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사시대 ~ 고대국가


0. 흔암리와 송국리 유적은 청동기 시대에 벼농사가 전래하였음을 알려준다.

1. 우리나라 君長制社會에서는 사유재산에 대한 보호는 철저하였다.

2. 고구려에서는 대가들도 사자, 조의, 선인 등의 관료들을 거느렸다.

3. 청동기 시대의 암각화로 반구대암각화, 천전리 암각화,고령 암각화등이 있다.

4.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지역집단의 수장이 묻힌 무덤으로 지배자의 등장을 말해 준다.

5. 신석기인들은 구석기인들과 단절되어 있으며 새로 한반도로 이동해온 우리민족의 기원이다.

6. 비파형 동검과 함께 미송리식 토기는 고조선의 세력범위와 일치한다.

7. 세형동검은 한반도에서만 발견된다.

8. 고조선은 상대부장군 등의 중앙관직을 두고 지방관으로 도위를 파견 하였다.

9. 단군왕검, 소도지역의 천군, 차차웅은 모두 주술사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10. 원시신앙 중 샤머니즘(Shamanism)은 세계적 유형의 원시종교이며 애니미즘(animism)은 우주만물이 모두 영혼을 지니고 있다는 근원적 신앙이었다.

11. 삼한 중 마한이 가장크게 강대하였다. 그중에서도 목지국이 영도세력이 되었다.

12. 신석기시대에는 애니미즘, 샤머니즘, 토테미즘 등의 신앙활동이 있었다.

13. 청동기 문화의 주인공은 무문 토기의 제작사용인들이다.

14. 卵生說話太陽숭배사상과 관련이 깊다.

15. 부여에서는 가뭄이나 장마가 계속되어 오곡이 잘익지않으면 그허물을 왕에게 돌려 왕을 바꾸거나 죽이기도 하였다.

16. 철기문화는 B.C 4세기경 중국의 스키타이 계통의 청동기 문화와 함께전래 되었다.

17. 단군신화의 弘益人間은 고조선이 새로운 지배자에 의해서 새로운 사회질서가 확립 되었음을 말해준다.

18. 櫛文土器人은 뒤에 이동해 온 無文土器人들에게 정복동화되어 우리민족의 주류를 형성 하였다.

19. 청동기인은 주로 구릉지대에 거주하면서 기장수수벼 등을 재배하였다

20. 삼국시대 불교의 유입으로 인해 문화가 크게 발달하였는데 특히 호국사상을 대표하는 仁王經이 널리 읽혔다.

21. 신라의 和白會議와 같은 귀족회의가 있었다는 것은 백제의 政事巖에서의 재상 선출에서 엿볼 수 있다.

22. 고구려 소수림왕 때에 전진에서 순도가 최초로 불교를 전파하였다.

23. 광개토대왕비는 고구려 특유의 예서체로 약 1,800여 자가 수록되어 있으며 주몽의 건국, 왕의 공덕, 능묘의 수묘 등 3부로 구성되었다.

24. 삼국시대 공통적인 지방관으로 도사(道使)가 있어 조세수납군사지휘노동력 동원 등을 담당 하였다.

25. 고대국가체제가 갖추어지면서 노비도 율령체계에 편입되었다.

26. 신라(8C) 문화중 불국사와 석굴암이 이 시기의 문화를 대표한다.

27. 백제가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한 시기에는 22부의 중앙관서와 5, 5방의 내외통치 조직을 완비하였다

28. 본가야를 복속시킨것은 법흥왕때이며대가야를 복속시킨것은 진흥왕때이다.

29. 삼국이 고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각각 태조왕, 고이왕, 내물왕 때의 일이다.

30. 삼국이 고대국가를 완성한것은 각각 근초고왕,소수림왕,법흥왕때의 일이다.

31. 제가회의, 정사암회의, 화백회의는 국왕중심의 귀족정치가 이루어졌음을 보여 준다.

32. 5소경은 수도의 편재성이 가져오는 지방통치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설치 되었다.

33. 화백제도는 귀족과 왕권사이의 권력을 조절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34. 녹읍제도의 부활은 귀족세력의 강화를 의미한다.

35. 통일신라의 국제무역항인 울산항에는 아라비아 상인까지 내왕하였다.

36. 백제가 고구려와 함께 부여계열임을 말해주는 자료로는 왕족의 성이 부여라는 점, 성왕이 국호를 남부여로 칭했다는 점 등에서 알 수 있다.

37. 고구려에서는 삼론종이, 백제에서는 율종이 발달하였다.

38.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전제왕권이 확립되고 갈문왕 제도가 쇠퇴하였다.

39. 고구려는 초기에 석총이, 후기에 토총이 발달하였다.

40. 신라에서 불교가 늦게 공인된 이유로는 고유한 신앙이 강하여 外來宗敎를 배척 하였기 때문이다.

41. 보우는 원의 임제종을 고려에 전래하여 조선 선종의 주류로 발전시키는 토대를 제공하였다.

42. 4C(미천왕) 고구려는 낙랑을 쳐서 중국세력을 우리나라에서 몰아내는데 성공 하였다.

43.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후연(後燕)을 공격하여 요동을 확보하였다.

44. 원효의 화쟁사상은 교종불교의 제학설을 한단계 높은 차원에서 통합하려는 사상 이다.

45. 신문왕은 유학을 통치이념으로 확립하기 위해 국학을 정비하였고, 설총은 군주 에게 도덕정치를 요구하는 <화왕계>를 지어 신문왕의 노력을 뒷받침하였다

46. 강서대묘에서는 四神圖가 발견되었다. 이외에 백제 송산리 6호분, 타카마쓰 고분, 기토라 고분에서 사신도가 나왔으며 이는 도교적 요소를 엿볼수 있다.

47. 일본화폐가 발해 유적지에서 발견된 바 있다.

48. 신라 골품제도는 고대국가 확대과정에서 족장세력의 대소에 따라 골품이정해졌다.

49. 최치원의 사산비명 중 신라 선종사를 소개하고 있는 것은 [지증대사비문]이며 골품제를 수록하고 있는 것은 [낭혜화상비]이다.

50. 신라 下代 변방을 수비하던 軍鎭세력, 지방 호족세력 등이 독자적인 지위를 확보 하게 되었다.

51. 신라말기 儒佛과 풍수도참사상이 복합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52. 원효는 정토신앙을 통해 十門和諍論을 강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각 종파간의 대립을 조화융화하고자 하였.

53. 황룡사 9층탑, 왕흥사, 백고좌회 등은 모두 호국신앙을 나타낸다.

54. 나말 신라의 역사무대가 중앙에서 지방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55. 공의 난(770)‘96각간의 난이라고도 하며 왕위쟁탈전의 시초였다. 왕위쟁탈전은 신라 하대 진골 귀족간의 다툼이다.

56. 통일이후 신라는 주군에 외사정(外司正)을 파견하였다.

57. 신라말의 지리도참설은 송악이 國都가 될 만한 吉地라고도 하였다.

58. 발해의 정혜공주묘는 횡혈식 석실분(굴식 돌방무덤)으로서 고구려계통의 영향을 보여준다. 반대로 정효공주묘는 전축분(벽돌무덤)으로서 당적 문화계통의 영향을 보여준다.

59. 장보고는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상무역을 독점하여 커다란 정치세력으로까지 성장 하였다.

60. 원효는 각 종파간의 대립을 조화, 융화하고자 十門和諍論을 지었다.

61. 신라의 이방부(理方部) 발해의 禮部와 그 기능이 같다(형률담당).

62. 신라 민정문서에 의하면 연령별남녀별 인구수가3년마다파악되었다(6등급).

63. 만파식적 고사는 신문왕대의 전제왕권강화와 신라의 평화를 상징한다.

64. 발해사를 처음으로 우리 민족사의 연장으로 보려하였던 것은 유득공의 [발해고]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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