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문벌귀족의 대두


문벌귀족사회

문벌 귀족: 과전과 공음전, 사전(유공 왕족과 관리에게, 13) 겸병. 인척관계.

문벌 귀족 사회의 모순과 갈등: 과거를 통하여 진출한 지방 출신의 관료들 중 일부는 왕에게 밀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보좌하는 측근 세력이 되어(예종 때의 한안인이 대표) 문벌 귀족과 대립.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이자겸의 난(1126): 이자겸은 예종의 측근 세력을 몰아내고, 인종 4년 국왕의 측근세력이 척준경의 군 사행동으로 인하여 이자겸 제거에 실패. 이후 이자겸은 척준경에 의하여 축출되고 경원 이씨는 몰락.

서경천도 운동(1135): 묘청 세력들은 서경에 대화궁을 짓고 칭제건원, 금의 정벌을 주장. 대위국을 세우 고 천개라는 연호를 쓰며 난을 일으키다 김부식의 관군에 의해 1년만에 진압.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1대 사건” <조선사 연구초>

서경 천도 운동의 결과: 문벌 귀족 세력의 강화와 숭문 천무 현상으로 무신 정변의 배경이 되었으 며, 서경의 지위가 하락하여 분사 제도가 폐지.

 


무신 정변

무신 정변의 배경

문벌 귀족 지배 체제의 모순의 심화

숭문 천무 정책: 과거 제도에는 무과가 없었으며, 무반의 지휘관에 문관이 임명되기도 하였다.

의종의 실정: 측근 세력을 키우면서 이들에 의존하고 향략에 빠졌으며, 문신을 우대하고 무신을 차 별하였다.

무신의 경제권 침해: 전시과의 토지 분급이 문신보다 낮았고, 군인전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하급 군인들의 불만도 고조되고 있었다.

경과: 정중부, 이의방 등이 정변을 일으켜 문신들을 죽이고, 왕을 폐하여 거제도로 귀양보낸 후, 명종을 세웠다(1170 경인난)

 


최씨 무신정권

형성기(1170-1196)

확립기(1196-1258)

붕괴기(1258-1270)

이의방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117011741179) (11791183) (11831196)

최충헌 최우 최항 최의

(11961219)(12191249)(12491257)(12571258)

김준/임연/임유무

(1258126812701271)

이고이의방

(중방정치)

30살 요절

(도방설치)

천민출신

(중방정치)

(도방부활, 교정도감)

(도방강화, 교정도감)

(정방서방 설치)

(개경환도, 무신정권 종말)

최씨정권은 흥녕부를 중심으로 교정도감, 정방, 서방, 도방, 농장을 둠.

교정도감(교정별감): 최씨 정권의 최고 권력기관.

도방(사병집단), 삼별초(사병집단), 정방(독자적 인사행정기구), 서방(최우의 문신등용책)

정치적으로는 안정되었지만 국가 통치질서는 약화: 완전한 독재정치, 문무양반의 정권임을 강조, 국민 회유책으로 향부곡을 현으로 승격, 독립사상에 의한 항몽정권이기도 함.

왕은 새 궁궐로 옮길 것

농민으로부터 빼앗은 토지를 돌려줄 것

지방관의 공물 진상을 금할 것

승려의 왕궁 출입과 고리대업을 금할 것

사찰 건립을 금할 것

관리의 수를 줄일 것

선량한 관리를 임명할 것

탐관 오리를 징벌할 것

관리의 사치를 금할 것

신하의 간언을 용납할 것




4. 고려의 대외관계


고려의 침입과 강동 6

야율아보기가 거란족을 통일하고 요를 세움(916). 거란은 송을 공격하기에 앞서 송과 연결되어 있던 정 안국 및 고려와의 관계를 개선하려 하였다.

고려는 요의 관계개선을 거부하고 정종이 30만 광군을 설치하고 서북지역에 여러 성을 쌓음.

거란은 송과 친교한 정안국(926986) 멸망시킴, 압록강 하류의 여진족 경략(991) 후 고려 침략.

거란의 침입

1차 침입(993):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영토와 친교를 요구 서희가 협상을 하여 압록 유역의 강동 6(홍화진(의주), 용주(용천), 통주(선주), 철주(철산), 귀주(귀성), 곽주(곽산)) 획 득, 요의 연호 사용, 거란과 통교를 약속하고 수습(비공식적으로 고려, 송과 계속 교류).

2차 침입(1010): 송과 친교, 거란과 친교 않음, 강조의 정변을 빌미로 40만 대군 침입, 6주 요구 개경 함락, 양규가 선전. 거란의 성종은 고려가 강화를 요청하자, 현종의 친조를 조건으로 후퇴.

3차 침입(1018): 현종 9년 소배압이 10만 대군으로 개경까지 침입. 반격받고 퇴각.

4차 침입(1018): 10만 대군 침입 강감찬 귀주대첩(1019). 거란은 고려와 화약. 고려 천리장성 축조.

 

6대 성종이 후사를 잇지 못하고 죽자 목종이 어린 나위에 등극. 목종의 모후인 천추태후가 김치양과 불륜하여 왕위찬탈을 모의하자 서북면 도순검사인 강조는 5천의 군사를 이끌고 평주에 도착. 그는 현종을 옹립하고 김치양 일파를 제거한 뒤 목종을 폐위하고 양국공으로 삼았다가 얼마 후에 살해.

전란의 영향

고려거란의 세력 균형 형성.

국방 강화

나성: 현종 때 강감찬의 주장으로 개경에 나성 축조.

천리장성(덕종정종): 거란과 여진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하여 압록강 어귀에서 도련포에 이르는 장성 건축.

문화 사업: 7대 실록이 편찬되고, 거란군 격퇴를 기원하는 초조대장경이 조판되었다.

보수 세력의 성장: 거란과의 강화로 북진 정책은 보류되었고, 보수주의 세력이 성장하였다.

 


여진 정벌과 9성 개척

 

중국

춘추전국

남북조

명칭

숙신

읍루

물길

말갈

여진()

만주족

우리나라

군장 국가연맹 왕국

삼국 시대통일 신라

고려

조선

말갈은 발해 멸망 이후 여진으로 불리며 발해 영토에서 반독립 상태로 자생.

11세기 후반에 여진이 통일 세력 형성 고려는 경제적으로 도와주며 회유, 동화 정책 실시.

완옌부 추장 영가가 통일하면서 북간도 지방으로 가서 고려 영토 동여진에 이르자 정주를 경계로 고려 군과 충돌 고려군은 기병인 여진군에게 패함.

별무반(1104) 편성 예종 2(1107) 윤관은 별무반을 이끌고 함흥평야의 여진족을 토벌하고 동북 9성 을 쌓음. 여진의 침입을 계속 받다가 불침과 조공을 약속하고 1년만에 반환.

여진은 금을 건국(1115)하고 이자겸의 사대 외교로 태조 이래의 북진 정책은 사실상 좌절. 이자겸의 난 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을 야기.

 


대몽항쟁

13세기 초 동아시아의 정세

몽고의 팽창: 몽고족이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면서 금을 공격하여 북중국을 정복하고, 거란족을 복속.

금의 쇠퇴: 금의 지배하에 있던 거란족의 일부가 대요수국을 세우고(1216), 두만강 지역에는 동진 국(1217)이 등장.

시기

연대

구실

고려항쟁

몽고장군

전황

결과

접촉

고종 7

(1219)

거란족이 다시 침입해 왔으나 고려군에 의해 북쪽으로 쫓기다 강동성(평양 동쪽)에서 포위당함. 이 때 거란족을 추적한 몽고 및 동진국의 군대와 연합작전.

공물요구

1

고종 18

(1231)

저고여 피살사건

귀주에서 박서 활약, 충주 노예군 항쟁(지광수)

살리타이

의주귀주서경개경 공략

서경주위에 다루가치 설치

2

고종 19

(1232)

강화천도와

항몽태도

김윤후 처인 부곡민의 항전

살리타이

처인성(용인)에서 살리타이 사살

초조대장경 소실

3

고종 22

(1235)

출륙항복

최우

당올태

경주까지 침입

속장경, 황룡사 9층탑 소실

4

고종 34

(1247)

계속적인

항몽태도

 

아모간

 

 

5

고종 39

(1252)

출륙항복

김윤후

야고, 홍복원

충주성 전투

김윤후가 충주에서 격퇴

6

고종 41

(1254)

 

충주부군-다소철소민 활약

차라대

6년간의 전투

20여만의 포로 발생(고려), 최대 피해

 

고종 46

(1259)

고려의 끈질긴 항전으로 몽고는 고려를 직속령으로 정복하려던 계획 포기, 강화로 인하여 국왕과 문신의 입지 강화

강화

 

원종 10

(1270)

강경론이 대두되어 원종을 폐위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원종은 몽고군의 지원 하에 개경환도를 단행.

개경 환도

특징 및 결과

전투의 대부분은 관인의 지원 없이 민의 자력으로 수행.

부인사 소장 대장경과 황룡사 9층 목탑 소실. 국토는 황폐화.

 

환도 후 삼별초의 항쟁(12701273)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 아래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

배중손을 중심으로 진도(용장성) (여몽 연합군) 제주도(김통정)

 



5. 고려후기의 정치

원간섭기

영토의 상실

쌍성총관부: 고종 말년 영흥지역에 철령 이북의 땅을 직속령으로 편입

동녕부: 원종 때 최탄의 투항으로 자비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여 서경에 설치. 충렬왕 때 탈환.

탐라총관부: 삼별초 진압 뒤에 제주도에 설치하여. 목마장 경영). 충렬왕 때 탈환.


고려 국왕은 원의 공주와 결혼, 왕실의 호칭과 격이 격하. 관제 개편명칭 격하.

원 간섭 이전

원 간섭 이후

도병마사 ―――――――――――――――――→ 도평의사사(독자적)

중추원 ――――――――――――――――――――――――→ 밀직사

2―――――――――――――――――――――――――→ 첨의부

6―――――――――――――――――――――――――――→ 4

이부, 예부 ―――――――――――――――――→ 전리사

호부 ――――――――――――――――――――→ 판도사

병부 ――――――――――――――――――――→ 군부사

형부 ――――――――――――――――――――→ 전법사

공부 ――――――――――――――――――――→ 폐 지


원의 내정 간섭 기구

정동행성: 일본원정을 위한 기구였으나 고려-원의 형식적 연락기구로 기능.

순마소: 반원 인사의 색출과 개경의 치안을 담당하는 감찰기관.

만호부: 고려의 군사 조직에 영향력 행사.

다루가치: 감찰관을 파견하여 내정 간섭.



자주성의 회복

 

개혁기구

개혁내용

 

개혁기구

개혁내용

충렬왕

전민변정도감

원종때 처음 설치, 농장혁파

충숙왕

찰리변위도감

권문세족이 점유한 민전을 본주인에게

충목왕

정치도감

각도에 관리를 보내 양전과 안렴

충선왕

사림원

정방폐지 시도 한림원 기능

신진사족 기용 재정개혁

공민왕

전민변정도감

신돈을 기용하여 토지와 노비 정리

창왕

급전도감

도평의사사의 결의에 의함

충선왕(13081313)의 개혁정치: 관제 복구 시도, 농무사 설치, 의렴창 설치, 농장에 징세, 정방폐지 시 도, 사림원 설치

공민왕의 개혁정치: 기철을 위시한 친원세력의 대규모 숙청, 정동행성 이문소 혁파, 쌍성총관부 공략철령 이북 수복, 관제개혁, 몽고풍 엄금.

요동 공략: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하여 요동 지방을 공략하여 지용수와 이성계로 하여금 양 면으로 진격하게 하였다. 이성계는 압록강을 건너 요양을 점령하고, 이 땅이 원래 우리의 영토임 을 선포하였으나, 뒤에 명의 군대가 이 지역을 점령함에 따라 그들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말았다.

 


왜구의 격퇴

시기: 왜구는 13세기부터 우리를 괴롭혀 왔으나 14세기 중반부터는 본격적으로 침략.

외교 교섭: 정몽주 등을 일본에 보내 교섭하였지만, 일본 정부의 억제력 부족으로 실효가 없었다.

무력 토벌의 전개: 왜구의 침입에 따른 사회의 불안정은 국가적 과제였다. 왜구를 격퇴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신흥 무인 세력이 성장하였다.

연대

홍건적의 침입

고려항쟁

연대

왜구의 고려항쟁

공민왕 8

(1359)

모거경이 4만 군사로 서경 침입

이승경, 이방실

우왕 2(1375)

최영이 홍산에서 격퇴

우왕 6(1379)

최무선이 최초로 화포 사용

우왕 6(1379)

이성계가 황산에서 격퇴

공민왕 10

(1361)

사유가 10만 군사로 개경 침입

장세운, 안무, 이방실

우왕 9(1382)

정지가 관음포에서 격퇴

창왕 1(1388)

박위가 쓰시마에서 격퇴



신진사대부: 출신 기반은 문반무반향리. 지방 향리의 자제나 신진 관인 출신자가 주류.



지는 고려 뜨는 조선

공민왕이 반대파에 의해 시해. 이인임의 추대로 우왕이 즉위, 고려는 원-명 양면외교.

공민왕의 암살신돈의 제거로 개혁정치가 중단. 권문세족-신진사대부 대립 격화,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

우왕 때에 이르러 최영이 이성계와 연합하여 이인임 일파를 축출.

위화도 회군(1388): 철령위 설치문제에서 고려는 우왕 14년 최영을 8도도통사, 조민수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음. 이성계는 사불가론(하왜우소)를 내세워 위화도에서 회군.

이성계 등은 공양왕을 세운 후(폐가입진 1389), 과전법 공포(1391) 조선(1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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