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절 일제 식민정책의 전환 ]

 

1. 문화정치의 표방

3·1 운동의 영향으로 일본은 헌병경찰정치를 버리고 문화정치를 실시한다고 발표

- 새 총독 사이토의 부임과 함께 표방됨

- 총독에 문관도 임명될 수 있게 함 실제론 한명의 문관도 총독에 임명되지 않음

- 보통경찰제도의 채용 경찰기관과 인원은 오히려 증가함

- 언론 통제의 완화 동아일보’,‘조선일보’,‘시대일보등이 창간되었지만 검열이 심했음

일본에서 관동대지진(1923)이 일어났을 때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

 

2. 식량의 약탈

1918년 일본에서 쌀값이 급등하여 미소동 발생 한국의 쌀에 대한 요구 증대

산미증식계획

- 1910년대에 시작한 미작개량 정책이 더욱 강력하게 추진된 것

- 쌀의 증산은 1.5배도 못되었지만, 수출량은 8배 이상 증가하여 국내에 큰 피해

- 일본의 산미증식계획은 1934년에 중지되었지만, 증가된 수리시설에 의한 농민들의 부담 증가

 

3. 상품시장의 구실

1920년에 일본과 한국과의 관세제도가 철폐

- 일본으로부터 한국으로 수입되는 것은 완제품(의료···담배·종이·기계 등 일용품)이 주류

- 한국으로부터 일본으로 수출은 쌀을 주로하는 식료품과 원료·원료제품이 대부분

1930년대에 들어서는 일본의 한국에 대한 투자의 증가로 인해 완제품의 수입은 감소됨

 

4. 중공업에의 투자

1920년에 총독부는 회사령을 철폐

- 회사의 설립은 허가주의에서 신고주의로 변함

- 낮은 임금과 값싼 수력전기의 개발 가능성으로 일본인 자본의 투자 증가

- 1926년에 조선수력 전기회사가 설립되어 부전강의 수력이 개발

- 그 전력을 이용하는 조선질소비료회사가 흥남에 건설 일본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

1931년에 만주사변으로 만주를 지배하게 되어 더욱 투자가 촉진됨

- 일본은 국방국가 건설의 필요로 공업의 비중이 급속도로 커짐

 

5. 광산자원의 약탈

1930년대 중반부터 광산액이 급증

- 중국 침략을 위한 전쟁에 필요로 하는 석유·고철·공작기계 등의 수입하는데 필요한 금을

얻기위해 금광을 집중 개발

1941년에 미일전쟁이 벌어지면서 철·석탄·중석·흑연·水鉛·마그네사이트 등으로 옮겨감

- 한국을 일본의 병참기지화하는 성격이 나타남

 

6. 민족말살정책

일본은 1937년에 중국에 대한 전면적인 침략을 개시하고, 1941년에는 미국에 대해 선전포고

일본은 내선일체라는 표어를 내걸고 민족말살정책을 감행

- 모든 민족적인 문화활동을 금지시킴

- ‘동아일보’,‘조선일보등 한글로 발행되는 신문과, ‘문장등 한글로 된 잡지가 모두 폐간

- 조선어학회(한글학회), 진단학회 등의 활동이 금지됨 한국어,한국사에 대한 연구 금지

- 신사참배 강요, 창씨개명 강요함

식량·원료 및 노동력의 강제적인 동원

- 쌀의 강제 공출, 각종 금속기가 강제로 헌납됨, 인적 동원의 강요

 

 

[ 2절 민족자본과 농민·노동자의 상태 ]

 

1. 민족자본의 상태

일제의 정치적 보호하에서 군수공업·광업 등 일본 자본이 급성장 함

민족자본의 성장

- 김성주의 경성방직

󰠆 1919년에 호남지방 지주를 중심으로 한 민간자본으로 창립된 민족기업

󰠐 특히 민족정신이 강한 서북지방에서 환영

󰠐 중앙중학과 보성전문을 맡아 민족교육을 담당

󰠌 동아일보를 운영하여 민족의 여론을 대변

- 안희제의 백산상회

󰠆 영남지방 지주들의 자본으로 부산에서 창립

󰠌 독립운동의 자금을 공급, 장학사업·협동조합 운동을 전개

- 평양의 메리야스공업, 고무공업

󰠆 메리야스공업은 1920년 이후에 활기를 띰, 주로 양말을 생산

󰠐 가난한 소상인 출신(공신양말-이진순,삼공양말-손창연)의 경영주가 많았음

󰠐 이병두가 고무신을 고안하여 일반 대중으로부터 환영받음

󰠌 일본의 기업이 따르지 못하는 중요한 민족기업으로 성장

 

2. 농민의 영락

토지조사사업으로 일본인 대지주 증가, 양반 지주들의 특권은 인정됨

많은 농민들이 영세소작농으로 전락

- 자작농이라도 지극히 적은 농토밖에 소유하지 못한 영세농이 절대적인 비중

- 소작료는 생산량의 1/2, 비료대·수리조합세·곡물운반비·지세 등을 소작농이 부담

- 농민의 생활이 점점 곤란해져 화전민이 격증함

농민들의 반항운동이 격화되자 일본은 농촌진흥운동(1933) 실시

- 자력갱생에 의하여 춘궁을 퇴치하고 부채를 근절하여 농가의 경제를 갱신

- 농가의 식량생산과 부업을 장려

- 영세농민이 절대다수인 현실에서 성과를 기대할 수 없었음

농민의 반항운동이 격화되었기 때문에 이를 완화시키려는 일본의 정책적 수단에 지나지 않음

 

3. 노동자의 생활

광공업의 발전에 따라 노동자의 수도 급증

한국인 노동자의 임금은 한국거주 일본인 공장 노동자의 절반 수준도 안됨

많은 노동자들이 재해와 질병으로 고생, 실업자도 증가

노동문제가 당시의 중요한 사회문제로 부각

 

 

[ 3절 민족운동의 새 양상 ]

 

1. 물산장려운동과 소작·노동쟁의

물산장려운동

- 1920년대에 상인 및 지주들이 많이 기업으로 진출하였지만, 일본의 자본에 비해 미약

- 1923년에 물산장려회가 조직되어 국산품 애용운동 펼침

소작쟁의

- 1920년대 중반부터 크게 증가

- 소작권 이동에 대한 반대와 소작료의 인하가 주된 요구

- 일본인 지주의 농장에서 많이 일어남

(함남 고원의 동척농장쟁의, 평북 용천의 불이농장쟁의)

노동쟁의

- 일본의 대기업들이 진출하여 광공업이 발전함에 따라서 급격히 증가

- 1920년에 조선노동공제회, 1922년에 그 후신인 조선노동연맹회가 조직되어 적극성을 띰

- 1921년 부산 부두노동자 파업, 1923년 서울 고무여공 파업, 1929년 원산 노동자 총파업 등

1920년대에 크게 일어난 물산장려운동이나 소작쟁의 및 노동쟁의는 일제에게 큰 위협

일본은 탄압정책으로 일관, 1930년대에 중국에 대한 침략을 강행하면서 더욱 탄압이 심해짐

 

2. 신간회의 활동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 방향을 모색하게 됨

사회주의와의 연결

-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고, 레닌은 약소 민족의 독립운동에 대한 원조를 주장

- 1921년 상해에서 이동휘를 중심으로 고려공산당이 세워지고, 레닌으로부터 자금 원조도 받음

- 1925년 조선공산당을 조직하고 노동쟁의 등을 통한 조직적 항일운동을 일으킴

동경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무정부주의(아나키즘) 운동이 일어남

- 절대적인 자유를 내세워 일체의 권력을 부인하는 이 운동은 폭력항쟁의 과격한 방법을 취함

- 1923년 박열의 일황암살계획

신간회의 조직

- 6·10 만세운동 다음해인 1927년에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공동전선을 펴서 조직

- 일본은 문화정치 표방과 한국 민족운동의 내막 파악위해 합법적인 기관으로 인정함

- 신간회의 강령 󰠆 우리는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함

󰠌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

- 일본 경찰의 심한 감시가 있었지만, 전국에 많은 지회가 설립되고 회원도 3만에 이름

- 여성단체인 근우회가 방계단체로 신간회의 활동에 동조

- 신간회는 광주학생운동 때 조사단을 파견하고 민중대회를 계획함

- 만주사변이 일어나던 1931년에 사회주의 계열의 주장에 의하여 해산됨

 

3. 6·10 만세운동과 광주학생운동

6·10 만세운동

- 19264월에 순종의 붕어

- 장례일인 610일에 항일시위운동 계획 일본의 삼엄한 경계

- 610일에 가두 시위를 벌임

“2천만 동포여! 원수를 구축하라. 피의 값은 자유이다. 대한독립만세.”

광주학생운동

- 1929년 한국학생과 일본학생들과의 충돌로 발생 일본은 한국학생들 검거

- 검거된 학생들의 석방과 민족차별의 철폐, 약소민족의 해방, 제국주의 타도 등을 외치면 시위

- 1930년까지에 걸쳐서 국내 각지에 파급됨

 

4. 해외의 독립운동

1920년의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 봉오동 전투 :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가 합세하여 일본군에게 승리

- 청산리 전투 :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의 독립군이 일본군 격파

- 일본군은 그 보복으로 만주의 한국인 부락을 습격 (경신참변)

경신참변 후 독립군 부대들은 러시아 등지로 흩어졌으나, 효과적인 활동을 위하여 통합운동 전개

- 만주의 독립군은 참의부·정의부·신민주 셋으로 정리됨

󰠆 參議府 : 집안현을 중심으로 압록강 연안지방에 설립 (임시정부 직할 하)

󰠐 正義府 : 길림성과 봉현성을 중심으로 성립 남만주 지방에서 한족행정부로 성장

󰠌 신민부 : 북만주에서 自由市사변 이후 러시아로부터 돌아온 독립군을 중심으로 통합

- 한국인의 자치를 집행하는 민정기관과 독립군의 훈련과 작전을 관장하는 군정기관 갖춤

만주에서 독립군의 활동이 계속되자, 일본은 1925년에 총독부 경무국장 미쯔야를 보내어 탄압

- 만주의 군벌 장작림과 협약(三矢협약)을 맺고 탄압

- 한국의 독립운동자들은 중국인 관리에게 붙잡혀서 일본으로 인도됨 독립군에게 큰 타격

- 만주사변(1931) 이후 독립군은 반만중국군과 연합하여 투쟁

- 중국, 연해주 등으로 흩어짐

공포수단에 의한 항일투쟁

- 김원봉의 의열단과 김구의 애국단의 활동이 두드러짐

- 의열단원 나석주 : 서울에서의 동척폭탄사건 (1926)

- 애국단원 이봉창 : 동경에서의 일황 암살을 위한 수류탄투척사건 (1932)

윤봉길 : 상해에서의 홍구공원 사건 (1932)

임시정부의 활동

- 이승만의 대통령 취임반대 문제, 이동휘의 레닌으로부터 받은 자금 사용문제 등으로 분열

- 이를 단합시키려고 1923년에 국민대표회의가 소집(실패), 재정의 궁핍으로 활동이 거의 중단

- 1937년에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통일을 위한 움직임이 일어남

- 1941년에 미일전쟁이 일어나자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다시 단결함 (상해에서 중경으로 이동)

- 임시정부는 미일전쟁이 일어난 다음날 일본에 대하여 선전포고하고 대외적인 외교활동 벌임

- 정치단체의 통합과 함께 여러 독립군도 임시정부 밑에 있는 광복군으로 통합

- 중국군·영군군 등과 협동작전을 수행

 

 

[ 4절 민족문화의 수호 ]

 

1. 민족교육의 저항

3·1 운동 이후 문화정치가 표방됨에 따라 일본의 교육방침에도 표면상의 변화가 일어남

- 일본은 한국인의 교육 정도를 일본인과 같게 한다는 구호를 내세움

- 학교도 늘고 서울에 대학까지 설치되었지만, 일본인을 위한 교육기관의 확장이였음

1930년대 들어서 일본은 교육즉생활주의를 표방

- 일본어와 실업 교육에 치중 군수공업의 발달에 따른 필요

전쟁말기에는 민족말살정책에 따라 한글수업 폐지, 일본어 상용을 강요

교육에 대한 민족적 요구에 따른 움직임

- 교육기관이 너무 적었기 때문에 보조 교육기관의 필요성이 증가됨

- 재래의 서당이 개편되어 개량서당으로 발전, 농촌 아동들의 초등교육기관의 구실을 함

- 개량서당 중에는 보통학교로 승격하는 경우도 있었음

- 3·1 운동 이후 노동야학이 크게 발전함 만주사변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줄어듬

- 학생들의 농촌계몽운동(브나로드 운동) 전개

 

2. 국학연구

1) 國語 연구

주시경의 제자들로써 조직된 조선어학회가 그 중추적 역할을 담당

- 1921년 조선어연구회로 발족한 후 1931년에 조선어학회로 개칭 (현 한글학회)

- 이윤재,이극로,최현배,김윤경 등이 중심

-한글이란 잡지를 발간하여 국어 보급에 힘씀

- 사전 편찬에 착수, 맞춤법의 제정, 표준어의 사정, 외래어 표기법의 통일 등 업적

- ‘한글날의 제정

2) 國史 연구

1920년대에는 애국적 사학의 전통을 이은 민족주의적 사학이 성하였음

- 박은식 : “한국통사”,“한국독립운동지혈사등 저술

- 신채호 : 고대사 연구에 주력, 郞家思想을 강조, “조선사연구초”,“조선상고사등 저술

- 정인보 : “조선사연구”(오천년간 조선의 얼) 저술

- 최남선 : “兒時朝鮮” ‘조선정신의 표현으로서 단군신화를 연구

- 문일평 : “한미오십년사” ‘조선심의 발로로서 한국사를 이해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사에 있어서의 사회적 발전에 주목하여, 그 발전과정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려는 학풍이 나타남

- 안 곽 : “조선문명사

- 백남운 : “조선사회경제사”,“조선봉건사회경제사유물사관의 입장

개별적인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고 충실하게 이해하려는 실증사학이 발생

- 1934년에 조직된 진단학회를 중심

- 이병도·손진태·이상백·김상기·고유섭·최현배 등

- 일본 학자들의 연구 활동에 맞서서 진단학보발행

 

3. 현대문학의 성장

3·1 운동 이후, 문학을 하나의 독립된 예술활동으로 인식

- 1919년에 창조’, 1920년에 폐허’, 1922년에 백조등 문학 동인지 탄생

- 김동인 감자” : 자연주의 문학

- 염상섭 삼대” : 사실주의 문학

- 감상적인 심미주의에 흐른 문학이 일어나기도 함

1920년대 중엽에는 병약한 감상의 예술에 대한 반발로 새로운 경향이 일어남

-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문학 : 한용운 님의 침묵”, 이병기의 시조 현대화

- 신경향파 문학 : 당시의 사회주의 운동에 영향을 받아서 가난에 허덕이는 인간들을 주로 묘사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험악한 현실과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려는 경향이 나타남

- 1939년에 이태준,정지용 등이 참여한 문장발행

- 문학을 정치세계로부터 옹호하려는 경향이 나타남

- 순수문학이 주장되기도 함

일제 말기에는 순수문학의 활동도 탄압의 대상이 됨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