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학기 때 대학교 수업 과제로 썼던 답사 보고서.
지난 6월 9일 일요일, 천도교 대교당, 탑골공원, 운현궁, 우정총국, 마지막으로
덕수궁의 순서로 총 5곳을 다녀왔다. 예전에 외국인 친구를
서울 구경시켜주느라 덕수궁과 경복궁은 가본 적이 있었지만, 그런 특별한 경우 혹은 이번처럼 과제를
부여받거나 하는 경우가 있지 않은 이상, 이번에 다녀온 답사지들을 방문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사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방문할
기회가 없었다기보다는 나의 주말이나 기타 남는 시간들을 활용해 역사적 장소를 답사하고자 하는 그런 의지나 동기부여가 없었던 것 같다. '기회가 없었다'라는 말은 그저 합리화를 위한 변명이라고 생각하고, 특히나 매일 광화문 일대를 거쳐 시청역 1호선 옆의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며 학교에 통학하는 나 자신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니 갑자기 매우 부끄러워 졌다.
우리나라의 역사 깊은 장소들 5곳을
둘러보는데 몇 시간이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걸 답사하고서 알게 되었는데(그것도 도보로), 나는 학교 다니는 3년 동안 안국역 주변과 광화문 일대를 단지
인사동과 삼청동, 청계천 등이 있는 데이트 코스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답사로 자신에 대한 반성과 부끄러움을 느낀 학생이 나뿐이 아닐 거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그런데 만약 나뿐이라면 더욱 반성해야겠다. 오늘날의 나를 있게 해주신
조상님들의 주무대였던 장소를 매일같이 다니면서 단 한 번도 관심을 가진 적이 없다는 것은 확실히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계속 반성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앞으로는 내가 매일 통학하는 이 길이 조선과 근현대사 시기를 비롯한
우리나라 역사의 중심지였고, 또한 대한민국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의 역사를 써내려 갈 장소라는 사실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 편이 더 낫다고 느꼈다.
1. 천도교 대교당
1) 답사 지역 선정 이유
수업시간에 갑오농민전쟁과 그에 관련하여 최제우, 최시형 등의 인물들을 배웠는데, 갑오농민전쟁의 종교적 이념이었던
동학(천도교)을 따르는 사람들이 집결하던 장소인 천도교 중앙대교당이
어떤 곳인지 알고 싶었다.
2) 답사지 이동 경로 및 위치, 동행자
6월 9일 일요일 13시 45분 집에서 출발하여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하여 이동하였고, 15시 10분쯤 안국역
4번 출구로 나와 운현궁을 지나서 30m정도 걷다보니 오른쪽 길 건너에 천도교
중앙대교당이 보였다. 동행자는 없었다.
천도교 대교당 문은 열려있었고 들어가서 이곳 저곳을 둘러 보았다. 신도들이 집회를 하고 있었던 걸로 보이기에 교당 내부는 들어가지 못했다. 이번
답사지에서 기억나는 점은 2층에 올라갔을 때 교당 내부의 물건들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는데, 창고의 입구에서 2세교조 최시형의 거대한 사진을 보았던 일이다. 교당 내부에 가지 못했기에 둘러 볼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15분 정도 건물 내외를 둘러본 뒤 탑골공원으로 떠났다.
3) 답사지의 역사
- 해당 답사지의 내력
천도교의 3세 교조인 의암성사
손병희 선생의 계획아래 1918년 대교당 신축이 결의되고, 천도교인들이 모은 성금을 사용하여
1921년 2월 27일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원래는 1919년에 완공할 예정이었으나 해당 연도에는 성금의 대부분을 3.1운동을 위한 자금으로 사용했고, 그 남은 성금으로 지었기 때문에
완공이 지연되었다고 한다.
완공
이후 주요 민족적 집회와 해방 이후 귀국한 해외 독립지사들의 귀국인사 강연 및 집회 등이 이곳에서 일어났으며, 1978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되었고 현재까지도 많은 천도교인들이 매주 일요일 11시에 시일식과 기념식 등을 행하고 있다.
- 역사적 사건
건물
자체에 직접적으로 관련한 역사적 사건으로는 1922년에는 소파 방정환,
김기전 선생의 지도 아래 천도교소년회에서 어린이의 날을 선포하며 대대적인 행사를 하는 등의 어린이 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이 있고, 해방 이후에는 귀국인사들이 강연과 집회 등을 벌인 장소이기도 하다는 점 등이 있다.
건물
자체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역사적 사건은 아니지만 건물이 지어지던 시기에 주변에 있는 탑골공원에서 3.1운동이
일어났었고, 건물이 지어지기 28년 전에는 동학(천도교)에 종교적 뿌리를 둔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났었다. 당시 천도교 대교당이라는 건물은 없었지만 동학 종교 조직의 체계적인 포접체계 등은 갑오농민전쟁 이전에 있었던
항쟁들의 한계였던 체계성이 없었다는 점과 지속성이 없었다는 점 등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 조사 방식
수업자료와 더불어 천도교 중앙대교당 내에 비치된 팜플렛, 그리고 인터넷
조사(네이버 지식백과 등)를 통해 조사하였다.
4) 답사 소감
1920년대
당시, 민족의 힘으로 지은 건물 중 가장 컸던 건물이라는 것을 알고 답사했는데, 사실 생각했던 것보다는 크기가 작았다. 그러나 조금 더 조사해보니
원래 400평을 계획했던 것이 조선총독부에 의해 212평으로
규제, 축소당한 후 허가를 받았다고 한다. 건물크기까지도
규제할 만큼 조선총독부의 간섭과 견제가 심했구나 라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원래 답사지에 도착하기 이전에는 천도교 대교당 역시 경복궁이나 기타 문화재와 같이 '만지지 마시오', '들어가지 마시오' 등의 문구가 많이 비치되어 있을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러나 대교당 앞에 도착했을 때 집회를 하러 오신 몇몇의 천도교인들을 보고 실제로 '아, 이 건물을 아직도 적극적으로 활용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실제로 대교당 내부에 들어와 보니 교당, 관리실, 창고, 화장실, 심지어 건물을 청소하시는 아주머니도 있었기 때문에 이 건물을 단지 보존해야 할 문화재로서 뿐만이 아니라 마치
다른 여느 평범한 교당처럼 실제로 활용까지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천도교는 현재 신도 수가 많이 부족하고 그나마 있는 신도들의 연령대도 점점 높아져 간다고 들었다. 1800년대
후반 신분제가 당연시 되던 조선 사회에서(물론 조선 후기였지만)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후천개벽 사상과 인내천 사상을 들고 나온 의미 있는 민족종교로서 명맥을 이어나갈 가치가 높다고 생각하는데, 비록 천도교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언젠가 천도교가 다시 부흥할 수 있는 계기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 탑골공원
1) 답사 지역 선정 이유
탑골공원은
3.1운동이 일어난 역사적 장소이며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십층석탑과
유형문화재 팔각정이 있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내가 이 장소에 대해 평소 들어온 바는 주로 오갈데 없는
노인분들이 많이 이용하시는 공원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지탄과 비꼼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이 노인분들이 사실은 예전 어렸을 적에 부모님 손을 붙잡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시절이 그리워서
탑골공원에 매일 앉아계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번 해보았는데, 맞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런 생각도 해보며 탑골공원을 답사지로 선정하였다.
2) 답사지 이동 경로 및 위치, 동행자
15시 15분부터 15시 30분까지
천도교 중앙대교당을 답사한 뒤, 바로 출발하여 낙원상가를 지나 탑골공원에 도착하였다. 도보로 10분 정도 이동했으며 동행자는 없었다. 탑골공원 내부 답사는 독립선언문 비석 -> 의암 손병희 선생
석상 -> 팔각정과 원각사지십층석탑 순으로 15분 정도
답사하였다.
3) 답사지의 역사
- 해당 답사지의 내력
현재
탑골공원 부지에 고려시대에는 흥복사라는 사찰이 있었고, 조선시대에 와서 세조가 그것을 원각사로 개명하고
중건하였는데 그 규모가 실로 굉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성종 때부터 억불정책이 시행되던 것이 연산군 때는
절정에 이르게 되어 연산군을 위한 기생들이 거주하는 연방원으로 바뀌게 되었고 결국 1514년에 가서는
사찰을 헐게 되었다.
현재
탑골공원 부지에는 원각사가 얼마나 웅대했는가를 보여주는 원각사지십층석탑만이 역사적 산물로서 남아있는데, 그곳이
언제부터 공원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다고 한다. 다만, “파고다공원이
이 땅에 최초의 공원이고 1897년 총세무사 브라운의 건의에 의하여 꾸며졌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고 하는데 반면 인천의 만국공원이 최초의 공원이라는 주장도 있다. 확실하게 인정된 정설이 없으므로, 어느 주장이 옳다라고 단정지어
말하기는 힘든 것 같다.
- 역사적 사건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났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사실 정작 조선은 승전국인 일본의 식민지였으므로 해당 사항이 없었지만)의 영향으로 서울과 평안도에서 독립운동을 벌여보자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서울에서는
이 탑골공원이 그 움직임의 중심지였다.
3.1운동은 실력양성론자들인 민족대표 33인이 기획되었고, 운동 당일에 학생대표에 의해 독립선언문이 낭독되었으며, 외교독립론
중 독립청원의 일환인 만세시위로써 독립 의지를 강력하게 표명하였으나 당시 일본의 '이성'은 조선 민중들의 기대에 부응해주지 않았다. 결국 일제의 물리력에 3.1운동은 실패하였다. 하지만 비록 실패했으나 당시의 다양한 국내
세력들(복벽주의, 공화주의,
민족교육운동 등)이 한데 모여 민족자결을 외쳤다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 조사 방식
수업자료와 인터넷(네이버 지식백과)을
활용하여 조사하였다.
4) 답사 소감
역사적
장소로서도 중요하지만 역시 공원으로서의 가치도 돋보이는 답사지였다고 생각한다. 이미 천도교 대교당에서
느꼈던 것이지만, 예전에는 역사 답사지라고 하면 단지 '과거'의 것만을 '아, 그 때는
그랬구나'하고 배우는 것으로만 생각했었는데, 반면에 탑골공원처럼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며 과거를 대표하는 역사적 답사지로서의 성격과, 잘 정돈된 현재의 공원으로서의 성격이
둘 다 제대로 발휘되는 답사지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독립선언문을 보면서 '만약 내가 1919년 조선의 학생이었다면, 과연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를 위해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학생대표가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물론 학생 대표는 아닐지라도 자기가 생각하는
가치관에 따라 소신있게 독립을 적극적으로 외치던 부류에 속할 수 있었을까? 이러한 생각을 해본 이유는
요즘 나를 포함한 학생들이 각종 사회 문제와 현안들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점 때문이다. 요즘은
자기 자아에서 나온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기보다는 일단 남들처럼 좋은 스펙을 쌓아 좋은 대기업에 취직하기를 바라는 것 같다. 과거는 미화된다 라는 말이 있지만 그래도 3.1운동 시절의 학생들은
적어도 남들따라 줏대없이 독립을 외치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일제 순사들에게 빌붙어 편하게 사는
길을 택할 수도 있었을텐데, 내가 알고 있는 한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탑골공원은 듣던 대로 노인분들이 많이 앉아계셨다. 특히 팔각정 주위에 빙 둘러앉아서 더위를 피하고 계셨다. 그 노인분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괜스레 서글퍼지기는 했지만 다음 답사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3. 운현궁
1) 답사 지역 선정 이유
근현대사의 중심에 있는 고종과 흥선대원군이 살았던 집이자 흥선대원군의 고종 섭정 시절 수많은 국정 논의가 이루어진
장소이기에 반드시 답사해 보아야 하는 곳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2) 답사지 이동 경로 및 위치, 동행자
15시 40분부터 15시 55분까지 탑골공원을 답사한 뒤, 다시 안국역쪽으로 돌아오는 길에 있는 운현궁에 도착하였다. 동행자는 없었다. 운현궁 입구에서 '꽃필녘 일요마당'이라는
판소리, 가야금 병창, 전통무용 등의 특별공연을 관람하고 수직사, 이로당,
노락당, 노안당의 순으로 답사하였다.
3) 답사지의 역사
- 해당 답사지의 내력
원래
흥선대원군의 사저였고 고종이 어린 시절부터 자란 곳이다. 고종이 즉위하면서 명칭이 운현궁으로 바뀌었다. 1864년(고종1년)에 노락당과 노안당을 짓고, 1869년에는 이로당과 영로당을 세웠다고
한다. 창덕궁에 쉽게 드나들게 하기 위한 공근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1912년 일제의 토지조사 때 소유권이 국가에 넘어가게 되었지만 실제 안살림은 역시 이로당의 안주인들이 맡아서 했다. 그러다가 1948년 미군정에 의해 다시 대원군 5대손 이청씨에게 소유권이 돌아오게 되었다. 그 이후 1991년 운영 문제로 이청씨가 소유권 양도 의사를 밝혔고 당시 서울시가 매입하여 현재까지 운영, 관리 중이다.
- 역사적 사건
1866년
노락당에서 고종과 민비(명성황후)의 가례가 있었다. 노락당은 민비의 왕비 수업이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다. 노안당은 흥선대원군이
국정을 논의하던 곳으로서 수많은 정책들이 발의되고 결정된 역사적 장소이다. 이로당은 운현궁의 안살림을
책임지는 장소였다.
- 조사 방식
수업자료와 운현궁 내의 팜플렛, 운현궁 공식 홈페이지 등을 참조하였다.
4) 답사 소감
규모가
굉장히 축소된 것이라고 하지만 한 가족이 살기에는 역시 거대한 규모라고 할 수 있었다. 흥선대원군의
위세를 잘 보여주는 집이라고 하는데, 인상깊었던 점은 국정운영 논의의 많은 부분들을 흥선대원군의 사저나
다름 없었던 운현궁에서 했다는 점이다. 지금 생각으로는 현재 정치도 국회나 청와대에 가서 하듯이 나라의
일은, 더군다나 왕의 권한을 가지고서 하는 일들은 창덕궁이라든지 어떤 특정한 격식이 있는 장소에서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궁이라고는 하나 원래는 흥선대원군의 개인 집인 노안당에서 했었다니 당시 흥선대원군의 위세를 짐작하게 했다.
그리고
노락당을 답사하던 중 점점 사람들이 모이니 아무 대가 없이, 누가 해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운현궁과
기타 지식들에 대해 설명해주시는 친절한 어르신을 보게 되었다. 정말 세부적이고도 사람들이 모를 만한
것에 대해 설명을 하셨는데, 가령 조선시대 때 방을 좁게 만든 것은 부부 간의 금실을 좋게 하기 위해서
라고 하시고, 문 틈 모양은 모두 한자 쓸 용 자로 되어 있다 등의 설명을 해주셨다. 한 번쯤 알아두면 재미있을 만한 상식들이어서 설명이 끝난 후 그 어르신에게 모두 감사를 표했다.
4. 우정총국
1) 답사 지역 선정 이유
수업시간에 갑신정변이 시작된 장소가 이곳이라고 배웠는데, 수업시간에
배운 기억으로는 그 진행의 흐름이 상당히 흥미로웠기에 답사지로 선정하였다.
2) 답사지 이동 경로 및 위치, 동행자
16시~16시30분까지 운현궁을 답사한 뒤 안국역 6번출구 를 통해 우정총국으로
도보로 이동하였다. 동행자는 없었고 이동하는 잠깐의 휴식을 취하며 식사를 하였으며 17시 15분에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우정총국은 크기가 매우 작아서 답사 시간은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3) 답사지의 역사
- 해당 답사지의 내력
고종 21년인 1884년 3월 27일에 설치되었고, 다음날 홍영식이 총판으로 임명되었다. 그 해 5월에는 일본인 실무자 2명을
고용하였고 10월 1일 처음으로 우체 업무를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10월 17일에
우정총국 낙성식 때 갑신정변이 일어났고 19일에 그 막을 내린 후 이틀 튀인 10월 21일 우정총국은 폐지되었다.
그러나 폐지된 이후에도 우체 업무는 계속되어, 실제로 우체 업무가 마감된 것은 11월 20일이었다고 한다.
1970년에는 국가사적 213호로 지정되었고
71년 12월에는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72년에는
체신기념관으로 개관했다가 작년인 2012년 8월 우정총국을
재개국하여 우편업무를 보고 있다. 기념관 역시 내부에 재조성되어 있다.
- 역사적 사건
1884년
10월 우정국 낙성식 때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급진 개화파이자
보빙사였던 홍영식이 총판이었는데 급진개화파들은 1884년 4월
당시 조선 내부에 주둔하던 청군 1,500명이 청, 불 전쟁
때문에 청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보고 개혁의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 때부터 차곡차곡 물리력을
쌓기 시작하여 유학생들로 구성된 사관생도, 숙직장교가 이끄는 친군전영군, 박영효가 집을 판매한 돈으로 고용한 역사들, 부상 100여명, 운웅렬의 470인
중 함경도로 돌아가지 않은 70명 등 총 200~300명
정도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10월 낙성식 때 거사를 일으켰고 일련의 계획을 갖고 있었으나 별궁 방화 실패,
청과 민비의 결탁으로 인한 고종의 창덕궁 이어 등과 더불어 원래의 무력이 그렇게 강하지 않았기에 결국 청군에 의해 3일만에 제압당하고 말았다. 정변 주도층은 주로 일본 공사로 철수하거나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이들이
갑신정변 때 내세웠던 갑신정강은 갑오개혁에 가서야 실현되게 된다. 비록 실패 하였지만 갑신정변이 아무
의미 없는 개혁 시도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 조사 방식
수업자료와 우정총국 공식 홈페이지를 참조하였다.
4) 답사 소감
우정총국이
답사 날 현재 업무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정말 충격에 휩싸였었다. 천도교 대교당에 이어 우정총국도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서 운영을 하고 있다니, 내가 갖고 있는 역사 시설물에 관한 상식(문화재로서 해당 물체를 영구히 잘 보존하는 것이 최우선)이 완전히
틀린 것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조사 결과 2012년 8월부터 128년만에 업무를 재개했다는 사실을 알고서 그 충격이 조금
가라 앉긴 했다.
다만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문화재를 잘 보전한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나의 인식의 틀이 변화했다는 것이다. 가령 이전에 갖고 있던 문화재 보전 인식은 해당 물체를 잘
보존해서 현대의 산물들이 최대한 반영되지 않은 채로 영구히 후대에 물려줄 수 있게끔 유지하는 것이 최우선적인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는데, 진정한 문화재 보전이란 그런
물리적인 측면보다도 정신적인 측면, 즉 우정총국의 경우 우정총국이 가지고 있던 고유의 우편 업무 기능을
재개하는 일이 어쩌면 더욱 큰 의미의 문화재 복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엇이
더 옳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 쪽으로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5. 덕수궁
1) 답사 지역 선정 이유
덕수궁은 와 본적이 몇 번 있었는데, 이번 수업으로 근현대사 시기, 특히 대한제국을 배우고 나니 다시 한 번 답사해보고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고 보는 것과 알고 보는 것은 다르기 때문에 전에 못 보던 것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덕수궁을 선정했다.
2) 답사지 이동 경로 및 위치, 동행자
우정총국 방문 뒤 광화문을 거쳐 코리아나호텔, 시청역 1호선 등을 지나 대한문 앞에 17시 45분 경 도착하였다. 도보를 이용했으며 동행자는 없었다. 덕수궁 내에서는 덕흥전, 함녕전,
정관헌, 중화전, 즉조당, 석어당, 중화문, 광명문, 석조전 순으로 답사하였다.
3) 답사지의 역사
- 해당 답사지의 내력
덕수궁은 1593년 선조26년인 조선 후기부터 역사에 나오기 시작했다. 원래는 월산대군의 저택이었으나 선조가 행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1611년에
광해군은 그 저택에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붙였다. 인목대비 유폐 이후 서궁으로 불렸고 1623년에는 경운궁의 대부분을 다시 월산대군 가에 돌려주었다.
그
뒤로 약 280여 년이 흐른 뒤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옮겨오면서 다시 역사에
재등장했다. 대한제국기에 궁으로 사용되다가 통감부기에 이르러 1904년
대화재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다. 물론 나중에 재건은 하였다.
1907년에는 궁의 이름이 덕수궁으로 바뀌었고 1933년에 일반인에게 개방된 뒤 70년을 이어오다 2007년에 덕수궁 복원이 이루어졌다.
- 역사적 사건
석어당은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가 광해군에 의해 10년간 유폐되어 감금생활을 했던 곳이다. 이 사건은 인조 반정이 이루어지는 구실이 되었고, 반정에 성공한
인조는 인목대비에게 정통성을 인정받고 여기에서 즉위했다고 한다.
함녕전은
고종이 1919년 승하한 곳이면서 한편으로는 백범 김구의 목숨을 살린 대청전화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백범 김구의 사형 직전에 고종이 서류를 검토하다가 전화로 사형집행 중지를 내렸다는 일화가 있다. 또한 정관헌에서는 고종 독살 미수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석조전은
서양식 건물로서 근대국가를 상징하는데 이곳에서 외국 대신들과의 수많은 접견들이 이루어졌으며 미소공동위원회와 유엔한국감시위원단 이 이곳에 머무르며
많은 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의 궁역 안에 있었던 중명전은 일제에 의해 을사늑약이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지만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 파견이 이루어진 뜻깊은 장소이기도 하다.
- 조사 방식
수업자료와 덕수궁 내에 비치된 팜플렛, 인터넷 조사 등을 활용하였다.
4) 답사 소감
덕수궁은
오늘 답사했던 곳들 중 가장 규모가 크고 건물도 웅장했다. 중화전이 서양식 기술로 만들어진 근대국가의
상징이었다면 중화전이나 함녕전, 등은 동양식 기술로 만든 조선을 상징한다고 생각하는데, 덕수궁을 보고 있으면 고종이 하루빨리 조선에서 벗어나 나라를 근대화시키고 싶어했음이 느껴진다.
일단
고종이 대한제국을 성립한 후에 곤룡포를 벗고 제복을 입은 것과(동양식 옷이 아니라 서양식 옷이라는 점) 서양식 기술과 동양식 기술의 조화인 정관헌에서 커피를 마시며 외국 사절들과 연회를 즐겼던 점, 그리고 무엇보다 석조전을 건립하여 침전 및 편전으로 사용하려 했던 점 등을 보면 고종은 이 덕수궁 내에서 나름의
야망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