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절 개화정책과 그에 대한 반발 ]
1. 통상 개화론의 대두
․초기 통상론
- 박제가 (북학파) : 청,일본,서양과 통상해야 국가 부강 주장
- 이규경 : 순조 32년(1832), 영국상선 통상 요구때 허락 주장
- 최한기 : “지구전요” 저술, 무호개방 주장
․박규수·오경석·유홍기 등에 의한 통상론 추진
- 박규수 : 박지원의 손자
- 오경석 : 중인 출신의 역관, 청 왕래하면 “해국도지”등 수입
- 유홍긱 : 중인 출신 醫 종사
․대원군의 정권 하야 (고종 10년,1873)
2. 開港
․운양호 사건 : 고종 12년(1875)
- 대원군의 정권 하야를 통상조약 강요의 기회로 삼음
- 譯官 오경석이 우의정 박규수를 움직여 통상 수교 방침을 결정
- 신헌(申櫶)을 파견하여 구로다와 협상
․朝日修好條規 (병자수호조약, 강화도조약) : 고종 13년(1876)
- 12조로 구성
조선이 자주의 국가로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 ← 청의 종주권 배격
20개월을 기하여 부산과 그 밖의 2개의 항구를 개항 - 원산만,인천
일본은 수시로 조선의 해안을 측량
개항장에는 일본인의 조차지(租借地)를 설정, 일본인의 치외법권 규정
- 원산만 : 러시아의 남하에 대비
인 천 : 정치적 이용 - 인천으로부터 쌀의 수출은 금지됨
3. 개화정책의 추진
1) 개화정책에 따른 문화 도입
․김기수를 수신사로 임명하여 일본에 파견
- 고종 13년(1876) ; 강화도 조약이 성립된 해
- “일동기유”를 저술, 고종에게 바침 ⇢ 신문명에 대한 조심스런 비판
․일본은 하나우사를 公使로 파견, 서대문밖의 청수관(청연정)을 假 공사관으로 삼음
․김홍집(김굉집)이 수신사로 방일
- 고종 17년(1880)
- 청의 황준헌 “조선책략”, 정관응 “이언(易言)”을 가져옴
* 조선책략 : 나라가 부강하려면 서양의 제도와 기술을 배우고,
러시아 남침을 막으려면 친중국·결일본·연미방하여 자강을 꾀하여야 함
* 이언 : 국가를 부강하게 하려면 기술뿐만 아니라 정치제도도 받아들여야 함
․조사시찰단(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
- 고종 18년(1881), 조준영·박정양·어윤중·홍영식 등
- 각종 시설을 시찰하기 위한 전문 위원의 파견
․청의 권고에 따라 김윤식을 영선사로 삼아 청의 천진기기국 파견
- 양반 출신의 학도, 공장(工匠) 수십명
- 신식무기 제조법, 군사관계의 기초과학을 배움
2) 개화 정책에 따른 정치개혁
․군사제도의 개편 (고종 18년,1881) ⇦ 왕권 강화를 위한 군대 개혁
- 5군영 → 양영(무위영,장어영) : ‘大將’에 국왕의 친근자 임명
- 별기군 신설 : 일본인 장교초빙, 국왕의 근위병 성격
- 사관생도 교육 : 양반의 자제 100여명
․행정기구의 개혁
- 대체로 청의 제도를 참작
-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
그 밑에 12司 (사대·교린·군무·변정·통상·군물·기계·함선·어학·典選·理用) 설치
4. 위정척사 운동
․위정척사 사상 : 개화의 조류에 반대하는 유학자들의 사상
- 성리학에 근본을 두고, 그 밖의 다른 이질적 문화를 배척
- 양요와 강화도 조약의 영향으로 척화론의 형태를 띰
- 이항노 고종 3년(1866;병인양요가 있던 해)에 상소 → 주전론 주장
고종 4년(1867) 언행록인 “화서아언” - 침략 배격
內修가 있은 연후에 外攘이 가능
의병을 조직하여 관군과 호응하여 외적과 싸울 것 주장 ⇒ 의병운동에 영향
경제적 침략에 대한 경고 → 서양 물품을 사용하지 말 것을 주장
- 강화도조약 이후 ‘왜양일체론’ 대두 ← 최익현의 ‘五不可疏’ 고종 13년(1876)
․김홍집(김굉집)이 가져온 “조선책략”에 대한 유학자들의 반발
- 영남 유학자들이 이만손을 疏頭로 하고 낸 ‘영남만인 疏’ ⇒ 축출되었던 대원군 추앙받음
5. 임오군란
․대원군의 정권 복귀 노력
- 고종 18년(1881), 이재선을 국왕추대 → 실패
․임오군란 (고종 19년,1882)
- 개화와 수구 세력의 대결로 정계혼란, 일본 세력 침투에 대한 민족적 반항심
- 별기군 창설후 구식 군대에 대한 차별대우 등에 의해 발발
- 별기군을 훈련하던 일본인 장교 살해, 일본 공사관 습격
․대원군의 재집권
- 양영과 별기군 폐지 → 5군영 부활
- 통리기무아문 폐지
6. 청·일의 침략행위와 열강과의 통상
․일본의 출병소동 → 청의 군대파견 (영선사 김윤식의 의견)
- 일본에게 빼앗긴 조선에 대한 우월적 지위 회복 목적
- 대원군을 납치하여 텐진(天津)으로 호송 ← 군란의 책임자라는 이유
․제물포조약 (조선,일본) : 고종 19년(1882)
- 군란의 주모자 처단, 일본인 피살자 유족에게 위문금 지불,
일본 정부에 손해 배상금 50만원 지불, 일본 공사관에 경비병 주둔
․제물포조약이 체결되긴 했지만, 청이 주도권 계속 유지
- 정권을 담당한 명성황후는 청에 의존
- 조선의 요청으로 청은 묄렌도르프와 馬建常을 외교고문으로 파견
- 고종 19년(1882)에 ‘통리교보통상사무아문(외아문)’과 ‘통리군국사무아문(내아문)’ 설치
외교와 통상 군국의 기무와 내정의 일체
- 군사제도 : 친군영을 세우고 그 밑에 4영(좌·우·전·후), 청국식으로 훈련
- ‘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 : 청국인의 조선안에서의 거주·영업·여행의 자유 인정
→ 청국 상인의 수 급증하여 조선 상인에게 타격 ⇒ 반청감정
․열강과의 통상 ⇐ 일본의 진출을 막으려는 청의 의도
- 고종 19년(1882)에 미국과 통상조약, 그 다음해(1883)에 비준
- 영국·독일과도 고종 19년에 의정되었다가, 익년에 작성, 그 다음해(1884)에 비준
- 이탈리아·러시아 : 고종 21년(1884)에 조인
- 프랑스 : 고종 23년(1886)에 조약
- 오스트리아·벨기에·덴마크 등과 통상조약 체결
[ 제2절 개화당의 개혁운동 ]
1. 개화당의 탄생
․개화당(독립당)의 탄생 : 급진적 개화정책 주장
- 김옥균·박영효·박영교·서광범·홍영식 등 (민비에게 압박받는 양반층) ← 유홍기의 영향
- 이동인(승려), 변수(중인), 유상오 부자(무인), 이창규(상인) 등 참여
- 신분차별 폐지,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본떠 정치쇄신, 청의 간섭배격 등
일본에게 원조받기를 희망
․개화당의 활동
- 임오군란 이후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고종 19년,1882)부터 활발
김옥균·서광범 등이 동행
- “한성순보” 간행, 일본에 유학생 파견
우정국(우편), 전환국(화폐주조), 기기국(무기제작) 설치
- 경기도 광주에서 신식군대 양성 → 민비세력의 반대로 곧 중지
- 열강의 외교사절과 빈번히 접촉 ← 외교 활동의 중요성 인식
․민비 세력의 반발과 일본의 지원 미비로 활동에 한계
2. 갑신정변
․정변의 준비
- 김옥균이 일본으로부터 300만원의 차관 계획 (고종 20년,1883) → 실패
- 고종 21년(1884)에 ‘청불사변’ 발생 ⇒ 청의 간섭을 배격할 기회로 생각
- 서재필 등 합류, 일본(다케소에)의 지원 약속
․갑신정변 단행 (고종 21년,1884)
- 홍영식이 총판(總辦)으로 있는 우정국 개국 축하연 이용
- 대원군의 귀국 요청 ⇐ 민비세력 압도위해
문벌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제정
국가에 해를 끼친자 처벌 ⇐ 민씨 일파의 척족세력 제거
- 재정을 호조로 단일화
타조법 개혁하여 국가 수입 확대
관제를 개혁하여 회의로써 정책 결정
․갑신정변의 실패
- 청군의 출동으로 실패 (서울주둔군 - 청:1500명, 일:200명)
- 일본군 물러나자 김옥균·박영효 등 일본으로 망명
- 다케소에 공사는 공사관에 방화한 뒤에 일본으로 귀국
- 일본 경비대 본부, 일본인 거류지 등이 군중의 습격 받음
3. 열강세력의 침투
․한성조약 (고종 21년,1884)
- 이노우에가 대표로 갑신정변의 책임문제보다는 선후책의 강구를 위주로 하는 해결 꾀함
- 일본인 피살자에 대한 위휼금 지불, 공사관 건축비 배상 등...
․天津條約 (고종 22년,1885) : 청-일
- 일본은 갑신정변을 계기로 청의 주도권을 약화시키려 함
- 청·일 양군의 철병
- 교련을 위한 인원 파견 금지, 파병시 사전 통고
- 청의 원세개는 서울에 남아 심한 간섭 → 청 상인들의 집단거주
․러시아 세력의 등장
- 러시아와 통상조약 : 고종 21년(1884)
- 러시아 대표 웨베르의 외교활동 → 정부(고종,민비)의 친러적 성향
- 청의 러시아에 대한 경계 대원군 귀국, 뭴렌도르프대신 Denny를 외교 고문으로 추천
뭴렌도르프에 의해 개선된 조선해관의 사무를 청에 예속
- ‘조로육로통상약정’ 체결 경흥이 러시아와의 무역에 개방
러시아인 조차지 허용
러시아인의 두만강 항행 인정
- 원산과 절영도에 저탄소(貯炭所) 설치 시도 → 청의 간섭으로 실패
․영국의 러시아에 대한 견제
- 청의 양해하에 전라도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 (고종 22년,1885)
- 러시아의 반발로, 청의 중재하에 영국함대 철수 (고종 24년,1887)
․조선의 열강 침투에 대한 반발
- 유길준 “중립론” : 고종 22년,1885 → 발표도 못됨
- 박정양을 주미 전권공사로 미국에 파견 (고종 24년,1887)
- 독일 영사 부들러의 영세국외 중립국 제안 → 묵살
[ 제3절 동학 농민군의 항쟁 ]
1. 농민의 동요
․정부의 재정 궁핍 → 농민에게 전가
․일본의 경제적 침투
- 일본의 곡물 수입(침탈) 증가
․방곡령
- 고종 26년(1889) : 함경도
- ” 27년(1890) : 황해도
- 일본의 항의로 효과를 거두지 못함
2. 동학 농민군의 봉기
․교조신원 운동 (고종 29년,1892)
- 전라도 삼례에서 충청·전라 감사에게 교조의 누명 풀것과 교도에 대한 탄압금지 요구
- 교조신원은 기각되었으나 교도탄압 금지 약속
- 고종 30년(1893)에 박광호를 소두로 복합상소 → 실패
- 충청도 보은에 2만여명 집결 →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구호
- 정부는 탐학한 향리를 징벌할 것을 약속하여 해산시킴
․군사행동 (고종 31년,1894)
- 고부군수 조병갑의 횡포 → 만석보 水稅의 강제 징수
- 전봉준의 지휘 아래 고부군청 점령 → 무기탈취, 곡식 빈민들에게 분배, 만석보 파괴
- 전부는 안핵사 파견 조사 → 전기 민란의 책임을 동학 교도에게 떠 넘김
- 전봉준·김개남·손화중 등을 중심으로 재 봉기
倡義文 산포, 보국안민을 위해 궐기 호소
‘民은 국가의 근본이다...’
- 고부를 점령한 뒤에 白山에 진을 옮겨 대오정비
3. 집강소의 설치와 항일전
1) 관군의 격파
․전주에서 출동한 관군을 황토현의 싸움에서 격파 → 정읍·고창을 거쳐 무장 점령
→ 영광을 거쳐 함평에 도달
․정부에서는 홍계훈을 양호초토사에 임명 토벌 → 장성에서 패배 → 동학 농민군 전주 점령
2) 휴전의 성립
․독학 농민군이 전주 점령 즈음, 청군·일본군 출동 → 정부의 휴전제의
․폐정 개혁을 조건으로 휴전 성립
- 양반들의 부당한 가렴주구 배격
- 외국상인의 침투 반대
․동학 농민군의 해산
- 각 촌마다 包를 설치 (村村設包)
- 전라도 53군에는 집강소(일종의 민정기관) 설치 → 폐정개혁에 착수
- 전주에 집강소의 총본부인 大都所를 두어 전봉준이 총지휘
- 요직에는 행정에 대한 지식이 있는 잔반이나 향리들이 임명
․개혁의 요강
- 탐관오리, 횡포한 부호,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 징벌
- 노비문서 불태울 것
- 천인의 대우 개선, 제한적인 과부 개가 허락
- 인재등용, 명분없는 잡세 폐지
- 公私債의 무효화
- 토지를 평균으로 나누어 경작하게 할 것
- 일본의 침략에 내통하는자를 엄벌
․동학 세력은 三南 지방을 비롯하여 평안도·함경도까지 미침
3) 동학 농민의 재 봉기
․청군·일본군의 출동으로 정세 혼미 → 斥倭를 구호삼아 북진
․공주에서 일본군과 합세한 관군에게 패하고, 태인에서 패배
→ 전봉준이하 많은 지도자들이 체포 혹은 피살 → 해산
4) 동학 운동의 의미
․양반 사회에 항거하여 일어난 대규모적인 농민들의 반항운동
․외국의 자본주의 침략에 대항
4. 청·일의 침략경쟁
․동학운동 → 청·일은 조선에 있어서의 세력확장의 기회로 보고 군사 출동
․청의 공동 철병 제안 → 일본의 거부, 공동으로 내정개혁 추진 제의
․청일전쟁 발발 → 일본의 승리
․하관조약(시노모세키 조약) 체결 (청-일)
- 조선은 완전한 자주 독립국가로 확인 ⇒ 청의 종주권 부인
- 청이 요동반도와 대만을 일본에게 할양
[ 제4절 갑오경장 ]
1. 개혁의 실시
1) 일본의 내정 개혁 요구 → 정부의 거절 → 군대 출동하여 경복궁 점령,
대원군 집정, 김홍집을 수반으로 한 친일·중립계 정부 구성
2) 갑오경장 (고종 31년,1894)
․군국기무처의 설치
- 김홍집을 총재관으로 17명의 회의원으로 구성
- 초정부적 존재 → 국왕·왕비·대원군 무시
- 세력 제거되자 군국기무처 폐지시키고 개혁 진행
․정치상의 개혁
- 開國紀元 사용 → 청과의 종속관계 벗어남을 나타냄
- 의정부와 궁내부를 구별
궁내부 : 과거의 왕실 관계 여러 관부를 정리하고 간소화
의정부 : 총리 대신을 최고로 하여 8개 아문 (6조+외무,농상)
-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치고 7부(외부·내부·탁지부·법부·학부·농공상부·군부) 둠
- 관리의 品級을 개정하고, 品에 따르는 월봉제도 수립
- 과거제도 폐지, 새로운 관리 임용법 시행 → 양반·상민이나 문반·무반의 차별 없앰
- 지방관제 개혁 8道 → 23府 → 13道 개편
지방관으로부터 사법권·군사권 박탈
- 사법권을 행정기구에서 분리 독립 ← 재판소 구성법 공포
1심 재판관 : 지방 재판소, 개항장 재판소
2심 ” : 고등 재판소, 순회 재판소
- 경찰권 일원화
서울 : 경무청
지방 : 관찰사 지휘하에 경무관 둠
․경제적 개혁
- 재정의 일원화 탁지부(度支部)에서 재정에 관한 사무 담당
탁지부 관하에 220개 처의 徵稅署, 9개처의 管稅司 설치
- 화폐제도 정리 : 신식화폐장정에 의하여 은본위제 채택, 수종의 동화로써 보조화폐
⇒ 조세의 금납제
- 도량형 개정 통일
․사회적 개혁
- 신분제도 철폐
- 고문이나 연좌법 폐지
- 남녀의 조혼은 금함 (남자20세, 여자16세)
- 모든 과부의 재가 허용, 관직에서 물러난 후 상업 종사 가능
- 양자 제도의 개정, 의복 제도의 간소화
2. 개혁의 파문
․일본의 자본주의가 침투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
- 일본 화폐 혼용 가능
- 군사제도의 개혁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음
․조세의 금납제
- 농촌에까지 화폐가 널리 유통되지 않아서 농민들에게 부담
․대원군의 불만 → 일본은 공사를 오오도리에서 이노우에로 교체하여 대원군 축출
- 김홍집·박영효 연립 내각 성립
- 홍범 14조 (한국 최초의 헌법)
․러시아·독일·프랑스가 요동반도를 청에게 다시 반환시킴
→ 배일·친러 세력 형성 : 민씨세력
→ 박영효 등 친일세력 축출 → 이범진·이완용 등 친러파 기용
․을미사변 (고종 32년,1895)
- 일본의 친러세력 축출, 친일세력 부활 의도
- 이노우에의 뒤를 이은 미우라가 주도
- 김홍집을 수반으로한 새 내각 조직
․급진적 개혁의 추진 (을미개혁)
- 태양력 채용
- 어린애에 대한 종두규칙 발표
- 서울에 소학교 설치
- 충주·안동·대구·동래에서 우체 사무개시
- 一世一元의 연호 사용, 이듬해부터 건양(建陽)
- 군제 변경 : 중앙에 친위대, 지방에 진위대
- 단발령
․을미사변, 단발령 등으로 반일 분위기 고조
→ 의병 (유인석·이소응·이춘영 등) 봉기
[ 제5절 개화기의 상공업과 사회사상 ]
1. 개항후 상공업의 변화
1) 개항초기 : 외국 상인의 활동범위 제한
․객주·여각(도고상인)은 보부상을 통하여 수입품 판매나 수출품 매입으로 재부 축적
2) 외국 상인의 내륙에서의 상업활동 개시
․객주·여각 및 보부상에게 큰 타격
․객주·여각의 진취적 상인들은 상사회사를 조직
- 평안도人이 처음 평야에 설립한 대동상회 등...
- 서적출판 목적의 廣印社
- 술을 양조 판매한 長春社 민간의 합자회사
- 농민들의 稅穀 환금 담당한 米商會社 - 관설회사
⇢ 관설회사의 수가 더 많았음, 정부로부터 특권
3) 상인단체 조직
․고종 20년(1883)에 보부상 보호 목적으로 혜상공국 설치
- 보부상단은 특권의식 때문에 근대적 상인단체로 성장하지는 못함
․개항장의 객주들이 객주상회 조직
- 고종 20년(1883) : 원산의 상회소
- ” 22년(1885) : 부산 상법회사, 인천 객주상회(紳商協會)
4) 공업
․고종 20년(1883) 근대적인 무기 제조하는 기기국(機器局)
화폐 주조하는 전환국(典圜局)
출판물 인쇄하는 박문국(博文局)
․고종 22년(1885) - 방직을 위한 직조국(織造局)
․고종 24년(1887) 제지를 위한 조지국(造紙局)
근대식 채광법에 의한 광산 개발을 위한 광무국(鑛務局)
․개항 초기의 근대식 공장은 정부에 의해서 운영됨
5) 해운
․고종 23년(1886) - 轉運局 설치하여 근대식 汽船을 구입하여 해운업 경영을 담당
․ ” 29년(1892) - 官民합판회사인 利運社 설립하여 세곡 운반등에 종사
2. 개화사상의 전개
․개화사상 :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여 상공업을 발전시킴으로써 부국강병의 실을 거두려 함
․초기에는 무기와 농업기술의 도입에 큰 관심
- “해국도지”의 설명에 따라 신식전함 제조 시험, 대포 제작하여 강화도에 배치
- 최경석은 농무목축시험장에서 미국에서 도입한 종자 재배, 가축 기름
- 새로 설치된 잠상공사에서는 독일인 초빙하여 새 양잠법 시도
- 안종수는 고종 18년(1881)에 “농정신편” 저술
- 정병하는 ” 23년(1886)에 “농정촬요” 저술 서양의 근대 농법 소개
․정치와 사회의 개혁을 중요시하는 급진적인 개화사상으로 발전
- 김옥균 전제군주제를 입헌군주제로 개혁
서구식 무기로 무장한 신식군대 양성
자본주의적 경제 조직과 근대적인 산업을 건설
양반 중심의 신분제도 폐지, 만민의 평등권 확립하여 근대적인 시민사회 추구
학교의 설립, 종교의 자유
- 유길준 고종 26년(1889) “서유견문”에서 서양의 근대문명을 모범으로하여 개화에 노력
허명개화, 실상개화 언급
법치주의적 민주주의,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수립 목표
당시의 한국에서는 군민이 함께 다스리는 정치체제가 적절한 것이라 함
- 고종 20년(1883) “한성순보”에 발표된 ‘회사설’
→ 상업하는 방법으로서 여러사람이 자본을 모아 서양회사를 설립하는 것이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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