아니라 망명을 갔다. (95.5)

- 박영효 망명 간 후


을미개혁

삼국간섭 후 박영효가 실각하고 온건 개화파와 친러파의 연립 내각인 제3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

명성황후는 친러파와 연결하여 일본의 침략세력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일본 침략자들은 을미사변 (1895. 8)을 일으킴.

을미사변 이후 제3차 개혁이 추진되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의병이 일어났고 아관파천으로 인하여 개혁운동은 중단.

을미개혁은 광의의 갑오개혁에 포함.

구 분

개 혁

내각

내 용

1차 김홍집 내각(1894. 71894. 12)

1차 개혁

친일

대원군 섭정, 군국기무처 중심

2차 김홍집 내각(1894. 121895. 7)

2차 개혁

친일

박영효서광범, 홍범 14, 박영효의 망명으로 개혁 중지

3차 김홍집 내각(1895. 71895. 10)

(3차 개혁?)

친러

삼국간섭 후, 이범진이완용 등

4차 김홍집 내각(1895. 101896. 2)

3차 개혁

친일

을미사변(95.8) 후, 을미개혁 추진

개혁 중단

 

친러

아관파천 후

 


갑오개혁의 내용

정치면

자주국권 선포

개국기원 사용으로 청의 종주권 부인

왕실존칭이 격상되어 주상전하는 대군주폐하, 왕비는 태후, 세자를 태자로 부르도록 하였다. 

중앙정치의 개혁

근대적 내각제로 군주권을 약화시키고 사법군사경찰을 독립

중앙기구를 의정부와 궁내부로 나누고 의정부를 내각이라 하여 총리대신을 두며, 산하 6조에 외무농상을 더한 8아문을 두었다가 7부로 축소. 경찰권을 일원화하여 경무청을 설치하였는데, 박영효가 내무대신에 임명되어 경무청을 두고 경무사, 경무관 등의 관제를 제정(1895. 5).

지방제도의 개혁: 8도를 23부로 소지역주의 채택. 지방관을 행정관으로 역할 축소.

사법제도 개혁: 사법권을 행정권에서 분리. 1심 재판소로 지방재판소개항장재판소, 2심 재판소로 고등재판소순회재판소 설치.

과거제도 폐지 관리임용법 제정

관등이 11품으로 축소. 칙임관(12), 주임관 (36), 판임관(79)으로 구분.

관리의 월봉제, 문무관 차별 철폐

군대의 통합과 일원화, 훈련대 사관 양성소 설립 (군사면의 개혁 소홀로 왕권약화)

경제면

재정의 일원화(탁지아문 관장): 220개 징세서와 9개 관세사 설치.

은본위제: 신식화폐장정을 만들어 일본과 같은 은본위제 채택. 이로 일본화폐 침투, 세금의 금납 제세금의 금납제를 실시하여 화폐 유통을 촉진, 화폐경제에 의한 시장화 촉진. 이에 도량형도 개정통일.

사회면

반상의 신분제 폐지

악습 폐지: 적서차별 철폐, 조혼 엄금(20/16), 과부 재가 자유, 연좌제와 고문제 폐지.

의복제도의 간소화

교육면

고종의 교육입국조서 발표(2차 개혁 때)

근대적 학제(신교육령): 한성사범학교와 영일어를 교육하는 외국어 학교의 관제 공포. 훈련 대사관양성소와 서울에는 소학교 설립.


홍범 14조(94.12)

청국에 아부하는 생각을 끊어버리고 자주독립하는 기초를 세운다.

왕실전법을 제정.

대군주는 정전에 나아가 정사를 보되 친히 명대신에게 물어 재결하고 후빈종척은 간예를 불허.

왕실사무와 국정사무는 분리.

의정부와 각 아문의 직무권한을 명확히 제정.

조세는 법령에 따름.

조세의 과징과 경비 지출은 탁지아문에서 관할.

왕실비용을 솔선절감하여 각 아문과 지방관의 모범이 되도록 한다.

왕실비와 각 관부의 비용은 1년 예산을 정한다.

지방관리의 직권을 제한조절.

청준자제를 널리 파견하여 외국의 학술과 기예를 전습.

장관을 교육, 징병법 제정.

민법과 형법을 엄명하게 제정하여 남용치 못하게 하고 생명과 재산을 보전한다.

선비를 구하되 두루 조야에 미쳐 인재 등용의 길을 넓힌다.



⑷ 1차 갑오개혁의 의의

조선 근대화의 출발점

을미개혁은 변법개화파가 추진하던 노선을 확대 발전시킨 것으로, 제도상으로는 서양식 근대국가에 근접하였으나 국방의회토지에 대한 배려가 거의 없고, 일본의 조종을 받는 내각에 실권을 전부 주 었음.

갑오개혁은 대원군을 최초로 국민들에게서도 반발을 일으킴.

 


을미개혁과 의병운동의 발발


삼국간섭과 친러파의 대두(3차 김홍집 내각)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

조선이 자주 독립국임을 확인. 청은 일본에 남만 철도, 요동반도, 대만, 팽호도 할양.

청은 일본에 배상금 2억량 지불.

청국내의 일본군은 3개월 내에 철병하되 위해위의 일본군은 배상금 지불시까지 주둔.

++독은 요동반도를 다시 청에 반환하도록 삼국간섭 행사(1895. 4): 일본의 위신이 추락하여 조선에 대한 압력 감소, 친러내각 구성.

삼국 간섭 후 정부는 배일친러로 경도. 친러파를 키우고 있던 베베르는 박영효가 폐비음모 사건으로 축출되자(1895. 7), 이완용이윤용이범진을 앞세워3차 김홍집 내각을 구성. 개혁은 중단.


을미사변과 을미개혁

조선정부가 친러로 기울자 일본은 친일파와 공모하여 대궐에 침입, 이경직홍계훈을 살해, 명성황 후마저 시해.

친일파 제4차 김홍집 내각(김홍집서광범어윤중유길준)을 조직하고 개혁을 재개.

을미개혁의 내용

훈련대 폐지하고 중앙에 친위대, 지방에 진위대 설치.

단발령 공포와 전국에 광제원을 세우고 종두법 사용.

일세일원의 연호로 1896년부터 건양사용.

189611일부터 태양력 사용.

개성, 수원, 충주, 안동, 대구, 동래 등지에 우체사 설치.

소학교령을 제정공포하여 서울 시내에 관립소학교들 설치.

 

갑오을미 개혁의 성격: 일본의 침략 의도가 반영된(타율적) 것이지만, 전통 질서를 타파하는 근대적 개혁이었고, 조선의 개화 인사들과 농민층의 개혁 의지가 일부 반영된, 민족 내부에서 일어난 근대화의 (긍정적) 노력이기도 하였다.

. 동학농민혁명과 갑오개혁


1. 동학농민운동(1894)


동학교세의 확장

최제우: 1860년 창도, 1864년 최제우 처형.

최시형: 2대 교주로 각지에 포와 접 설치. 동경대전용담유사로 포교. - 이 두 책도 최제우가 다 지어놓은 거였다.

 


교조신원운동

삼례집회: 189211월 전라도 삼례에서 교조 신원과 탐관오리의 숙청을 충청전라감사에게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함.

2차 신원: 18933월 박광호손병희 등이 서울 궁궐에서 교조신원 복합상소를 하고 외국인 철수 요구, 실패.

보은집회(3차 신원): 

1893. 3. 114. 2. 척외양창의를 구호로 정치운동을 벌임

정부는 탐학한 향리를 징벌하겠다며 어윤중을 선무사로 파견.

한편으로 홍계훈으로 하여금 600명의 관군을 출동시켜 진압.

금구집회

보은집회 시기에 전라도 금구에서 1만여명의 농민이 참가

전봉준서장옥황하일 등이 보 은집회와 결합하여 서울로 쳐들어가려 하였으나 집회는 무산되고 동학 상층부의 반대로 해산.

 


동학농민운동의 전개


1- 고부민란의 시기

원인 고부군소 조병갑이 만석보의 수세를 강제 징수하고 1천냥을 사취.

전봉준과 농민군 지도자들은 사발통문을 돌리며 1894110일 봉기. 고부접주 전봉준은 관아를 습격하며 군수를 내쫓고, 아전들을 징벌한 뒤 곡식을 농민들에게 분배하고 보를 허물음.

몇 개조의 요구사항을 제시하며 10여일 만에 해산(1894. 2). 1차 농민전쟁의 도화선이 됨.


2- 황토현 전투(남접)의 승리(절정기)

원인: 정부는 조병갑을 징죄하고 안핵사 이용태를 파견하였으나 그는 탄압에 급급. 대장 전봉준과 총사령관 손화중, 김개남, 총참모 오지영 하에 창의문을 선포.

주장: 탐관오리 제거, 조세 수탈의 사정 등을 주장. 특히 균전사 폐지를 강력히 요구.

1890년에 왕실이 전라도 서북부 11개 고을의 개간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파견한 관리.

경과: 농민군은 고부와 태인에서 봉기하여 백산에 진을 옮겨 호남창의대장소를 조직하고 격문과 4 대 강령 발표. 이후 황토현에서 관군을 물리치면서 남하.

<4대 강령>

사람을 죽이지 말고 가축을 잡아 먹지 마라.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라.

왜놈을 몰아내어 없애고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는다.

서울로 들어가 권세가와 귀족을 모두 없앤다.

결과 : 정읍고창함평에서도 승리하고, 양호초토사 홍계훈 병력 800여명을 장성에서 패배시킨 후 전주를 점령.




3- 집강소 설치 및 자치시기

집강소의 설치

정부와 전주 화약을 맺고 촌촌설포

새로 부임한 전라감사 김학진과의 합의에 따라 전라도 53개 군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폐정 혁역안(=폐정개혁안)을 실천.

집강소의 조직: 한 사람의 집강과, 몇 명의 임원. 전주에는 대도소 설치. 도소가 있는 곳은 도소가 집강소를 대신.

민보단: 봉건유생층(지주, 부호, 양반 등)이 각지에서 농민군을 체포하여 화적 혐의로 처형.

정부의 대응

전주 화약에도 불구하고 청에 파병 요청

청이 파병되자 일본도 천진조약을 구실로 파병하여 갑오개혁도 후퇴하고 청일 전쟁 발발

관민상화와 집강소체제는 좌절.

<폐정개혁안> - 나중에 갑오개혁 때(그 중에서도 1차개혁 때) 많이 반영 된다.

동학도는 정부와의 원한을 씻고 서정에 협력

탐관오리는 엄징.

횡포한 부호는 엄징.

불량한 유림과 양반 징벌.

노비문서 소각: 갑오 1차 때 반영

- 1차 때 노비제도 "공식"적 소멸

- 물론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좀 남았을 것이다.

7종의 천인차별 개선, 백정의 평량갓을 없앤다.

청상과부의 개가 허용.

무명의 잡세를 일체 폐지.

관리 채용에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

공사채를 물론하고 기왕의 것은 무효로.

왜와 통하는 자는 엄징.

토지는 평균하여 분작

- 참고: 토지에 관하여 "평균분작"이라는 말은 한국사 통틀어서 여기밖에 안 나온다. 만약 다른 시기의 토지제도에서 이 말 하면 그건 틀린 보기이다.


2차 동학농민전쟁(남접+북접), 공주우금치 전투

원인

갑오정권의 개혁 지진, 일본군관군의 탄압, 봉건유생의 반격

일본의 내정간섭과 왕궁 점령에 농민군은 189410월 척왜를 구호로 재기.

경과

손병희는 최시형의 승인 하에 10만여 명의 충청 농민군(북접)을 이끌고 청산에 집결하여 논산에서 합류

서울로 북상하다 공주 남쪽의 우금치에서 관군일본군과 1주일간 50여회 격전

첫 전투인 목천 세성산 전투에서 패배, 이인 전투에서 승리, 우금치에서 많은 희생을 내고 후퇴

농민 군의 전면적 후퇴와 함께 무자비한 살육 시작

양반토호의 민보군수성군도 공격하여 3040만 의 민중이 학살.

결과

전봉준은 변절한 부하의 밀고로 순창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일본공사의 재판을 받고 사형(1895. 4.).

나머지 지도자들도 체포 혹은 살해.

 

동학운동의 성격

철학적으로 주기론에 근접, 종교적으로 샤머니즘 중시

도교에 가까워 조선왕조를 부정하고 양반사회를 반대하는 사회개혁 사상

인내천 사상(한울님 사상), 천인합일, 운수, 말세, 후천개벽 사상 보유.

 

동학운동의 영향

갑오개혁에 영향

구국 의병 투쟁의 활성화: 농민군의 잔여 세력이 영학당, 활빈당을 조직.

 

동학운동의 의의

일부의 유생, 관리, 군인까지 참여.

조선의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고 항일의병운동의 단초를 열었음.

중국의 태평천국 혁명, 인도의 세포이 투쟁과 함께 19세기 아시아 3대 농민전쟁의 하나로 평가.

 

4. 열강의 침략


국내의 청일 상권 침략


청의 간섭과 경제적 침투

 위안스카이의 간섭

원세개(=위안스카이)는 주차관 명목으로 서울에 남아 간섭.

그의 비호아래 청 상인들이 전국적으로 상리를 취하여 국내/일본 상인에게 타격. 서울에 중국인가 형성.

수륙무역장정 체결 이후 일본에서의 수입은 점차 후퇴, 청국 수입이 점차 증가.

청국은 일본과 달리 영국상해조선으로 직수출 하였고, 일본의 상품에 조악품이 많았음.

조선은 쌀, 인삼 등을 수출하고, 영국제 면제품 수입.


일본의 경제적 침투

임오군란, 갑신정변으로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되자 경제적 침략을 강화하여 조선을 상품시장 및 원료공급지화 정책을 사용.

1890년대 초 조선의 전 수입액의 50% 이상, 수출의 90% 이상이 일본. 농촌경제 파탄. 고리대금.

조선은 쌀, , , 생사, 피혁 등을 수출하고 면제품, , 농구, 석유, 소금, 성냥, 자기 술 등 수입.

일 어로협정(1889)으로 국내 어민의 피해가 크자 제주도에서는 1891년 일본 어민의 출어금지 를 요구하는 민란 발생.


조선 정부의 대응

ㄱ. 조선의 대응

조미수호통상조약(1882), 조일통상장정(1883)에서는 어느 정도 관세 자주권과 수출 금지권 획득.

정부의 상회사 설립: 1880년대 초평양의 대동상회, 서울의 장통상회 등 30여 개 회사가 영업권과 징세권을 위임.

혜상공국(1883): 영세상인인 보부상 보호책.

관영 운송회사: 기선회사(1884), 이운사(1892) 등에 세곡운반 전담

방곡령: 함경도에서 1889년 감사 조병식에 의해, 황해도에서 1890년 감사 조병철에 의해 내려짐. 일본은 조일통상장정 제 37조 위배를 트집잡아 조선은 10만엔 손해배상.

기타: 서울 시전상인들의 황국중앙총상회(1898), 경강상인들의 증기선 도입 등.

ㄴ. 대응했으나 대세를 뒤집긴 어려웠음.

청일전쟁(94.6~95.4) 이후 일본이 조선의 경제권 독식. 아관파천 전후(96) 열강(특히 러시아)의 이권침탈이 극심.



 

러시아 세력의 진출

정부의 친러화: 인아거청 정책

갑신정변 이후 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의 우호를 강화하고자 하였으나 미국이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자 러시아와의 교섭을 적극 추진.

러 통상조약(1884, 김병시-베베르): 베베르가 반청 경향을 보이던 조선 정부에 접근하여 중재 없이 체결.

러 비밀 협정 추진(1886, 명성황후-베베르): 3국의 분쟁 시 러시아 함대가 출동한다는 내용의 밀약을 체결하려 하였으나 청의 압력으로 폐기.

청의 대응

대원군 귀국조치, 비밀협정설에 트집.

묄렌도르프 대신 미국인 데니를 외교고문으로 추천(1886), 조선 사무를 청의 해관에 예속 조치. 데 니도 러시아와의 연결을 주장하며 청국의 고종 폐위 음모를 고발하고 청의 속방론 비판.

러 육로통상장정(1888, 조병식-베베르)

경흥이 대러무역을 위해 개방되고 조차지도 허용. 러시아인의 두만강 항해도 허용.

러시아는 원산과 절영도에 저탄소를 설치하려 하였으나 청의 간섭으로 실패.

 


영국의 진출 - 거문도 사건(18851887)

영국이 청의 양해하에 고종 22(1885) 함대를 파견하여 전라도의 거문도(해밀톤항) 불법 점령.

러시아는 조선정부를 통하여 항의하고 청에 대해서도 조선 영토를 점령하겠다 위협.

청이 개입하여 2년 동안 교섭 후에 영국 함대는 철수.

 


중립론

정부는 박정양을 주미전권공사로 미국에 파견(1887)하여 접근을 꾀함.

독일 영사 부들러가 조선의을 영세국외중립국화 운동을 정부에 건의, 묵살.

유길준의 중립론(1885), 묵살.

● 유길준의 업적

정치적으로 법치주의적 민주주의, 경제적으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목표로 하고 군민 공치가 적절하다 함.

한성순보에 발표한 회사설에서는 근대적 상업체제로의 전환을 강조.

㉢ 「서유견문은 그 나라에 알맞은 독자적인 개화의 길을 주장.

사회진화론처음으로 소개(양계초 음빙실문집)

거문도 사건 직후 중립론자. 김옥균도 중립론 주장.

㉥ 「조선문전(1895)저술 ⇨ 「대한문전(1909)재저술. 국한문혼용체.


3. 위정척사운동과 개화파보수파의 갈등



위정척사운동의 전개

위정척사운동의 경향: 서양 일본. 주리론에 바탕, 이항로 계열 유생들이 주도.

시 기

배 경

특 징

1860년대

통상반대운동

이항로, 기정진 등 척화주전론

1870년대

개항반대운동

최익현 개항5불가소

1880년대

개화반대운동

이만손 영남만인소, 홍재학 만언척사소

1890년대

항일의병운동

유인석 문석봉

위정척사운동의 전개

이항로 동부승지를 사직하고 겸하여 소회를 진언한 소: 서울 근교의 노론 산림학자 이항로는 상소를 올림. 고종 4(1867)에 편찬된 그의 언행록 화서아언속에서도 같은 사상을 밝힘. ‘존체 통개언로선무비용덕인의 구체적 대응책을 제시. 기정진도 같은 내용의 척사론 주장.

최익현 오불가소: 이항로의 제자인 유학자 최익현은 도끼를 들고 대궐문 앞에서 상소하다 구속. 최익현은 풀려났으나 1905년 을사조약으로 태인에서 의병 등을 일으켰다가 순창에서 관군과 접하여 체포되고 대마도로 유배, 단식 투쟁 끝에 순절(1906).

이만손 영남만인소: 1881조선책략의 유포로 위정척사 운동이 비등. 이만손은 조선책략의 내용을 비난하고 김홍집의 처벌을 요구. 홍재학의 상소도 이와 유사. 이만손은 강진 유배, 홍재학은 능지처참 당함.

위정척사운동의 의의와 역기능

의의: 내수외양 정신의 표현

역기능: 전근대 체제를 유지시키려는 데 목적, 역사의 발전을 가로막는 기능.

 


임오군란(=도봉소 사건, 1882. 6)


배경

개화파와 수구파가 대립: 대원군은 정권을 되찾기 위하여 고종 19(1881) 서장자 이재선을 국왕으로 추대하고 고종을 폐위하며 일본 공사관을 습격, 개화론자를 제거하려 하였음.

구식 군대의 차별 대우: 민씨 정권이 별기군을 우대하고 구식 군대를 차별 대우하는 불만에서 폭발(1882).


경과

13개월이나 급료가 밀린 구식 군대가 선혜청 고리의 사리에 분개하여 관리와 싸움

선혜청 당상 이자 병조판서인 민겸호가 주동자를 잡아 사형을 언도하자 군졸들이 민겸호의 집을 습격하였고 그는 도망

대원군은 군졸들을 배후 지휘하여 포도청과 경기감영 습격, 별기군 일본인 훈련장교 살인, 일본 공사관 방화

일본공사 하나부사는 도주. 다음 날 민겸호와 이최응을 죽이고, 명성황후는 충주로 도주

재집권한 대원군은 2영과 별기군을 폐하고 5군영을 부활, 통리기무아문 폐지.

그러나 대원군의 재집권은 오래 가지는 못했다.


결과


일본의 대응: 거류민보호를 구실로 하나부사 공사에게 군함 4척과 육군 1개 대대 파견.

20일 이내에 군란책임자 처벌, 그 기일 안에 체포하지 못할 때에는 일본국이 처리.

5만 원을 내어 피해를 입은 일본 관리들의 유족 및 부상자에게 지급.

일본이 받은 피해 및 공사를 호위하는 육해군의 경비 중에서 10만원씩을 5년동안 조선이 지급.

공사관에 경비병 주둔시키고 비용은 조선이 부담.

기타 조선 사죄사 파견, 일본 상인의 여행범위 확대 등

제물포조약(1882, 이유원-하나부사) 체결


청의 대응: 김윤식, 어윤중의 요청으로 속국 보호 명분으로 3천여 군대를 파견하여 조선 군민 살상, 대원군 납치. 명성황후 일파가 재집권하여 청에 사대정책.

청은 오장경, 원새개, 마건상, 묄렌도르프 고문을 보내어 내정간섭

통리외무아문(외아문-후에 통 리교섭통상사무아문)과 통리내무아문(내아문-후에 통리군국기무아문) 설치

묄렌도르프와 마건상을 외교고문으로, 하아트를 세관고문으로 파견. 상무감독관 진수당 파견

원세개가 조선군대를 청나라식으로 훈련. 상민수륙무역장정(1882) 체결.

 



(3) 갑신정변(1884)


개화당의 활동

1882년 박영효가 임오군란 뒤처리로 일본에 간 뒤에 개화당의 활동이 활발화.

개화당의 건의로 일본 유학생 50명 파건, 김옥균 기화근사, 박영교 지구도경보급. 박문국, 전환국, 기기국, 우정국 등 설치.

김옥균은 유대치, 박규수 등의 지원 하에 세력을 넓히고 충의계라는 비밀조직 결성(1878)

한계성: 그러나 일본의 태도가 냉담하여 개화 운동을 위한 차관 도입에 실패. 친청 민씨 일파의 견제.


배경

친청 세력의 개화당 탄압: 신변에 위혐을 느낀 개화당 요인들은 비상 수단을 도모.

개화당과 집권세력 사이의 대립: 정부는 묄렌도르프의 건의로 당오전을 발행하려 하였지만 김옥균은 일본 차관을 제안. 고종은 병행하기로 하였으나 차관도입 실패.

조선 주둔 청군의 철수: 청이 베트남 문제로 프랑스와 전쟁 상태로 들어가(1884) 조선 주둔 청군의 일부가 철수하자 개화당은 정변의 기회로 삼음.

일본 공사의 지원 약속: 개화당은 미국 공사관의 지원을 얻는 데에는 실패했으나, 일본 공사의 지원을 약속받음. - 그러나 실제로는 지원 안 함

청의 내정 간섭과 개화 정책의 후퇴: 이에 대한 반발로 급진 개화파들은 갑신정변을 일으킴.


경과: 갑신정변 14개조 요강

내 용

분 석

청에 잡혀간 대원군을 돌아오게 하고, 청에 대해 행하 던 사대허례 폐지.

자주독립의 역설, 대원군 송환, 청에 대한 사대 관계 폐지

 

문벌 폐지 사민평등 확립.

 

조세제도(지조법) 개혁, 관리부정 방지.

 

내시부(환관) 폐지, 인재등용

 

탐관오리 처벌

 

상환미를 영구히 받지 않음

환곡제 폐지

규장각 폐지

구조 조정

경찰제도 정비

 

혜상공국(보부상들로 조직된 행상인 관청) 폐지

특권적 상업 체제 폐지

투옥유배자 감형

 

4영을 1영으로 할 것

 

모든 제정은 호조에 통할

 

정부, 6조 외에 불필요한 기관 폐지.

 

대신과 참찬은 매일 합문 내의 의정소에 모여 정령을 의결반포(입헌군주제 요소)

 

개화당은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켜 14개조의 개혁요강 발표.

청국 군사가 창덕궁을 포위하여 일본과 전투 후 왕을 구출. 일본공사관 피격, 홍영식박영교는 피살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공사 다케소에는 일본 망명(삼일천하).

 


결과

조선은 예조참판을 일본에 보내 개입에 항의하고 망명자의 송환을 요구.

일본은 공사관 전소와 거류민 희생을 이유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고 7척의 군함과 군대를 인천 파견.

한성조약(김홍집-이토 히로부미)

조선은 국서로 일본의 변란에 사의 표명.

일본 거류민 피해자에 위로금 11만원(12만엔).

이소바야시 대위 살해자를 잡아 처단.

일본 공사관 신축지 및 신축비 2만원 지불.

일본군 영사로 공관부 대지 택정.

천진조약(이토 히로부미-공사 파아크스-이홍장)

청일 양국은 조선으로부터 4개월 이내 공동철병.

청일 양국군은 조선에 군사교관을 파견하지 않음.

조선에 변란이 일어나 양국 중 어느 한 나라가 군 대 파견의 필요가 있을 때에는 사전통고

 

한성조약(1884)과 천진조약(1885) 체결.

- 한성조약은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의 조약이다.

- 천진조약(텐진조약)은 일본과 청 사이의 조약이다.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은 18943월 상해에서 홍종우에게 사살되고 양화진에서 능지처참.


의의: 인민평등의 이상만을 내걸고 국가의 주권수호와 위기관리, 국민 정서를 거의 외면한 위로부터의 개혁.

 

. 근대화의 시련과 민족운동


1. 근대사회로의 정치적 변화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


흥선대원군의 집권: 철종 서거 후 대원군의 생부인 이하응(흥선대원군)이 고종을 섭정(16731873).

개혁의 방향

개혁의 내용

전제왕권강화

인재등용

안동 김씨 세력을 누르고 사색을 고르게 등용

통치기구 정비

의정부와 삼군부(신영남영마병소)가 부활하여 정치와 군사 분리

법전 완비

고종 2년 조두순, 이유원에 의해 대전회통 편찬.

보조법전인 대전조례 편찬. 육전조례 편찬.

서원 정리(1871)

47개소만 남기고 정리

- 참고로 흥선대원군 하야 후 여럿 부활(만동묘 포함)

위민사회개혁

전정

은결 적발, 토지겸병 금지, 부분적 양전실시

군정, 동포제

군포를 양반에게까지 확대하는 동포제(호포제) 실시 하여 양반의 원성을 삼

환곡, 사창제

환곡제를 사창제로 개혁하였으나 성과는 없었음

경복궁 중건

(재정실책)

영건도감을 중건하고 원납전을 강제징수.

당백전(종래돈의 100) 발행. 통행세 징수, 결두전(1결당 100) 부과

양반들의 묘지림 벌목, 백성들의 토목공사 동원.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 ‘폐정쇄신봉건적 개혁

개혁 정치의 의의: 전통적인 통치 체제를 재정비하여 국가 기강을 바로 잡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데 어느 정도 기여.

한계: 전통 체제 안의 개혁이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배경(서세동점)과 이양선 출몰

영국은 아편전쟁을 일으켜 청은 최초의 문호개방인 난징조약(1842)을 체결. 미국은 일본을 위협하여 미일 화친조약 체결.

이양선

최초로 영국 상선 로드 암허스트호가 통상 요구(1832). 

프랑스 세실의 통상요구 거절(1846). 러시아(1845), 독일(1866), 미국 셔먼호(1866)이 통상 요구.

천주교 확산과 서양 상품의 유입: 대원군 집권 이전부터 프랑스 선교사가 국내에 잡입, 선교 활동을 하여 신자가 점차 늘어났고, 의주, 동래 등지를 통하여 서양 상품이 불법 유입되고 있었음.


국내의 반응: 애로우호 사건(1858)과 베이징 조약(1860) 체결 등이 위기의식을 조성하여 동학, 위정척사, 개화사상의 대두.




쇄국정책의 강행: 병제병오신척

병인박해(66.1) - 제너럴셔먼호(66.8) - 병인양요(66.9) - 오페르트도굴사건(68) - 신미양요(71) - 척화비(71~72)

병인양요(고종 31866)

원인: 대원군은 처음에는 천주교에 관대. (철종 이후 이미 베르누, 리델 등 프랑스 선교사가 활동) 연해주를 차지한 러시아가 경흥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자(1864) 대원군은 신도 남종삼의 건의에 따라 프랑스 신부를 이용하여 견제하려 하였으나 거절.

경과: 청국에서 탄압하자 대원군도 탄압. 벽파 조두순의 배외정책 압력과 천주교의 만연이 조선 유교사회를 말살시킨다 하여 고종 3년에 남종삼, 정의배 등 신도 8천여명과 프랑스 신부 9명 사형. 탄압을 계속한 병인사옥(=병인박해, 66.1) 발생.

결과: 탈출한 리델 신부가 프랑스 극동함대의 로즈 제독에게 사실 보고. 프랑스 정부는 신부의 처 형을 구실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고자 극동함대 7, 1천 군사를 끌고 강화도 점령. 대원군은 훈 련대장 이경하 휘하에 순무영을 설치하여 대응, 이항로 등의 척사론자 등과 한성근 문수산성, 양 헌수 정족산성 전투로 승리. 프랑스군은 40여 일만에 물러나며 약탈과 방화 자행.


오페르트 사건(1868): 고종 32차에 걸친 통상요구를 거절당한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프랑스 신 부 페론과 함께 충청도 아산만에 상륙하여 관청을 습격하고 남연군의 무덤을 도굴하려다 실패. 유 생들은 존화 양이론 주장, 대원군은 쇄국 의지 강화.


신미양요(1871)

원인: 병인양요 이전에 미국 상선 제네럴 셔먼호가 대동강에서 통상을 요구하다 평양군민과 충돌하여 선원과 배가 소실.

경과: 미 대통령 그란트의 명을 받은 베이징 주재 미국 공사 로오는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 에게 조선 정벌을 명하여 5척의 군함과 1,200명 군대를 보내 강화도를 공격. 미국은 초지진을 함락하고 광성진 포대까지 점령.

결과: 어재연이 이끄는 경군과 강화 수비군이 광성진과 갑곶에서 대항하여 20일 만에 물리치고 어재연은 전사.



쇄국정책의 강화

대원군은 척사교서를 반포. 주요 지역에 척화비 건립(1871). 해국도지의 영향으로 전함 수뢰포 완성.

하지만 대원군 하야 후 척화비는 상당수 철거되게 된다.



2. 문호 개방


개항의 배경

흥선 대원군의 하야: 고종이 성인이 되고 서원 철폐에 대한 지방 유림의 반발과 왕후 및 개화파의 통 상개화론에 밀려, 대원군이 1873년에 물러남.

통상 개화론의 성장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등이 당시의 조선 사회는 개방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지만 개방이 불가피 하다고 주장. 역관이었던 오경석은 해국도지, 영환지략등 개화 서적을 접하기도 하고, 승려 이동인을 비롯하여 중인과 상민 계층에서도 개화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출현.

고종과 노론 북학을 계승한 통상 지지파인 명성황후 일족(민태호, 민영목 등)이 집권.

고종과 개화추진세력의 입장: 전면적인 서양화는 아닌 동도서기론.

급진 개화파: 북학을 계승한 대외통상 개화론자들(김옥균, 김홍집, 홍영식, 서광범 등)은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하는 입헌군주제 혹은 서양식 공화정 추진. 변법개화사상으로 발전하고 사회진화론과 연결되 어 공리주의로 나아감.

1. 역사지리서: 해국도지(위원), 영환지략(세계여), 지구전요(최한기), 보법전기(왕도), 서유견문(유길준)

2. 정치법률서: 조선책략(황쭌셴), 만국공법」․「이언(정관응)

3. 자연 과학 서적: 격물입문(Martin), 박물신편(Hobson)

 


일본과의 관계와 조약 체결

일본 국내의 입장: 18세기 이후 국학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854년 미국에게 개항당한 일본은 메이지 유신의 신정부 수립을 알리며 조선과 다시 수교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함. 일본에서 정한론이 대두하였으나 온건파의 반대로 후퇴. 조선은 일본과 외교 단절.

정한론이 보류되자 집권당은 18744월 대만을 침공하였으나 청국의 반대로 배상금을 받고 물러나 조선으로 주의 집중.

병자수호조약(강화도 조약)과 개항

운요호 사건: 18754월 일본 군함 3(춘일호, 운요호, 제이정묘호)이 부산에 출현. 8월 운요호는 강화도에 접근하여 조선 측의 발포를 유도하였고, 조선의 공격에 즉각 반격하며 영종도에 상륙하여 약탈과 살육 감행.

강화도조약 체결(1876): 일본의 요구에 조선정부는 박규수, 신헌의 의견을 들어 조선 대표 신헌과 일본대표 구로다 사이에 전문 12개조의 불평등 통상수호조약 체결.

내 용

의 미

조선은 자주국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

청의 종주권 부인 의미, 일본의 침략 의도

15개월 후에 양국은 서로 사신을 파견.

김기수, 김홍집을 수신사로 파견

개항장에서 일본상인의 무역과 조계 설정 등.

 

20개월 이내에 부산과 그 밖의 두 항구 개항.

부산(경제적), 원산(군사적), 인천(정치적) 개항

일본은 조선연안을 자유로이 측량할 수 있다.

주요 군사 기지를 점령하기 위한 것으로 주권 침해

양국의 민간무역활동에서 관리의 불간섭.

 

일본은 조선이 지정한 항구에 영사 파견.

 

치외법권 인정

가장 독소적

조일수호조규부록

조선 내에서 일본외교관의 여행자유

개항장에서 일본거류민의 거주지역(통행거리 사방 10)

일본화폐의 유통허용 등

조일통상장정(=조일무역규칙) 잠정적 통상협정

일본의 수출입품에 비과세

양곡의 무제한 유출 등

(천재지변시 사전 통고후 수출 금지 가능)

강화도 조약에 따른 조일수호조규부록(1876)과 조일통상장정(1876. 7.)

개정된 조일통상장정(1883, 민영목-죽첨진일랑): 수출입 상품에 대한 관세, 조일통상에 대한 절차규정, 최혜국 대우, 방곡령 실시시 일본에 사전예고 등.

일본과 조약 체결 후 정부의 입장: , 일본, 서양세력에 대해 세력균형 정책 실시. 미수호통상 조약(1882) 체결.

강화도 조약의 의의: 부산 일본의 선택으로 원산(군사적 목적), 인천(정치적 목적) 개항. 1883년 통 상장정으로 일제는 침략의 발판 마련. 우리나라는 보호조치를 취할 수 없게 됨. 식민지의 계기.


 


서양제국과의 통상장정체결

미 수호 통상 조약(1882)

체결 배경: 조선 책략이 국내 지식층에 유포되어 미국과 외교를 하여야 한다는 주장 제기.

조약의 체결: 청과 이해관계가 일치되어 신헌-리홍장-슈펠트 사이에 체결.

조약의 내용

양국 중 한 나라가 제3국의 압박을 받을 경우 서로 도와 준다.

영사 재판에 의한 치외 법권과 최혜국 대우.

조약의 성격: 서양과 맺은 최초의 조약으로 불평등 조약.

1. 전래: 주일 청국 참사관으로 있던 황 쭌셴이 동양 3국이 펼쳐야 할 외교 정책을 쓴 것으로, 2차 수신사 김홍집이 소개(1880).

2. 요점: 러시아의 남하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중국, 미국, 일본과 결속해야 한다. 서양의 기술을 배워야 한다. 예수와 주자를 동격으로 표현.

3. 영향: 개화 운동을 자극, 위정척사 운동을 강화.

청은 일본의 조선지배를 차단하려고 조청 상민수륙무역장정(1882) 체결: 치외법권, 청상인의 내지통상 권연안어업권

청의 추천을 계기로 한 열강과의 통상조약: 영국(1882. 4, 민영목), 독일(1882. 5, 조영하), 이탈리아 (1884. 5, 김병시), 러시아(직접, 1884. 7, 김병시), 프랑스(1886, 김만식, 직접), 오스트리아(1892, 권 재형), 필리핀(1901, 박제순), 벨기에(1901, 박제순), 덴마크(1902, 유기환) .

영 수호 통상 조약(1882): 서양 최초의 통상 요구로 최혜국 대우와 내지 통상권 규정.

러 수호 통상 조약(1884): 일의 반대로 지연, 직접 수교.

불 수호 통상 조약(1886): 천주교 반대 문제로 지연, 천주교 신앙 및 선교 자유 허용.

 


개화운동

신문물 수입

수신사(18761881): 1차 김기수(1876), 2차 김홍집(1880) 파견. 김기수는 일동기유, 수신사 일기 저술, 김홍집은 황쭌셴 조선책략과 정관응 이언소개.

신사유람단(1881): 박정양, 어윤중, 홍영식 등이 일본의 근대기관을 살피고 돌아옴. 수행원 중 유길 준, 윤치호 등은 유학.

영선사(1881) 김윤식 등을 톈진에 파견, 학생들의 근대 기술에 대한 기본 지식과 정부의 재정 지원 부족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년만에 귀국. 영선사를 계기로 기기창(1883) 설치.

보빙사(1883): 미국 측의 푸트 공사 파견에 대한 답례로 민영익을 전권대사로 하여 미국에 파견. 사절단은 대부분 개화에 뜻을 둔 젊은이들.

개화운동

고종의 개혁: 규장각 기능 부활, 1881년 청을 모방한 통리기무아문(총리대신)과 산하 12(당상관) 설치. 5군영을 2영으로 개편(무위영장어영)으로 개편하고 별기군(교련병대) 신설.

사대사: 대중국 외교

교린사: 교린외교

군무사: 군대통솔

변정사: 변방사무외국정탐

통상사: 통상무역

기계사: 기계제조

선함사: 선박군함제조 감독

군물사: 병기제조

기연사: 왕래 선박 순찰

어학사: 외국어언어문자

전선사: 인선

이용사: 물품조달

일본의 사정: 자유민권운동가들이 흥아회를 조직하여 아시아 연대론주장. 뒷날 김옥균의 삼국합 종론(삼화주의)’, 안경수의 일청한 동맹론에 영향.

2013년 1학기 때 대학교 수업 과제로 썼던 답사 보고서.



   지난 6 9일 일요일, 천도교 대교당, 탑골공원, 운현궁, 우정총국, 마지막으로 덕수궁의 순서로 총 5곳을 다녀왔다. 예전에 외국인 친구를 서울 구경시켜주느라 덕수궁과 경복궁은 가본 적이 있었지만, 그런 특별한 경우 혹은 이번처럼 과제를 부여받거나 하는 경우가 있지 않은 이상, 이번에 다녀온 답사지들을 방문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사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방문할 기회가 없었다기보다는 나의 주말이나 기타 남는 시간들을 활용해 역사적 장소를 답사하고자 하는 그런 의지나 동기부여가 없었던 것 같다. '기회가 없었다'라는 말은 그저 합리화를 위한 변명이라고 생각하고, 특히나 매일 광화문 일대를 거쳐 시청역 1호선 옆의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며 학교에 통학하는 나 자신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니 갑자기 매우 부끄러워 졌다.

   우리나라의 역사 깊은 장소들 5곳을 둘러보는데 몇 시간이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걸 답사하고서 알게 되었는데(그것도 도보로), 나는 학교 다니는 3년 동안 안국역 주변과 광화문 일대를 단지 인사동과 삼청동, 청계천 등이 있는 데이트 코스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답사로 자신에 대한 반성과 부끄러움을 느낀 학생이 나뿐이 아닐 거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그런데 만약 나뿐이라면 더욱 반성해야겠다. 오늘날의 나를 있게 해주신 조상님들의 주무대였던 장소를 매일같이 다니면서 단 한 번도 관심을 가진 적이 없다는 것은 확실히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계속 반성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앞으로는 내가 매일 통학하는 이 길이 조선과 근현대사 시기를 비롯한 우리나라 역사의 중심지였고, 또한 대한민국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의 역사를 써내려 갈 장소라는 사실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 편이 더 낫다고 느꼈다.


 

 

1. 천도교 대교당

 

1) 답사 지역 선정 이유

   수업시간에 갑오농민전쟁과 그에 관련하여 최제우, 최시형 등의 인물들을 배웠는데, 갑오농민전쟁의 종교적 이념이었던 동학(천도교)을 따르는 사람들이 집결하던 장소인 천도교 중앙대교당이 어떤 곳인지 알고 싶었다.

 

 

2) 답사지 이동 경로 및 위치, 동행자

   6 9일 일요일 13 45에서 출발하여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하여 이동하였고, 15 10분쯤 안국역  4번 출구로 나와 운현궁을 지나서 30m정도 걷다보니 오른쪽 길 건너에 천도교 중앙대교당이 보였다. 동행자는 없었다.

   천도교 대교당 문은 열려있었고 들어가서 이곳 저곳을 둘러 보았다. 신도들이 집회를 하고 있었던 걸로 보이기에 교당 내부는 들어가지 못했다. 이번 답사지에서 기억나는 점은 2층에 올라갔을 때 교당 내부의 물건들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는데, 창고의 입구에서 2세교조 최시형의 거대한 사진을 보았던 일이다교당 내부에 가지 못했기에 둘러 볼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15분 정도 건물 내외를 둘러본 뒤 탑골공원으로 떠났다.

 

 

3) 답사지의 역사

 

- 해당 답사지의 내력

   천도교의 3세 교조인 의암성사 손병희 선생의 계획아래 1918년 대교당 신축이 결의되고,  천도교인들이 모은 성금을 사용하여 1921 2 27일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원래는 1919년에 완공할 예정이었으나 해당 연도에는 성금의 대부분을 3.1운동을 위한 자금으로 사용했고, 그 남은 성금으로 지었기 때문에 완공이 지연되었다고 한다.

   완공 이후 주요 민족적 집회와 해방 이후 귀국한 해외 독립지사들의 귀국인사 강연 및 집회 등이 이곳에서 일어났으며, 1978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되었고 현재까지도 많은 천도교인들이 매주 일요일 11시에 시일식과 기념식 등을 행하고 있다.

 

- 역사적 사건

   건물 자체에 직접적으로 관련한 역사적 사건으로는 1922년에는 소파 방정환, 김기전 선생의 지도 아래 천도교소년회에서 어린이의 날을 선포하며 대대적인 행사를 하는 등의 어린이 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이 있고, 해방 이후에는 귀국인사들이 강연과 집회 등을 벌인 장소이기도 하다는 점 등이 있다.

   건물 자체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역사적 사건은 아니지만 건물이 지어지던 시기에 주변에 있는 탑골공원에서 3.1운동이 일어났었고, 건물이 지어지기 28년 전에는 동학(천도교)에 종교적 뿌리를 둔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났었다. 당시 천도교 대교당이라는 건물은 없었지만 동학 종교 조직의 체계적인 포접체계 등은 갑오농민전쟁 이전에 있었던 항쟁들의 한계였던 체계성이 없었다는 점과 지속성이 없었다는 점 등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 조사 방식

수업자료와 더불어 천도교 중앙대교당 내에 비치된 팜플렛, 그리고 인터넷 조사(네이버 지식백과 등)를 통해 조사하였다.

 

 

4) 답사 소감

  1920년대 당시, 민족의 힘으로 지은 건물 중 가장 컸던 건물이라는 것을 알고 답사했는데, 사실 생각했던 것보다는 크기가 작았다. 그러나 조금 더 조사해보니 원래 400평을 계획했던 것이 조선총독부에 의해 212평으로 규제, 축소당한 후 허가를 받았다고 한다. 건물크기까지도 규제할 만큼 조선총독부의 간섭과 견제가 심했구나 라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원래 답사지에 도착하기 이전에는 천도교 대교당 역시 경복궁이나 기타 문화재와 같이 '만지지 마시오', '들어가지 마시오' 등의 문구가 많이 비치되어 있을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러나 대교당 앞에 도착했을 때 집회를 하러 오신 몇몇의 천도교인들을 보고 실제로 ', 이 건물을 아직도 적극적으로 활용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실제로 대교당 내부에 들어와 보니 교당, 관리실, 창고, 화장실, 심지어 건물을 청소하시는 아주머니도 있었기 때문에 이 건물을 단지 보존해야 할 문화재로서 뿐만이 아니라 마치 다른 여느 평범한 교당처럼 실제로 활용까지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천도교는 현재 신도 수가 많이 부족하고 그나마 있는 신도들의 연령대도 점점 높아져 간다고 들었다. 1800년대 후반 신분제가 당연시 되던 조선 사회에서(물론 조선 후기였지만)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후천개벽 사상과 인내천 사상을 들고 나온 의미 있는 민족종교로서 명맥을 이어나갈 가치가 높다고 생각하는데, 비록 천도교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언젠가 천도교가 다시 부흥할 수 있는 계기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 탑골공원

 

1) 답사 지역 선정 이유

  탑골공원은 3.1운동이 일어난 역사적 장소이며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십층석탑과 유형문화재 팔각정이 있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내가 이 장소에 대해 평소 들어온 바는 주로 오갈데 없는 노인분들이 많이 이용하시는 공원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지탄과 비꼼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이 노인분들이 사실은 예전 어렸을 적에 부모님 손을 붙잡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시절이 그리워서 탑골공원에 매일 앉아계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번 해보았는데, 맞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런 생각도 해보며 탑골공원을 답사지로 선정하였다.

 

 

2) 답사지 이동 경로 및 위치, 동행자

  15 15분부터 15 30분까지 천도교 중앙대교당을 답사한 뒤, 바로 출발하여 낙원상가를 지나 탑골공원에 도착하였다. 도보로 10분 정도 이동했으며 동행자는 없었다. 탑골공원 내부 답사는 독립선언문 비석 -> 의암 손병희 선생 석상 -> 팔각정과 원각사지십층석탑 순으로 15분 정도 답사하였다.

 

 

3) 답사지의 역사

 

- 해당 답사지의 내력

   현재 탑골공원 부지에 고려시대에는 흥복사라는 사찰이 있었고, 조선시대에 와서 세조가 그것을 원각사로 개명하고 중건하였는데 그 규모가 실로 굉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성종 때부터 억불정책이 시행되던 것이 연산군 때는 절정에 이르게 되어 연산군을 위한 기생들이 거주하는 연방원으로 바뀌게 되었고 결국 1514년에 가서는 사찰을 헐게 되었다.

   현재 탑골공원 부지에는 원각사가 얼마나 웅대했는가를 보여주는 원각사지십층석탑만이 역사적 산물로서 남아있는데, 그곳이 언제부터 공원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다고 한다. 다만, “파고다공원이 이 땅에 최초의 공원이고 1897년 총세무사 브라운의 건의에 의하여 꾸며졌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고 하는데 반면 인천의 만국공원이 최초의 공원이라는 주장도 있다. 확실하게 인정된 정설이 없으므로, 어느 주장이 옳다라고 단정지어 말하기는 힘든 것 같다.

 

- 역사적 사건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났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사실 정작 조선은 승전국인 일본의 식민지였으므로 해당 사항이 없었지만)의 영향으로 서울과 평안도에서 독립운동을 벌여보자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서울에서는 이 탑골공원이 그 움직임의 중심지였다.

   3.1운동은 실력양성론자들인 민족대표 33인이 기획되었고, 운동 당일에 학생대표에 의해 독립선언문이 낭독되었으며, 외교독립론 중 독립청원의 일환인 만세시위로써 독립 의지를 강력하게 표명하였으나 당시 일본의 '이성'은 조선 민중들의 기대에 부응해주지 않았다. 결국 일제의 물리력에 3.1운동은 실패하였다. 하지만 비록 실패했으나 당시의 다양한 국내 세력들(복벽주의, 공화주의, 민족교육운동 등)이 한데 모여 민족자결을 외쳤다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 조사 방식

수업자료와 인터넷(네이버 지식백과)을 활용하여 조사하였다.

 

 

4) 답사 소감

   역사적 장소로서도 중요하지만 역시 공원으로서의 가치도 돋보이는 답사지였다고 생각한다. 이미 천도교 대교당에서 느꼈던 것이지만, 예전에는 역사 답사지라고 하면 단지 '과거'의 것만을 ', 그 때는 그랬구나'하고 배우는 것으로만 생각했었는데, 반면에 탑골공원처럼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며 과거를 대표하는 역사적 답사지로서의 성격과, 잘 정돈된 현재의 공원으로서의 성격이 둘 다 제대로 발휘되는 답사지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독립선언문을 보면서 '만약 내가 1919년 조선의 학생이었다면, 과연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를 위해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학생대표가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물론 학생 대표는 아닐지라도 자기가 생각하는 가치관에 따라 소신있게 독립을 적극적으로 외치던 부류에 속할 수 있었을까? 이러한 생각을 해본 이유는 요즘 나를 포함한 학생들이 각종 사회 문제와 현안들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점 때문이다. 요즘은 자기 자아에서 나온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기보다는 일단 남들처럼 좋은 스펙을 쌓아 좋은 대기업에 취직하기를 바라는 것 같다. 과거는 미화된다 라는 말이 있지만 그래도 3.1운동 시절의 학생들은 적어도 남들따라 줏대없이 독립을 외치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일제 순사들에게 빌붙어 편하게 사는 길을 택할 수도 있었을텐데, 내가 알고 있는 한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탑골공원은 듣던 대로 노인분들이 많이 앉아계셨다. 특히 팔각정 주위에 빙 둘러앉아서 더위를 피하고 계셨다. 그 노인분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괜스레 서글퍼지기는 했지만 다음 답사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3. 운현궁

 

1) 답사 지역 선정 이유

근현대사의 중심에 있는 고종과 흥선대원군이 살았던 집이자 흥선대원군의 고종 섭정 시절 수많은 국정 논의가 이루어진 장소이기에 반드시 답사해 보아야 하는 곳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2) 답사지 이동 경로 및 위치, 동행자

15 40분부터 15 55분까지 탑골공원을 답사한 뒤, 다시 안국역쪽으로 돌아오는 길에 있는 운현궁에 도착하였다. 동행자는 없었다. 운현궁 입구에서 '꽃필녘 일요마당'이라는 판소리, 가야금 병창, 전통무용 등의 특별공연을 관람하고 수직사, 이로당, 노락당, 노안당의 순으로 답사하였다.

 

 

3) 답사지의 역사

 

- 해당 답사지의 내력

   원래 흥선대원군의 사저였고 고종이 어린 시절부터 자란 곳이다. 고종이 즉위하면서 명칭이 운현궁으로 바뀌었다. 1864(고종1)에 노락당과 노안당을 짓고, 1869년에는 이로당과 영로당을 세웠다고 한다. 창덕궁에 쉽게 드나들게 하기 위한 공근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1912년 일제의 토지조사 때 소유권이 국가에 넘어가게 되었지만 실제 안살림은 역시 이로당의 안주인들이 맡아서 했다. 그러다가 1948년 미군정에 의해 다시 대원군 5대손 이청씨에게 소유권이 돌아오게 되었다. 그 이후 1991년 운영 문제로 이청씨가 소유권 양도 의사를 밝혔고 당시 서울시가 매입하여 현재까지 운영, 관리 중이다.

 

- 역사적 사건

   1866년 노락당에서 고종과 민비(명성황후)의 가례가 있었다. 노락당은 민비의 왕비 수업이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다. 노안당은 흥선대원군이 국정을 논의하던 곳으로서 수많은 정책들이 발의되고 결정된 역사적 장소이다. 이로당은 운현궁의 안살림을 책임지는 장소였다.

  

- 조사 방식

수업자료와 운현궁 내의 팜플렛, 운현궁 공식 홈페이지 등을 참조하였다.

 

 

4) 답사 소감

  규모가 굉장히 축소된 것이라고 하지만 한 가족이 살기에는 역시 거대한 규모라고 할 수 있었다. 흥선대원군의 위세를 잘 보여주는 집이라고 하는데, 인상깊었던 점은 국정운영 논의의 많은 부분들을 흥선대원군의 사저나 다름 없었던 운현궁에서 했다는 점이다. 지금 생각으로는 현재 정치도 국회나 청와대에 가서 하듯이 나라의 일은, 더군다나 왕의 권한을 가지고서 하는 일들은 창덕궁이라든지 어떤 특정한 격식이 있는 장소에서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궁이라고는 하나 원래는 흥선대원군의 개인 집인 노안당에서 했었다니 당시 흥선대원군의 위세를 짐작하게 했다.

  그리고 노락당을 답사하던 중 점점 사람들이 모이니 아무 대가 없이, 누가 해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운현궁과 기타 지식들에 대해 설명해주시는 친절한 어르신을 보게 되었다. 정말 세부적이고도 사람들이 모를 만한 것에 대해 설명을 하셨는데, 가령 조선시대 때 방을 좁게 만든 것은 부부 간의 금실을 좋게 하기 위해서 라고 하시고, 문 틈 모양은 모두 한자 쓸 용 자로 되어 있다 등의 설명을 해주셨다. 한 번쯤 알아두면 재미있을 만한 상식들이어서 설명이 끝난 후 그 어르신에게 모두 감사를 표했다.

 

 

 


4. 우정총국

 

1) 답사 지역 선정 이유

수업시간에 갑신정변이 시작된 장소가 이곳이라고 배웠는데, 수업시간에 배운 기억으로는 그 진행의 흐름이 상당히 흥미로웠기에 답사지로 선정하였다.

 

2) 답사지 이동 경로 및 위치, 동행자

16~1630분까지 운현궁을 답사한 뒤 안국역 6번출구 를 통해 우정총국으로 도보로 이동하였다. 동행자는 없었고 이동하는 잠깐의 휴식을 취하며 식사를 하였으며 17 15분에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우정총국은 크기가 매우 작아서 답사 시간은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3) 답사지의 역사

 

- 해당 답사지의 내력

   고종 21년인 18843 27일에 설치되었고, 다음날 홍영식이 총판으로 임명되었다. 그 해 5월에는 일본인 실무자 2명을 고용하였고 10 1일 처음으로 우체 업무를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10 17일에 우정총국 낙성식 때 갑신정변이 일어났고 19일에 그 막을 내린 후 이틀 튀인 10 21일 우정총국은 폐지되었다. 그러나 폐지된 이후에도 우체 업무는 계속되어, 실제로 우체 업무가 마감된 것은 11 20일이었다고 한다.

   1970년에는 국가사적 213호로 지정되었고 71 12월에는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72년에는 체신기념관으로 개관했다가 작년인 2012 8월 우정총국을 재개국하여 우편업무를 보고 있다. 기념관 역시 내부에 재조성되어 있다.

 

- 역사적 사건

   188410월 우정국 낙성식 때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급진 개화파이자 보빙사였던 홍영식이 총판이었는데 급진개화파들은 1884 4월 당시 조선 내부에 주둔하던 청군 1,500명이 청, 불 전쟁 때문에 청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보고 개혁의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 때부터 차곡차곡 물리력을 쌓기 시작하여 유학생들로 구성된 사관생도, 숙직장교가 이끄는 친군전영군, 박영효가 집을 판매한 돈으로 고용한 역사들, 부상 100여명, 운웅렬의 470인 중 함경도로 돌아가지 않은 70명 등 총 200~300명 정도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10월 낙성식 때 거사를 일으켰고 일련의 계획을 갖고 있었으나 별궁 방화 실패, 청과 민비의 결탁으로 인한 고종의 창덕궁 이어 등과 더불어 원래의 무력이 그렇게 강하지 않았기에 결국 청군에 의해 3일만에 제압당하고 말았다. 정변 주도층은 주로 일본 공사로 철수하거나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이들이 갑신정변 때 내세웠던 갑신정강은 갑오개혁에 가서야 실현되게 된다. 비록 실패 하였지만 갑신정변이 아무 의미 없는 개혁 시도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 조사 방식

수업자료와 우정총국 공식 홈페이지를 참조하였다.

 

 

4) 답사 소감

   우정총국이 답사 날 현재 업무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정말 충격에 휩싸였었다. 천도교 대교당에 이어 우정총국도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서 운영을 하고 있다니, 내가 갖고 있는 역사 시설물에 관한 상식(문화재로서 해당 물체를 영구히 잘 보존하는 것이 최우선)이 완전히 틀린 것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조사 결과 2012 8월부터 128년만에 업무를 재개했다는 사실을 알고서 그 충격이 조금 가라 앉긴 했다.

   다만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문화재를 잘 보전한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나의 인식의 틀이 변화했다는 것이다. 가령 이전에 갖고 있던 문화재 보전 인식은 해당 물체를 잘 보존해서 현대의 산물들이 최대한 반영되지 않은 채로 영구히 후대에 물려줄 수 있게끔 유지하는 것이 최우선적인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는데, 진정한 문화재 보전이란 그런 물리적인 측면보다도 정신적인 측면, 즉 우정총국의 경우 우정총국이 가지고 있던 고유의 우편 업무 기능을 재개하는 일이 어쩌면 더욱 큰 의미의 문화재 복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엇이 더 옳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 쪽으로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5. 덕수궁

 

1) 답사 지역 선정 이유

   덕수궁은 와 본적이 몇 번 있었는데, 이번 수업으로 근현대사 시기, 특히 대한제국을 배우고 나니 다시 한 번 답사해보고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고 보는 것과 알고 보는 것은 다르기 때문에 전에 못 보던 것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덕수궁을 선정했다.

 

 

2) 답사지 이동 경로 및 위치, 동행자

   우정총국 방문 뒤 광화문을 거쳐 코리아나호텔, 시청역 1호선 등을 지나 대한문 앞에 17 45분 경 도착하였다. 도보를 이용했으며 동행자는 없었다. 덕수궁 내에서는 덕흥전, 함녕전, 정관헌, 중화전, 즉조당, 석어당, 중화문, 광명문, 석조전 순으로 답사하였다.

 

 

3) 답사지의 역사

 

- 해당 답사지의 내력

   덕수궁은 1593년 선조26년인 조선 후기부터 역사에 나오기 시작했다. 원래는 월산대군의 저택이었으나 선조가 행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1611년에 광해군은 그 저택에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붙였다. 인목대비 유폐 이후 서궁으로 불렸고 1623년에는 경운궁의 대부분을 다시 월산대군 가에 돌려주었다.

   그 뒤로 약 280여 년이 흐른 뒤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옮겨오면서 다시 역사에 재등장했다. 대한제국기에 궁으로 사용되다가 통감부기에 이르러 1904년 대화재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다. 물론 나중에 재건은 하였다. 1907년에는 궁의 이름이 덕수궁으로 바뀌었고 1933년에 일반인에게 개방된 뒤 70년을 이어오다 2007년에 덕수궁 복원이 이루어졌다.

 

- 역사적 사건

   석어당은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가 광해군에 의해 10년간 유폐되어 감금생활을 했던 곳이다. 이 사건은 인조 반정이 이루어지는 구실이 되었고, 반정에 성공한 인조는 인목대비에게 정통성을 인정받고 여기에서 즉위했다고 한다.

   함녕전은 고종이 1919년 승하한 곳이면서 한편으로는 백범 김구의 목숨을 살린 대청전화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백범 김구의 사형 직전에 고종이 서류를 검토하다가 전화로 사형집행 중지를 내렸다는 일화가 있다. 또한 정관헌에서는 고종 독살 미수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석조전은 서양식 건물로서 근대국가를 상징하는데 이곳에서 외국 대신들과의 수많은 접견들이 이루어졌으며 미소공동위원회와 유엔한국감시위원단 이 이곳에 머무르며 많은 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의 궁역 안에 있었던 중명전은 일제에 의해 을사늑약이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지만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 파견이 이루어진 뜻깊은 장소이기도 하다.

 

- 조사 방식

수업자료와 덕수궁 내에 비치된 팜플렛인터넷 조사 등을 활용하였다.

 

 

4) 답사 소감

   덕수궁은 오늘 답사했던 곳들 중 가장 규모가 크고 건물도 웅장했다. 중화전이 서양식 기술로 만들어진 근대국가의 상징이었다면 중화전이나 함녕전, 등은 동양식 기술로 만든 조선을 상징한다고 생각하는데, 덕수궁을 보고 있으면 고종이 하루빨리 조선에서 벗어나 나라를 근대화시키고 싶어했음이 느껴진다.

   일단 고종이 대한제국을 성립한 후에 곤룡포를 벗고 제복을 입은 것과(동양식 옷이 아니라 서양식 옷이라는 점) 서양식 기술과 동양식 기술의 조화인 정관헌에서 커피를 마시며 외국 사절들과 연회를 즐겼던 점, 그리고 무엇보다 석조전을 건립하여 침전 및 편전으로 사용하려 했던 점 등을 보면 고종은 이 덕수궁 내에서 나름의 야망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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