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장 민족국가의 태동과 제국주의의 침략

 

[ 1절 독립협회의 활동 ]

 

1. 대한제국의 성립

아관파천 : 건양 원년(1896)

- 을미사변으로 전국 혼란 러시아 대표 웨베르는 공사관 보호 명목으로 水兵 100명 파견

- 친러파인 이범진 등이 국왕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데려감

- 친일 내각의 김홍집·어윤중 등 살해, 유길준 등은 일본 망명

- 이범진·이완용 등 친러내각 성립

- 러시아의 이권 획득이 열강을 자극하여 아관파천 이후 많은 이권이 외국인 손으로 넘어감

대한제국 성립 : 광무 원년(1897)

- 아관파천으로 국민의 비나 집중 독립협회 등..

- 고종은 경운궁(덕수궁)으로 옮겨와 국호를 大韓, 연호를 光武, 왕을 황제 칭함

 

2. 독립협회의 창립과 발전

정부가 외세에 의존하여 국가를 보존하려는데 반발한 신지식층들이 각종 정치단체를 창설

독립협회

- 건양 원년(1896)에 갑신정변 실패로 미국에 망명하였던 서재필이 귀국하여 조직

- 윤치호·이상재·남궁억·정교·한규설 등 참여

- 회원 가입의 전적인 개방 : 정부 관료들 중심에서 일반 시민을 중심으로 한 협회로 변화

- 광무 2(1898)에 조직된 공주지회를 필두로 지방으로 확대

(서울의 본회가 해산된 후에도 계속 활동)

- 신지식층을 선두로 하여, 새로이 성장한 시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음

 

3. 독립협회의 활동

청의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 세움, 독립관·독립공원 만듬

계몽운동 전개

- 일요일마다 독립관에서 토론회 개최

- 기관지 발행

󰠆 공 식 : 월간 대조선 독립협회 회보

󰠐 비공식 : 일간신문 독립신문』 ← 독립협회 창설전에 간행, 순 한글

󰠌 독립협회에 참여한 유교의 혁신파 : 황성신문

독립협회의 활동 목표

- 자주독립 옹호

󰠆 외국의 정치간섭 배격, 이권양여 반대, 침탈된 이권도 되찾을 것

󰠌 열강의 세력을 균형 유지시켜 자주적인 중립외교

- 일반국민을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민권 신장

󰠆 국민의 참정권 주장 : 개인의 생명과 재산의 보호권, 언론과 집회의 자유권,

󰠐 만민의 평등권, 국민 주권론

󰠌 중추원을 개편하여 의회를 설립 제의 고종의 승낙을 받기도 함

- 국가의 자강을 이룩

󰠆 촌마다 학교를 세워 신교육을 실시

󰠐 방직·제지·철공업 등의 공장을 건설하여 상공업 국가로 발전

󰠌 자위를 위해 근대적인 국방력을 양성

독립협회의 활동에 의한 영향

- 러시아의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알렉세프)의 본국 소환, 한로은행 폐쇄

-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부터 경운궁으로 돌아옴 (경복궁 아님)

- 광무 2(1898) 10월에 종로광장에서 관민공동회 개최

󰀲 헌의 6조 건의 : 입헌정치와 법치행정 요구, 홍범 14조 등 장정 실행 요구

- 정부의 독립협회에 대한 해산 명령 만민공동회 개최 무력으로 시위군중 해산

독립협회의 해산

 

 

[ 2절 일제의 정치적 침략과 의병의 항쟁 ]

 

1. ·일의 침략 경쟁

러시아의 만주에 대한 지배력 강화후 대한제국에 대해서도 강력한 침투 시도

실력에서 뒤지던 일본은 러시아와 타협을 원함

·일간 니사(西)-로젠 협정(광무 2,1898) 체결

- 한국의 내정 불간섭, 훈병교관과 재무고문의 파견은 사전 협의,

일본의 한국에 대한 경제적 침투 인정

러시아의 해군 근거지 확보위한 마산의 토지 조차 시도 (광무 4,1900) 실패

·일 전쟁

- 광무 4년에 청에서 의화단의 난일어남

- 러시아 만주에 군대 파견 ·일 동맹 체결

- 러시아는 압록강을 넘어 용암포에 주둔, 조차 요구 (광무 7,1903) 일본 항의로 실패

- 광무 8(1904) 2월에 일본이 旅順 기습공격으로 러일전쟁 발발

 

2. 일제 침략의 국제적 승인

한국의 국외중립 선언 : 광무 8(1904) 1

한일의정서 성립 : 광무 8(1904) 2

- 일본이 무력으로 위협하여 강제 성립, 일본의 정치적·군사적 간섭을 합리화

- 한국과 러시아간의 모든 조약 폐기

- 전쟁을 위한 필요에서 경의·경부선 착공, 통신망 강점, 한국의 해안과 하천의 항행권 획득

- 토지의 강탈을 위한 황무지 개척권 요구 여론의 반대로 철회

- 일본인 고문관의 초빙을 강요 내정 간섭 목적

한일협정서 (1차 한일협약) : 광무 8(1904) 8

- 일본이 추천하는 일본인 1명을 재정고문으로 초빙, 자문후 시행

외국인 1명을 외교고문으로 초빙, 일본과 협의하여 시행

재정고문:메가다, 외교고문:스티븐스

- 협약에 없는 군부고문·경무고문·궁내부고문·학정참여관 등 파견 고문정치 시행

- 독일·프랑스·일본·청 등에 파견 되었던 한국공사 소환됨

일본의 한국에 대한 지배 인정

-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연승

- 루스벨트는 미국의 필리핀 지배 승인 대가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지배 인정

태프트·가쯔라 비밀협약 : 광무 9(1905) 7

- 영국도 영일동맹을 개정하여 일본의 한국 보호조치 승인 : 광무 9(1905) 8

- 포츠머드 강화조약 : 광무 9(1905) 9

일본의 한국 지배를 러시아가 인정

일본의 한국에 대한 독점권리 확보

 

3. 을사조약

일진회 : 송병준·이용구 등이 조직한 친일단체 보호조약의 필요를 선전

헌정연구회 : 이준, 양한묵

을사조약 (한일협약) : 광무 9(1905) 11

- 일본 정치계 원로 이토, 주한일본공사 하야시에 의한 강제 조약

안중근의 이토 살해 (융희 3,1909) - 한일합방 전

- 한국의 외교권을 완전히 박탈

일본은 간도를 안봉선 개축 조건으로 청에게 넘겨줌 (융희 3,1909)

- 통감(統監) 정치 : 규정상에는 외교에 관한 사항만 관리하게 되어있었지만,

실제로는 한국의 모든 내정을 관장

국민적인 반항

- 상소문·연설·시위·철시가 끊이지 않음

- 시종무관 민영환 자결

- 조병세·홍만식·송병선·이상철 등 많은 憤死者

- 의병들의 봉기 : 민종식(홍성), 최익현·임병찬(순창), 신돌석(경상도)

 

4. 海牙密使事件과 한일신협약

대한매일신보에 고종의 친서 발표

헤이그밀사사건

- 광무 11(1907)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

- 이상설·이준·이위종 참석하지는 못함

- 이위종은 만국기자협회에서 실정을 폭로, 이준은 순국

고종의 양위

- 밀사사건으로 일본은 지배의 강화를 꾀하려 함

- 일본의 강요로 순종 황제 즉위 (광무 117), 연호를 隆熙

- 시위운동 확산, 일진회의 기관지인 국민신보의 사옥 파괴

한일신협약 (정미7조약) : 융희 원년(1907)

- 통감은 한국의 내정에 간섭할 수 있는 권한을 정식으로 가짐

- 施政개선, 법령제정, 중요한 행정처분, 고등관리 임명, 외국인 초빙등에 통감의 동의필요

- 고문을 없애고, 각 부의 차관이하에 다수의 일보인 관리 임명 차관정치

군대의 해산 : 융희 원년(1907) 8- 한일신협약 직후

- 해산된 군대는 일본과 시가전을 전개하였으나 탄약이 떨어져 패배

- 해산되어 지방으로 내려간 군대들은 각지의 의병과 합류

- 지방의 진위대들도 의병에 참가

 

5. 일제의 식민지화

한일합방 (융희 4,1910)

- 일본은 육군대신 데라우치를 새 통감으로 임명

- 데라우치는 부임전 동경에서 경찰권을 위양받는 조약을 맺어서 한국으로 옴

- 일본 헌병 2000여명을 증원시켜 경찰업무 담당

- 황성신문·대한민보·대한매일신보등을 정간시킴

- 총리 이완용과 더불어 병합안을 꾸미어 822일에 조약에 조인

총독부 설치

- 총독은 육·해군 대장 중에서 임명, 입법권·사법권·행정권 및 군사통수권 가짐

- 초대 총독에 데라우치 강압적인 통치

- 헌병 경찰제도 실시

- 1910년 안명근의 데라우치 암살 미수사건

그 이듬해에 신민회의 윤치호·양기탁·이승훈 등 600여명 검거, 105명 기소 (105인 사건)

- 한국인의 모든 정치활동 금지 : 집회취체령(集會取締令)

- 총독부 부속 관청으로 중추원 만듬 일본 자문기관

󰀲 중추원 의장에 정무총감(일본인), 의원은 일본이 임명, 부의장에 이완용 등 임명

 

6. 의병항쟁의 격화

의병활동은 을미사변(고종 32,1895)때부터 있었지만 활동은 미비

군대 해산(융희 원년,1907) 후 서울의 시위대와 지방의 진위대 합류 후 본격화

- 서울의 시위대는 일본군과 항전 후 지방으로 내려가 의병과 합류

- 원주의 진위대는 민긍호의 지휘하에 원주·충주·여천·춘천 등에서 왜군 격파

- 강화의 진위대는 유명규의 지휘하에 일본군 격파하고 황해도로 가서 의병과 합류

- 허위는 적성 등 임진강 일대를 중심으로 활약

- 이인영은 강원도에서, 이강년은 안동 진위대와 함께 경북·강원 일대에서 활약

- 신돌석(평민출신 의병장)은 경상도에서 활약

융희 원년(1907)에 이인영,허위 등이 전국 의병 1만으로 십삼도창의군결성

서울 동대문 앞 30리 지점까지 진격

융희 2(1907)을 고비로 의병활동은 점차로 약화되었으나,

한일합방 이후에는 만주·발해주로 무대를 옮기어 독립군으로 전환

 

 

[ 3절 일제의 경제적 침략과 민족자본 ]

 

1. 토지의 약탈

광무 8(1904) 6월에 황무지 개척이라는 구실로 토지의 약탈을 강행하려 함

- 이도재 등이 농광회사 조직하여 황무지 개척은 우리손으로 해야한다고 주장

정부의 승인 받음

- 보안회에서 대중적인 반대운동

황무지 개척안은 철회되었으나, 국유미간지이용법 제정 (광무 11,1907)하여 목적달성

일본인 자본가들의 농업회사 설립

- 국유 미개간지 뿐만아니라 역둔전 등까지 침탈해서 대규모 농장소유

- 한국농업주식회사(광무 8,1904)·한국흥업·한국실업·산음도산업 등 많은 농장 소유

- 동양척식주식회사(융희 2,1908)16개월동안 3만 정보의 토지소유

- 일본 농민의 이주가 급격히 증대

- 철도용지·군용지를 빙자한 토지수용 방법으로 약탈

국유지는 무상으로 약탈, 사유지는 한국정부가 매입하여 제공

토지조사 사업

- 1910년 토지조사국 설치

- 1912년 토지조사령 반포 공공기관 소유, 신고하지 않은 모든 토지 총독부에 몰수

- 1911년 산림령, 1918년 임야조사령 국유산림, 소유자 불확실한 산림이 총독부 소유

1930년 통계 : 총독부가 소유한 전답과 임야 : 888만 정보 (전 국토의 40%)

- 총독부가 점유한 토지의 일부는 동양척식회사 등 일본인 토지회사나 이민들에게 헐값으로 불하

 

2. 자원의 독점

금의 확보를 한국에 의존 일본의 자본주의가 金本位制로 전환

병합이후 일본인 소유 광산 증가

삼림채벌 - 1920년 이후에 심해짐

독도를 불법적으로 일본 영토로 편입 일본인 어부 보호

총독부는 철도·항만·통신·항공 등의 시설운영, 인삼·소금·담배·아편 등을 전매

 

3. 공공사업의 지배

전신시설

- 고종 22(1885)에 서울과 인천 및 의주와의 연락위해 처음 가설 청의 관리

- ” 25(1888)에 서울과 부산 사이에 전신선 가설,

부산에서 해저선을 통하여 일본으로 연결 한국 정부가 운영

-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의 수중으로 넘어감

우편사무

- 고종 21(1884)에 우정국 설치 갑신정변으로 폐지

- ” 32(1895)에 우편사를 두고 우편사무 시작

- 광무 4(1900)에 외국과의 우편물 교환도 실시

-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본관리에 위임

철도의 가설

- 경인선 : 일본이 양해로 먼저 얻었음

건양 원년(1896)에 미국에게 경인선 부설권이 넘어감

다음해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일본에게 인계되어 광무 4(1900)에 완성

- 경부선·경의선 : 러일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일본이 가설

- 을사조약 이후 통감부 철도관리국의 관장하에 놓였고, 이어 총독부 관하로 들어감

전기시설

- 광무 2(1898)에 한국과 미국의 합자로 한성전기회사 설립되어 전차·전등 가설

- 전기시설만은 통감부의 관리를 받지 않았음 병합후에는 모두 총독부의 지배

 

4. 금융의 지배

화폐의 정리 (광무 9,1905)

- 한일협정서 (광무 8,1904)에 의하여 재정고문으로 온 메가다에 의해 실시

- 엽전(상평통보)과 백동화가 주로 유통되고 있었음

- 제일은행(일본소유)으로 하여금 새 화폐를 만들어 교환·정리

- 백동화를 갑··병으로 구분하여 병(전 백동화의 2/3)은 교환해 주지 않음

한국 상공업자는 막대한 손해

- 일본의 은행이 한국의 금융업계를 지배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됨

일본 금융기관의 침투

- 1900년경에 제일은행,제십팔은행,제오십팔은행,일본흥업은행 등 지점과 출장소 설치됨

- 제일은행의 한국지점은 광무 9(1905) 3월이래 통화발행권을 가짐 한국의 중앙은행 구실

- 융희 3(1909)에 한국은행 설치되어 제일은행의 업무 계승

총재에는 제일은행 한국총지점 지배인이 취임

- 합방후인 1911년에 한국은행을 조선은행으로 만들어 중앙은행의 구실을 담당케 함

- 광무 10(1906)에 설치된 농공은행(식산은행)은 식민지가 된 후에 주로 일본인 상·농민 지원

정부의 국채 증가

- 통감부는 금융기과의 구제, 도로의 개수, 일본인 관리의 고용 등의 비용을 정부에게 부담시킴

- 정부는 통감부의 주선으로 일본정부 및 일본인 은행에서 차관을 함

- 국채의 부담은 정부로 하여금 더욱 일본에 의존하게 만듬

국채보상운동의 전개 (광무 11,1907)

- 병합된 뒤에 총독부는 한국국민의 세금으로 이를 모두 상환함

 

5. 민족산업의 수난

민족자본에 의한 근대적 기업 활동이 활발해짐 : 18971907

- 독립협회가 활발한 사회적 활동을 하고, 대한제국이 성립되던 무렵 이후

객주조합은 개항장에서 근대적 상인단체로 성장

고종 32(1895)상무회의소규례가 발표되면서 상무회의소로 바뀜

광무 9(1905)에 서울에 설치된 상무회의소가 한성상업회의소

- 화폐개혁으로 인한 금융공황의 구제책을 강구하는 것이 목적

- 상업은행 설립을 계획하여 광무 10(1906)에 한일은행 창립

- 기관지인 상공월보간행

- 한성상업회의소는 일제의 식민지가 된 후에 해산,

한국 상업인들도 일본인 주도하의 경성상업회의소에 흡수

민간 기업인들에 의한 근대적 공장 건설

- 가장 관심을 가진 분야는 방직(紡織)공장

안동수의 대한직조공장, 백목전의 종로직조사, 김덕창의 김덕창직조공장

- 요업·정미업·담배제조업·제분업 등의 공장도 늘어남

철도를 민족자본으로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

- 광무 2(1898)에 부산과 하단을 연결하는 철도 가설 위해 박기종 등이 부하철도회사 설립

- 광무 3(1899)에 설립된 대한철도회사는 경의선·경원선·함경선 등 건설 계획

- 자본 부족으로 시작을 못하자, 정부는 광무 4(1900)에 철도원을 두고 건설 계획 세움

- 광무 6(1902)에 경의선 건설을 위해 서북철도국을 신설하여 기공식까지 함

러일전쟁 이후 일본에게 부설권 강탈당함

해운에 있어서는 관민합판회사인 이운사 몰락후, 민간 해운업 점차 설립됨

- 광무 4(1900)에 대한협동우선주식회사·인천우선회사·인한윤선주식회사·통운사 등 설립

김종한 등이 건양 원년(1896)에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금융기관인 조선은행 설립

- 이어 한성은행·대한천일은행·한일은행 등 설립

- 광무 7(1903)에 중앙은행 설립위한 조례 반포

한국 정부에 의한 중앙은행은 실현되지 못함

 

 

[ 4절 애국계몽운동 ]

 

1. 정치·사회 단체의 활동

보안회

- 광무 8(1904)에 송수만 등이 조직

- 일본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반대운동을 일으켜, 일본으로 하여금 철회케 하는데 성공

- 이상설을 회장으로 하는 협동회로 발전 일본의 탄압으로 해산

공진회

- 광무 8(1904)에 독립협회 계통의 인사들로 조직

- ” 9(1905)에 헌정연구회로 발전

정치·사회 단체의 활동은 정부·일본의 탄압으로 사회문화 운동으로 변화

대한자강회

- 광무 10(1906)에 헌정연구회의 후신으로 조직됨

-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일본이 고종의 퇴위를 강요하자 반대운동 전개

- 통감부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으나, 대한협회로 이름바꾸고 계몽운동 전개

국채보상운동

- 광무 11(1907)에 국채보상기성회 조직

- 간사인 양기탁의 구속으로 더 이상 진전없이 좌절

신민회

- 통감부의 감시속에서 정치·사회 운동이 많은 제약을 받자 조직된 비밀단체

- 광무 11(1907)에 윤치호·안창호·양기탁·전덕기·이동휘·이갑·이승훈 등이 조직

- 산업을 위하여 자기회사 세우고, 교육을 위하여 학교설립, 출판활동을 위하여 서점을 경영

- 무장활동을 목표로 한 준비도 하고 있었으나, 1911년에 105인 사건으로 활동 중지

 

2. 언론기관의 발달

·한성순보

- 한국 최초의 신문

- 고종 20(1883)에 김옥균 등 개화당의 노력에 의하여 박문국에서 발행

- 갑신정변으로 1년만에 폐간

·독립신문

- 건양 원년(1896)에 서재필이 창간

- 한글전용으로 처음 1주일에 3회에서 일간으로 발전

- 독립협회에서도 서구문화를 흡수한 신지식층의 견해를 대변

·황성신문

- 광무 2(1898)에 남궁억 등이 창간

- 독립협회에서 유교의 혁신파 세력의 견해를 대변, 국한문 혼용

-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오건조약체결전말이라하여 상세보도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 실음

·제국신문

- 광무 2(1898)에 이종일 등이 발행

- 중류이하의 대중과 부녀자를 상대로 하는 순한글로 된 신문

- 정치적 문제보다는 사회적인 계몽운동에 주력

·대한매일신보

- 광무 8(1904)에 영국인 베델(배설)이 양기탁과 함께 창간

- 영국인의 경영이라하여 일본의 검열을 받지 않음

- 처음에는 국한문 혼용으로 간행하였으나, 한글판·영문판(The Korea Daily News)도 간행

- 을사조약 후 고종의 친서 발표

·만세보

- 광무 10(1906)에 손병희·오세창 등 천교도 계통

- 일진회에 대한 비난

·대한민보

- 융희 3(1909)에 대한협회에서 간행

- 일진회 등과 맞서 싸움

광무 11(1907)에 통감부는 신문지법 제정하여 언론을 탄압

- 1910년 경에는 대한매일신보만이 민족의 대변지 구실

병합후 총독부에 매수되어 매일신보로 개제

- 미국에서 신한민보, 발해주에서 해조신문이 간행되어 국내로 배달

융희 2(1908)에 완전히 금지됨

 

3. 교육열의 팽창

정부는 고종 23(1886)에 육영공원 설립하여 서양의 새 학문에 대한 교육 실시

고종 32(1895)에 교육입국의 조서를 내려, 교육의 중요성 강조

사립학교의 설치

- 원산학사 : 고종 20(1883)에 덕원부사 정현석이 원산에 세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학교

- 배재학당 : 고종 23(1886) 미국 선교회 계통의 아펜젤러가 세움

- 을사조약 체결 후에 한국인에 의한 사립학교가 많이 세워짐

사립학교는 양반보다는 평민 출신들이 설립을 많이 하였고, 관심도 많았음

을사조약 이후 노동야학이 크게 성행함

통감부시대에 사립학교령(1908)을 제정하여 인가제로 하고, 교과서도 인가된 것만을 사용케 함

많은 사립학교가 폐교

병합후에는 총독부가 실용주의 교육을 내세움

- 보통교육에서는 일본어를, 실업교육에서는 기술을 교육시킴

 

4. 종교운동

기독교(신교)의 영향

- 고종 21(1884)에 미국 북장로회의 알렌,

고종 22(1885)에 언더우드, 미국 북감리회의 아펜젤러 등이 활발한 선교활동

전도의 한 수단으로 의료 등 사회사업을 경영

- 사상적으로 자유주의를 고취하고 민족의식 양양에 커다란 구실

- 광무 7(1903)에 황성기독교청년회 설립, 활발한 정치적·사회적 운동 전개

천도교

- 동학계통의 일부가 일진회로 흡수되자, 손병희는 천도교란 이름을 내세우고 민족운동에 가담

-만세보를 발간하는 등 활발한 사회활동

유교

- 보수적인 입장이여서 근대화의 방향과 반대인 경우가 많았지만,

강한 척왜사상으로 상소문이나 의병활동 일으킴

불교

- 불교를 혁신하려는 운동 전개

-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1913)이 간행됨

대종교

- 나철·오적 등이 단군신앙 부활, 민족적 입장 강조

 

5. 계몽적 학문

학문적인 계몽 단체들의 조직

- 李甲 등의 서북학회 (서우학회+한북흥학회) → 『서북학회월보

- 이광종 등의 기호흥학회 → 『기호학회월보

- 장지연 등의 영남학회

- 이채 등의 호남학회 → 『호남학보

- 남궁억 등의 관동학회

- 유길준 등의 흥사단

- 김윤식 등의 대동학회

- 진학신 등의 여자교육회

계몽적인 잡지

-대조선독립협회 회보·대한자강회월보·소년

- 여성 계몽을 위하여 신민회의 가정잡지, 여자교육회의 여자지남

- 광학서포·회동서관 등 기업적인 출판사 설립

國語 연구

- 유길준의 조선문전”(19세기 말) : 최초의 문법서 1909대한문전으로 간행

- 주시경이 국문동식회, 지석영이 국문연구회 조직

- 주시경은 국어문법”,“말의소리등 저술, 많은 제자 배출 후에 조선어학회 결성

國史 연구

- 장지연·박은식·신채호 등 을지문덕전”,“강감찬전”,“최도통전”,“이순신전등 전기 전술

- 역사지리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국토에 대한 애호 강조

- 한국의 고전을 발굴하여 그 가치를 재인식하려는 노력,

최남선이 조선광문회 조직 조선총서간행

- 세계사에 대하여도 큰 관심 (건국사·망국사)

서사건국지”,“미국독립사”,“의대리독립사”,“월남망국사”,“파난말년전사

- “이태리건국삼걸전”,“비사맥전”,“피득대제”,“애국부인전등 영웅들의 전기가 환영됨

 

6. 소설과 가사

신소설 : 구소설로부터 신문학으로의 다리를 놓는 역할

- 순한글, 권선징악적 주제, 인물들이 틀에 박힌듯한 유형

- 등장인물이나 사건을 현대에서 취하고, 언문일치의 문장을 사용

- 민족의 자주독립, 신교육의 필요성, 남녀평등, 미신타파, 과학문명의 필요를 역설

- 이인직 : “혈의 누”,“치악산”,“귀의 성

이해조 : “자유종”,“모란병(牡丹屛)”

최찬식 : “추월색

안국선 : “금수회의록

- 신소설은 1911년에 이광수가 무정을 발표할때까지 소설의 주류를 이룸

새로운 형태의 가사(창가)가 크게 유행

- 애국·독립·신교육·신문화 등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

외국 문화의 소개도 늘어남

- “성경”,“천로역정같은 기독교물

- “이솝이야기”,“로빈손표류기”,“걸리버여행기등 아동문학

 

 

[ 53·1 운동 ]

 

1. 망명과 비밀결사

한일합방이후 많은 민족운동자들이 해외로 망명함

무력에 의한 독립쟁취 움직임

- 삼원보 : 이시영·이동녕·이상용 등이 중심이 되어 서간도에 설치

1911년에 군사훈련을 위한 신흥무관학교가 세워짐

- 대한광복군정부 : 연해주에 건설한 신한촌 등 여러 한국인 거주지를 토대로,

1914년 이상설·이동휘 등이 블라디보스톡에 세움

- 미국에서는 박용만이 1909년 헤스팅스에 한인소년병학교 설립

1914년에는 하와이에 대조선국민군단 편성하고, 사관을 양성하기 위한 사관학교 설립

외교적 수단에 의하여 독립을 쟁취하려는 움직임

- 상해에서 활동하던 신규식은 1912년에 동제사 조직, 중국의 혁명가들과 연결

- 미국으로 간 이승만은 1909년 대한인민국회(국민회)를 조직,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

- 안창호는 강제 해산당한 신민회의 후신으로 흥사단 조직

- 중국에 망명한 독립운동자들은 1917년 스톡홀름에서 열린 만국사회당대회,

뉴욕에서 열린 세계약소민족회의에 대표 파견

국내에서의 독립활동

- 안창호가 1907년에 비밀결사인 신민회 조직 105인 사건으로 강제해체

- 장일환이 중심으로 1917년에 기독교 계통의 조선국민회 조직

독립군의 조직

- 대한독립의군부 : 1912년에 임병찬이 중심이 되어 조직

- 조선국권회복단 : 1915년에 서상일등이 조직

- 대한광복회 : 1913년에 채기중 등이 조직하고, 뒤에 박상진 등이 강화

 

2. 3·1 운동의 발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으로 약소민족들이 독립함

19191월에 상해에 모인 망명지사들이 신한청년당 조직

- 2월에 파리의 평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

- 국내와 일본·만주·시베리아 등 각지에 대표를 보내 구체적인 독립활동 모색

2·8 독립선언

- 일본 동경의 유학생인 최팔용 등은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독립운동 계획

- 이들 유학생 600여명은 191928일 동경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선언서와 결의문 발표

3·1 운동의 시작

- 천도교·기독교·불교 등 종교 단체를 중심으로 계획

- 고종의 장례일인 33일을 앞두고, 전국 각지의 군중들이 서울에 집결

-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 발표

- 학생들은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 후 시위 행진

 

3. 3·1 운동의 전개

민족대표 33인에 의하여 작성된 독립선언서의 발표와 더불어 시작

평화적인 시위운동의 전국적인 확대 만주·연해주 등 해외로도 번져감

1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인 일본의 국제적인 지위가 높았기 때문에 열강의 지원은 못받음

 

4. 임시정부의 수립

강력한 통일된 조직의 필요성 대두

- 3·1 운동 직후에 국내외에 여러개의 임시정부가 생김

-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에 수립됨 (19194)

대한민국 임시정부

- 의정원과 국무원으로 구성

- 임시정부와 국민과의 연결은 연통제를 통하여 이루어 짐

- 19195월 김규식을 전권대사로 임명하여, 파리강화회의에서 독립 주장케 함

- ” 8월 스위스에서 열린 만국사회당대회에 대표 파견

- 만주와 발해주 지방의 독립군을 일원적으로 재편성하고, 안동현에 광복군 총영을 설치

- 임시정부 기관지로서 독립신문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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